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76화 (76/415)

76화. 유언장이 공개되다

* * *

"…필요악이라뇨?"

페트리오는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 개소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에이, 도련님. 그런 개,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귀족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역할을 하는 겁니까?"

카샬은 비웃음을 그리려고 하지 않아도 자꾸만 그려지는 자신의 입꼬리를 꽉 잡았다.

[대장, 필요악이 뭐야?]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하벨은 아라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간질이며 대답했다.

"원래 없어야 하지만, 사회와 나라의 질서를 위해 악이 필요할 때가 있어. 사람들의 의식을 한곳에 모으거나 혹은 선한 이미지를 위해 누군가가 악이 될 필요가 있을 때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말이 안 됩니다."

페트리오는 일그러지는 얼굴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필요악이라니.

피나토 웬이?

그럼 자신은.

자신은 대체 뭐가 된단 말인가.

"그자가 지금 대법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을 희생시켰는지 아신다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나는 지금 피나토를 옹호하는 게 아니야, 좀도둑. 그러니까 진정해."

하벨은 분노에 삼켜진 페트리오를 일단 진정시켰다.

"…죄송합니다."

페트리오는 자신의 허벅지를 세게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미안해할 필요 없어. 너한테 있어서 피나토 웬은 네 인생 자체를 흔든 놈인데 화가 나지 않는 게 이상하지."

페트리오 자신의 분노는 정당하다고 인정해주는 것처럼 들려오던 그때, 하벨은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좀도둑. 그건 기억해야지. 네가 에르티안 왕국에서 어떤 존재였는지를."

에르티안 왕국을 좀먹던, '악'이라고 불리는 존재.

하벨의 뒷말이 이어지지 않아도 페트리오는 욱신거리는 통증을 참아내며 고개를 들고 필사적으로 하벨과 시선을 마주했다.

"여기부터는 어디까지나 내 가정이야. 흘려서 들어도 좋아, 좀도둑."

하벨은 아라의 꼬리를 만지며 차분히 목소리를 냈다.

"돈에 눈이 멀었던 그 당시의 너는 왕국을 위해 반드시 없어져야 할 존재였을 거야. 그래서 귀족을 위한다는 핑계로 너를 누른 피나토 웬의 세력은 더 커졌을 테고."

하벨의 손가락이 하벨 티에라를 향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왜 독을 탔는지. 왜 죽이려고 했는지."

"맞습니다. 도련님의 전제가 틀리셨다고 부정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독 사건은 아주 이상합니다."

카샬은 고개를 끄덕였다.

페트리오야 죽일 놈이지만, 하벨 티에라는 왕국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다.

오히려 이름만 알려진 형태가 아닌가.

"티에라 가문을 노린 거야."

"…죄송합니다, 도련님.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놈이 티에라 가문을 노렸다는 게 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페트리오는 하벨의 말을 부정했다.

굳이 왜 분란을 일으켜야 하는가. 오히려 티에라 가문과 손을 잡으면 되지 않겠는가.

"말이 돼. 왜냐하면, 티에라 가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하벨은 실실 웃었다.

"왕국이 무너지든 말든, 귀족들이 설치든 말든 티에라 가문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얼마나 거슬릴까. 힘이 없는 것도 아닌데. 조금만, 아주 조금만, 저 힘을 왕국을 위해 쓴다면 분명 많은 게 달라질 텐데 하면서."

"아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애초에 귀족 가문이 아닌데 왜 왕실과 귀족 문제에 개입해야 하는 겁니까?"

카샬의 언성이 살짝 올라갔다.

힘이 있는 가문은 견제를 받는 건 당연하지만, 귀족의 작위조차 없는 가문에게 그런 의무를 지게 하는 건 개가 집을 지키니 개에게 집과 땅의 소유권이 있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그렇지. 그게 참 우습긴 한데, 티에라 가문이 그렇게 강하다며? 귀족 가문을 쉽게 부술 수 있을 만큼 말이야."

피나토 눈에 티에라 가문이 가진 그 힘이 딱 거슬리고 말았을 테지.

"뭐가 됐든 눈이 돌아버린 피나토가 이렇게 생각했을 거야. 차라리 티에라 가문의 분노를 왕실로 돌려 사건을 파헤치는 와중에 자신과 엮인 귀족들의 행실까지 드러나게 하자고 말이야."

하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목표가 하벨 티에라였던 거지. 결과적으로 놈의 활약 덕에 내가 움직일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럼 놈은, 그리고 죽을 생각이었습니까? 뭐가 됐든 멋대로 짓밟아놓고, 부서트려놓고 그렇게 숭고한 척 죽으려고 한 겁니까?"

페트리오의 목소리에는 그저 증오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했다.

이 사실은 누가 와서 말하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놈의 이상향을 위해 희생됐다는 사실을 마냥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맞아. 망상에 시달린 줄도 모르고 자신을 포장하려는 거지."

누굴 희생하든지 간에.

