96화. 다시 돌아와서 보다(3)
* * *
'아주 제대로 낚으셨네.'
카샬은 의지를 태우는 칼리우스를 보자 속으로 혀를 찼다.
생각해보면 하벨은 사람을 참 잘 시키지 않는가.
어떻게 저렇게 사람을 움직이는 게 자연스러울 수가 있을까.
'나도 저렇게 움직이는 건가.'
제3자의 시선으로 보니까 문득 하벨의 미래가 걱정스러웠다.
'엄한 길로 빠지시면 안 되는데.'
"카샬. 딴 생각하지 말고 검 뽑아."
찌르듯 들려오는 하벨의 목소리에 카샬은 표정을 다잡았다.
눈치가 빠르시다니까.
"결계를 부수려는 거지? 나도 할 수 있어. 내 손톱은 날카로워!"
칼리우스가 의욕을 가득 담아 손을 쫙 펼쳤다.
"아니. 너는 마나를 아껴. 회복하는 데 집중해."
칼리우스가 마나를 회복할 때까지만 곁에 머물기를 허락했기에 하벨은 그가 마나를 낭비해 머물 시간을 늦추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흔적을 쫓아도 마나는 거의 들지 않아. 여기에 결계가 여러 개가 있는데 내가 마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어디에 있는지 모를 거야."
칼리우스는 벌써 여러 개의 결계 위치를 파악했다.
잘 숨겼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부술 수 있었다.
칼리우스가 무언가를 할퀴는 듯한 동작을 취하자 아라가 눈을 반짝이며 칼리우스의 손톱을 살짝 건드려보았다.
[오오! 단단해!]
"그럼 지금은 가만히 있어도 괜찮아."
"하벨은 마나가 없잖……."
칼리우스는 다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실수했어.'
용이 마나가 없다는 것 자체로 하벨에게 있어 큰 충격일 텐데.
'이… 이 바보야!'
칼리우스는 자신을 탓했다.
"미, 미안해!"
"아니, 사실인데. 마나는 없어."
하벨은 손가락으로 결계 중 하나를 가리켰다.
애초에 마나가 어떤 느낌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없어도 지금까지 크게 불편하진 않았다.
"하지만 마법은 보여. 그러니 너는 나서지 않아도 괜찮아."
"마법이… 보인다고?"
칼리우스의 눈이 커졌다.
자신도 마법을 느낄 순 있어도, 마법을 볼 수는 없는데.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유를 찾고자 머리를 굴리는 사이 카샬의 검이 결계를 찢어버렸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오자 칼리우스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하벨을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 영혼이 흔들리는 냄새가 났다.
"많이 아파?"
"아니. 조금 아플 뿐이야."
몸이 살짝 무거운 정도.
하벨은 결계가 사라지자 드러나는 진짜 숲속의 모습에 눈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화르륵.
짜증 나는 랜턴에 검은 불꽃이 붙었고, 마치 괴물이 설치기라도 한 것처럼 타버리고 부서진 나무가 눈에 밟혔다.
누군가 쉽게 이동할 수 있게 만들어진 흔적이지 않을까 싶었다.
'여기에 멸망의 원인이 있다는 거네?'
오염된 물이자 검은 물.
하벨은 랜턴을 보자 그걸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건 너무해!]
아라가 망가진 숲을 보자 털을 부풀렸다.
인위적으로 자연을 부서트렸다는 사실에 갑자기 화가 치밀어올랐다.
"웨인 놈이 거대 정화 장치를 없앴다고 했잖아? 그때 만든 흔적이지 않을까 싶어."
하벨은 아라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간질거렸지만, 아라의 꼬리는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예. 그때 난 흔적을 포함해 다른 흔적까지 섞여 있는 것 같습니다."
카샬은 먼저 앞으로 튀어간 칼리우스를 바라보다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길을 트기 위해 나무를 자르고 부서트린 흔적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혹시나 들킬 가능성 역시 생각해 흔적을 가짜로 만들지 않았을까 싶었다.
"저번처럼 안개가 나타나는 경우는 없어야 할 텐데요."
카샬은 괜히 검집 앞으로 내밀어 살짝살짝 휘둘러보았다.
