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75화 (75/415)

75화. 통합(3)

* * *

[대장!]

아라는 정령수를 주다 말고 하벨을 다급히 불렀다.

하벨이 잠깐 멈칫하자 아라는 목소리에 힘을 줬다.

[이 몸은 앞으로 대장이 위험하다 싶으면 정령수를 안 줄 거야.]

아라는 자신의 기준을 하나 정하고자 했다.

처음에는 저 인간이 죽지 않았으면 했고, 나중에는 다치지 않았으면 했기에 정령수를 넣어주었다.

정령수는 정령사가 자연의 힘을 사용할 수 있게 정령이 걸러주는 힘을 말했다.

정령수를 넣는 과정에서 그 대상자의 당시 감정과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기에 처음에는 엄청 두려웠다.

혹시나 자신을 이용하거나, 싫어하면 어떻게 해야 하고.

하지만 하벨은 언제나 행복해했다.

그건 하벨이 자신의 정령수 때문에 물의 저주가 연쇄작용처럼 일어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몸은 그럴 자격이 있어. 정령사인 대장과 정령인 이 몸은 서로 화합해야 하니까! 그렇지?]

아라는 웃는지, 화를 내는지 모를 가면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좋은 생각이야, 아라야. 아주 잘했어."

하벨은 아라만 들을 수 있게 작게 목소리를 냈다.

자신만의 기준을 정한다는 건 좋은 출발점이었다.

하벨은 한껏 부풀어 오른 감정이 식기 전에 가면단에게 명령했다.

"다들 내 지시가 떨어지기 전까지 움직이지 마."

뒤를 생각할 정도로 지금 자신은 여유롭지 못했다.

하벨은 앞으로 걸어갔고, 페트리오가 뒤쫓다 멈췄다.

오직 카샬만이 하벨의 뒤를 따랐다.

하벨은 씨앗 여러 개를 만들어 양손을 앞으로 뻗어 하나씩 떨어트렸다.

식물은 물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정령수로 만들어진 물이 아닌, 용왕의 힘으로 만들어 낸 물을 사용하고자 했다.

[우와아! 물이다!]

아라는 참을 수 없는 유혹에 금방 달려가다 말고 입을 꽉 다물며 꼬리를 힘껏 끌어안았다.

저건 먹어서는 안 되는 물이었다.

괜히 입맛만 다셨다.

하벨은 독의 힘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자비는.'

치이익.

흙마저 녹아버릴 정도의 검은 극독이 씨앗 위에 뿌려졌다.

'필요 없다.'

하벨은 마지막으로 만들었던 물을 뿌렸다.

'자라나라, 되도록 길게.'

마치 명령이 떨어지기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색을 띤 여러 개의 줄기가 앞으로 길고 빠르게 자라났다.

투투투투!

줄기들이 서로 뒤엉키어 하나의 굵고 튼튼한 다리처럼 보일 정도였다.

정령수로 만들어낸 식물의 등장에 나무들이 옆으로 몸을 뉘었다.

모두가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숲이 열렸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그 뒤에 있었다.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적들이 빤히 보이기 시작했다.

놈들조차 황당한지 몸이 굳어 있었다.

"적이다!"

가면단 중 누군가 흥분하며 소리쳤지만, 페트리오는 그들을 진정시키며 차분히 하벨을 바라보았다.

아직 지시가 떨어지질 않았다.

뭐가 더 남은 게 분명했다.

―곧 숲이 열릴 거야. 화살을 준비해.

자신이 보기에 아직 숲이 완전히 열리지 않았으니까.

하.

하벨은 코에서 흐르는 피를 느끼며 숨을 짧게 골랐다.

용왕의 힘으로 만들어낸 물 덕인지 몰라도 앞으로 자라난 식물은 누구라도 대항할 마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웅장했다.

하벨은 아직도 성장하는 식물을 그대로 양쪽으로 벌려놓았다.

'숲을 열어!'

명령이 떨어지자 벌려진 식물이 양쪽으로 움직였다. 흡사 수십 마리의 들소가 몰려오는 듯한 모습에 적들은 부리나케 달렸다.

