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모든 건 제자리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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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의 목이 다 댕강 잘려서는 까마귀밥이 됐더라고요. 수도 광장에 긴 창을 설치해 한 명씩 목을 꿰뚫은 모습이 아주 멋졌어요."
레디나가 양손으로 턱을 괴며 하벨을 바라보았다.
"오. 그것참 멋지겠네."
하벨은 촉촉한 스테이크를 입에 넣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도련님께서는 저쪽으로 안 가십니까? 다들 도련님에게 어떻게든 말을 걸고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카샬은 닫힌 커튼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돌아온 에르티안 왕국과 티에라 가문의 고마움을 표현하고자 왕실에서 급하게 연회를 열었다.
다소 조촐하나, 그래도 연회이지 않은가.
하벨을 위해 음식을 가지러 갈 때마다 자신을 바라보던 이들의 시선이 아주 부담스러웠다.
[오, 맞아! 이 몸도 카샬을 따라가면서 슬쩍 봤는데, 엄청 떠들썩했어! 대장 이야기도 많이 나왔구.]
아라는 자랑스러운 눈빛을 하며 쫑알거렸다.
"저기서 뭘 먹어도 체할 것 같아서. 그렇잖아?"
하벨은 우물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도련님을 위한 자리잖습니까? 저곳에 도련님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페트리오가 안쪽 눈썹을 올렸다.
연회장에 피를 뿌린 사람이 룬델이라고 한다면 그 기틀을 마련한 한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하벨이었으니.
"날 위한 자리가 어디 있어?"
하벨이 치고 들어오는 말에 카샬이 흠칫거렸다.
하벨 티에라의 몸도.
이 이름도.
심지어 있어야 할 장소 역시 다 빌린 것뿐.
'굳이… 날 위한 자리라고 말한다면야.'
하벨의 시선이 금화 초콜릿을 들고는 행복해하는 아라를 향했다.
아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배시시 웃었다.
"애초에 나는 그런 거 바란 적도 없어. 내가 하고 싶었고, 내가 만족했으니 그걸로 된 거야."
하벨이 실실 웃자 레디나는 턱을 괸 손을 떼며 놀라듯 하벨을 불렀다.
"도련님."
"왜 그래?"
"혹시 전생에 성자셨어요? 저는요, 도련님 같은 분은 처음 봐요."
"뭐, 그랬지. 비슷하긴 했어."
하벨은 음료수로 입가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쉽게 인정하시면 맥이 빠지잖아요."
레디나는 기대한 반응이 아니라 숨을 크게 내쉬었다.
좀 더 부끄러워하며 당황하길 바랐는데.
"가주님께서는 내심 기대하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카샬은 비워진 음료수 잔을 채우며 말했다.
봐라, 얘가 내 아들이다.
딱 그런 표정을 짓던 룬델이 하벨이 물러서자마자 그렇게 눈동자가 슬플 수가 없었다.
"형님이 나 대신 잘해줄 거야."
"둘째 도련님 역시 기대하셨던 모양입니다."
봐라, 얘가 내 동생이다.
그 말을 진짜로 하려던 모양인지, 라르웬은 입을 벙긋거리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하벨의 뒷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에이, 설마."
하벨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 페트리오를 바라보았다.
"나야 그렇다고 치는데 너는 왜 저쪽으로 가질 않는 건데? 기회잖아."
카샬과 레디나는 현재 자신의 집사와 시녀니 당연하겠지만, 페트리오는 귀족의 신분으로 이곳에 온 게 아닌가.
"제가 끼면 안 될 자리잖습니까."
"누가 그래?"
하벨의 한쪽 눈이 살짝 커졌다.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절 용서하셨어도 저는 아직 죄인의 마음입니다."
"그래,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많이 먹어."
하벨은 자신의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페트리오에게 넘겼다.
"감사……."
"막내야."
커튼이 젖히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라르웬의 목소리에 하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형님."
하벨은 고개를 내밀었다.
"불편하겠지만, 잠깐 나와야겠어."
"혹시 전하께서 부르십니까?"
"그래. 널 잠깐 따로 보자고 하시네."
하벨이 연회라는 자리를 불편해하더라도 티에라 가문이 에르티안 왕국과 척을 지지 않는 이상 왕의 말을 거역하기란 어려웠다.
"아, 좀도둑도 같이."
라르웬의 시선이 페트리오를 향했다.
"알겠습니다. 벌써 견제에 들어가는 모양입니다."
하벨은 가볍게 웃었다.
피의 연회에서 바안이 다음 왕은 자신이라 밝혔다.
페트리오는 이번 일에 주역이었고, 티에라 가문이 어느 편에 서느냐가 몹시 중요한 시점이니.
"그래. 전하께서는 바안 저하를 아끼시니 말이야."