[마, 맞아! 그때, 안개가 나타나서 라르웬이랑 카샬이랑 떨어져 버렸어.]
아라는 혹시나 해 하벨에게 매달리다 뒤를 쳐다보았다.
아라의 귀가 파닥거렸다.
[대장. 저기 봐봐!]
활짝 피어난 미소만큼이나 앞발을 쭉 내밀자 하벨까지 뒤로 몸을 움직였다.
하벨은 어떤 기대도 담지 않고 물었다.
"혹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라르웬과 말을 나눴을 때부터 보이던 정령들이었다.
그들은 하벨을 경계하면서도 아라와 칼리우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궁금한데 자신에게 묻기는 싫은 표정이었다.
[진짜… 용이야?]
정령이 입을 열었다.
'아. 이것 때문이었나?'
하벨은 그제야 정령들이 자신들을 쫓아온 이유를 알았다.
칼리우스는 말을 하려다 하벨을 쳐다보았다.
누가 자신에게 물으면 하벨한테 먼저 대답해야 할지 아닐지를 확인받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
하벨이 고개를 끄덕여서야 칼리우스가 입을 열었다.
"그래. 나는 용이야."
당당한 칼리우스의 대답에 정령들은 당황해 어쩔 줄은 몰라 했다.
[용이… 살아 있었어?]
정령들이 칼리우스에게 우르르 달려들어서는 그를 살폈다.
머리카락도 당겨보고, 귀도 만져보는 등 비록 밀착해야 알 정도였지만, 이 냄새를 잊지 않았다.
[요, 용이 맞아! 진짜 용이! 아직 어린 용 말이야!]
[왜 우리한테 말하지 않았어? 우리는 널 보호해줄 수 있는데. 널 얼마나 기다렸는데.]
정령은 칼리우스를 쓰다듬으며 애틋하게 바라보았다.
"너희가 날 해치지 않을 거고, 보호해줄 거라는 건 알고 믿어. 하지만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었어."
그 이상 말을 하지 마.
칼리우스는 하벨에게 흘러나오는 분위기에 다급히 말을 아꼈다.
[있잖아. 이 몸이 너희한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해줄래?]
아라는 하벨이 상처받지 않게 자신이 먼저 정령들에게 다가갔다.
낯선 정령들을 향해 날아가는 아라의 몸이 살짝 뻣뻣해졌다.
정령들은 그 모습을 귀엽게 바라보았다.
[거대 정화 장치 일을 물어보는 거라면 우리도 지금 알아보는 중이야.]
[그건 어떻게 됐는지 이 몸은 알아. 왜 여기에는 부정한 것들이 없는지 이상해서 물어보고 싶었어.]
아라는 털이 삐죽 서고, 온몸이 떨려오는 그 감각을 느낀 적이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이전 거대 정화 장치 근처에 부정한 것들이 있지 않았는가.
[원래는 있었어. 거대 정화 장치 부품으로 보이는 것들을 옮기는 와중에 부정한 것이 지워져서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정령은 숨을 깊게 내쉬었다.
갑자기 사람들에게 내쫓겨 무얼 할 수가 없었다.
[그럼 지금… 거대 정화 장치 쪽으로 가는 거야?]
정령은 어떤 기대를 담아 아라에게 물었다.
[맞아. 대장이랑 같이 가고 있어!]
[대장이라면…….]
정령들의 시선이 칼리우스와 카샬에게 향했다.
[아니야. 이 몸의 대장은 하벨이라구.]
아라는 바로 하벨에게 달려가 옷자락을 꼭 잡았다.
[…잠깐. 하벨이라면, 혹시 하벨 티에라?]
[맞아! 대장 이름은 하벨 티에라야.]
아라가 자랑스럽게 말하지만, 하벨은 주먹을 잠깐 쥐었다.
망할 하벨 티에라.
이름을 들었을 뿐인데 갑자기 열이 받았다.
[오염된 강을 원래대로 돌렸다는 그 하벨 티에라?]
[응응! 대장이 해냈어. 우리 대장이 한 거야.]
아라의 콧대가 저절로 높아졌다.
어쩐지 자신이 아주아주 크게 자라버린 기분이 들었다.