쿠쿠쿠쿠쿠!

깔리면 그대로 즉사였다.

"마, 마법을 발동시켜! 어서!"

"적들이 마법을 발동하려고 합니다."

카샬은 적들이 내지르는 입 모양을 읽자마자 하벨에게 알려주었고, 하벨은 미리 봤던 마법진의 위치를 떠올리며 식물을 계속 움직였다.

'…으으.'

한 번에 정령수가 빠져나간 만큼 차오르는 불순물에 하벨은 신음을 꽉 삼켰다.

속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만 같았다.

벌써 입가에 피 맛이 맴돌았다.

[대, 대장!]

아라가 정령수를 넣다 말고 기겁했다.

저렇게 한꺼번에 불순물이 밀려들면 안 되는데.

얼마나 아플까.

금방이라도 불순물이 세 번째 막을 부술 것처럼 보여 무서웠다.

"괜찮아, 아라야. 버틸 수 있어."

하벨은 아라를 다독였다.

숲이 열렸다.

이제 한 걸음만 다가가면 적들에게 절망을 선사할 수 있었으니까.

'솟구쳐라!'

도르르 구르던 식물에서 동시에 가지가 뻗어 나갔다.

자신이 노린 건 처음부터 마법진이었다.

적이 이 작은 전쟁에 승기를 잡기 위해 준비했던 비장의 수부터 부서트려놔야 했으니.

파지직!

일제히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깨졌다……!'

마법진이 깨졌다는 걸 알아챈 적들의 움직임이 느려졌고, 하벨은 그제야 소리쳤다.

"쏴!"

다시금 입에서 피 맛이 일렁거렸다.

현기증이 밀려왔지만, 하벨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지금은 흔들릴 때가 아니었다.

"준비!"

페트리오가 하벨의 명령을 받으며 가면단에게 신호를 보냈다.

적이 방심할 수 있게 겉으로 드러난 가면단의 세력들 말고 숨어 있던 자들까지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띠잉!

그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와 이상하게 가슴이 뛰었다.

쿵쿵.

귀족이자, 뒷세계 사람으로서 살면서 하나 느낀 게 있다면 절대로 눈에 띄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걸 어기고 귀족들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어 그들에게 짓밟힌 뒤에야 뼈에 사무치도록 후회하고, 또 후회하지 않았던가.

페트리오는 하벨을 쳐다보았다.

자유로운 바람이 되고 싶은 분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자신은 하벨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도련님께서 짊어질 수 없다면 제가, …제가 대신 짊어지겠습니다.'

페트리오는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병사들처럼 일사불란하지 않았지만, 절대로 질 것 같지 않았다.

"쏴라!"

페트리오는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듯 크게 목소리를 터트렸다.

또 후회해도 상관없었다. 이제 그림자 속에 숨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진짜 그림자는 레디나가 맡았으니.

가면단의 활시위에서 손이 떨어지자 화살이 하늘을 향해 쏘아 올랐다.

피슈욱!

떼를 지으며 다가온 화살의 매서움에 적들이 도망쳤지만, 소용없었다.

푹!

촘촘한 화살 더미가 단숨에 적들의 숨통을 끊어냈으니.

설령 화살을 피해 도망쳤어도 가시를 세운 식물과 마주했다.

독을 품은 식물을.

하벨은 살고자 '항복'을 입에 올리며 자신 쪽으로 튀어나오는 이들을 향해 명령했다.

"죽여라!"

어설픈 자비는 결국 물에 탄 독과 같았다.

이미 몸소 경험하지 않았던가.

자신들에게 저항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저들은 이미 독이었다.

"…커헉."

카샬이 하벨의 명령을 이해하고 제일 먼저 움직였다.

적의 목이 날아갔다.

피가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자 적들도, 가면단도 그 뜻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자비는 없다.

그 누구에게도.

말로 전하지 않아도 확실한 메시지에 가면단이 검을 뽑는 소리가 하나의 음악처럼 퍼져갔다.

스겅!

"죽여라!"

"적을 죽여라!"

