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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74화 (74/415)

74화. 통합(2)

* * *

'……?'

자문관은 혹여 자신이 잘못 읽었나 싶어 첫 줄을 다시 읽었다.

하지만 몇 번을 읽어도 적힌 건 똑같았다.

'재무부 장관, 그놈이 나 몰래 돈을 숨겼다고?'

그럴 리가.

자문관은 어처구니없는 소리라 판단하며 읽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의 짙은 눈썹이 몇 번이고 움직이며 참을 수 없는 유혹에 꿈틀거렸다.

과연 재무부 장관을 신뢰할 수 있는가.

그 문제의 대답은 쉽게 나왔다.

'아니. 그놈을 어떻게 신뢰하겠어?'

다 쓰러져가는 왕 옆에 붙어 있어봤자 나올 건 한계가 있었다.

나라의 살림을 쥐고 있는 재무부 장관이야말로 진짜 권력의 핵심이기에 가까이할 뿐이지.

'저 자리가 내 자리가 되어야 하는데.'

자문관은 손톱을 물어뜯다 시선을 내렸다.

이런 허무맹랑한 말도 머리를 식힐 겸 읽어봐도 되는 게 아닌가.

―아마 모르셨겠죠. 하지만 저는 이 사실을 그냥 볼 수 없었습니다. 자문관께서 이 나라를 위해 얼마나 헌신하셨습니까? 재무부 장관의 힘이 강해진 건 순전히 저들이 전하의 힘을 몰아냈기 때문이 아닙니까?

자문관은 아무리 저 말을 부정하려고 해도 자신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것처럼 살살 긁어주는 말에 자꾸만 눈동자를 움직였다.

―제가 자문관님을 위해 그 위치를 알아냈습니다.

편지에는 정말로 지도가 동봉되어 있었다.

'…생각보다 가까운 위치인데?'

자문관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방 안에 짙은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딸랑딸랑.

자문관은 옆에 놓인 종을 흔들었다.

"예, 가주님."

당장 집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 편지, 누가 가져다줬나?"

"…편지라뇨? 오늘 올 편지는 이미 아침에 가주님께 드렸습니다."

"네가 준 게 아니라고?"

자문관은 천천히 눈동자를 굴렸다.

'대체 누가 이걸 넘긴 걸까.'

똑딱똑딱.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도 들려왔다.

자문관의 침묵에도 집사는 초조함을 숨기며 기다렸고, 자문관이 넘긴 종이를 받았을 때, 굳었던 표정이 풀렸다.

"여기에 뭐가 있는지 조사해보게. 은밀히 말일세."

"알겠습니다, 가주님."

집사는 허리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갔다.

닫힌 문을 바라보며 자문관은 손가락을 깍지 껴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아무것도 없어야 해. 아무것도.'

* * *

"…그래. 이제 발견을 했구나? 얼마나 충격적일까."

하벨은 페트리오의 부하가 넘긴 정보에 코웃음을 쳤다.

설마하니 재무부 장관이 같이 손을 잡은 자문관 몰래 돈을 빼돌려 은닉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방금 자문관이 그 사실을 알았다는, 놈의 집사를 통한 소식을 들었기에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자문관은 재무부 장관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생각한 것보다 아주 많이요.

모스튼이 떨리는 목소리로 꺼냈던 말을 기억했다.

"돈 문제는 누구에게나 예민한 상황이죠. 재무부 장관과 자문관 사이에 돈 문제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순간 이제 갈라져 원수가 되는 건 뻔한 일이겠습니다."

카샬은 사과를 깎으며 말했다.

아사삭.

침대에 얌전히 앉아 사과를 먹던 하벨은 카샬을 올려다보았다.

"나가도 되냐고 물으신다면 안 된다고 말씀드릴 겁니다. 아직 열이 떨어지지 않으셨습니다."

비가 온 뒤에 밖을 나간 일이 무리가 된 건지, 하벨의 열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화 장치의 거품도 가라앉지 않았고.