"좀도둑, 들었지?"
하벨은 고개를 돌려 페트리오를 보았다.
왕을 보기 전에 미리 말을 맞출 차례였다.
* * *
"…그래, 몸은 어떠한가?"
왕은 하벨을 걱정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하벨은 도리어 왕을 보자마자 나타난 랜턴의 불꽃이 이전보다 약해진 기분이 들어 그가 걱정됐다.
검은 불꽃이든 밝은 불꽃이든 줄어드는 경우는 처음이었으니.
"괜찮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하벨은 방긋 웃었고, 왕의 시선은 페트리오를 향했다.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던 그는 시선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왜 그렇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가, 페트리오 경?"
"죄송합니다, 전하."
"죄송할 게 뭐가 있겠는가? 다 짐이 부덕한 탓일세."
왕은 가볍게 웃었다.
"전하, 저는……."
"경은 짐의 벌을 받았으니 그걸로 끝이 났네."
왕의 말에 페트리오는 얼굴을 일그러트렸고, 하벨은 만족했다.
'현명하다. 지금 좀도둑을 적으로 둘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좀도둑이 가진 죄책감을 이용해 파고드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
왕의 시선에서 보자면 페트리오는 왕국을 뒤흔든 죽일 놈인 건 확실했다.
하지만 그 힘이 바안을 위해 쓰인다면야 말이 달라졌다.
이미 이번 일로 페트리오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으며 도움이 됐던 것도 사실이었고.
"하벨 공도, 페트리오 경도 아직 눈에 띄고 싶어하지 않는 걸 알기에 내 이리 조용히 불렀다네."
'사실 바안의 적이 될지 아닐지를 판단하는 거겠지만.'
하벨은 왕의 의도가 무엇이든 바안과 적이 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물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고.
왕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하벨과 페트리오를 향해 걸어왔다.
"고맙네."
진심이 섞인 말을 꺼내며 건조하던 눈동자가 촉촉해졌다.
"그대들은 이 에르티안 왕국의 은인일세."
왕은 그들의 손을 꼭 잡았다. 잦은 떨림이 느껴졌다.
"내 그대들을 위해 다시 자리를 마련하겠네. 하여 그대들이 에르티안 왕국을 구했음을 공포하겠네."
"전하, 죄송하지만, 그 속에 저는 빼주십시오."
진심이 느껴졌지만, 하벨은 바로 거절했다.
누군가를 위해 한 일도 아니었고, 온전히 자신을 위해서 했으며 무엇보다 돌아온 하벨 티에라가 감당할 수 없는 몫이라고 보았다.
"그대가… 빠지면 되겠는가?"
왕은 손을 놓으며 당황함을 드러냈다.
그렇지 않아도 룬델에게서 이미 하벨이 이번 일을 부담스러워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나는 그대가 이 에르티안 왕국을 위해 해준 일이 얼마나 큰지 아주 잘 알고 있네. 그런 그대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겠는가?"
"전하. 이미 이번 일로 티에라 가문이 가지고 있는 힘을 휘두를 뿐만 아니라 본격적으로 움직일 거라는 사실을 다른 나라들이 알게 됐을 겁니다. 이 방향이 응징이든, 뭐든 말입니다."
왕은 분명 룬델과 라르웬이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도 이와 관련된 일을 꺼냈을 테지.
결론은 어떤 식으로 났는지 나중에 물어봐야겠지만.
"이제 하벨 티에라라는 이 이름 역시 다른 나라들이 떠들어댈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에르티안 왕국을 짊어진다는 것 역시 제게는 무거운 짐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하벨은 왕조차 알고 있는 '하벨 티에라'의 모습을 떠올리도록 말을 꺼냈다.
정령사에게 선택받지 못한, 티에라 가문의 무능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왕이 기억해주길 원했다.
"저는 전하께서 칭찬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리고 저보다."
하벨은 의문이 섞인 왕의 시선을 확인하고는 페트리오를 눈동자로 가리켰다.
무너진 가문이 일어남과 동시에 힘을 가지려면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야만 했다.
"여기 있는 페트리오 경을 더 칭송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미 하벨과 말을 나눴지만, 페트리오는 미칠 것만 같았다.
앞으로 누려야 할 칭송도, 환호도 다 하벨의 것인데.
죄책감이 가슴을 찔렀다.
"혹 페트리오 경은 그대의 사람인가?"
왕이 물었다.
"아닙니다, 전하."
하벨의 거절에 왕의 눈매가 좁혀졌다.
"페트리오 경과는 이번에 사귀게 된 친우일 뿐입니다."
페트리오는 그 말에 너무 놀라 눈동자에 숨을 급히 들이마셨고, 하벨은 여전히 태연했다.
