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82화 (82/415)

82화. 모든 건 제자리로

* * *

"룬델 티에라가 왜…?"

티에라 가문을 지켜야 할 룬델이 대체 왜 여기에 왔단 말인가.

아무도 그가 이곳에 나타날 거라는 걸 알지 못했다.

룬델이 질질 끌고 오는 저자는 또 대체 누구고.

탁.

룬델은 손에 움켜쥐었던 자를 내던졌다.

몇 번이나 구르다 멈췄지만, 피투성이가 된 남자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귀족들의 시선에 의문이 어릴 때쯤, 룬델이 목소리를 냈다.

"이놈은, 이 나라의 대법관을 맡은 피나토 웬이다."

우수수.

묵직한 그 소리에 소름이 장내를 휩쓸었다.

에르티안 왕국의 3대 고위직 중 하나에 있는 대법관 피나토 웬이 티에라 가문 손에 짓밟혔다는 말이 아닌가.

티에라 가문이 강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라니.

"반역을 꾀한 자이자, 비굴하게 울며 네놈들의 죄를 고발한 자이기도 하다."

하벨은 이어지는 룬델의 말을 들으며 피나토를 향해 비웃음을 그렸다.

장렬하게 죽는 게 목표라면, 그걸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가장 추하게.

오래오래 살아야지.

"오늘 이 시간 이후로 이 연회장은 반역을 꾀한 자들을 멸하는 자리가 될 것이니."

룬델이 손을 들며 손가락을 까닥이자 정령 기사들이 순식간에 연회장으로 밀고 들어왔다.

귀족들이 데려온 호위 기사들조차 긴장할 만큼 그 기세가 매서웠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아무리 티에라 가문이라도 이건……."

착.

룬델은 왕명이 담긴 칙서를 꺼냈다.

"이는 모두 전하의 뜻이다."

왕명.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귀족들은 아무도 없었다.

왕실 뒤에 티에라 가문이 있었다니.

그럼, 왕실이 하벨 티에라를 독살했다는 그 소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 하벨 티에라가 바안 왕자에게 욕을 퍼부었다는 그 사실은?

"…헙."

귀족들은 생각을 멈추고 다급히 숨을 참았다.

룬델에게 퍼져나오는 압박에 절로 무릎을 꿇는 귀족들까지 나타날 정도였다.

―티에라 가문은 오늘도 가만히 있을 겁니까? 아니면 손에 움켜쥐었던 칼을 휘둘러보겠습니까?

하벨이 물었다.

아직도 그 덩치를 가지고 가만히 있겠냐며.

상당히 도발적인 말로 들릴 수 있지만, 룬델은 그가 자랑스러웠다.

결국, 하벨은 자신을 움직였다.

아들이 처음 만들어낸 무대에 어떻게 올라가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무대를.

룬델은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오늘 이 자리는 단순한 자리가 아니었다.

반역죄에 엮이지 않은, 혹은 다른 나라와 얽힌 귀족들.

나아가 티에라 가문을 눈독 들이는 왕국들을 향한 경고를 내뱉는 자리였다.

"이 자리를 빌려 확실히 네놈들에게 말하겠다."

룬델은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똑똑히 말을 꺼냈다.

"감히 티에라 가문을 넘보지 마라. 내 아들을… 네놈들의 역겨운 대의를 위해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말거라."

쿠웅.

룬델이 내는 기백이 더 강해지자 하벨까지 오싹하다 느낄 정도였다.

"나는 더는 참지 않겠다. 오늘, 티에라 가문의 분노가 어떤 것인지 느껴보거라."

룬델 주변에 몰려든 정령들마저 같이 분노했다.

티에라 가문의 적은 곧 자신들의 적과 같았으니.

연회장에 내려앉은 싸늘한 침묵.

룬델은 그 침묵을 깨며 소리쳤다.

"반역자들을 전부 죽이거라!"

스겅.

룬델의 명령에 정령 기사들은 일제히 검을 뽑았다.

