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92화 (92/415)

92화. 용용이(2)

* * *

미래에 세상을 멸망시킨 용이라 볼 수 없을 만큼 순진한 모습과 칼리우스를 보자마자 다시 타오르는 랜턴의 검은 불꽃에 하벨은 경계심을 더욱 올렸다.

―응. 바다와 물의 냄새가 이렇게 나는데? 인간은 그럴 수 없어.

'내가 용왕이라는 걸 한 번에 꿰뚫어 봤다.'

그런 존재가 저런 모습을 할 리가 없었다.

하벨은 요동치는 마음을 억누르며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레디나와 페트리오를 향해 말했다.

"이제 괜찮으니까, 그만해도 돼."

애초에 저들이 왜 고개를 숙이는지.

틈의 세계를 닫으려고 한 것도 자신이고 정령수를 이용해 힘을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도 힘을 썼다.

분명 자신은 저들의 어떤 것도 짊어지지 않겠다고 했는데.

"저는 저 자신이 분해서 사과하는 겁니다. 전투에서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 건 사실이니까요."

페트리오는 고개를 올리며 말했다.

말을 하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는 도련님의 신도잖아요? 아, 그림자 역할도 제대로 못 했네요. 어쨌든 페트리오와 같은 의미로 자기반성입니다."

덩달아 고개를 올린 레디나가 씨익 웃었다.

반성은 이제 됐다. 남은 건 달라지는 일뿐.

"그럼 나한테 그럴 필요는 더욱 없어."

하벨은 카샬의 눈짓에 움직이려다 멈췄다.

"아뇨, 도련님."

"앉을 만큼 괜찮아졌어. 정말로."

"아직 일어나시면 안 된다는 걸 알고 계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는 건 그게 아닙니다. 사과는 받으셔야 합니다."

"왜?"

하벨이 눈을 깜박거리자 카샬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애초에 같은 임무를 함께하지 않았습니까? 임무를 실패했고, 부상자까지 생겼습니다. 각자의 역할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셈이죠."

"그런 일이라면 내가……."

"아뇨. 도련님께서는 의뢰자입니다. 길잡이인 페트리오가 사전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으며 호위로 온 저나 레디나가 의뢰자인 도련님을 지키지 못한 겁니다. 이건 각자의 자존심이 달린 일이니 더욱 사과를 받으셔야 합니다."

카샬은 단호했고, 그만큼이나 진지했다.

임무의 실패 때문에 하는 사과이니 받아라.

'…아.'

하벨은 그제야 자신이 또 멋대로 짊어지려고 했다는 걸 알아버렸다.

버릇처럼 되어버려 자신이 그랬음을 인지하지 못하다니.

"고마워."

그렇다면 당연히 사과를 받아야지.

짊어진다는 건 저들의 잘못까지 자신의 잘못이 되는 셈이니.

"그럼 이제 도련님의 식사를 위해 요리장한테 말하고 올게요. 카샬은 여기 붙어 있어야 할 것 같으니 오늘은 제가 볼게요."

레디나는 그제야 활짝 웃으며 카샬을 향해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카샬이 입을 움직이려다 그만뒀다.

지금은 칼리우스가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사실이었다.

"저는 비가 그칠 때까지, 이번에 살펴보기로 한 거대 정화 장치 이외에 다른 장치들의 위치와 상황을 계속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페트리오는 고개를 숙였다 올렸다.

귀족 문제로 잠깐 멈췄던 거대 정화 장치에 다시 손을 댈 차례였다.

오늘을 통해 다시금 깨닫지 않았던가.

사전 조사는 더 철저히.

여러 상황에서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함을 품어야 한다는 걸.

"도련님. 저는 밖에서 대기하겠습니다.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카샬은 칼리우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겉모습은 많이 봐봤자 13살.

그 속에 뭐가 들었는지 몰라도 볼 때마다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카샬."

하벨의 부름에 카샬은 밖으로 나가려다 고개를 돌렸다.

"마음 준비 단단히 해."

"…마음 준비를 단단히 하라뇨?"

카샬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이제껏 하벨이 저런 소리를 한 적이 있던가.

매 순간, 가볍게.

