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잡았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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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촤악!
물살이 일어났고, 무언가 베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안 차립니까?"
한껏 올라간 언성에 하벨은 눈동자를 돌리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건… 또 꿈인가?'
하벨은 불쾌감이 치솟았다.
류아를 보는 건 반가웠으나, 과거를 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부끄럽고, 안쓰러웠고, 절망스럽고, 괴로웠던 기억이 가득할 테니까.
'여긴 어디지?'
하벨은 기억을 더듬어보나, 몸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말거라."
한껏 여유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눈앞에 보이는 수십의 적은 자신이 익히 알고 있는 존재였다.
증오스럽고, 역겨운 '수족'이 아닌가.
사람을 먹고, 시간을 먹고, 미래마저 먹어간 괴물들.
"나는."
바닷속에서 거품이 일어났다.
손아귀를 넘어, 가슴까지 무언가 가득 찬 기분에 하벨은 꿈이지만 그 느낌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이는 자신의 힘이었다.
꿈이라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너무도 생생했다.
"용왕이다."
단 한 번의 공격에 바다가 요동치고, 물이 수족들을 움켜쥐며 터트렸다.
푸르렀던 바다가 피를 머금었고, 자신은 뒤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이제 나의 영토다. 수족의 그 누구도 내 허락 없이는 밟지 못할 것이니라!"
류아가 활짝 웃었고, 수족에게 공격당하던 수많은 어인이 별보다 환한 눈동자로 자신을 보았다.
그리운 얼굴들이 너무도 빨리 지나갔기에 자신이 서 있는 바닷속만큼이나 크나큰 애틋함이 밀려들었다.
'…그래. 이때, 이랬지.'
자신은 수족에 대항해 일어난 저항세력의 주축이었으며 그들의 왕이었다.
뽀글뽀글.
갑자기 거품이 일어났다.
장소가 바뀌고 새하얀 세상이 펼쳐졌다.
자신이 아직 어린 북극여우를 보았던 그곳.
"…용왕님."
자신을 부른 건 류아가 아니었다.
"더는 방황하지 마시고, 이제 왕좌로 돌아가실 시간입니다."
자신을 살아 있는 인형으로 만든 그놈.
"네놈이 왜?"
분노에 치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지금 감히 내게 방황이라 하였는가?"
"용왕님께서 왕좌를 비워 바다가 벌써 몇 개월째 잠잠해지질 않습니다."
"하여 돌아가란 말인가?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은… 내가, 내 모든 것이었던 자들이 이제는 없는데?"
자신이 꺼낸 말이지만, 하벨은 끔찍하게 들려왔다.
절망감밖에 느껴지질 않았다.
여기에서 정신을 차렸어야 했다. 저놈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더라면 당장 그 자리에서 죽였어야만 했다.
이제 놈이 자신을 움켜쥘 테니까.
"아직 용왕님의 백성들이 남아 있습니다."
자신의 몸이 흔들렸다.
"제가 손에 쥐고 있는 백성들 말입니다."
"…지금 무어라 말했는가?"
"용왕님."
부드러운 목소리가 놈에게 흘러나왔다.
"백성들을 지키고 싶으시다면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그냥 왕좌에 앉아 계십시오. 그것만이 백성들을 지킬 유일한 방법입니다."
뒤를 돌아보자 놈이 히쭉 웃고 있었다.
* * *
툭.
투툭.
하벨은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에 조용히 눈을 떴다.
온몸이 짓눌리는 기분에 그는 숨을 깊게 내쉬었다.
'…이걸 악몽이라고 하는가.'
하벨이 상체를 일으키자 '히유'하며 숨소리를 내던 아라가 귀를 팔랑거리며 눈을 떴다.
[어, 어!]
아라는 비몽사몽 하며 하벨의 얼굴에 찰싹 붙었다.
[안 돼! 라르웬이 대장은 오늘 꼼짝 말고 누워 있어야 한다고 했어.]