하벨은 그제야 손에 든 붉은 꽃을 뿌렸다.

떨어지는 꽃잎과 달리 랜턴의 검은 불꽃은 더욱 타올랐다.

모스튼, 자문관, 재무부 장관의 피를 먹고 성장한 듯 검은 불꽃은 처음 이곳 왕실에 발을 디딜 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짙어졌다.

"멍청한 것들."

하벨은 웃었고, 귀족들은 닥쳐오는 상황에 콩벌레처럼 작고 작게 몸을 웅크리며 벌벌 떠는 게 고작이었다.

에르티안 왕국에 가장 높은 관직에 있던 재무부 장관, 자문관, 그리고 대법관까지 모두 떨어졌다.

이제 저들을 이끌 구심점은 아무도 없었다.

'네놈들을 보호할 그늘은 이제 없다.'

타타탁!

누군가 달려와 제일 먼저 귀족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푸욱!

페트리오였다.

증오를 품으며 누구보다 빨리 참형의 시작을 알렸다.

"그, 그만두시오! 세상에 이런 법도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재판을 받겠소! 재판으로 내 죄를 증명하겠단 말이오!"

한 귀족이 소리쳤다.

너무도 억울한 표정.

마치 자신들은 아무 죄가 없다는 그 표정에 페트리오의 검이 다시 움직였다.

쉬익!

입만 놀리던 그 목이 떨어졌다.

"귀담아들으실 필요 없습니다. 저런 헛소리는 말이죠."

"알고 있어. 그래도 정말 웃기네. 재판이라니. 어차피 짜고 치는 판일 텐데."

하벨은 키득거렸다.

"그냥 웃기기만 하면 참 좋을 텐데요."

카샬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자신의 검을 꺼냈다.

오늘 열릴 연회의 주인공인 하벨을 위해 암살을 준비했던 귀족들이 반드시 있을 테지.

"걱정하지 마세요."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검은 달을 의식하여 레디나는 오늘 기사로 위장한 상태였다.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까앙!

카샬이 예상했던 암살자의 기습은 레디나의 검에 너무도 쉽게 막혀버렸다.

콰직!

레디나가 암살자의 가슴팍을 꿰뚫으려던 그때, 놈이 갑자기 거대한 압력에 쪼그라들었다.

레디나는 휘날리는 바람보다 거센 살기에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룬델이 보였다.

'허어…….'

"어느 놈인지 모르겠지만, 미쳤네. 아버지 앞에서 널 건드리다니, 멸문할 각오를 했나 봐?"

라르웬은 혀를 차며 어디선가 가져온 의자를 하벨 앞에 뒀다.

"막내야, 여기 앉아 있어. 뭐 해? 탁자도 가지고 와야지, 카샬."

"그럼 차도 우릴까요?"

카샬이 기가 찬 목소리를 내자 라르웬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여러 무늬가 들어간 상자를 건넸다.

"아니. 차를 우릴 시간은 부족하겠네. 이거나 먹고 있어, 막내야."

"이게 뭡니까?"

"금화 초콜릿."

라르웬은 아라를 의식하며 씩 웃었다.

[그, 금화 초콜릿! 이 몸도, 이 몸도 먹어볼래!]

아라의 눈이 반짝거렸다.

[뱉을 거면 먹지 마. 저번에도 뱉었잖아.]

루룸은 아라의 옆구리를 꾹 찔렀다.

"너도 칼 내려놔."

라르웬은 레디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예?"

"이제 끝났으니까."

솨아아아아.

물이 흘렀다.

연회를 가득 찰 만큼의 물이.

하지만 옷이 젖지 않자 하벨은 진심으로 놀랐다.

적과 아군이 섞인 이곳에서 그걸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룬델이 가진 힘이 엄청나다는 걸 반증했다.

'설마, 정령들이 눈이 되어주는 건가…?'

하벨은 룬델과 그를 둘러싼 정령들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 힘 역시 앞으로 자신이 도달할 힘의 경지일 테니.

"어이쿠. 초콜릿도 못 먹겠다."