오늘 적을 죽이지 않으면 죽는 건 자신들이라는 압박감이 그들의 다리를 멋대로 움직이게 했다.

적을 죽이며 가면단은 머릿속에 사실 하나를 집어넣었다.

자신들의 우두머리인 저 남자는 그게 누구든 배신자에게 베풀 자비 따위는 주지 않는다는 걸.

검을 휘두르는 소리도.

적들의 비명도 차츰차츰 가라앉자 하벨은 정령수로 키운 식물을 거둬들였다.

머리를 숙인 나무가 다시 솟구쳤고, 그 시선이 거꾸로 이어져 결국, 하벨에게 몰렸다.

홀로 숲을 열었으며 자비조차 보이지 않는 냉혹함과 적의 피마저 빨아들일 것 같은 검은 복장에 가면단은 숨을 내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하벨의 머리 위에 보이질 않을 왕관 하나가 보였고, 모든 밤마저 삼킬 존재처럼 느껴졌다.

"우리의 승리다."

하벨은 긴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 이상을 꺼낼 필요조차 없었다.

아직 놈들이 사용하던 곳을 정리해야 하지만, 마법이 깨지고 마법사들이 죽었다.

대체 여기에서 뭐가 더 남아 있을까.

'늘 일어난 뒷세계 세력 다툼이라 생각할 귀족들이 움직일 리가 없고.'

하벨은 단언했다.

이는 오만함이 아닌, 사실을 바라보고 현재를 보고 도출해낸 결론이었다.

"우와아아아!"

잠시 뒤, 함성이 들려왔다.

그제야 하벨의 존재감에 가려졌던 승리가 귀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승리의 끝이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기에 가면단은 소리를 내지를 수밖에 없었다.

이 며칠 사이에 벌어진 일들은 가히 기적이었다.

정말로 자신을 '달님'이라 부르는 저 남자가 뒷세계를 통합해버렸다.

"달님!"

누군가 그 이름을 언급했고, 거친 함성은 곧바로 이름으로 뒤바뀌었다.

'…그래. 지금 많이 좋아하거라. 어차피 이것도 이제 끝이니까.'

하벨은 자신을 언급하는 저들의 목소리와 눈빛이 너무도 부담스러웠지만, 참았다.

저들의 행동과 모든 것들을 짊어질 자는 자신이 아니었고, 귀족들마저 사라진다면 자연스럽게 저들 역시 존재를 잃어버릴지도 몰랐다.

어쩌면 뒷세계보다 더 깊은 음지로 숨어버릴지도.

아니면 이렇게 모은 가면단을 고스란히 페트리오에게 넘겨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저들의 세력이 커진다고 한들, 절대로 티에라 가문을 넘어설 수가 없었으니.

"좀……."

하벨은 페트리오를 부르려다 멈췄다.

페트리오가 너무도 기뻐하지 않는가.

이렇게 환한 웃음은 처음이라 참 낯설었다.

"축하드립니다."

자랑스러움이 가득한 페트리오의 말에 하벨은 중얼거리며 카샬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뭘 축하까지야."

"일단, 저도 축하드립니다."

카샬까지 승리를 축하하자 하벨은 어쩔 수 없이 페트리오를 다시 바라보았다.

지금 이 분위기에 취할 순간도 아니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이는 자신의 승리가 아닌, 세력의 승리였으니.

"좀도둑."

"예. 말씀하십시오."

페트리오는 하벨에게 다가오다 잠깐 걸음을 멈췄다.

익숙한 피 냄새를 맡자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에본한테 뒷정리를 시키고, 날 기다리는 놈에게 가자고."

"…괜찮으십니까?"

"조금?"

하벨은 사실 그대로 털어놓았다.

굳이 보지 않아도 정화 장치가 날뛰는 게 느껴졌다.

여기서 한 번, 어쩌면 두 번까지는 가능하겠다 싶었다.

"조금이요?"

카샬은 비웃음을 터트렸다.

"아, 실수했습니다. 요새 왜 이렇게 도련님께서 말씀하시는 단어들이 재미가 있는지."

