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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95화 (95/415)

95화. 다시 돌아와서 보다(2)

* * *

[용… 이라니?]

루룸은 입만 벙긋거렸다.

아라가 거짓말을 못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벨은 점점 매서워지는 라르웬의 시선에 괜히 마른 침을 삼켰다.

'칼리우스가 용이라는 말은 나중에 하려고 했는데.'

하필 자신이 가려고 했던 장소에 틈의 세계가 열리고.

하필 자신을 구한 자가 용이라면.

라르웬은 분명 그 관계를 엮어서 볼 수밖에 없었다.

용이 나타났기에 틈의 세계가 열렸다고.

"…잠깐 따라와."

라르웬의 목소리가 유난히 싸늘하자 카샬은 하벨을 힐끔 바라보았다.

아무리 몰라도 이 정도 눈치는 있었다.

들켰구나.

카샬은 후련해하며 미소를 지었다.

'도련님을 마구마구 혼내주십시오.'

슬쩍 속으로 빌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하벨은 라르웬의 뒤를 따르면서도 주변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라르웬처럼 평상복을 입은 사람은 짙은 남색 계열의 옷을 입은 사람들 속에 어쩌다 한두 명 보이는 정도였다.

'평상복을 입은 자는 형님처럼 클로저일 테고, 나머지는 무엇인가?'

"나처럼 옷이 통일되지 않은 사람은 클로저. 나머지는 직원이야. 클로저라는 이름은 단독으로 틈의 세계를 닫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지."

라르웬의 설명에 하벨은 그의 표정을 물끄러미 살폈다.

"화난 거 아니야."

[아닌데. 이 몸이 봐도 라르웬은 화가 났는데.]

"맞습니다. 내가 봐도 그렇습니다."

하벨은 아라가 꺼내는 말에 슬쩍 묻어갔다.

라르웬의 입술이 잠깐 벌어지다 말고 일단 숨을 가볍게 내쉬었다.

"어쨌든, 보통 틈의 세계가 열리면 그 일대를 조사해. 싸웠던 흔적, 놈들이 어떻게 이동했는지 등. 그래서 행동 패턴을 기억하는 거지. 보통 길면 4일 정도 걸려."

[그럼 왜 저 사람들은 아무도 대장을 신경 쓰지 않아?]

아라는 라르웬의 옷자락을 흔들다 말고 하벨의 등장에 도망치듯 물러가는 정령들을 보자 입을 삐죽 내밀었다.

"촉박하기도 하고, 틈의 세계가 열린 그 일대에 각 나라가 모두 인정한 '임시 소유권'이 발동되기 때문이야. 아, 누가 와도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고."

라르웬이 대답하다 곧 걸음을 멈추고 하벨을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이야, 막내야? 다시 말하지만, 화를 내는 건 아니야."

"거대 정화 장치가 있던 그 일대에 결계가 설치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와중에 형님이 딱 한 명만 된다고 하시니 어쩌겠습니까."

용이라도 데려와야지.

하벨의 시선이 카샬이 맨 가방으로 향하자 라르웬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왜 가장 중요한 걸 말하지 않았잖아?"

[맞아. 용이라니! 아니, 진짜야? 나는 아직도 못 믿겠는데?]

루룸이 여전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올 때까지 몇 번을 생각해도 믿기 어려운 말이었다.

용은 없다.

만약 있었으면 자신들이 가만히 뒀겠는가.

세계를 위해 용은 보호되어야 했다.

[응응. 정말이야. 이 몸은 거짓말하지 않아. 그건 나쁜 거라구.]

아라가 제법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럼 혹시 틈의 세계가 열린 것도……."

"그건 아닙니다."

하벨은 라르웬이 꺼낸 가정을 단번에 박살 냈다.

역시나 라르웬이 칼리우스와 틈의 세계를 엮을 줄 알았다.

"알았어. 섣부른 추측이었네."

민망해하는 라르웬을 보며 하벨은 그에게 꼭 해야 할 말부터 꺼냈다.

"괴물이 말을 했습니다, 형님."

"……?"

라르웬의 표정이 잠깐 풀어졌지만, 그는 곧 신중히 접근했다.