"형님이… 오셨어?"
입이 바짝 말라 좀처럼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응응. 비가 내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라르웬이 왔어.]
"아라야, 형님 좀 불러줄래?"
하벨은 이 무거운 몸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게 어려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번 비가 내렸을 때는 몸이 이 정도로 가라앉진 않았는데. 어쩌면 방금 꿨던 악몽의 영향이지 않을까.
'악몽이 영혼의 흔들림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어.'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루룸이 이전에 마법을 볼 수 있는 자신에게 영혼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었으니까.
[대장. 눈 크게 뜨고 봐봐. 밖에 비가 와. 그리고 대장은 물의 저주라는 아주 못된 병에 걸려서 나가면 안 된다구!]
아라는 일부러 무섭게 보이려 미간을 구겼다.
"……?"
하벨은 아라의 표정에 눈을 살짝 크게 뜨다 곧 눈웃음을 지었다.
"착하네, 아라야."
하벨이 쓰다듬자 아라는 배시시 웃다 말고 화들짝 놀라며 하벨의 손가락을 살짝 물었다.
[대장 또 나가려는 거지? 이 몸은 이제 알아. 대장은 지금 나가면 안 돼. 중간에 카샬이 와서, 음…….]
아라는 열심히 기억을 되짚어가지만, 잠결이라 뭐라고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라야."
[응, 대장.]
"필요하다면 나가겠지만, 일단은 얌전히 있을……."
하벨의 시선이 비가 내리는 밖을 향하다 그대로 말을 멈췄다.
아무래도 수도가 귀족들의 힘이 밀집된 곳이다 보니 임시로 구한 집은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왕실은 그게 불가능해. 초대 왕의 가호가 있거든.
이전에 왕실에서 라르웬이 왕실은 부정한 것이 있을 수 없다고 말을 하며 초대 왕의 가호라는 걸 언급했다.
―비가 오는 날에 하늘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어쨌든, 지금은 집중하자고.
'…비가 오는 날.'
하벨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상체를 일으켰고, 당장 주저앉을 것 같은 몸을 이끌며 창문으로 다가갔다.
[대, 대장! 안 된다구!]
아라가 하벨의 옷가지를 힘차게 당기지만 소용없었다.
[이잇!]
아라가 식물을 자라게 해 하벨을 붙잡았지만, 그는 멈추질 않았다.
줄기에 붙잡힌 곳이 붉어지자 아라가 다급히 식물을 거두었다.
앞발을 꼼지락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미, 미안해, 대장. 아팠어?]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아라야."
하벨은 얼이 빠진 얼굴을 하며 창문에 손을 댔다.
찌릿.
창문에 닿는 것만으로도 독을 만진 것처럼 하벨의 정화 장치에 거품이 올라왔다.
'…저게 뭐야?'
하벨은 밀려오는 통증에도 하늘에 피어오른 광경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가 천장에 매달려 있는 듯 왕성에 홀로 비가 내리지 않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나간 푸른빛은 마치 은하수처럼 보였다.
방금 과거의 꿈을 꾸었기 때문인지 몰라도 저 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바닷속에 온 것처럼 포근함과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쿵쿵.
하벨은 심장이 뛰는 것과 다른 어떤 갈망을 느꼈다.
'나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아. 나를.'
당장 왕실로 가고 싶었다.
그곳에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워져 하벨은 입술을 깨물며 옷자락을 세게 쥐었다.
[대장! 갑자기 왜 입술을 깨물어? 피 나잖아!]
아라가 하벨의 목을 끌어안았고,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카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도련님!"
카샬은 하벨의 어깨를 흔들었다.
"…나 지금 어지러우니까, 흔들지 말아줘."
하벨의 얼굴이 금세 새파랗게 질려가자 카샬은 손을 뗐다.