[세상에. 그러면 대체…….]
정령들의 표정이 굳어지자 하벨은 자신이 먼저 말을 꺼냈다.
"그 말은 꺼낼 필요 없어. 엄청 많이 들었으니까."
[맞아! 꺼내지 마! 이 몸이 화낼 거라구!]
아라가 털을 부풀렸다.
"무슨 말을 많이 들었길래 그래?"
칼리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쾌한 냄새가 난다고 했습니다."
카샬이 슬쩍 목소리를 꺼냈다.
웬만한 대화가 들리지 않아도 눈치로 알 수 있었다.
"잠깐만."
정령들을 바라보는 칼리우스의 시선마저 곱지 않았다.
"하벨한테 정말 그렇게 말하려고 했어? 정말로?"
물론 자신도 하벨에게서 뾰족한 냄새를 맡은 건 사실이나, 그게 불쾌감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하벨이 상처받을지도 몰랐다.
칼리우스의 날카로운 시선에 정령들은 입을 꾹 다물려다 힘없이 대답했다.
[…맞아. 그런 냄새가 나는걸.]
[검은 물을 뿜어내던 거대 정화 장치 냄새랑… 아얏!]
정령은 화들짝 놀라며 그 말을 꺼낸, 고양이 귀를 가진 정령의 뺨을 꼬집었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하벨은 도저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었다.
다른 냄새도 아니고 마법으로 용도가 변해 오염된 물을 뿜어내던 그 거대 정화 장치랑 비슷하다니.
[…그, 그렇게 말해서 미안해!]
고양이 귀를 가진 정령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실수를 바로 인정했다.
―되게 위험한 냄새 같기도 하고. 음. 뾰족한 냄새야. 그 이상은 잘 모르겠어.
정령을 제외하고 그런 소리는 칼리우스가 처음이었다.
'그 냄새가 오염된 거대 정화 장치가 뿜어낸 물 냄새와 비슷하다니.'
하벨은 진심으로 충격에 빠졌다.
다시금 떠올려보아도 어처구니없는 소리이질 않은가.
[미안해!]
하벨이 살짝 얼빠진 표정을 하자 고양이 귀를 한 정령이 날아와 그를 안았다.
[이 바보야! 그건 심하잖아!]
[맞아! 난 바보야! 난 바보야아!]
고양이 귀를 한 정령이 훌쩍이다 말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놀라지 마, 하벨.]
정령들이 하벨에게로 날아왔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저마다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래서… 미워할 수가 없지.'
하벨은 정령들의 행동에서 무엇이든 진심이 느껴졌다.
저들은 거짓이 없었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
[나도 사과할게. 절대로 그 말은 사실이 아니야. 쟤는 바보야. 그냥 바보가 한 말이라고 생각해.]
세상을 잡아먹는 그 물을 어떻게 저 가엾은 아이와 비교할 수 있을까.
불쾌한 냄새 때문에 피한 건 사실이나, 하벨이 원해서 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찌르르.
교감이 느껴졌다.
"괜찮아."
하벨은 토닥거려도 될지 망설이다 정령들을 두드려주었다.
따뜻함이 밀려왔다.
두근두근.
아라처럼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훌쩍이던 정령의 귀가 꿈틀거렸다.
킁킁.
정령은 갑자기 냄새를 맡더니 눈을 반짝거렸다.
[바다 냄새가 나는데?]
[바다 냄새라고?]
그 말에 상황을 살피던 정령들까지 갑자기 우르르 하벨에게 몰려왔다.
무언가를 피하려는 듯한 그 어색한 움직임에 카샬은 힘껏 웃음을 참아내다 아예 고개를 돌려버렸다.
"푸흡……!"
[대장한테 다 떨어져!]
아라가 소리치며 하벨에게 매달렸다.
[대장한테 나쁜 말 하려고 했잖아? 그럼 대장을 만지지도 마! 이 몸이 허락하지 않을 거라구!]
아라의 말에 하벨의 볼을 쿡쿡 찌르고,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정령들은 움찔거리다 천천히 뒤로 물러섰고, 하벨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으려 애를 썼다.