"포효를 말하는 거야?"

"아뇨. 말이었습니다."

라르웬은 당장 카샬을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저도 들었습니다."

"왜 그것도 나한테 알려주지 않은 거야?"

"도련님의 의사를 아직 묻지 못했으니까요."

단호한 말과 함께 카샬은 뻔뻔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카샬이 원래 저런 놈이라는 걸 알았어도 라르웬은 오늘따라 주먹이 부르르 떨려왔다.

저 망할 놈.

"소리를 내지르는 것 이외에는 괴물이 말을 하는 경우는 없었어."

라르웬은 말을 내뱉었다.

"단 한 번도."

재차 강조하는 그의 목소리에 힘마저 느껴졌다.

'역시… 특별한 일이었어.'

하벨 자신은 벌써 두 번이나 듣지 않았는가.

"괴물이 뭐라고 말을 했는데?"

라르웬이 묻자 하벨은 잠깐 숨을 고르는 척 생각했다.

아가야.

이게 정말 맞는 말인지 솔직히 헷갈렸다.

하벨은 일단 확실한 사실만 언급했다.

"가야. 이 두 글자만 들렸습니다."

"도련님 말씀이 맞습니다. 정확한 발음이었습니다."

[맞아! 이 몸도 들었어. 가야. 가야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했어!]

아라까지 거들자 라르웬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었다.

'틈의 세계에 나오는 괴물이 진화하고 있는 건가?'

말은 진화의 증거였다.

이제껏 없던 일이기에 변종일지 진화일지 헷갈리긴 했다.

"루룸."

하벨은 고민에 빠진 라르웬을 보며 루룸을 불렀다.

이참에 궁금증을 다 해결하면 좋지 않은가.

[왜?]

"아라가 흔적을 봤대.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이겠지. 그걸 뭐라고 부르는 거야?"

[맞아! 이 몸이 땅의 흔적을 봤어!]

아라는 우쭐거렸다.

[…흔적을 봤다고? 대화 없이?]

루룸이 묻자 아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화라니? 땅이 말을 걸어와?]

[가끔 말을 걸어와. 내가 걸기도 하고. 그런데 보통은 잘 하진 않아.]

[왜? 이 몸은 나무랑 꽃이 말을 걸면 너무너무 좋겠는데?]

[자연과 말을 할수록 우리는 자연하고 동화되니까. 동화하면 '나'라는 걸 잊어버리고 그냥 세계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가 되어버려.]

일정한 박자대로 움직이던 아라의 꼬리가 멈추자 루룸은 키득거렸다.

[어쨌든, 대화도 아닌데 그렇게 알려주는 건 처음 봤네.]

[그, 그럼! 이 몸의 특별한 힘이라는 거야?]

아라의 눈에 별이 박힌 것처럼 반짝이자 루룸은 웃음을 멈췄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애초에 우리는 자연의 마음을 모르…….]

"칼리우스."

살벌한 목소리가 갑자기 라르웬 입에서 튀어나왔다.

루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화났네.]

틈의 세계에서 나온 괴물을 잠깐 고민했지만, 그 문제는 일단 접기로 했다.

지금 당장 중요한 건 하벨이 아닌가.

라르웬의 부름에 대답 대신 가방이 살짝 흔들렸다.

"내 동생을 건드렸다간 네가 용이든 뭐든 간에 반드시 죽여버릴 거다. 가장 처절하게 말이야. 티에라의 분노를 무시하지 마라."

명백한 경고에 하벨은 깜짝 놀랐다.

칼리우스가 아이처럼 보여도 용이 아닌가.

겁을 먹어도 모자랄 판에 협박이라니.

"나는 그런 행동 안 해. 절대로."

'아니, 해.'

하벨은 칼리우스 말에 속으로 반문하며 간지러운 입을 참았다.

세상이 멸망했다는 건 티에라 가문도 다 무너져내렸다는 뜻일 테니.

'…룬델 역시 죽었다는 건가.'

그 사실을 생각하니 이상하게 가슴이 따끔따끔했다.

어쩌면 그동안 정이 들어버렸는지도 몰랐다.

"형님."

하벨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아 있었다.

"왜?"

"안 무서우십니까?"