그나마 식욕이라도 떨어지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다.

"그게 아니라 모스튼 벨이 넘긴다는 서류가 자문관한테 도착했는지 물으려고 그랬지. 갈등에 불이 붙었으니 기름을 던져야 하잖아?"

재무부 장관이 자문관 몰래 숨겼던 그 돈이 분명히 갈등을 일으킬 테고, 그 뒤를 이어 자문관의 마음을 더 흔들 게 필요했다.

"그렇지 않아도 좀도둑한테 곧 서류가 도착할 거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카샬의 대답을 들으며 하벨은 사과를 한입 베어 먹었다.

모스튼 벨의 감시는 당분간 레디나에게 맡겼다.

그녀만큼 이번 일에 적합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카샬."

"예, 도련님."

"맨날 '곧'이라고 하는데, 대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거야?"

"보통 2~3시간을 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이 움직이다 보니 정확한 시간을 가늠할 순 없죠."

"…흠."

하벨은 잠깐 아쉬움에 숨을 짧게 내뱉었다.

용왕이었을 때는 물을 통해 자신의 말을 퍼트리거나 누군가의 말을 듣거나 하면서 연락이라는 것 자체에 지장을 받은 적은 없었다.

"뭔가 불편하시거나, 아프십니까?"

카샬은 하벨의 미간 사이가 좁혀지자 말을 꺼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정보 전달을 위해 뭔가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아무에게도 의심받지 않을, 정보 전달 방법이.

슬그머니 크라마가 머릿속에서 떠오르긴 했다.

"아무래도 연락용 아이템 자체가 비싸고, 둘째 도련님께서 주신다는 물건 역시 쉽게 보급되기도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빠른 겁니다, 도련님."

과거 뒷세계에서 살았기에 그런 건지 몰라도 페트리오가 구한 자들은 정말 쓸만했다.

카샬은 이를 인정하기 싫었지만, 하벨을 위해 꺼내야 할 말이었다.

"어쨌든, 카샬. 그 정보가 오면 말이야……."

[아이참, 대장. 그만 좀 말해. 어서 사과부터 먹어.]

옆에서 하벨을 보던 아라가 속이 답답한지 사과를 잡았다.

['아' 해. 먹어야 나아. 헤레스가 그랬다구.]

똑똑.

"…불청객이 찾아왔네요."

카샬은 문으로 향했다.

레디나는 임무를 위해 모스튼 벨 근처에 붙어 있었고, 라르웬은 이상 신호가 있어서 클로저로서 잠깐 밖에 나갔기에 남은 건 페트리오뿐이었다.

"왜?"

카샬이 문을 열며 아니꼽게 바라보자 페트리오는 이를 가볍게 무시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좀도둑 네가 직접 왔다는 건 큰일이 생겼다는 건데."

하벨은 페트리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예, 도련님. 도중에 알려드릴 일이 생겨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기쁜 소식이었으면 하는데, 네 표정을 보니 좀 골치 아픈 일이 생겼나 봐?"

페트리오의 시선이 살짝 굳어진 게 보였다.

"저번에 도련님께 알려드렸던 새로운 세력 말입니다."

"그래. 기억하고 있어."

수도에 있는 뒷세계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세력이 자신들에게 접근한 적이 있었다.

일단 귀족들에게 억눌렸던 세력으로 추정됐지만, 자신들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기에 경계하던 참이었다.

[레디나가 혁명의 바람이 불어온다고 해서 이 몸도 기억하고 있지. 혁명의 바람이라니. 뭔가 멋진 말 같아.]

아라는 흥미롭게 다음 상황을 관찰하려다 손에서 나는 사과 냄새에 코를 벌름거렸다.

"그들이 다시 접근해 만남을 요청했습니다."

"언제?"

"지금입니다. 오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합니다."