왕실은 무조건 페트리오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왕국의 복구를 위해서는 그간 귀족들이 무얼 했는지, 은닉한 재산이 어디에 있는지 등 이를 알아낼 사람이 필요한데, 그 역할에 페트리오만큼 제격인 사람이 어디 있는가.
생각해보면 하벨 티에라의 사람 이외에 처음으로 인연이 닿은 자는 페트리오였다.
페트리오는 티에라 가문에 지은 죄를 갚고, 자신은 그의 복수를 돕고.
이 관계에서 나아가 친우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이번 일에 제 시작이 컸다는 사실은 저 역시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전하. 제가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 뒤에서 구경만 했을 뿐입니다."
하벨은 왕실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관여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어떤 역할을 짊어지는 건 더욱 사양이었다.
"하벨 공."
"예, 전하."
"그대의 공이 크다는 건 내 알고 있네. 바안에게 모두 들었다네. 그대가 아무것도 받지 않는다면 내 죽을 때까지 마음에 짐을 이고 있을지도 모르네. 무엇이든 말해보게."
왕은 하벨의 거절을 안타까워하며 그를 설득했다.
하벨이 왜 밖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가뜩이나 티에라 가문을 노리는 이들은 많았다.
나라가 힘이 없어 저들을 지켜주지 못했기에 다른 나라가 티에라 가문을 눈독 들였다.
놈들은 티에라 가문을 차지하려고 무슨 짓이든 저질렀고, 그 결과 하벨이 저렇게 움츠러들었을 테지.
미안한 마음이 컸다.
룬델에게도, 하벨에게도.
"그럼, 전하. 제가 감히 청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무엇이든 말해보게."
왕은 하벨의 부탁에 금세 얼굴을 활짝 폈다.
"거대 정화 장치를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십시오."
그 권한은 각 영토를 다스리는 귀족들에게 부여된 것이었다.
"허락하겠네."
왕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자 도리어 하벨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쉽게?'
티에라 가문에 걸어놨던 목줄을 풀어준다면 가장 겁이 나는 건 왕실이 아닌가.
이 역시 큰 권한 중 하나일 텐데.
"또 없는가? 아직 그대가 이 나라를 위해 해준 일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라다네."
"아직… 은 없습니다, 전하."
"아, 서두를 것 없네. 이는 바안한테도 말해둘 테니 천천히 생각하게."
왕이 인자하게 굴자 하벨은 룬델과 나눈 대화가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대체 룬델이 어떻게 구워삶았기에 저러는지.
"전하."
페트리오가 입을 열었다.
"무척 송구하나, 저 역시 전하께 드릴 청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외람되오나, 재차 열리는 연회는 다른 나라에 어떤 식으로든 빌미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연회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으니 부디, 왕실의 복구를 위하여 다시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어허……."
왕은 페트리오까지 저렇게 나오자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나라에서 에르티안을 어떻게 보든 말든 왕국을 위한 자들부터 챙기는 게 당연히 먼저라 생각했는데.
"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겠네. 페트리오 경 역시 내게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주게."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전하."
페트리오는 허리를 숙였다.
하벨과 페트리오가 워낙 간곡해 이어 준비한 말 역시 꺼내기 민망할 정도였다.
"내 그대들의 시간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는지 모르겠네."
"아닙니다, 전하."
하벨은 만족했다.
원하던 걸 손쉽게 손에 넣지 않았던가.
"페트리오 경."
왕은 페트리오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 말했다.
이것까지는 거절하지 못할 테지.
"경이 원한다면 지금 감옥에 갇힌 피나토 웬을 보러 가도 괜찮네."
피나토 웬이라는 말에 페트리오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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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갈게."
방에서 나오자마자 하벨이 페트리오를 향해 말했다.
"도련님께서요?"
"그때, 얼굴을 제대로 못 봤거든."
연회장에서 피나토 웬은 바닥에 누워 있었다.
라르웬이 가지고 온 금화 초콜릿이나 먹으며 주변을 구경하기 바빴기에 얼굴을 보지 못했다.
"어딜 간다고?"
라르웬의 목소리에 하벨은 깜짝 놀랐다.
[이 몸은 안 놀랬는데!]
아라는 배시시 웃으며 앞발로 입을 가렸다.
"연회장으로 돌아간 거 아닙니까?"
"널 데려다주고 그러려고 했지. 그런데 기분이 싸하더라고. 왕궁은 넓고, 네가 무슨 짓을 벌이기에 딱 좋잖아?"
라르웬의 시선이 페트리오를 향했다.
"쟤는 널 말리기에 마음이 좀 약하니까."
"그건 오해입니다. 저도 확실할 땐 확실합니다."
페트리오는 부정했지만, 라르웬의 시선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뿌듯한 미소가 피어났다.
"역시 딴 길로 셀 줄 알았어. 앞장서, 같이 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