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66화 (66/415)

66화. 너희가 누구라고?(3)

* * *

말하는 내내 입가가 썼다.

기억이 온전하지 않을 거라면 차라리 모조리 다 잊지. 왜 애매하게 기억이 나는 건지.

지금 에르티안 왕국은 자신의 과거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관료들은 백성들의 손을 놓았고, 오히려 그들의 목숨줄을 쥐어버린 상황.

이를 막지도 못하고 힘없이 인형이 되어버린 왕.

'내가 무얼 선택했는지 몰라도 결과를 보면 뻔하지 않겠는가?'

흐릿한 기억이 자신을 막았지만,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결국, 자신은 죽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하고 싶었다.

"뭐, 물론 귀족들과 악연도 있고."

하벨은 왠지 충격을 받은 듯한 레디나의 모습에 가볍게 웃었다.

적은 자신의 잠을 깨웠고, 감시에 이어 독까지 먹게 하지 않았던가.

"…죄송합니다."

레디나가 갑자기 사과하자 하벨은 어리둥절했다.

"……?"

"전 진짜 가벼운 마음으로 이 일을 하시는 줄 알았어요."

귀족 도련님이 아니라고 해도 하벨은 누가 뭐라든 도련님이었다.

곱게 자라왔으니 이번 일은 가벼운 정의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아도취, 뭐 그런 종류로 똘똘 뭉쳤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이 하벨을 따르는 것과 별개로 그가 굳이 나서서 해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

"가벼운 마음 맞아."

하벨은 레디나의 관찰력에 엄지를 올렸다.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거든."

"…떠나다뇨?"

하벨은 계속 자신을 주목하는 시선에 그만 말을 아꼈다.

일부러 페트리오의 부하들이나 새로 포섭한 뒷세계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말을 꺼냈지만, 아무래도 여기까지인 듯했다.

"어쨌든, 가벼운 마음은 맞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는 건 아니야."

"그건 저도 알아요. 정말 궁금해서 물어봤으니까, 오해 마셨으면 해요."

"걱정하지 마. 내가 보는 눈이 좋아. 아, 물론 이 눈 말고."

하벨은 눈을 가리키다 잠깐 움찔거렸다.

자연스럽게 쓰고 있지만, 이 몸이 자신의 몸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며 다시 말했다.

"이건 내 눈이 아니니까."

"……?"

레디나는 하벨을 뒤따라가다 잠깐 걸음을 멈췄다.

저 눈이 하벨의 눈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 눈이라는 건지.

'뭐지? 의안이라는 말이야?'

레디나는 이해하지 못할 말에 혼란스러웠다.

그렇다고 지금 '눈'이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말을 꺼낼 때도 아니었고.

쾅!

하벨은 닫혔던 문을 발로 열었다.

하루는 짧았다.

아라가 슬슬 올 때가 됐기에 빨리 적당한 말을 꺼내고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안에서 분주히 청소하던 카샬과 수장들이 하벨을 동시에 바라보았다.

"여기는 이제 가면단의 것이야."

아까 꺼내야 할 말을 하벨은 뒤늦게 내뱉었다.

다들 황당해했으나, 하벨은 거리낌 없이 다음 말을 꺼냈다.

"가장 많이 치우는 조가 여기를 소유하게 될 거야."

"우와아아!"

승리보다 더 기쁜 소리에 금세 함성이 터져 나왔다.

고작 하루지만, 달 무늬가 들어간 가면을 쓴 저 남자, 달님은 '공평'과 '성취감'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다.

가장 열심히 한 자에게 상을 추가로.

상을 제외한 나머지는 완벽하게 만족할 순 없지만, 공평하다고 느낄 정도로 확실히 보상을 배분했다.

개도 먹이를 주는 사람을 물지 않듯, 이렇게 무언가를 자꾸 주는데 마음이 이끌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달님."

수장 중 한 명이 하벨에게 말을 걸었다.

분명 위아래가 존재했지만, 마냥 딱딱한 체계와는 달랐다.

"왜?"

지금도 말을 잘 받아주지 않는가.

