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땅따먹기
* * *
"저 말하는 속도 봐봐."
카샬이 페트리오에게 불만을 터트렸다.
누가 보면 하벨의 충견이라 착각할 정도였다.
하벨은 그제야 쏟아지는 잠에 감겨왔던 눈을 크게 떴다.
"벌써? 오늘은 허탕 치고 올 줄 알았는데."
"반드시 해내겠다는 일념으로 임했습니다. 최근 모스튼 벨의 몸집까지 불어나 생각한 것보다 빨리 흔적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페트리오는 기쁨을 드러냈다.
하벨이 속도전이라고 말했고, 자신 역시 그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기에 손에 넣을 수 있어 정말 다행이었다.
"모스튼 벨이 요새 땅과 관련된 일을 한다고 하긴 했지."
라르웬은 턱 밑을 쓰다듬었다.
카샬을 통해 하벨이 귀족들의 허리를 끊어낼 재무부 소속 '모스튼 벨'을 잡으려 한다는 걸 들었다.
뒷세계 정복은 이를 위한 포석 정도였고.
"맞습니다. 모스튼 벨은 현재 놈의 가문이 가진 재산에 맞먹을 만큼 막대한 돈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자기 돈이 아닌 거네?"
하벨은 카샬이 뺀 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모스튼 벨, 그놈이 가진 돈이 아닙니다."
"재무장관과 이어져 있는 게 분명하고. 그렇지?"
"도련님 예측이 맞습니다."
이미 재무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예상했지만, 설마 현실이 될 줄이야.
하벨은 남아 있던 잠마저 깨는 기분을 느꼈다.
페트리오는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망설이지 않고 꺼냈다.
"모스튼 벨이 재무장관의 돈을 은밀히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 돈의 출처는 이미 예상하셨겠지만, 세금이 맞습니다."
"…그렇지. 저 정도는 되어야 이제 베는 맛이 나는 거야."
레디나는 솟구치는 분노를 억누르려 혼잣말을 꺼냈지만, 그 말이 참 섬뜩해 하벨은 테이블을 가볍게 쳤다.
탁탁.
고개를 올린 레디나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눈으로 물었다.
"열 받으면 혼잣말하는 거 버릇이야?"
"아뇨. 혼잣말을 버릇으로 달고 다니면 오래 못 살아요."
암살자에게 말버릇이라니. 숨조차 참아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런 약점은 위험했다.
"여기서는 그냥 말해도 될 것 같아서요. 마음이 편안하거든요."
레디나는 양손으로 턱을 괘서는 씩 웃었다.
"검은 달은 제가 사랑하는 곳이지만, 솔직히 편하진 않아요."
악을 상대하려면 강해야 했기에 검은 달은 철저하게 약육강식의 법칙으로 돌아갔다.
각 지부를 맡을 수 있는 것도 강한 자의 특권이었고, 지부의 위치를 아는 간부와 수장 역시 힘으로 되는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노리는 건 현재 간부였다.
그러려면 지부를 손에 넣어야 했고.
하지만 이런 압박이 여기에 발을 디디자마자 신기하게도 사라졌다.
자신이 모르는 세계이기 때문일까.
"…혹시 문제가 됐나요?"
레디나가 우물쭈물하다 물었다.
"아니. 만약에 버릇이라면 그런 버릇은 고치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해주려고 했지. 그것보다 편하다니 다행이네."
하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레디나가 원해서 이곳에 왔고, 자신도 레디나가 필요했기에 허락했지만, 기왕 있는 거 편안하게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미안, 좀도둑. 계속 말해줘."
하벨은 뒤늦게 아차 싶어 페트리오를 재촉했다.
"모스튼은 현재 라르웬 님이 말한 것처럼 재무장관에게서 받은 돈으로 땅을 대거 샀습니다."
페트리오는 미리 가지고 왔던 지도를 풀었다.
에르티안 왕국의 지도와 함께 빨갛게 표시된 구역이 보였다.
칠해진 땅 개수만 세어도 스무 개 이상이 될 것만 같았다.