"죄송합니다. 도련님께서 갑자기 유령한테 씐 것처럼 보여서 저도 모르게 흔들었습니다."
"아니야, 괜찮아."
하벨은 털을 부풀린 아라를 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눈동자에 눈물과 원망이 섞여 있었다.
"미안해, 아라야. 저걸 보고 잠깐 정신을 놓았어."
아라는 화를 내다 말고 곧 눈동자를 깜박거렸다.
[괜찮아. 이 몸도 그랬어. 이 몸도 처음에 시선을 뗄 수 없었어. 잠깐… 울어버렸고.]
밀려드는 그리움이 아라 자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컸기에 눈물이 핑 돌았다.
다만, 무엇을 향한 그리움인지 알 수 없었다.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렸다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막 밀려오거든.
이전에 루룸이 왕실에 정령들이 없는 이유를 설명하며 꺼냈던 말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도련님께서는 처음 보시겠군요."
카샬은 하벨을 침대에 앉힌 후에야 말문을 열었다.
"저도 초대 왕의 가호를 봤을 때 그랬습니다. 넋을 잠깐 잃어버렸죠."
"너도?"
"예. 아마 웬만하면 다 느낄 겁니다. 전혀 이상한 게 아닙니다."
카샬은 하벨의 정화 장치를 살피더니 바로 주사기를 꺼냈다.
"답답하실까 봐 커튼을 다 치지 않았는데, 제 잘못입니다."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에 하벨은 카샬을 몹시 낯설게 보았다.
"어떻게 됐어?"
"비가 오면 대부분 일이 정지됩니다. 어쩔 수 없죠. 죽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말 돌리지 마."
"말 돌리는 게 아니라 사실입니다."
카샬은 혀를 차며 정화제가 든 주사를 놓았다.
"새벽에 에본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고 왔어?"
"모스튼 벨이 땅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지 언급했다고 합니다."
"드디어 눈치를 챘겠네."
잡았다.
하벨은 덫에 걸려든 모스튼 벨의 모습을 떠올리며 웃었다.
"맞습니다. 비가 그치면 바로 움직이겠지요."
"나머지는 얼마나 진행됐어?"
"현재 뒷세계 장악이 67%쯤 진행됐습니다. 땅은 둘째 도련님께서 신나게 사들여 목표량의 71%쯤 완성했고요."
"형님을 불러줘."
"오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
"땅은 그만 살 거야. 이 정도면 모스튼 벨을 열 받게 하기에 충분하니까. 나머지는 내 기준에서 봤을 때, 살 가치도 없고."
라르웬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형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귀족들의 움직임이 아주 바빠. 널 만나러 티에라 가문까지 온 자들이 많아. 아버지께서 밀려온 편지가 산더미라고 하더라고."
하벨이 움직이자 라르웬은 문을 살짝 열어 손을 흔들었다.
"아버지께서 걱정이 많으셔. 오늘은 특히 비가 내리니까."
라르웬이 룬델을 언급하자 하벨은 주춤거렸다.
"쉬어, 막내야. 오늘은 너 대신 내가 움직일 테니까."
"보셨습니까?"
문이 닫히자 카샬은 손으로 가리켰다.
어처구니없어하는 하벨의 표정에 카샬은 방긋 웃었다.
"오늘은 얌전히 계셔야겠습니다, 도련님."
[응응. 잘한다, 카샬!]
아라가 옆에서 손뼉을 마주쳤기에 하벨은 멍한 표정 그대로 눈을 깜빡거렸다.
* * *
"…하."
모스튼이 한쪽 입꼬리를 올려 바르르 떨었다.
가뜩이나 어제부터 내린 비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상태에 들려오는 소식까지 저러니 헛웃음이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땅을… 뺏겼다?"
"…예. 그렇습니다."
집사는 허리를 숙였다.
"땅을?"
쾅.
모스튼은 책상을 있는 힘껏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땅을 뺏겨? 지금 이 시기에?"