아니, 최대한 가볍게 넘어가려고 했던 그가 준비라는 무거운 단어까지 쓰다니.

카샬은 자신을 덮쳐오는 불안함에 섣불리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저 지금 엄청 불안합니다. 불안해도 되는 겁니까, 도련님?"

"그래 주면 좋지. 마음의 준비라도 될 테니까. 일단 너부터 말해줄게."

하벨은 아직도 이곳을 떠나지 않은 레디나와 페트리오를 의식하며 말했다.

칼리우스가 용이라는 사실은 그 말을 가장 믿지 않을 카샬에게 꺼낸 뒤에 반응을 보고 판단할 생각이었다.

불안함과 초조함을 드러내며 카샬은 밖으로 나갔다.

칼리우스가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오고 문이 닫혔다.

[안녕!]

그 자리에 가만히 선 칼리우스를 보더니 아라가 먼저 꼬리와 손을 흔들었다.

"안녕, 아라야."

칼리우스 역시 손을 흔들었다.

"좋아, 칼리우스."

하벨은 숨을 고르며 긴장감이 흐트러지지 않게 유지했다.

하벨 티에라와 별개로 세상이 멸망하는 원인 중 하나가 아닌가.

"그동안 얌전히 있었어. 만지지 말라고 하면 안 만졌고. 차 마시라고 하면 차만 마셨어."

칼리우스는 먼저 입을 열었다.

"맹세코 아무한테도 해를 끼친 적 없어. 인사도 잘했고. 내가 용이라는 것도 밝히지 않았어."

"……?"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인지.

하벨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나이 많은 인간이 나보고 손주라고 부르면서 말은 잘 들어야 한다고 알려줬거든."

칼리우스는 그립다는 듯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하벨은 어리둥절한 표정 그대로 물었다.

"혼내는 거 아니야?"

"혼을 내다니?"

"표정이 딱 그런데. 화를 내기 직전의 표정. 감정을 숨기려고 애를 쓰고 있어. 그런데 진짜 하벨 너는… 음, 읽기가 좀 어렵네."

"틀렸어."

"트, 틀렸어?"

하벨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의자를 가리켰다.

"끌고 와서 앉아."

"옆에?"

"그래."

"응!"

칼리우스는 달려가 의자를 가볍게 들며 침대 위에다 놓으려 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하벨의 언성이 살짝 올라가자 칼리우스는 의자를 든 채로 멈칫거렸다.

"내가 뭐 실수했어, 하벨?"

[응. 침대 옆에 의자를 둬야지. 이 몸도 그건 아는데?]

아라가 날아와 침대 옆을 가리키자 칼리우스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하벨이 분명히 옆이라고 했는데?"

"침대 옆이 맞아."

하벨은 잠깐 흔들렸다는 걸 인정했다.

순진한 연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당장 벗고 싶은 팔찌를 쳐다보며 마음을 다시 잡았다.

"아, 고마워."

칼리우스는 고개를 숙인 뒤에 의자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무슨 말을 나눌지 몰라 긴장하면서도 설레어 있는 게 보였다.

하벨은 속으로 혀를 차며 말을 꺼냈다.

"저번에 날 찾은 이유가 내가 용이기 때문이라고 했잖아?"

"맞아."

"틀렸어. 나는 용이 아니라, 용왕이야."

"…그냥 용이 아니라 왕이었어? 세상에."

칼리우스의 눈이 커졌다.

한껏 기대감에 부풀다 못해 활짝 웃었다.

"아니. 용왕이라고. 앞에 '용'이 붙긴 하는데 달라. 나는 한 번도 용을 부려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저 바다와 물의 지배자였을 뿐이야."

"와. 엄청난 힘까지 가지고 있었어? 용을 부려본 적 없으면 오늘부터 하면 되겠다. 나 말이야."

칼리우스는 신이 난 채로 말하자 하벨은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잡았다.

뭔가 대화 자체가 피곤했다.

[헤헤, 뭔가 재밌다.]

아라는 하벨을 꼭 안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이봐, 내 말을 듣고 있어?"

이마를 꾹 누른 하벨이 겨우 말문을 열었다.