"무서울 게 뭐가 있어? 나는……."

라르웬은 순간 울컥 올라오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억지로 눌렸다.

"나는 내 가족을 잃는 게 더 무서워."

잃어본 놈이 안다고. 다시는 가족을 잃고 싶지 않았다.

라르웬은 분위기가 이상해지기 전에 하벨의 정수리에 딱밤을 때렸다.

따악!

"……!"

"억울해하지 마. 이건 맞을 만했어. 무슨 움직이는 족족 사고야? 다음에 네가 누굴 데리고 올지 상상만 해도 무섭다."

하벨이 랄라룰루 데리고 온 게 용이라니.

라르웬의 시선이 잠깐 가방을 향했다.

"어쨌든, 어쩌기로 했어?"

하벨이 말이 없자 라르웬은 불안함에 입가를 핥았다.

또 무슨 이야기가 흘러나오려고 이러지는.

"가문 내에 잠깐 머물기로 했습니다."

하벨의 목소리가 투박하자 라르웬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아무래도 맞은 게 억울한 모양이었다.

"왜?"

"마나를 거의 다 써버렸다고 하네요. 회복하려면 정령이 있는 곳에 만들어지는 순수한 마나를 흡수해야 한다고 합니다."

"…좋아. 일단 이유는 나중에 들을게. 너도 급하니까."

라르웬은 용이 마나를 거의 다 썼다는 말이 걸렸지만, 용은 이미 하벨 곁에 있었다.

무엇보다 오늘이 아니면 하벨이 이곳을 찾아오기조차 어려울 테고.

어제 일이 아버지의 귀에 닿았다.

조만간 하벨이 원하든 아니든 집으로 소환될 가능성이 컸다.

'아니, 용이라니……. 대체 뭘 어떻게 했길래 용을 만날 수 있는 거지?'

라르웬은 어떻게 말을 해야 룬델이 그나마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을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팠다.

라르웬은 숨을 크게 내쉬려다 말고 문득 떠오른 생각에 머뭇거렸다.

"몸은 어때? 어제 보니까 외상은 없던데."

가장 먼저 물었어야 할 말이 아닌가.

미안했다.

"괜찮습니다. 조금도 안 아픕니다."

하벨은 말을 아꼈다.

[대장. 거짓말은 나쁜 거라고 대장이 알려줬는데. 이러면 이 몸은 지금 실망할지도 몰라.]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도련님. 아까도 비틀거리셨잖습니까."

아라가 꺼내는 말에 하벨은 화들짝 놀라 뒤이어 들려온 카샬의 말마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조금 아픕니다."

하벨은 다시 말을 바꾸자 라르웬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아무렴 어제 그 모양이었는데 오늘 괜찮으면 사람이 아니었다.

"숨은 제대로 쉬어져?"

"이게 있어 괜찮습니다."

하벨은 가면을 툭툭 건드렸다.

"진짜 움직이는 침대라도 있으면 좋겠네."

라르웬이 꺼내는 말에 하벨은 키득거렸다.

"그것도 생각보다 괜찮습니다."

물을 침대 삼아 누워 바다를 둥둥 떠돌아다닌 기억이 떠올랐다.

서서 다니는 것과 다른 시선이기에 편안하면서도 재미있었다.

"…막내야. 제발, 몸이 이상하면 돌아와. 무조건. 만약 돌아왔을 때 저번이랑 비슷한 상태라면 내가 끌고 집으로 갈 테니까."

뭐가 즐거운지 웃음을 터트리는 하벨을 보자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옆에서 카샬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또 틈의 세계가 벌어지진 않겠죠?"

하벨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웃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같은 장소에 틈의 세계가 벌어지지 않는다고 확답할 수 없지만, 보통은 시간이 걸려."

라르웬은 말하면서도 마음이 불편했다.

저번에 생긴 이상 신호가 이런 식으로 나타난 걸까.

'기분 탓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틈의 세계가 열리는 빈도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중 절반 이상이 하벨이 있던 곳이었다.

우연일까.

"형님?"

"어쨌든, 아까 내가 한 말 잊지 마, 하벨아."

라르웬은 다시금 경고하며 하벨을 안내했다.