"지금이라고? 아니, 그놈들은 약속이라는 개념을 몰라? 날짜와 시간을 제대로 잡아야 할 거 아니야."

카샬이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저도 이번만큼은 카샬의 말에 동의합니다. 약속도 잡지 않은 무례함이 눈에 걸립니다."

페트리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필 카샬의 말을 동감하다니.

"괜찮아. 그러면 느긋하게 기다리라고 전해. 나도 느긋하게 행동할 테니까."

상대방이 얼마나 저자세로 나오는지 하벨은 궁금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절박함이 제대로 보일 테니까.

"그건 그렇고 뒷세계는 어떻게 됐어?"

하벨은 페트리오에게 넘길 쪽지를 작성하며 물었다.

모스튼 벨을 낚으려 땅을 산 일과 갑자기 내린 비로 하루 이상을 날려 먹었지만, 뒷세계는 그것과 별개로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가면단이라는 이름으로 점차 거대해졌으며 보고를 들을 때마다 하벨은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졌다.

배신자들도 물론 나왔지만, 라르웬이 미리 부탁한 정령들과 배신자를 처리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사실에 수장들이 발버둥 친 결과 조용했다.

조용히 뒷세계는 가면단 손에 떨어지고 있었다.

"항복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남은 세력들이 저항하고 있어 아마 이 소식이 해당 영토를 소유하고 있는 귀족들에게 닿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 정도면 많이 버틴 거지."

오늘로 4일째.

이제 여유 시간은 하루밖에 남지 않았다.

"어쨌든, 그 세력들만 누르면 끝이겠네?"

"물론입니다."

"그럼 이제 사건들을 하나씩 마무리할 시간이라는 뜻이겠지."

뒷세계 통합.

재무부 장관과 자문관 사이의 갈등.

새로운 세력.

클로이 체닐라의 유언장.

벌여놓았던 일들을 주워갈 차례였다.

"좀도둑."

"예, 도련님."

"레디나한테 전해. 모스튼 벨을 피신시키라고."

"…피신이요?"

죽이라는 말을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싶어 페트리오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재무부 장관하고 자문관 사이에 갈등이 커지려면 이 방법이 최고거든. 아, 피신해도 자문관이 있는 곳 근처로 가서 일부러 흔적을 남기라는 말까지 전해줘."

하벨은 페트리오에게 써 내려간 쪽지 두 개를 넘겼다.

"하나는 자문관에게. 하나는 재무부 장관에게."

[음, 이쪽은 어음, 클로이 체닐라와 엮일까 봐 피해라. 그리고 다른 쪽은 자문관이 배신했다. 어어! 대장. 내용이 달라! 이러면 싸우는데!]

아라는 쪽지를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대장이 아까 갈등을 일으켜야 한다고 했지? 후후, 이 몸은 기억하고 있어!]

"이건… 폭탄과도 같은 말이 아닙……."

쪽지를 받던 페트리오는 말을 멈추고는 곧 눈을 크게 떴다.

"이래서 모스튼 벨에게 도망을 가라고 한 겁니까?"

"그래. 내 의도를 알아차렸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지?"

"예. 물론입니다. 차례대로, 시간에 맞춰 보내겠습니다."

하벨은 그 대답에 만족했다.

이미 모스튼을 이용해 재무부 장관의 사람도, 자문관의 사람도 한 명씩 목줄을 비틀어 잡았다.

모스튼의 힘이라면 아무 의심 없이 재무부 장관은 물론, 자문관에게도 접근할 수 있었으니.

하지만 이제 그 쓰임이 하나만을 남기고 있었다.

"그래. 레디나한테는 준비하고 있으라고 전해줘."

레디나에게 내릴 준비는 하나였다.

모스튼 벨의 죽음.

"카샬, 준비하자."

하벨은 사과를 마저 씹어 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꽃을 피웠으니 이제 타오를 차례였다.

"마지막 저항세력을 부수고, 새로운 세력을 만나러 가야겠지?"