"일단 제가 알아낸 곳입니다. 아마 이보다 배는 더 있을 거라 추정됩니다."
"참 많이도 먹었네."
라르웬은 혀를 내둘렀다.
세금을 가지고 땅을 사다니.
"이 땅으로 대체 뭘 하려는 건데?"
하벨이 묻자 라르웬은 목소리를 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많지. 건물을 올려서 세를 받아도 되는 거고, 땅 자체를 빌려줄 수 있는 거고, 땅값 자체를 올리는 방법도 있어."
"놈이 사용한 방법은 땅 자체를 빌려주는 거였습니다."
페트리오는 라르웬의 말을 이어받았다.
"처음 땅을 값싸게 빌려주고, 건물 등 자유롭게 이용해도 된다는 식으로 풀어준 뒤, 기틀을 잡을 때까지 최소 몇 개월에서 최대 몇 년을 기다렸다가 갑자기 땅값을 미친 듯이 올립니다."
"와, 그냥 땅을 빌려주고 곡식이나 솜으로 뜯어가는 것보다 더 잔인한데?"
라르웬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응했다.
자리를 잡은 뒤 뺏어가겠다는 건 삶의 기둥을 통째로 가져가겠다는 말과 대체 뭐가 다른가.
"그런데 좀도둑. 네가 하루 만에 알아낸 일인데 다른 귀족들이 몰랐다는 건 이상한데?"
하벨은 의아함을 드러냈다.
"확실히 도련님 말씀대로 이상합니다."
카샬 역시 하벨의 말에 동의하며 페트리오를 의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재무장관 자리를 노릴 귀족들은 많습니다. 뭐가 됐든 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명분은 우습게도 백성들이 아닙니까? 누군가 꼬리를 잡고 늘어질 만큼 큰 일입니다. 그런데 이걸 몰랐다뇨."
"저는 모스튼 벨이나 그 측근들의 피를 찾으러 병원을 돌아다녔습니다."
피를 통해 기억을 볼 수 있는 마법이 있다는 사실을 하벨은 이미 알기에 페트리오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측근이 누구인지는 이미 알고 있어서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으니 쓸데없이 꼬리 잡지 마라."
페트리오는 어떻게든 자신의 꼬리를 잡으려는 카샬을 향해 불쾌함을 드러냈다.
"얼마든지 쓰고 버릴 수 있는 사람을 통해서 땅을 샀나 보네요? 죽이면 캐내려고 해도 불가능하잖아요."
이유를 생각하던 레디나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방법을 대입해 맞춰보았다.
이유를 불문하고 누구든 쉽게 입을 막을 방법이야말로 죽음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주기적으로 땅을 갈아치웠고?"
하벨의 입꼬리까지 올라가자 페트리오 역시 웃었다.
"두 분 다 맞습니다. 시기도 딱 좋고요. 지금 도련님의 등장에 굳어 있던 귀족계의 판도가 흔들린 상황이 아닙니까?"
귀족들끼리 어떻게든 서로의 흠집을 찾으려는 지금 재무장관 역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오히려 몸을 사려야 할 때였다.
위로 올라가고 싶은 귀족들은 얼마든지 있었으니.
"형님."
하벨은 바로 라르웬을 불렀다.
"땅 사달라고?"
"예, 사주십시오. 내가 원하면 사주신다면서요."
"도련님. 그래도 땅이 몇 개인데 둘째 도련님께서 허락하시……."
"좋아."
라르웬의 허락이 떨어지자 카샬은 '겠'을 닮은 입 모양 그대로 멈췄다.
"그게 가능한 건가요?"
"…미, 미치셨습니까?"
설마 하던 레디나는 깜짝 놀랐고 카샬이 기겁하며 라르웬을 말렸다.
농담 삼아 하벨에게 몇 번 말하긴 했지만, 진짜로 가능하다니.
"왜? 나 돈 많아. 알면서 왜 그래?"
라르웬은 오히려 왜 이러냐는 듯이 카샬을 쳐다보았다.
