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91화 (91/415)

91화. 용용이

* * *

과거로 돌아온 자.

회귀자.

그게 하벨 티에라일 줄이야.

'왜…….'

하벨은 넘치는 의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왜 하필 나인가.'

정말로.

아주 희귀한 확률로 과거로 돌아올 수 있었다면 하벨 티에라 본인이 했어야지.

세계가 멸망하든 말든 그게 자신하고 무슨 상관인가.

'왜 내게 책임감을 떠넘기냐는 말이다, 하벨 티에라!'

하벨은 밀려오는 답답함에 호흡이 빨라지고 피가 서서히 빠지는 기분이 느꼈다.

―도련님께서는 일하는 걸 싫어하잖습니까. 음… 요 몇 달 전에 갑자기 달라지셨는데 오늘도 되게 이상하십니다.

카샬이 자신을 처음 보며 했던 말.

달라졌다.

이조차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이제야 알았다.

그때부터였다.

'하벨 티에라가 회귀한 날. 그때가 그 날이었어.'

"…도련님?"

카샬이 조심스럽게 하벨을 불렀다.

상태가 갑자기 이상해졌다.

"카샬."

하벨의 목소리에 숨이 섞여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정말 안 좋습니다."

"하벨 티에라가 달라졌다고 했잖아. 나한테… 그렇게 말했잖아."

"지금 도련님께서도 충분히 다릅……."

"아니!"

하벨이 소리치자 카샬과 아라는 깜짝 놀랐다.

이토록 강렬한 분노는 처음 봤다.

"나 말고! 내가 아니라 하벨 티에라! 하벨 티에라 말이야…!"

[대장? 이, 이 몸은 지금 대장이 무서워.]

아라가 제 품에서 떠는 게 느껴지자 하벨은 잠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치미는 분노에 자신을 잡아먹히는 일은 없어야 했다.

"…흡."

입술을 깨물며, 숨을 가다듬으며 하벨은 이성을 붙잡았다.

하벨 티에라가 회귀자였다는 사실만큼 커다란 일은 얼마든지 있었기에 통제할 수 있었다.

아니, 통제해야만 했다.

어떤 감정에도 잡아먹히지 않게 항상 머리는 차갑게.

랜턴을 보자마자 순간, 울컥 치밀어올랐지만, 참았다.

억누르고, 짓누르며 하벨의 숨소리는 차차 가라앉았다.

"…소리쳐서 미안해, 카샬. 미안해, 아라야."

"아… 닙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조금 놀랐을 뿐이니까요."

카샬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아라는 하벨을 쳐다보았다.

방금은 갑자기 커지는 불꽃처럼 강렬했다면 지금은 차가운 얼음을 보는 것 같았다.

눈물로 이뤄진 얼음을.

[대장. 이 몸이… 무섭다고 말해서 미안해. 이 몸 말 때문에 대장이 지금 슬퍼하는 거야?]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주 잠깐 북극여우를 봤던, 새하얀 눈이 내린 그 장소를 떠올렸다.

감정에 먹혀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만 그 장소.

"괜찮아."

지금은.

"카샬. 나 말고, 하벨 티에라 말이야."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차분했으나, 하벨의 얼굴에 여전히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몇 달 전부터 달라졌다고 나한테 말한 적이 있잖아?"

"예. 그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떻게 달라졌는데?"

"갑자기 어른… 스러워지셨습니다."

카샬은 생각을 하며 말을 꺼냈다.

사람이 한순간에 달라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렸던 하벨 티에라가 갑자기 어른이 되어버리지 않았던가.

지금 하벨은 그 중간에 서 있는 것 같았고.

"그럼 하벨 티에라가 올랐다는 산 말이야."

산이라는 말에 카샬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마치 건드리면 안 될 버튼을 누른 것 같았지만, 하벨은 멈출 수 없었다.

[…산?]

아라는 한쪽 귀를 쫑긋거렸다.

"혹시 거기가 어딘지 알고 있어?"

"알고 있지만,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카샬은 단호하게 말하며 미간까지 찌푸렸다.

"그곳은 도련님께 위험합니다. 다시는 가면 안 될 곳입니다."

[마, 맞아! 이 몸도 세렌이랑 루룸한테 들었어! 대장이 아주아주 위험할 뻔했다며? 그런 곳은 다시는 가면 안 돼!]

아라는 옷자락을 꽉 잡으며 인상을 쓰려 무던히 노력했다.

아무리 그래도 하벨은 마음을 접을 생각이 없었다.

'거기가 내 시작점인 게 확실하다.'

하벨 티에라가 산을 올라 용의 왕을 향해 무언가를 빌었을 때.

그때, 자신은 어떤 방법으로 하벨 티에라의 몸에 들어왔으니까.

[대장. 산에 가려는 거 아니지? 이 몸은 대장이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해!]

아라가 옷자락을 흔들며 물었다.

산에는 오염된 물로 된 눈이 가득 쌓여 있다고 했다.

하벨이 죽을지도 몰랐다.

하벨이.

생각만으로도 슬픔이 넘쳐 흘렀다.

'그래. 아직은 아니야.'