"일단 가자."

"…예. 일단, 앞장서겠습니다."

페트리오는 찝찝함을 느끼며 하벨의 명령에 앞으로 걸었다.

[…조금이 아니잖아. 대장은 거짓말쟁이야.]

곰곰이 생각하던 아라가 입을 삐죽 내밀자 하벨은 그대로 멈춰 섰다.

"아니야, 아라야."

[아니. 대장은 거짓말쟁이야. 이 몸한테 거짓말하지 말라고 해놓구.]

"아, 아니야. 정말로 조금 괜찮아. 봐봐, 걸어 다니잖아?"

"다리가 부러지거나 배가 뚫리지 않으면 그건 웬만하면 다 가능하죠."

카샬이 빈정거리자 하벨은 바로 그를 쳐다보았다.

가면을 뚫고 올 정도로 그의 눈빛이 매서웠다.

"설령 다리가 부러지거나 배가 뚫려도 기절하기 전까지 입은 움직입니다. 일단, 마차로 가시죠."

페트리오까지 빈정거리며 숲속에 세워진 마차로 그들을 안내했다.

"…후."

마차가 출발한 뒤, 하벨이 가면에 손을 대자 카샬과 페트리오, 아라의 시선이 쏠렸다.

그 시선이 몹시 부담스러웠지만, 하벨은 제 잘못을 조금은 알기에 가면을 벗었다.

[…으음.]

예상대로 입가가 피범벅이 되어 있자 아라의 눈 사이가 좁아졌고, 귀가 축 처졌다.

[대장은 바보야.]

이제는 하벨이 아픈 이유가 순환의 길, 세 번째 막 아래까지 차 있는 저 불순물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정령수에 녹지만, 다시 차오르는 이상한 불순물.

"괜찮아, 아라야."

하벨은 세 번째 막까지 차오른 불순물을 느꼈지만, 그 이상 차오르지 않았고, 물의 저주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끝나 다행이다 싶었다.

입가를 닦던 하벨은 다른 손으로 시무룩한 아라를 쓰다듬어주며 입을 열었다.

"혹시 가면서 내가 알아야 할 것들이 있어, 좀도둑?"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주사부터 맞고 시작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페트리오는 미리 주사를 꺼내는 카샬의 모습에 차례를 양보했다.

"주사랑 별개니까, 말해줘."

하지만 페트리오는 하벨이 주사를 맞고 난 뒤에야 말을 꺼냈다.

"피나토 웬이 움직였습니다."

"피나토 웬이 갑자기 왜 나오는 거야?"

하벨은 의문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피나토 웬이 저지른 일 중 가장 큰 사건은 독 사건이었다.

자신이 왕실로 올 수 있게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고.

짜증 나지만, 놈은 이번 사건과 마치 별개의 일인 것처럼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저는 도련님 덕에 힘을 얻은 순간부터 계속 피나토 웬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시키지도 않은 행동을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복수심에 불탔어?"

"맞습니다. 놈이라면 결코,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계속 말해줘."

하벨은 웃었다.

"새로운 세력이 두 번째로 찾아왔을 때, 피나토 웬이 똑같은 날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우연일 수 있잖아."

"맞습니다. 우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움직였던 장소가 비슷한 건 우연이 아니잖습니까."

페트리오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좀도둑. 만약 이게 맞다면 너는 지금 새로운 세력이 피나토 웬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거잖아?"

하벨의 말에 페트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네 이야기와 내 이야기가 말이 안 되는데?"

페트리오를 나락으로 끌어내리는 데 주 역할을 한 자는 피나토였으며 자신에게 독을 먹인 자 역시 피나토였다.

그런 피나토가 저항세력과 연결이 되어 있다니.

하벨은 그 사실을 이미 인정하고, 혼란스러움을 드러내는 페트리오를 보며 자연스럽게 결론을 하나 냈다.

비웃음을 드러내면서.

"아, 알겠다."

"알겠다뇨?"

카샬이 물었다.

"그 자식, 망상 병이 세게 왔네. 지금 자신이 왕실을 위한 필요악이라 생각하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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