"그런데 어쩌나. 나는 그게 딱 싫은데. 아름답게 죽는 게 놈이 원하는 거라면 그러지 못하도록 해야지."

추한 본인의 꼴과 제대로 마주해 그 망상을 깨트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대장 지금 엄청 나쁜 행동을 생각하는 것 같아.]

아라가 하벨의 얼굴을 찔렀다.

"내가?"

하벨은 키득거리며 아라의 옆구리를 찔렀다.

꺄르르.

금세 터져 나온 아라의 웃음에 하벨도 방긋거렸다.

* * *

[…어, 저기, 음, 안녕.]

아라가 몸을 배배 꼬며 정령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말을 거는 건 매번 쑥스러웠다.

[안녕!]

하지만 정령들은 아라를 보며 활짝 웃었다.

왜인지 청량한 감각이 밀려와 기분을 좋게 만드는 정령이었다.

[그런데 넌 왜 이렇게 조그마해?]

정령 중 하나가 조그마한 아라를 보며 물었다.

악의가 없다는 걸 알지만, 아라는 입을 꽉 다물며 밀려오는 슬픔에 눈동자가 글썽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작은 몸에 아라는 요새 걱정이 늘어났다.

어쩌면 저번 술래잡기 때부터였을지도 몰랐다.

[이 몸은 아직 자라고 있어. 자라고 있다구…!]

[자란다고?]

정령이 그 말에 의문을 가졌다.

[우리는 다 자라서 태어나는데?]

다르다는 말로 선을 긋는 듯한 상황에 아라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루룸도, 세렌도 다 자라서 태어났는데. 왜 이 몸만 이러는 거지?'

다름에 대한 의문.

아라는 미뤄왔던 그 의문을 정령들을 만나면서 천천히 느껴갔다.

―아라야. 다르다는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아. 다르다는 사실에 위축되는 네가 걱정될 뿐이야.

아라는 귀를 쫑긋 세웠다.

'…이 몸은 지금 위축된 건가?'

하벨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등을 토닥거려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오히려 더 좋다고 생각하는데? 모든 걸 다 아는 게 뭐가 재미있어? 그건 정말 절망스러워. 내가 그래 봐서 알아. 오히려 모르는 걸 하나씩 알아가니까 즐겁지 않아, 아라야?

응응.

아라는 그때마다 즐거웠다.

[이 몸은… 엄엄, 배우는 중이야. 배움에는 끝이 없다고 했어. 그러니까, 이 몸도, 너희도 아직 덜 자랐어!]

아라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꺄르르.

정령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비웃음이 아닌, 귀여운 걸 보았을 때 나오는 웃음과 같았다.

[미안해. 널 시무룩하게 하려던 게 아니었어.]

정령이 아라를 쓰다듬자 아라는 귀를 쫑긋 세웠다.

[이 몸은 아라야.]

[그래, 아라야. 우릴 왜 찾아왔어? 혹시 같이 놀려고?]

[아니. 이 몸은 지금 아주, 아주 중요한 임무 중이야!]

[임무? 혹시 정령사들이랑 같이 지내니?]

정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시선이 살짝 날카로워졌다.

[응응. 이 몸은 아주 대단하고, 사랑스럽고, 너무너무 좋은 대장이랑 같이 지내고 있어!]

한 번 흔들린 아라의 꼬리가 멈추질 않았다.

[다행이다. 혹시나 인간들이 너를 억압하면 어쩌나 걱정했어. 너는 아직 자라는 중이니까.]

정령은 그제야 환하게 웃었다.

[이 몸도 나쁜 인간들을 많이 봤어.]

아라가 으쓱거리며 말했다.

[그래. 너에게 다정한 인간들을 경계하렴. 인간들은 이유 없이 너에게 다정하지 않아. 우리는 인간에게 주어진 '망각'이 없어. 영원히 기억하게 될 텐데, 얼마나 슬플까.]

[우리 대장은 달라. 이 몸한테 매일 '행복해라', '예쁘다', '착하다' 하고 말해줘.]

[좋은 정령사와 만났네. 그럼, 너도 똑같이 아껴줘. 인간의 삶은 우리와 달리 짧으니까.]

[짧아……?]

아라가 충격을 받은 표정을 하자 정령들은 얼른 달려와 수많은 손으로 아라를 토닥였다.

같이 슬픔이 몰려오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라야! 어, 네가 인간한테 받은 임무가 뭘까? 갑자기 엄청 궁금하네.]

정령은 아라가 눈물을 흘리기 전에 서둘러 말을 돌렸다.

[…아!]

아라가 코를 먹으며 소리쳤다.

하마터면 하벨이 준 아주아주 중요한 임무를 잊어버릴 뻔했다.

[피나토 웬이 왔어?]

[피나토 웬?]

[혹시 들어봤어? 이 몸은 피나토 웬이 왔는지 아닌지 알아야 해.]

아라의 간절한 말에 정령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물었다.