하벨은 아라의 푸른 눈동자에 천천히 맺혀오는 눈물을 보며 일단 자신의 마음을 다독였다.

'거긴 최후의 보류야.'

헤레스가 티에라 가문으로 부른 마법사를 통해 몸을 돌려줄 방법이 아직 남아 있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아라야. 산은 오르지 않아. 아직은."

카샬은 도통 무얼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하벨을 보며 힘이 빠진 듯 숨을 길게 내뱉었다.

일단 하벨에게 해야 할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이 말씀부터 드렸어야 했습니다."

"……?"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다 말고 흠칫 놀랐다.

카샬의 사과가 이상하게 낯설었다.

웃음기가 빠져서일까.

"너, 왜 그래? 아까 내가 소리쳐서 그래? 그건 내가 잘못했어.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다 제 잘못입니다."

"갑자기 뭐가?"

하벨의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이번에 제가 집사로서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하벨은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가며 의문을 가졌다.

"그런 건 없는데?"

"아닙니다. 그 결과 도련님을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카샬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눈앞에서 하벨이 괴물에게 붙잡혔고 날아갔다.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았다.

그렇게 무력한 순간은 내쫓겼던 그 이후로 처음이었다.

"날 보호하는 건 집사의 역할이 아니야, 카샬. 그건 호위의 역할이지."

"아뇨. 저는 애초에 보호에 초점이 맞춰진 채 고용되었습니다."

여전히 카샬은 낯선 얼굴하고 있기에 하벨 역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서 룬델이 카샬을 그렇게 챙겼나?'

룬델이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항상 카샬을 데리고 돌아다녀달라고 자신에게 말하기도 했고.

"가주님이 널 그렇게 고용했어?"

"아뇨. 절 고용하신 건 도련님이십니다."

"하벨 티에라가? 왜?"

하벨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하벨 티에라가 회귀자라면 카샬을 고용한 것 역시 어떤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자신의 신경이 평소보다 날카롭다는 걸 알지만,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을 순 없었다.

"도련님께서는."

카샬은 잠깐 말문을 멈췄다.

―…고마워, 카샬. 있는 그대로 나를 봐줘서. 그… 말을, 너한테 처음 들어봤어. 이 넓은 저택에서 아무도 해주지 않았는데. 딱 한 명만. 제발 딱 한 명만이라도 나를 봐줬으면 했는데, 그게 너… 였네.

서러움을 토하며 말을 내뱉던 하벨과 다른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하벨이 어쩌면 영원히 떠올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카샬은 목구멍까지 말이 치솟아 올랐다.

내뱉어도 될까.

그걸 정말 원하시는 걸까.

기억하지 못한 일을 꺼냄으로써 하벨에게 있어 강요될지도 모르는데.

"제… 은인이십니다."

하지만 카샬은 첫 마디를 열어버렸다.

"은인이라고?"

하벨은 고마움이 깊게 묻어난 카샬의 눈빛에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가슴이 요동쳤다.

'진정하자. 진정해.'

시간을 역행하는 행동은 금기였다.

만약 극악의 확률로 회귀를 했다고 해도 또다시 과거를 여러 번 반복하는 건 불가능했다.

시간 선을 건드린다는 건 존재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는 건 물론이고, 다른 것까지 깨워버릴 만큼 위험한 행동이었다.

"예. 도련님께서 제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딱 여기까지 알고 있으라는 듯이 카샬은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어떻게 구해줬는데?"

하벨은 입 안이 바짝 말라 갔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가주님께서 제가 망나니였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성격도 개판이라 설치다가 죽을 뻔한 저를 도련님께서 주웠습니다."

"우연히?"

"웬만한 일들이 다 우연히 발생하지 않습니까?"

'아.'

하벨은 카샬의 말에 비로소 어깨에 힘을 뺐다.

'하벨 티에라가 칼리우스를 처음 봤을 때, 그곳에 카샬도 있었다.'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카샬과 하벨 티에라가 만난 건 우연이라고 볼 수 있었다.

"설령 만난 게 우연이라고 해도 저는 도련님 덕에 목숨을 구한 건 사실입니다."

카샬은 뒤이어 꺼내고 싶은 말을 삼켰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혼란스러워 보이는 하벨을 굳이 흔들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다음 말은 하벨이 정신적으로 안정됐을 때 꺼내야 할 말이라 생각했다.

'…칼리우스.'

갑자기 나타난 칼리우스라는 이름을 한 아이.

수상함을 가득 품은 그 아이 덕에 하벨의 목숨을 건지기는 했지만, 하벨이 느끼고 있는 저 불안함은 그 아이 때문에 벌어진 게 아닐까 싶었다.

"어쨌든, 죄송합니다, 도련님.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항상 노력하겠습니다."

카샬은 단호하게 말하지 못했다.

정령사도 될 수 없고, 마나를 다룰 수도 없는 그 애매한 곳에 선 자신을 보니 도무지 '같은 일이 다시는 없도록 맹세하겠다'라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도련님. 이제……."

"형님이 오셨지?"