라르웬은 탁자를 가져오다 말고 그래도 멈춘 카샬을 보며 키득거렸다.

"막내야. 세간에 '티에라의 분노를 조심해라'라는 말이 있어."

"저는 처음 듣습니다."

하벨은 라르웬이 내민 금화 초콜릿을 집어 아라에게 넘겼다.

[헤헤, 금화 초콜릿!]

아라는 초콜릿을 품에 꼭 안아서는 빙그르르 돌았다.

쫘악.

하벨이 포장지를 벗기자 아라는 그대로 굳어졌다.

꼬리가 힘없이 내려갔다.

[그, 금화가 찢어졌어!]

[아니야, 바보야. 초콜릿이라고.]

루룸은 아라의 머리를 '콩' 때린 후에 하벨에게 다가가 그가 부숴준 초콜릿을 들고 아라에게 내밀었다.

[아, 해.]

[아.]

아라가 초콜릿을 입에 물었던 순간, 하벨이 다급히 일어나 아라의 눈을 가렸다.

콰직!

순식간에 여러 명의 머리가 터져버렸다.

"방금 내 아들을 건드렸던 가문과 암살자가 소속된 곳. 이 둘은 내일 아침 해를 볼 수 없다는 걸 알려주지."

연회장을 휩쓸던 물이 붉어질 때쯤에 룬델은 갑자기 물을 거두었다.

공포에 젖어간, 죽음의 길에 발을 내디뎠던 귀족들을 그대로 얼어붙은 채로 룬델을 바라보았다.

네놈들의 목숨은 이제 내 손아귀에 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질 않아도 그 자리에 있는 귀족들 모두 느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두려움이 깔리기 시작했다.

[오오옵! 이건 맛있어! 이 몸도 먹을 수 있어!]

아라가 행복함에 하벨의 손을 붙잡으며 머리를 비볐다.

"막내야. 이제 그 말이 왜 생겼는지 알겠지?"

라르웬이 키득거렸다.

티에라의 분노를 조심해라.

오로지 룬델 때문에 생긴 말이었다.

귀족들은 그 오만함으로 잠자는 사자를 건드려버렸고.

"보고 있나, 피나토 웬."

룬델은 바닥에 아직도 붙어 있는 피나토를 의식하며 말했다.

"네놈은, 감히 티에라 가문을 조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오만했다. 내가 아닌, 그 누구도 티에라 가문을 뒤흔들 수 없으니."

룬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곳에 서 있는 모두에게 룬델은 자신의 경고를 뼛속까지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티에라 가문을 넘보지 마라.

'…한 번 더 온다.'

하벨은 짙은 물 냄새를 맡았다.

자신의 손바닥을 간질이는 아라의 손길에도 불구하고 떼지 않았다.

푸드득.

룬델의 등 뒤에 아름다운 빛깔을 뿜어내는 푸른 새가 나타났다.

"놀라지 마, 막내야. 세렌이야."

라르웬의 말에 하벨은 까먹으려던 초콜릿을 그대로 쥐었다.

세렌이라면 저 크기가 될 수 없었다.

룬델을 덮고, 연회장 문조차 덮을 만한 크기가 아닌가.

룬델이 처음 이곳에 등장했을 때보다 더 큰 위험이 몰아치며 물 냄새가 코를 긁을 정도로 짙어졌다.

"…저 새는 뭐예요?"

레디나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세렌이… 보인다고?'

하벨이 놀랄 무렵, 세렌의 날개가 움직였다.

푸욱!

단숨에 땅에서 물로 된 창이 수십 개 이상 솟구쳤다.

일반 창보다 더 매섭고, 아름다운 빛깔을 내는 창이.

"끄아아악!"

여기저기 어깨가 뚫린 귀족들이 비명을 내질렀고, 나머지는 가시가 목줄처럼 둘러 있었다.

세렌이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오자 뚝뚝 떨어지는 핏줄기가 비처럼 내려왔고, 피 냄새가 연회장에 가득 번졌다.