"아니, 아무리 많아도 정말 땅을 사신다고요?"
"모스튼 벨이 생각 없이 땅을 사려고 하진 않겠지.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하벨은 물주인 라르웬을 향해 밝게 웃었다.
"네가 뭘 좀 알고 있네, 막내야."
누구보다 돈 냄새를 잘 맡는 귀족이 값어치 없는 땅을 살 리가 없었다.
아마 예전부터 봐둔 땅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시기에 맞물려 급하게 사겠지만, 가치는 보장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돈 좀 쓰는 맛이 나겠네."
라르웬은 벌써 즐거웠다.
땅을 뺏긴 모스튼 벨이 어떤 얼굴을 할지, 얼른 보고 싶었다.
"그럼, 모스튼이 무슨 땅을 살 예정인지 알아내야겠네요."
하벨은 길게 하품하며 말했다.
"형님. 돈 좀 준비해줄 수 있습니까?"
"……?"
레디나는 턱을 괸 손을 풀어 눈마저 크게 떴다.
지금 하벨이 땅 살 돈 말고 다른 돈을 요구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얼마나 쓰려고?"
태연한 라르웬의 말에 레디나는 현실 감각이 들지 않아 카샬을 보았다.
아마 자신도 저렇게 당황한 표정을 짓지 않았을까.
'이래서 도련님들이란.'이라는 말을 카샬이 중얼거리기에 레디나는 웃음을 참으려 고개를 푹 숙였다.
"그냥 많아 보이면 좋습니다. 나는 부자다. 이런 향기를 품을 정도만요."
하벨은 허락이 떨어지자 신난 표정을 지었다.
재무장관도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지금, 모스튼 벨이라고 처지가 다르겠는가.
부랴부랴 땅을 바꿔치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놈들이 쓸 수 있는 패가 몇 없었다.
"나도 간다는 조건이야."
라르웬은 못을 박았다.
아무래도 하벨이 어떻게 하는지 눈으로 직접 봐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형님께서 동행하면야 나야 좋죠."
알아서 도와주겠다는데 하벨이 거절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아, 좀도둑."
"예, 도련님."
"움직인 김에 거대 정화 장치 쪽도 알아봐 줘."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던 루룸이 하벨이 꺼내는 말에 놀라서는 부랴부랴 숨긴 얼굴을 드러냈다.
[너, 진심이야?]
"거대 정화 장치요……?"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페트리오는 당황했다.
"그래. 클로이 체닐라가 거대 정화 장치를 팔았다는 건 사실이잖아?"
"사실입니다."
"마음에 걸려."
하벨은 오염된 물이 사라진 강을 바라보며 울음을 터트렸던 정령들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분명 이유 없이 체닐라가 거대 정화 장치를 팔진 않았을 테지.
그럼 팔린 거대 정화 장치는 어떻게 됐을까.
'내가 봤던 상황과 달랐으면 하는데.'
"…도련님."
레디나가 사뭇 진지하게 하벨을 불렀다.
"그래."
"혹시 저도 월급 주시나요?"
"갑자기 합류해서 아직 고용계약서를 쓰지 않은 것 같은데."
하벨은 카샬을 바라보았다.
일단 레디나는 시녀로서 들어오지 않았던가.
"맞습니다. 아직 쓰지 않았습니다."
"당장 쓸게요."
레디나는 손을 높게 들어 흔들었다.
"돈이 좀 급해? 빌려줄 수 있어."
하벨이 묻자 레디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도련님의 형, 도련님의 집사, 도련님의 새잖아요."
레디나는 순서대로 라르웬, 카샬, 페트리오를 가리켰다.
"…새?"
페트리오는 전서구를 가져다주는 새를 떠올리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저도 하나 하고 싶어서요. 저만 없잖아요."
"내 신도라며? 거짓말이었어?"
"그거랑 별개로 하나 하고 싶습니다. 해도 될까요?"
"왜 그게 하고 싶은 건데?"
"이불 같아서요."
"…이불?"