"응. 나는 뭐든 잘 들어. 대화란 자고로 가장 중요한 소통의 장이잖아? 그래서 나는 대화가 엄청 중요한 걸 알아."

칼리우스가 한껏 진지한 표정을 지었지만, 하벨 자신이 보기에 아라가 진지한 척하려는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순진한 척이 아니라, 어쩌면 멍청한 게 아닐까?'

하벨은 가정을 하나 해보며 눈높이를 낮춰보았다.

어차피 랜턴이든, 하벨 티에라가 보여준 기억이든 다 참고용이 아닌가.

"자, 다시 처음부터 말해보자, 용용아."

"용용이?"

"그래, 용용아. 용을 찾은 이유는?"

"혼자는 싫어서. 외롭고, 슬퍼서 찾아다녔어."

"네가 마지막 용이라며. 그런데 왜 굳이 찾아다니냐는 거지."

"용은 원래 함께 살아가. 이건 세대를 거듭해도 용에게 전해지는 정보 중 하나라서 나도 알고 있어."

칼리우스의 표정은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천천히 슬픔이 묻어났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현실은 다르잖아? 눈을 떴는데 나뿐이었어. 나는 내가 '마지막이구나'라며 받아들일 수 없었어. 왜 내가 혼자야? 왜 나는 혼자여야 하는 거지?"

이어지는 칼리우스의 말에 하벨의 손가락이 잠깐 꿈틀거렸다.

자신도 처음 눈을 떴을 때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별을 품은 바다를 바라보며 고요하게 흐르는 바다 한가운데 있었다.

자신을 축복하듯 바다가 출렁거렸고, 비가 내려왔다.

비를 맞으며 왜 태어났는지 모른 채로 눈을 깜박거렸다.

그때, 말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너는 바다와 물의 지배자인 용왕이자 그것들의 심장이다. 네 존재는 세계를 위한 것이며 세계를 위한 열쇠가 되거라.

이해하지 못할 소리.

―…아.

자신은 그 말을 들어서야 비로소 숨을 토했다.

하벨은 기억을 떨쳐내듯 주먹을 꽉 쥐며 다시 물었다.

"바다 냄새가 났다고 했잖아?"

"바다하고 물. 두 개는 다른 냄새잖아?"

"그걸 어떻게 안 거야?"

"그냥 나던데? 지금도 나고 있어. 조금… 아니, 많이 이상한 냄새도 나고."

"이상한 냄새?"

하도 그 말을 정령들에게 듣다 보니 하벨은 자신도 모르게 반응했다.

"되게 위험한 냄새 같기도 하고. 음. 뾰족한 냄새야. 그 이상은 잘 모르겠어."

"좋아. 냄새가 난다고 쳐. 하지만 적어도 이 몸뚱어리는 사람이야."

"……?"

칼리우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몰라도 괜찮아. 그냥 기억해."

하벨은 굳이 칼리우스의 의문을 해결해주고 싶진 않았다.

씩 입꼬리를 올리자 칼리우스도 덩달아 웃었다.

"너는 그때, 거기에 왜 있었어?"

하벨이 물었다.

아무리 봐도 부자연스러웠다.

괴물이 자신을 던졌던 그곳에 칼리우스가 있었다?

아무리 사건이 우연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인위적인 냄새가 났다.

"숲을 걷다가 날 쫓아온 자랑 비슷한 냄새가 나서 혼내주려고 찾아갔을 뿐이야."

"널 쫓은 자도 네가 용이라는 걸 알아?"

"아니. 그건 몰라. 몰라야 해."

칼리우스의 눈동자가 한순간 서늘해지자 공기가 무거워졌다.

"나는 혼자고, 내가 용이라는 걸 알면 어떻게 될지 몰라. 그건 아주 위험한 행동이야. 날 손주라고 말한 할아버지한테도 알려주지 않았어."

"나하고 아라는 아는데?"

하벨은 자신과 아라를 가리켰다.

"너는 용이니까 괜찮아."

[그럼 이 몸은?]

아라는 한껏 기대를 담아 꼬리를 흔들었다.

"정령은 그러지 않을 거야. 평화를 제일 좋아하잖아? 나도 평화가 좋아. 나는 세상의 수호자니까."