이곳은 더 이상 연회장이 아닌, 오로지 룬델을 위한 장소로 바뀌었다.

'…허.'

하벨마저 살짝 얼이 빠질 무렵, 룬델은 뒤를 바라보았다.

덩달아 하벨 역시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안이 걸어오고 있었다.

저 귀족들에게 쫓겨났던 왕정파 귀족들을 이끌고.

지독한 피 냄새에도 바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무서울 만도 한데. 왕의 자질을 가졌다는 건가?'

하벨은 아까 먹지 못한 초콜릿을 까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찰팍.

번져가는 피를 밟으며 바안이 룬델 앞에 섰다.

"룬델 공. 부디 내게 저들을 죽일 기회를 주십시오."

바안은 룬델에게 부탁했다.

이 사건이 끝나면 티에라 가문을 묶은 목줄이 사라짐에도 바안은 왕자로서 룬델을 바라보았다.

"물론입니다, 저하."

룬델은 분노를 삼키며 물러섰다.

이는 왕실을 향한 자신의 축하 선물이었다.

"뽑으십시오."

바안이 명령하자 귀족들은 가져왔던 검을 뽑았다.

스겅.

어설픈 소리가 들려왔다.

"명심하십시오. 그대들의 고마움과 별개로 그대들이 저들보다 이 나라를 더 아끼기에 이곳에 살아 있는 겁니다."

바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한때 왕정파였던 귀족들.

그들 역시 귀족이라는 사실을 머릿속에 계속 되뇌었다.

"이 자리의 주인공은 우리가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는 나도, 그대들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능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자리일 뿐입니다."

바안은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했다.

이 모든 건 티에라 가문과 가면단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하벨이 자신을 미끼로 삼아 귀족들을 알아서 한곳에 올 수 있도록 만들고, 가면단이 뒷세계를 지배해 정보를 차단해주고, 티에라 가문이 자신들의 힘을 이용해서 이런 자리가 탄생됐다.

절대로, 눈을 감을 때까지 잊어서는 안 되는 순간이었다.

"저들은 그대들의 미래 중 하나입니다."

바안은 목에 힘을 주었다.

"그러니 앞으로 나를, 이 에르티안을 배신하지 마십시오."

왕이 될 거라는 당연한 확신 위에 선 외침이기에 바안은 그 어느 때보다 무능함과 부끄러움, 그리고 고마움까지 씹으며 소리쳤다.

"당장 그대들의 미래를 베어내십시오!"

왕족으로서 귀족에게 복종을 받아내고자 했다

"예, 저하!"

데미트가 가장 먼저 나섰다.

이 기회야말로 바안을 위한 순간이 아닌가.

하지만 괴로움에 발버둥 치며,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거렸다.

'…내가.'

데미트는 숨을 몰아쉬며, 요동치는 가슴을 억누르며 자신의 미래를 찔렀다.

'해야 한다!'

"…끄어억!"

터져 나오는 귀족의 비명에 데미트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입술을 깨물어 참아냈다.

바안을 향해 걸어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저하."

데미트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비록 가문도, 성도 잃어버렸지만, 저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데미트 트리에나'라는 이름으로 다시 이 나라를 위해 제 모든 걸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귀족이었던 자존심은 이미 멸망한 제 가문을 등지고 도망쳤을 때 사라졌다.

가장 낮은 자세로 바안에게 허락을 구했다.

"으어어억!"

귀족의 비명이 터지고.

"저 역시 가문과 성, 그리고 이름을 잃어버렸지만, 저하께 제 모든 걸 바치겠다 맹세하겠습니다."

몰락했던 귀족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댔다.

연회장에 비명과 피, 그리고 맹세가 가득 찼다.

하벨은 입 안에 초콜릿을 굴리며 묵묵히 그 과정을 바라보았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네 사람을 가져가야 한다, 바안.'

하벨의 시선은 곧 페트리오를 향했다.

대리석에 물든 피와 꺼져가는 촛불을 바라보며 울분을 품듯 아직 피가 마르지 않은 검을 꽉 쥐고 있었다.