카샬의 얼굴이 굳어졌기에 하벨은 씩 웃었다.

이건 라르웬이 와도 말릴 수 없었다.

모든 건 앞으로 닥칠 일을 위해 달린 게 아닌가.

벌써 입을 삐죽 내민 아라와 하벨 티에라에게 미안하지만, 아직은 움직일 만했다.

"이상하게 바쁘네. 연회 준비도 해야 하고 말이야."

"일부러 제 속을 뒤집어 놓으시려고 그런 소리 하시는 거죠?"

"카샬. 마음 좀 넓게 가져."

"아니었다면 정말 죄송……."

"하지만 정답이야."

"…하."

카샬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벨보다 옆에서 들려오는 페트리오의 비웃음이 더 짜증 났다.

저 개자식.

* * *

하벨은 앞을 보았다.

참 고맙게도 뒷세계 마지막 저항세력이 선택한 장소는 숲이었다.

도망치면 어떻게든 살길이 있다고 생각한 건지, 아니면 숨으면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한 건지.

'…그것도 아니면 이길 자신이 있다고 생각한 건가?'

하벨은 고요한 숲을 바라보았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숲으로 보였겠지만, 자신의 눈에 마법진이 하나씩 보였다.

역시 이유 없는 움직임은 없었다.

저들 관점에서 이번 일에 승리한다면 엄청난 이득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말 그대로 마지막 저항세력이지.'

마지막이었기에 하벨은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압도적으로.

자신을 강한 자라고 알려야 했다.

이는 모든 걸 마무리 지을 신호이며 모든 걸 뒤바꿀 시작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와. 저 진짜 불안합니다."

카샬은 손가락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불안해하지 마. 내가 죽는 것도 아닌데."

하벨이 실실거리자 카샬은 불만을 꺼냈다.

"지금 제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데 그 말을 하시는 겁니까?"

[맞아! '피를 토할 만큼 모든 걸 쏟아붓겠다'라고 말했잖아. 이, 이 몸도 지금 조마조마하다구.]

아라까지 앞발을 꼼지락거렸다.

특히나 지금 하벨의 상태를 알기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이 좋은 기회를 보고도 그래?"

하벨은 자신이 가진 힘을 펼쳐질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기에 너무도 기뻤다.

이전 거대 정화 장치 때 확인하지 않았는가.

정령수로 만들어진 식물은 일반적인 식물보다 상위의 존재라는 걸.

"…하. 제발, 제 멱살 좀 살려주십시오."

카샬은 라르웬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마법이 깔려 있어. 지금 들어가면 다 죽을걸?"

"……!"

카샬은 그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법이라니.

뒷세계 수장들이 거기까지 준비했다는 건가.

"좀도둑."

"예, 도련님."

페트리오는 묵묵히 대답했다.

"곧 숲이 열릴 거야. 화살을 준비해. 저번보다 더 날카로운 화살이니 화력은 상당하겠지?"

"…숲이 열리다뇨?"

하벨에게 '혹시 마법사였습니까'라는 말을 삼켰다.

그렇지 않아도 레디나가 '도련님께서 뭔진 모르지만, 힘을 지니신 것 같아'라고 해맑게 말하지 않았는가.

"정령사거든."

하벨은 이때까지 라르웬의 그림자에 묻어갔던 사실을 밝혔다.

슬슬 이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하벨 티에라가 다시 돌아와도 순환의 길에 만들어진, 세 개의 막이 사라질 리가 없으니까.

페트리오는 잠깐 침묵을 지켰다. 옆에서 툴툴거리는 카샬의 말은 이미 들리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페트리오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설마 그 미지의 힘이 정령의 힘일 줄이야.

단순한 고백이 아니었기에 신뢰받았다는 의미가 전신을 자극했다.

"아라야."

하벨은 자연스럽게 아라를 불렀고, 밀려드는 정령수를 느끼며 다시 앞을 보았다.

자, 숲을 열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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