요동치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자 하벨은 이제야 여러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틈의 세계가 열렸으니 라르웬이 오는 건 당연했다.

"예. 한, 2시간 전까지 이곳에 계셨고 지금 뒷수습을 하러 잠깐 자리를 비웠습니다."

하벨은 카샬의 말을 들으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저 너머에 비가 내리는 게 보였다.

"비가 그치면 가야겠네."

"……?"

카샬은 중얼거리는 하벨의 말에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대장……?]

아라까지 눈을 크게 뜨며 하벨을 보았다.

"지, 지금 저기로 가신다는 말씀입니까?"

[맞아! 지금 비가 오는데?]

카샬이 말하고, 아라가 덧붙였다.

"어, 그걸 또 들었어? 귀가 좋네?"

하벨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천천히 미소를 띠며 아라의 배를 간질였다.

꺄르르 웃는 소리가 들리자 하벨은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갑작스럽게 많은 정보가 쏟아져 당황스러웠지만, 자신의 상황은 아직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저 들으라고 말씀하신 거 아닙니까?"

"비가 그치면."

"도련님."

"어차피 가야 하는데 뭘 망설여?"

설령 이전에 보았던, 오염된 거대 정화 장치에서 나온 검은 물이 멸망의 원인이라고 해도 자신은 하고 싶은 걸 할 뿐이었다.

하벨은 링거를 가리켰다.

"갑자기 날아서 속이 뒤집혔을 뿐이야. 비가 그칠 때까지 쉬면 괜찮아질 거야. 아, 레디나랑 페트리오는?"

카샬은 짧게 숨을 내쉰 후에야 대답했다.

"칼리우스와 함께 있습니다. 칼리우스 덕에 도련님께서 무사하실 수 있었지만, 저는 의심스럽습니다. 아이 혼자 그 숲에 있다뇨. 뭐가 더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일단 칼리우스를 불러줘. 나도 할 말이 있어."

아라와 칼리우스가 어떻게든 카샬, 레디나, 페트리오를 부른 듯하나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칼리우스는 세상을 멸망시킨 원인 중 하나입니다.

하벨 티에라가 회귀자였기에 그가 봤던 기억과 저 말을 조합하자면 미래에 일어날 일인 건 거의 확실했다.

아이가 아닌, 어른의 모습을 한 칼리우스를 처음 보았다고 했지만, 지금은 아이 모습을 칼리우스와 만났다.

'…그자 때문이겠지. 용을 찾으라고 내게 말한 그 존재.'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번에는 자신을 토닥였다.

혹시 그 존재가 하벨 티에라일까.

하벨은 천천히 숨을 토하며 그저 여러 가지 가능성만 두었다.

아직 뭘 판단하기엔 일렀다.

지금은 저 용을 통해 더 자세한 말을 들을 차례였다.

[대장, 있지. 칼리우스는 착했어.]

하벨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자 아라가 말했다.

[칼리우스는 대장을 정말 정말 걱정했어. 도중에 눈물도 보였다구.]

"…눈물을 보였다고? 날 처음 봤는데?"

하벨은 당황스러웠다.

죽을 뻔한 것도 아니었고, 평소처럼.

아니, 평소보다 조금 더 상태가 안 좋았다고 치지만, 처음 보는 사이에서 울음이 나올 수 있을까.

[운 건, 이 몸이 더 울었어. 이 몸이 더더 많이 걱정했어!]

아라는 울상을 지었다.

걱정하는 도중에 질투라니. 하벨은 피식 웃었다.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다 카샬이 꺼내는 말에 고개를 돌렸다.

"꼭 지금 만나셔야 합니까?"

"만나면 안 될 이유라도 있어?"

"도련님께서 지금 흔들리고 계십니다."

"조금 전까지는 그랬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야. 괜찮으니까 불러줘."

잠깐 망설이던 카샬은 일단 한발 물러섰다.

둘 사이 뭔가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금방 부르겠습니다."

카샬이 문을 열자 그 틈 사이로 레디나가 보였다.

카샬은 깜짝 놀랐다.

"도련님!"

레디나가 얼른 손을 흔들었다.

문이 밀려오자 카샬은 본의 아니게 뒤로 물러섰다.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페트리오까지 보이자 카샬은 뒤늦게 목소리를 터트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살펴본다며?"

칼리우스를.

"그러려고 했는데, 역시 도련님이 걱정되잖아요."

레디나는 어쩐지 평소보다 더 초췌해진 하벨의 모습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많이… 아프신가요?"

"안 아파."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해요."

"…저도 죄송합니다."

레디나와 페트리오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자 하벨은 당황스러워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안 돼, 대장! 일어나지 마!]

아라가 하벨의 옷자락을 다급히 잡았고, 레디나와 페트리오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일어나지 말고, 누워 있어."

앳된 목소리에 카샬은 다급히 하벨을 돌아보았다.

침대 밑으로 다리를 내리던 하벨이 슬그머니 올려서는 이불 속으로 넣었다.

"안녕, 하벨. 일어났어?"

칼리우스가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혹시 네가 괜찮다면 안으로 들어가 돼?"

문틀을 잡은 칼리우스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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