'기다리거라, 페트리오. 너에게도 기회가 있으니.'

하벨은 바안이 데려온 몰락 귀족들이 모두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자 슬쩍 미소를 지었다.

"내 경들의 맹세를 허락하겠습니다."

코끝을 간질이는 피 냄새를 맡으며 바안은 그토록 내뱉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자의든 타의든 처음으로 얻은 자신의 사람들이었다.

"그대들을 믿고, 그대들을 지키며 나아가 이 나라를 지키는 자가 되겠다, 나 또한 맹세하겠습니다."

바안은 그들을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하며 뭉클거리는 감정을 억눌렀다.

아직은 아니었다.

이 감정을 터트리기 전에, 룬델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전에 먼저 하벨과 한 약속을 지켜야 했다.

―한때, 에르티안 왕국을 위협했지만, 이번 일의 공로자임은 분명합니다. 하여 부탁 하나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저하?

"페트리오 비발체 경."

"예, 저하."

페트리오는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랐지만, 손에 쥔 검을 놓고 허리를 숙였다.

"경이 이 왕국에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나 역시 알고 있습니다."

페트리오의 입이 몇 번이고 움직이다 겨우 목소리를 토해냈다.

"…송구합니다, 저하. 제가 저지른 죄는 달게 받겠습니다."

"그대가 만든 저 괴물들을 그대의 손으로 처리하세요. 그게 전하께서 내리신 그대의 벌입니다."

페트리오는 순간, 하벨을 바라보았다.

하벨이 입꼬리를 올리자 페트리오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자신의 복수를 도와준다는 그 약속을 하벨은 지켰다.

갑자기 눈앞에 뿌옇게 물들어갔다.

"소신, 그 벌을… 기꺼이 받겠습니다."

바안은 페트리오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룬델 앞에 섰다.

"고맙습니다, 룬델 공.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저하. 이번 일의 최대 공로자는 제가 아니라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룬델의 시선은 자연스레 하벨을 향했다.

"공의 배려에 감사합니다."

바안은 룬델의 허락을 받고 하벨에게 걸어갔다.

찰팍.

발밑에 피가 튀어도.

시선을 돌리면 죽어간 시체가 보여도.

바안은 잘려나갔던 손과 발에 감각이 돌아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숨을 쉬면 여전히 코를 찌르는 피 냄새마저도 바안은 자유롭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하벨 공."

하벨을 보는 바안의 눈동자가 일렁거렸다.

요동치는 이 감정을 더는 주체할 수 없었다.

드디어, 에르티안 왕국이 돌아왔다.

"왕국을… 구해줘서 고맙습니다."

깊은 감사를 담아 하벨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귀족도 아닌 자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에르티안 역사상 어디에도 없던 일을 벌였지만, 바안은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저 하벨이 해준 그 모든 것에게 감사할 뿐이었다.

라르웬과 카샬, 레디나, 그리고 아라가 그 모습에 방긋 웃었다.

후.

랜턴에 활활 타오르던 검은 불꽃이 이전에도 그랬듯 미련조차 남기지 않고 꺼졌다.

끝났구나.

하벨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축하합니다, 저하."

진심을 담은 하벨의 목소리에 바안은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삼켰다.

"그저 독수리 한 마리가 잠깐 나뭇가지에 발톱이 걸렸을 뿐입니다."

하벨은 바안을 위해 이번에 벌어진 일도, 무능했던 것 역시 그의 잘못이 아니라 말해주었다.

"이제 날아갈 때가 아니겠습니까?"

바안이 고개를 들자 하벨은 눈웃음을 지었다.

독수리는 하늘의 제왕이라 불렸다.

발톱이 결렸든 잠깐 쉬었든 멀리 날아갈 날개가 있지 않은가.

'…좋은 왕이 되거라.'

이미 왕관이 부서진 자신과 다른, 에르티안 왕국을 따스하게 감쌀 수 있는 왕이.

하벨은 작은 바람을 담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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