[들어봤어?]

[나는 못 들어봤어.]

[나도.]

서로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릴 때 정령 중 하나가 손을 번쩍 흔들었다.

[나나!]

[어! 들어봤어?]

아라가 꼬리를 흔들며 물었다.

[응, 들어봤어. 저기 마차에서 누가 내리더라고. 아, 나는 인간들이 마차에서 내리는 그 행동이 너무 좋아서 지켜보곤 하거든.]

[맞아. 그건 엄청 재미있어. 꼭 작은 집에서 나오는 것 같잖아.]

정령들은 서로 공감하며 키득거렸다.

[그래서? 그래서?]

아라가 눈을 반짝였다.

[마차에 내려서 저쪽 건물에 들어가던데?]

[저쪽이면 어디야? 이 몸한테 알려줘!]

아라는 곧 임무를 완성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기에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좋아, 따라와.]

정령은 해맑게 웃으며 앞장섰다.

* * *

[…대장! 대장!]

아라가 창문을 두드렸다.

하벨은 아라를 보며 활짝 웃었다.

"잠깐 창문 좀 열어도 됩니까?"

눈앞에 차를 홀짝이던 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얼마든지 됩니다."

하벨은 카샬이 움직이는 걸 보며 차분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실례했습니다. 자, 그럼 계속 말을 해볼까요?"

그녀는 자신을 새로운 세력을 이끄는 수장이라고 소개했다.

이름은 데미트.

만나는 즉시 랜턴이 반응할 줄 알았지만, 잠잠했다.

고장이라도 난 걸까.

'있으면 되게 편했는데.'

하벨은 팔을 간질이는 척하며 랜턴을 건드렸다.

[대장! 피나토 웬이 여기에 왔대! 반대쪽 건물로 들어갔다는데, 그때, '데미트'라고 하는 여자를 만났다고 했어. 피나토 웬이 그때, 뭔가를… 어음, '잘해라'라는 식으로 말을 했대!]

아라는 피나토 웬이 데미트와 한 편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들고 왔다.

'잘했어, 아라야.'

하벨은 속으로 아라를 칭찬하며 모든 게 하나씩 맞춰지고 있는 사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네놈이 나를 이용하기 위해서 데미트로 흔들려고 했겠지만, 이용되는 건 너다, 피나토.'

자신이 가진 비장의 수를 떠올리며 하벨은 숨을 천천히 골랐다.

[어? 왜 세 명이야?]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샬, 페트리오, …어엄, 라르웬은 아닌데? 레디나랑도 다른데?]

하벨은 저 물음에 지금 당장 대답할 수 없어 안타까웠다.

계속 이어지는 아라의 숫자놀이를 들으며 하벨은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내게 어느 쪽이냐고 물었습니까?"

데미트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번 자리에는 그 사실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이렇게 기다렸습니다."

"그럼 먼저 묻죠. 누구십니까?"

아라 덕에 애매함이 사라지자 하벨은 그대로 밀어붙일 수 있었다.

"저는 조금 전 분명히 현 귀족들에게 짓눌린 자들을 이끌고 규합……."

"아뇨. 당신도 귀족입니까?"

하벨의 질문에 날이 섰다.

"지금 자리를 차지한 귀족들에게 짓눌린, 왕정파 귀족이었는지를 묻는 겁니다."

조금 전부터 데미트의 행동이 눈에 밟혔다.

차를 마시는 법, 앉는 법, 비록 후드를 깊게 썼지만, 말하는 것까지 기품이 느껴졌다.

데미트가 쥔 찻잔이 잠깐 흔들렸지만, 그녀는 차분하게 놓았다.

생각하듯 숨소리가 길어졌고, 그녀의 입에서 묵직한 말이 나왔다.

"맞습니다. 저는 왕정파 귀족이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자 하는 시선이 보였다.

수장이 왕정파 귀족이었다면 그녀가 속한 세력의 색깔은 저항이며 왕정파 귀족들의 모임이라는 소리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피나토가 저들을 이용한 건가. 아니지, 결과적으로 놈이 한 일은 왕실에게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하벨은 피나토가 저지른 일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 그가 지금 자신에게 안겨준 선물을 보며 흡족했다.

―…제가 구한 세력입니다. 공에게 무능하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건지 모르겠습니다. 답답함으로 하루하루가 저물어갑니다.

왕자 바안과 규칙적이지는 못해도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전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널널해진 귀족들의 감시에 연락은 물론, 바안이 밖으로 나가 세력을 구축하는 데까지 가능해진 셈이었다.

하지만 바안은 곧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그가 구하려던 세력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사라진 그 세력을 피나토가 쥐고 있을 줄이야.

"그럼 한 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하벨은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카샬, 페트리오 이외에 자신의 뒤에 서 있던 한 사람을 소개했다.

그가 성큼 걸어 나오며 가면을 벗었다.

"……."

데미트의 눈이 커지며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바안 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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