―…세상이, 그리고 네놈들이 용을 죽였으니. 너희도, 이 세상도 이제 사라져야 하지 않겠는가.

증오가 가득 담겼던 칼리우스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이 세상이 미운 게 아니라?"

아직 칼리우스는 자신이 수호자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하벨은 슬쩍 떠봤다.

"세상이 왜 미워? 나는 세상의 수호자라니까? 수호자인 내가 세상을 미워하는 게 말이 돼?"

칼리우스는 하벨의 질문에 곤란해하며 대답했다.

'아직은 아니었는데, 어떤 계기로 달라졌는데 그 원흉이 사람이었다는 건가?'

용이 죽었다고 했다.

칼리우스 말고 또 다른 용이 있다는 말일까.

아니면 이미 용을 죽였다는 말일까.

하벨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런 걸 고민하는 상황 자체로 짜증이 일어났다.

"그래서 너는 이제 어떻게 할 건데?"

하벨은 칼리우스를 부른 진짜 이유를 꺼냈다.

용을 찾으라는 말을 따른 것 같아 기분도 나빴고, 진짜 용인 칼리우스가 자신에게 왔기에 세상이 멸망하는 시간마저 움직인 기분이라 여러모로 찝찝했다.

칼리우스의 목적과 움직임 정도는 알아둬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하다니?"

"목적 말이야."

"내 목적은 이미 이뤘어. 내 동족을 찾았으니까, 나는 이제 행복해."

칼리우스가 배시시 웃으며 발을 흔들었다.

[아니야, 칼리우스. 이 몸이 봐도 대장하고 너하고 달라.]

"용이 붙었잖아? 생김새랑 여러 가지가 달라도 넌 내 동족이 맞아. 인간이 아닌걸."

"난 분명 아니라고 말했어. 나중에 후회해도 내 탓 하지 마."

"탓 같은 거 안 해. 절대로."

"그럼 이제 가면 되겠네. 나가는 문은 저쪽이야. 카샬이라고 아까 봤지? 집사가 안내해 줄 거야."

"아까 앉은 곳으로 가서 얌전히 있으면 돼? 그건 할 수 있어."

칼리우스가 의자에서 내려오다 말고 뒤이어 들려오는 하벨의 말에 그대로 멈췄다.

"아니. 목적을 이뤘다며? 이제 다른 목적을 이루러 가야지?"

하벨은 세상이 멸망하든 말든 칼리우스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세상을 구하는 건 하벨 티에라의 몫이었고, 자신은 어쩌다 이 몸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그런데 왜 자신이 해야 하는가.

순간 치솟는 짜증에 허벅지를 세게 내리쳤다.

탁!

'나는 또 짊어질 생각이 없다, 하벨 티에라. 네가 내게 부탁해도 나는… 실패했단 말이다.'

[대장? 갑자기 왜 그래?]

아라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게. 혹시 거기 뭐 묻었어?"

칼리우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하벨은 밀려오는 아픔이고 뭐고 아라를 쓰다듬은 뒤에 다시 칼리우스를 보았다.

"안 일어나고 뭐 해?"

칼리우스는 조금 전보다 더 차갑게 식어버린 하벨의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뭔가 쫓겨나는 기분이 들었다.

"나, 나는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

"왜? 목적을 이뤘잖아."

"하벨. 혹시 몇 살이야?"

"…3주?"

[응. 이 몸하고 똑같아.]

아라가 자신을 가리키며 배시시 웃었다.

"그럼 내가 형이야. 형으로서 널 지켜줄게. 약속해."

딱.

하벨은 참다못해 칼리우스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용용아. 내가 이 몸에 들어온 시간을 말한 거야."

"그래도 내가 나이가 더 많아. 용의 육감으로 알 수 있어."

"…하. 뭐 좋아. 형이든 뭐든 용용이 넌 누구한테 쫓기고 있는 건데?"

하벨은 사소한 다툼보다는 이 골칫덩어리를 어떻게 쫓아낼지 고민하며 물었다.

손쉽게 떨어지질 않을 테니, 일단 누구한테 쫓기는지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마법사."

칼리우스는 해맑게 웃었고 하벨의 눈이 커졌다.

'이런…….'

지뢰를 밟아버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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