갑자기 나타난 하벨 티에라의 등장에 귀족계의 흐름 자체가 요동쳤다.
고여있는 물로 새로운 물살이 치고 들어오기에 이를 기회라 여기며 그간 위를 바라보지 못했던 귀족들까지 움직이고 있었다.
이 상황에 무엇이 걸리든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거나 입막음의 대가로 막대한 돈을 요구할 테지.
짜악.
모스튼은 집사의 뺨을 후려쳤다.
"네놈 같으면 티에라 가문이 잘도 땅이나 처먹으면서 이를 이용하는 놈과 손을 잡겠다!"
집사의 몸이 휘청거렸지만, 모스튼의 손은 멈추질 않았다.
짝!
"내가 은밀히, 조심히 진행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냐고! 은밀히! 조심히! 이 단어가 뭔지 몰라?"
"죄송합……."
짜악!
"지금 이게 죄송할 일로 되겠어? 죄송할 일을 하지 말았어야지! 이 병신새끼야!"
화를 못 이긴 모스튼이 집사를 걷어찼다.
바닥에 쓰러진 집사는 당장 엎드려 모스튼에게 빌었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죄송합니다!"
"…하."
숨을 가다듬은 모스튼은 집사의 손을 짓밟으며 물었다.
"땅을 판 그 새끼들 다 데려와."
"그게… 흔적도 없이 도망쳤습니다."
"그럼 대체 어떤 새끼야! 어떤 새끼가 내가 준 돈을 처먹고 내 뒤통수를 친 거냐고!"
잘 좀 하라고 뒷세계 수장들한테 돈을 뿌렸다.
그런데 땅을 뺏겼다는 건 무슨 말이겠나.
뒷세계 수장 중 누가 배신했다는 사실뿐이었다.
"습격을 당했습니다."
"습격이라고?"
모스튼은 발을 떼며 물었다.
"예, …예, 가주님. 개들이 모두 누군가에게 당해 땅의 정보를 뺏기고 말았습니다."
"그놈이 대체 누구야!"
모스튼의 얼굴이 붉어졌다.
하나도 아니라 전부라니.
대놓고 자신을 노린 게 아닌가.
"모두 습격 후에 이… 쪽지 하나를 받았다고 합니다."
집사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내밀었다.
착.
신경질적으로 쪽지를 낚아챈 모스튼은 눈동자를 굴리다 말고 당장 벽에 걸린 액자를 떼어서는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파악!
"이런 개 같은 새끼…!"
―땅을 가지고 싶으면 이리로 와. 물론, 네가 직접. 우리 얼굴 좀 봐야지, 모스튼?
"…오냐. 내 너를 죽여주마."
까드득.
모스튼은 이를 갈며 정해진 시간과 약속 장소가 적힌 곳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당장 준비해. 당장!"
* * *
[우와아. 온다, 온다!]
땅에 귀를 대던 아라가 마차가 굴러가는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났다.
"봤지, 아라야?"
하벨이 손가락을 풀며 말했다.
[응응! 대장 말이 맞았어! 진짜로 약속 장소로 오고 있어!]
아라는 신기함에 활짝 웃었다.
하벨이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쪽지를 페트리오를 통해 모스튼 벨 밑에 있던 뒷세계 수장들에게 전달했다.
당연히 올 거라 확신하며 덫을 설치한다고 말했는데, 정말 올 줄이야.
하벨을 보면 신기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 아라는 정말 즐거웠다.
"몸 상태가 나쁘시면 말씀해주십시오. 비가 그쳤어도 영향이 있을 테니까요."
카샬은 걱정을 담아 말했다.
비가 내릴 때 쓰는 가면으로 바꿔 썼어도 비의 영향이 없는 건 아니었다.
"지금은 괜찮아. 드디어 놈을 잡을 순간이니까."
하벨은 아라가 채워주고 간 정령수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