하벨은 알쏭달쏭한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레디나는 그냥 배시시 웃었다.
오래 머물었던 검은 달보다 며칠 안 된 이곳이 포근하다는 말을 꺼내면 왠지 검은 달을 버린 것만 같아 일부러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형님이랑 카샬은 어쩔 수 없지만, 좀도둑도 너도 짊어질 생각은 없어."
"반가운 말이네요. 저는 앞으로도 도련님께 부담이 되어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페트리오는 오히려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를 짊어진다는 건 자신의 죄마저 떠안는다는 게 아닌가.
하벨이 그렇게 해준다고 해도 자신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행이네.'
혹여 자신의 죄가 하벨을 압박하거나, 부담으로 느끼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저도 기댈 생각은 없어요. 아직 어린아이인 도련님께서는 모르시겠지만, 제 목숨은 제가 챙길 수 있어요."
레디나는 하벨의 눈썹이 꿈틀거리자 실실 웃었다.
"앞으로 월급도 받을 테니 기대는 것도 아니고, 월급 받은 만큼 저도 열심히 할 테니 도련님께서도 좋잖아요."
"대체 나한테 뭐 먹을 게 있다고 그래?"
하벨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하자 레디나는 그 표정이 참 마음에 들었다.
누가 봐도 귀찮아하는 티가 막 나지 않은가.
"도련님께서는 절 무서워하지 않으시잖아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정말 무섭지 않으니까."
레디나의 눈에는 하벨의 의문이 고스란히 보였다.
대체 왜 널 무서워해야 하냐는 듯한 물음에 레디나는 손을 내려 식탁보를 꽉 쥐었다.
"도련님의 그림자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원하는 대로 해. 그림자든, 신도든 뭐가 변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월급은… 카샬하고 잘 상의해 봐. 뒤통수 맞지 않게 계약서 꼼꼼히 보고."
"제가 무슨 날강도입니까?"
카샬은 기가 찼다.
"당연히 날강도는 아니지. 그런데 집사인 너라면 왠지 그럴 것 같아서. 그렇지 않아?"
하벨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카샬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뭔가 자신을 인정한 말 같지 않은가.
"나, 자요. 주무십시오, 형님. 너희도 좋은 꿈 꿔."
대충 손을 흔들며 계단으로 향하자 카샬이 신나게 뛰어 하벨의 뒤를 따랐다.
"왜 쫓아와?"
"아직 어둡습니다."
"불 켜면 되지."
"도련님. 방금 제게 하신 말씀 있잖습니까, 칭찬 맞습니까?"
"…하. 이러려고 쫓아왔네."
한숨을 내쉬는 하벨의 목소리와 신나듯 놀려대는 카샬의 목소리가 잦아질 때쯤, 라르웬이 레디나와 페트리오를 바라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고 가버리면 어쩌라는 건지.
아무래도 하벨이 던진 말이 저들에게는 가슴을 흔드는 말이었을지도 몰랐다.
"막내가 아직 칠칠치 못해서 그래. 가볍게 한잔할래?"
레디나도 페트리오도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임무 도중에 술은 입에 대면 안 되겠지만, 술이 고팠다.
아주 절절하게.
* * *
"……왜?"
안으로 들어오는 제 부하를 보며 수장은 세던 돈을 멈추고 고개를 올렸다.
"대장을 보러온 자가 있습니다."
"날?"
수장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오늘 약속도 없었고, 지금 대낮에 자신을 보러올 자가 어디 있는가?
"누구인지 알아봤어?"
"예. 알아봤습니다."
"누군데?"
"가면단이라고 합니다."
"가면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에 수장은 코웃음을 쳤다.
어디서 개 같은 게 굴러오는지.
"쫓아내."
"대장, 이걸 봐주십시오."
부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종이를 내밀었다.
"…이런."
수장은 종이를 구겼다.
―모스튼 벨.
딱 이름만 적혀 있었지만,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데려와. 얼굴 좀 봐야겠어."
그 말에 창문에 빤히 붙어 있던 아라가 눈을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