무서움과 별개로 공존하는 부드러움에 수장은 한결 편안하게 물었다.

"다음에는 어디로 갑니까?"

수장의 눈동자에 벌써 기대가 어려 있었다.

"꿈나라."

하벨은 어느덧 어둑해진 밖을 보며 대답했다.

손에 시계가 들려 있지 않은 게 아쉬웠다.

"이제 잘 시간이 다 됐거든."

하벨 티에라는 성장기였다.

자신 때문에 성장기를 망칠 수는 없었기에 라르웬이 뒷수습 겸 임시로 마련한 숙소로 가야 했다.

푸하하핫!

언제 시체를 보고 무서워했냐는 듯 하벨이 꺼낸 말에 그곳에 있던 자들 대부분이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인데?"

하벨이 재차 꺼내는 말에도 여전히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카샬이 살기를 드러내려 하자 하벨이 이를 말렸다.

저들은 경직된 구조에 지친 자들이었다.

방금 말에 웃는다고 뭐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저들 사이에 공동체로서 경험한 일이 생기니 다행이질 않은가.

하벨은 주변을 둘러보다 그나마 말이 통할 것 같은 수장에게 걸어가 지시를 내렸다.

"내일 다시 올 테니까, 깨끗하게 치워놔. 누가 제일 깨끗하게 치웠는지 가려놓고."

"…정말로 가시는 겁니까?"

"그래. 가짜로 꾸미거나, 나 없다고 작당하지 마. 머리 굴려봤자 소용없다는 거 이제 알잖아?"

자신감이 아니라 마치 당연한 사실을 꺼내는 듯한 말에 수장은 허리를 넙죽 숙였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배신?

수상하기 그지없지만, 부하들이 '달님'이라고 부르는 저 남자가 오늘 벌인 일을 보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시체를 치우면서 저 시체가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생각했겠는가.

"가자, 꽃님아, 구름아."

하벨은 카샬과 레디나를 이어 페트리오의 부하들까지 불렀다.

건물 밖으로 벗어나기 전까지 임시 점령 중인, 가면단 소속이 된 뒷세계 사람들의 인사가 끊이질 않았다.

'불편하네, 진짜.'

하벨은 짜증이 일어났다.

어쩔 수 없이 뒷세계 세력을 포섭했지만, 하루 만에 마음이 바뀔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정말 저대로 놔둬도 괜찮은 겁니까?"

카샬이 물었다.

겨우 하루였다.

저렇게 인사를 하는 것 역시 어떻게 본다면 하나의 수작일 수 있지 않은가.

"나는 괜찮다고 보는데."

레디나는 등 뒤에 깍지를 끼며 말했다.

"내가 공포에 질린 사람을 얼마나 많이 봐왔겠어? 대충 삼일 이상은 저 상태일 거야."

공포라는 존재는 쉽게 떨쳐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잠을 잘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심지어 걷고 있는 와중에도 스멀스멀 덮치는 게 공포였다.

공포는 생각을 먹고 자라나고 커지기에 더하면 더했지 결코, 줄어들진 않을 테지.

'그리고 도련님께서 뒤에 많이 풀어주긴 했지만, 무서웠지.'

레디나는 곁눈질로 하벨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재미있어 보이는 도련님인 줄 알았는데, 저 어마어마한 행동력은 대체 뭔지.

마냥 순진해 보이는 저 속에 몇십 년 묵은 구렁이가 자꾸만 보이는 게 참 신기했다.

"꽃님아. 내가 평소에 생각하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아도 이건 경우가 다르지. 몇 번 봤잖아?"

하벨은 잠깐 카샬을 바라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대장!]

자신에게 쪼르르 날아오는 아라를 보자 하벨은 활짝 올라가는 자신의 입꼬리를 느꼈다.

가면이 표정을 숨겨주어 다행이다 싶었다.

[대장!]

아라가 하벨을 안았다.

왜인지 살짝 울적해 보였기에 하벨은 덩달아 가슴이 철렁거렸다.

[이 몸이 정령들이랑 술래잡기했는데, 이 몸만 자꾸 잡혀서 하나도 재미없었어.]