'그럼. 아라가 하는 말이 다 맞지.'
[맞아. 네 말이 맞아. 우리 행동이 나빴어.]
정령들은 아라의 말을 받아들였다.
뭐가 됐든 하벨을 피한 건 사실이었다.
"그럼 그 느낌과 냄새가 뭔지 제대로 말해줘. 사과는 그걸로 충분해."
하벨은 말을 꺼내기만 하고 누구 하나 입에 올리지 않는 그 사실이 알고 싶었다.
세렌은 애초에 묻기도 어렵지만, 자신하고 말을 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루룸은 짐작 가는 게 너무 많다고 말을 돌릴 뿐이었으니.
[하벨 너한테서 느껴지는 그 감각은.]
정령들은 아라를 의식했다.
조금 전 아라가 소리쳤을 때, 뭔가 달랐다.
거대한 압박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에르티안 왕실. 그래! 거기에서 느껴지던, 그 느낌하고 비슷해. 하지만 비슷할 뿐, 어딘가 달라. 불쾌함이 더 많이 섞여 있어.]
[오, 맞아! 거기랑 진짜 비슷해!]
정령들은 그제야 눈을 번쩍 뜨며 '에르티안 왕실'을 입에 올렸다.
'정령들이 가길 꺼리는 에르티안 왕실 말인가.'
하벨은 예측을 벗어난 말을 듣자 긴가민가했다.
좀 많이 불쾌했지만, 차라리 검은 물 쪽이 현실적으로 맞지 않을까.
'상상이… 가질 않네.'
비가 내리는 날, 수도를 바라봤을 때 보지 않았던가.
왕성에 존재하는 투명한 막을 따라 뻗어오는 푸른 은하수를.
[하벨.]
정령은 하벨을 불렀다.
그들의 눈에 경계심이 어느덧 벗겨져 있었다.
[너도 정령사라면 알겠지만, 거대 정화 장치는 너희에게도 물론 우리한테도 엄청 소중해.]
"알고 있어."
하벨은 정령들의 눈물과 그들이 토해낸 괴로움을 보았기에 알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거기로 향하는 중이야."
하벨이 꺼내는 말에 정령들은 더 미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가봤자 거대 정화 장치는 이미 없어. 인간들이 다 없앴다고.]
"그래서 그 흔적을 쫓으려고 하는 중이야. 누가 왜 그랬는지 말이야."
[우리도 하고 있지만, 저 속에 방해가 너무 많아. 부정한 것들. 그 짜증 나는 게 완전히 지워진 건 아니니까.]
"그럼 같이 갈래? 부정한 게 있으면 내가 치워줄게."
하벨이 제안했다.
여기부터 길잡이가 있으면 얼마나 편할까.
[정말? 우리가… 너한테 못되게 굴었는데.]
정령들이 쭈뼛거리며 눈치를 살짝 살폈다.
"괜찮아."
하벨은 그들의 행동을 이해했다.
실제로 부정한 것들 때문에 정령들이 괴로워하고 있으니 경계심이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을 테지.
이미 이만큼이나 마음을 주는 게 어딘가.
"거대 정화 장치가 사라졌어도 너희가 수상하다고 생각하는 게 있으니까 돌아가려는 거 아니야?"
[맞아. 뭔가를 봤거든. 그게 뭔지 확인하고 싶어.]
[뭐… 뭘 봤는데?]
아라가 무거워진 정령의 말에 침을 꼴깍 삼켰다.
[그걸 모르겠어. 어쨌든.]
정령의 시선이 칼리우스를 향했다.
[반가워. 용인 네가 살아있어서 기뻐.]
"칼리우스야."
칼리우스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예쁜 이름이네. 만약에 위험하다면 안심하고 우리한테 도움을 요청해. 우리는 용이 돌아오길 언제나 바라고 있었으니까.]
정령이 활짝 웃자 칼리우스는 따라 웃었다.
"그럼, 거대 정화 장치가 어디에 있었는지 안내해줄래?"
하벨은 대충 이야기가 마무리되자 앞을 가리켰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네비게이션을 얻은 게 아닌가.
[응!]
정령은 배시시 웃으며 하벨의 옷자락을 살포시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