클로저 일만 아니었어도 따라가는 건데.

'…아.'

라르웬은 곧바로 카샬을 쳐다보았다.

흠칫.

묘하게 날카로운 시선에 카샬은 움찔거렸다.

"카샬."

라르웬이 손짓하자 카샬은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채고는 그에게 걸어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도 저는 도련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스승한테 받은 임무.

용을 찾아라.

설마하니 그게 해결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다시금 한숨이 새어 나올 정도였다.

"번복할 생각하지 마라, 카샬."

유난히 라르웬의 시선이 날카로웠지만, 카샬은 고개를 끄덕였다.

임무가 달성되든 말든 자신은 티에라 가문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

* * *

카샬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잠깐 기다려 봐도 칼리우스가 나오지 않자 하벨은 입을 열었다.

"거기 계속 있을 거야?"

"나와도 되는……."

칼리우스가 다급히 입을 막는 소리가 들려왔다.

[용용아. 이제 나와도 괜찮아! 엄청 답답했을 텐데. 어서 나와!]

아라가 가방을 두드리다 그 속으로 들어갔다.

"진짜 나가도 돼?"

칼리우스가 속삭이자 아라는 크게 말했다.

[응응. 이 몸은 거짓말 못 해. 이 몸을 믿어!]

곧 가방이 움직이다 칼리우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을 둘러보던 칼리우스는 하벨을 보며 웃었다.

뭐가 좋다고.

하벨은 말을 걸었다.

"답답하지 않았어?"

"전혀. 도망치느라 일주일 동안 땅속에 있었던 적도 있었는데?"

[히익! 따, 땅에? 왜? 왜 도망쳤는데?]

아라가 꼬리를 바짝 세우며 물었다.

"실수로 의태가 벗겨진 적도 있었고. 나는 비를 맞아도 괜찮아서 인간, 아니 사람들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그걸 몰랐거든."

칼리우스는 머리를 긁적이자 아라가 꼭 안아주었다.

"용용아."

하벨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응."

"그게 답답함을 참는 이유가 될 필요는 없어. 답답한 건 답답한 거야. 가방에 오래 있게 해서 미안해."

갑작스러운 사과에 칼리우스는 당황했다.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갈 때는 더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칼리우스가 손님인 이상 카샬은 그를 보필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카샬까지 허리를 숙이자 칼리우스는 양손을 뻗어 흔들었다.

"아니야. 답답하지 않았어. 정말 괜찮아. 나는 숨도 오래 참을 수 있어."

"나는 네가 어디에서 누굴 만났는지 몰라."

하벨은 자신이 오지랖을 부린다는 걸 알지만, 어딘가 주눅이 든 칼리우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꼭 말해주고 싶었다.

본인이 받은 상처가 상처인지 모르는 것만큼 괴로운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네가 누굴 만났든 '악'을 향해 걸어가지 않는 이상, 그런 대접을 받을 이유는 없어. 그러니 조금이라도 억울한 게 있었다면 기억에서 지워버려."

칼리우스는 자신의 뺨을 간질이는 머리카락조차 모른 채 멍하니 하벨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그 말을 듣자 지금껏 괜찮았던 자신의 가슴이 조금씩 아픈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팠나?'

[응응! 이 몸이 행복한 기억으로 채워줄게!]

자신의 목을 따스하게 감싸는 아라의 부드러운 촉감에 칼리우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같이 가."

칼리우스는 조금 전보다 가벼운 걸음으로 하벨을 따라갔다.

저번처럼 단풍을 주워 아라와 칼리우스에게 주며 느긋하게 걸어가던 하벨은 틈의 세계가 열린 곳 너머에 도달해서야 칼리우스를 바라보았다.

"용용아, 여기 오기 전에 들었겠지만, 나는 거대 정화 장치로 가고 싶어."

"응, 들었어. 마나의 흔적을 쫓아야 한다며?"

"맞아. 할 수 있겠어?"

"응. 물론이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마나의 축복을 받은 자, 그게 우리야."

칼리우스는 당당히 목소리를 냈다.

용이 특별한 이유.

세상의 수호자인 이유.

모든 건 마나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칼리우스는 주먹을 꼭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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