아라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하벨이 웃음을 터트리자 그와 나란히 걷던 레디나가 깜짝 놀랐다.

"…왜 그러세요?"

"아, 그럴 일이 있어서."

하벨은 자신의 옷자락을 만지는 척하며 아라를 토닥였다.

[아차! 이 몸이 시무룩해서 잊었는데, 정령들은 여기에서 당분간 머물 거래. 내일 또 술래잡기하자고 하는데, 이 몸은…….]

아라의 꼬리가 힘없이 늘어졌다.

[이 몸은 술래잡기가 싫어.]

* * *

"…흐음."

라르웬은 하벨은 물론, 카샬과 레디나에게까지 나는 피 냄새에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뒷세계에 간다고 했을 때,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닌 건지.

"잘한다, 카샬. 하벨을 데리고 좋은 곳에 갔다 왔네."

"예. 제가 제일 만만하죠."

카샬은 불만을 터트렸다.

되도록 하벨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게 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는데.

라르웬은 당장 입꼬리를 올렸다.

"당연히 네가 제일 만만하지. 본 지도 얼마 안 된 레디나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잖아?"

한숨을 내쉬는 카샬의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라르웬은 다시 하벨을 바라보았다.

눈매가 살짝 날카로워졌다.

또 무슨 사고를 쳤을지.

적어도 자신이 왕실에서 벌어진 일을 뒷수습하고 올 때까지는 돌아올 거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벌써 새벽이지 않은가.

"형님. 혹시 좀도둑은 왔습니까?"

하벨이 묻자 라르웬은 손가락으로 욕실을 가리켰다.

"일단 씻어. 대답은 그 후에 할 테니까."

하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 *

"제가 늦었……."

페트리오는 인기척이 나는 방으로 들어가다 말고 그대로 굳었다.

"…미쳤어? 그걸 허락했다고? 뒷세계 통일? …하."

날카로운 라르웬의 목소리에 페트리오는 동그랗게 뜬 눈동자를 굴렸다.

"아니, 제가 허락할 위치입니까? 속된 말로 도련님께서 까라면 까고 구르라면 구를 위치잖습니까."

카샬은 억울해하며 소리쳤다.

페트리오의 미간에 주름이 살짝 잡혀갔다.

"위치고 뭐고 네가 하벨과 동행한 이유를 잊었어? 뭐가 됐든 위험하다 싶으면 말려야지. 평소에는 잘만 하면서."

"그러면 둘째 도련님께서는 뒷수습이 왜 이렇게 오래 걸린 겁니까? 저는 진짜 계속 둘째 도련님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렸다고? 아니, 너희가 어딜 가는 줄 알고 내가 가냐고. 나도 좀도둑이 임시로 잡은 약속 장소로 갔다가 아무도 없길래 주변만 빙그르르 돌고 허탕 치고 왔다고."

"정령사면서 왜 흔적도 못 쫓습니까? 평소에는 잘만 쫓잖습니까."

"정령사가 무슨 만능인 줄 알아?"

"오오, 그러면 어떻게 흔적을 쫓는 거예요?"

레디나는 재미있는 구경을 바라보다 방긋 웃으며 물었다.

"지금 그게 중요해? 머리가 세 개인데, 하벨이 직접 움직여야 하는 일인지 아닌지도 몰라?"

라르웬은 레디나를 이어 페트리오까지 사납게 쳐다보았다.

"전 도련님의 신도라 믿고 따라야죠."

양손을 가지런히 움켜쥐고 기도하는 듯한 레디나의 모습에 라르웬은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페트리오, 너는 적어도 생각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네. 하벨이 뒷세계 위치가 어디 있는지 묻는다고 쫄래쫄래 알려줘?"

갑자기 불똥이 튀자 페트리오는 손이라도 들고 있어야 하는가 싶었다.

분명 하벨이 성년이 되지 못한 소년이라는 걸 알지만, 막상 말을 나누면 나이는 까먹고 말았으니.

"…도련님은요?"

페트리오가 조심스럽게 묻자 레디나가 여전히 방긋 웃으며 알려주었다.

"씻자마자 기절하듯 잠에 빠지셨대요. 엄청 피곤했나 봐요."

"엄청 피곤한 게 아니라, 병 때문이야. 가만히만 있어도 병을 치료하느라 체력이 소진될 테니까."

라르웬은 흥분을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하벨은 남들이 사용하는 정화제에 3배 이상을 사용하는데, 거의 몸속에서 자라는 푸른 돌을 막고자 쓰이니 지치지 않는 게 이상했다.

라르웬은 다시 자리 앉았고, 그와 언성을 오가던 카샬도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한 표정으로 궁둥이를 붙였다.

"진짜 재미있게 사시네요."

그 모습에 레디나가 키득거렸다.

"일상이지 뭐. 맨날 만만한 게 나니까."

카샬은 코웃음을 치며 노골적으로 라르웬을 째려보았다.

"아버지께 이런 말을 듣고 싶은 거라면 나도 그만하고."

"계속하셔도 됩니다. 오늘따라 둘째 도련님의 말씀이 잔잔한 음악처럼 들리네요?"

카샬이 갑자기 방긋 웃었다.

"좀도둑. 넌 뭘 가지고 왔는데?"

라르웬은 그제야 만족하며 페트리오를 바라보았다.

멀뚱히 서 있던 페트리오는 곧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하지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이야, 주인이 확실하네. 만족스러워."

라르웬은 페트리오의 태도를 칭찬했다.

귀족들의 세계에는 가족도 물어뜯기 마련이니 경계하는 건 당연했다.

'그래도 좀 섭섭하려고 그러네, 하벨. 나는 괜찮다는 말 하나는 해주지.'

설마 하벨 자신이 기절할 걸 알았겠는가.

그걸 알지만, 라르웬은 밀려오는 섭섭함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럼 나한테 말해."

카샬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싫은데?"

"……?"

"푸하하하!"

카샬은 그대로 굳어졌고, 라르웬은 신나게 웃었다.

덩달아 웃으려던 레디나가 시선을 돌렸다.

라르웬의 웃음마저 뚝 하고 멈췄다.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에 라르웬은 자신의 입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둘째 도련님 때문에 도련님이 깨셨잖습니까."

카샬은 얼굴을 찌푸렸다.

임시로 구한 집이었기에 방음이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으함."

하벨은 눈을 반도 뜨지 못한 채 하품하며 내려왔다.

[왼발 한 번 더 내디뎌. 오른발 말고 왼발 말이야! 왼발!]

루룸은 오른발부터 내려오자 기겁하며 소리쳤다.

"아라는 어디 가고 네가 그러고 있어?"

라르웬이 묻자 루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침대 위에 자고 있지. 나도 그냥 자려고 했는데 얘 이마 빨개진 거 보여?]

루룸은 바람을 살짝 일으켜 빨개진 하벨의 이마를 보였다.

갑작스러운 바람에 하벨은 깜짝 놀라며 계단 난간을 잡으러 허둥지둥거렸다.

[저런데 어떻게 그냥 보네. 라르웬 너 같으면 그냥 보내겠어?]

"절대 못 보내지."

라르웬이 허공을 보자 레디나와 페트리오는 낯섦을 숨기지 못했다.

"잠에 약한 건 여전하시네요."

카샬이 자리에서 일어나 하벨을 부축하며 내려왔다.

"그러게. 어릴 때랑 변한 게 없네."

라르웬은 피식거리다 레디나가 꺼내는 말에 정색했다.

"이제야 틈이 보이네요."

"뭐?"

"아뇨. 그냥 그렇다고요."

레디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비몽사몽 하던 중에 부딪힌 이마가 이제야 아픈지 하벨은 이마를 문질렀다.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자마자 밀려드는 졸음을 도무지 이겨낼 수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이마가 붉으십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하벨은 자신을 걱정하는 페트리오를 보며 웃었다.

"지금 새벽입니다. …한, 3시간 뒤에 해가 뜨지 않을까 싶네요."

"어땠어?"

하벨의 물음에 페트리오는 고민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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