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너희가 누구라고?(2)
* * *
하벨은 엘리베이터로 들어가 아라를 보았다.
[꼭대기에 있다고 했어.]
"5층."
뒤따라 들어온 카샬은 안으로 들어오려는 적의 배를 걷어찬 뒤에 5층을 눌렀다.
"카샬."
하벨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카샬을 불렀다.
"예, 도련님."
"검 말이야, 어디에서 배웠어?"
기사들이 사용하는 건 마법의 변형인 '오러'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카샬은 오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심지어 마법도 사용하지 않았고.
"스승님께 배웠습니다."
카샬은 불현듯 두려운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몸을 떨었다.
"왜 그래?"
"갑자기 스승님이 시킨 일이 생각나네요. 지금 제가 집사 일이 바빠서 미뤄두고 있었거든요."
"보통은 그 반대가 아니야?"
"좀 허무맹랑한 일이라……."
카샬은 말꼬리를 흐렸다.
분명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하벨이 며칠이나 꼬리를 잡고 놀려댈 게 뻔했다.
띵.
엘리베이터가 5층에 도착했다.
"나중에 이야기해야겠네. 아라야, 꼬리로 눈 가려."
[응!]
아라는 얼른 꼬리에 자신의 얼굴을 묻었다.
하벨은 문이 열리자마자 순환의 길에 쏟아지는 정령수로 만들어낸 씨앗을 앞으로 던졌다.
'나무로 자라나라.'
두두두두!
공중을 떠돌던 씨앗이 단숨에 성장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 적들을 휩쓸었다.
졸지에 가지에 밀려나거나 깔린 적들에게 기다리는 건 죽음뿐이었다.
쉬익.
카샬이 휘두른 한 번의 궤적에 여러 명의 머리가 땅을 굴렀다.
하벨의 손에 우산이 쥐어졌다.
'오늘의 색은 빨강으로.'
붉은색을 띠는 우산이 그토록 섬뜩해 보일 수가 없었다.
"적은 고작 두 명이라고! 죽여!"
"막으라고!"
하벨이 걸어오자 수장으로 보이는 자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부웅.
바람 소리를 따라 하벨의 왼쪽에서 빛이 번쩍거렸다.
탁!
하벨이 우산을 반사적으로 휘둘렀지만, 묵직한 힘에 뒤로 밀렸다.
'……!'
무게 중심이 뒤로 젖혀지는 순간, 나무에서 자라난 가지가 허리를 받치고 놈의 공격을 막아주었다.
[우오옵!]
아라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기겁했다.
'저게 뭐지……?'
하벨은 뒤늦게 자신을 공격한 힘의 정체를 보았다.
굵게 자란 가지를 두부 썰 듯 베어버리는 검 주변에 연기처럼 피어난 빛이 보였다.
하벨은 오묘한 저 힘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독이 섞인 물을 뿌리며 뒤로 물러섰고, 카샬이 달려와 놈의 검을 받아냈다.
깡!
"뒤로 물러서십시오, 오러 사용자입니다."
"저게 오러라고?"
하벨은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가 튀어나올 뻔했다.
저 연기가 오러라니.
"예. 오러 사용자입니다. 대체 왜 이런 뒷세계에 있는지 모르겠네요."
카샬은 손잡이를 깊게 잡고는 놈의 검을 흘리며 앞으로 다리를 뻗어 나갔다.
오러가 어린 검은 그 어떤 명검보다 날카롭기에 막으면서 기회를 노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빛을 따라 그려지는 적의 검 궤적이 카샬의 눈에 보였다.
예전부터 들려왔던, 알 수 없는 소리가 바람 소리보다 먼저 방향을 알려주곤 했다.
육감과는 다른 자신의 힘이었기에 카샬은 몸을 뒤로 뺐다.
콰직!
적의 검 끝이 바닥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그대로 팔을 올려 검 끝이 아래로 향한 채 내리찍었다.
푸욱.
카샬의 검이 등에서 배를 관통했다.
바닥으로 무너지는 적의 등을 밟으며 검을 뽑았다.
콰드드득.
뼈가 갈리는 듯한 소리가 살벌해 방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대장, 대장, 저기 봐봐!]
아라가 다급히 앞발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찌직.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전에 하벨의 우산이 펴졌다.
팡.
우산을 덮치는 힘에 바람이 일어났음에도 하벨의 손에 밀려오는 반동은 생각보다 버틸 만했다.
'이게 우산이라니.'
우산을 접자마자 하벨은 한 남자의 손에 들린 찢어진 스크롤을 보았다.
'비싼 거라던데.'
하벨은 정령수로 손아귀에 만들어낸 물을 꽉 눌렀고, 원형톱날처럼 평평하게 된 물을 던졌다.
단계를 넘었기에 그 날카로움은 검 못지않았다.
"으, 으아아악!"
적의 비명이 퍼지고, 시선이 쏠릴 때, 하벨은 손목 일부까지 파고든 물을 단숨에 지워버리며 경고를 내뱉었다.
"앉아."
오러 사용자를 가뿐히 무찌른 것도 모자라 마법까지 막은 모습에 거스를 수 없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궁둥이를 붙이는 이들이 생겨났다.
격이 달랐다.
번져가는 두려움은 곧 그 방에 있는 모두의 마음을 꺾었고, 검을 떨어트리는 이들까지 늘어났다.
"여긴 이제부터 가면단이 점령했다."
가면단이라는 우스운 이름과 고작 두 명이라는 숫자는 이제 적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점령.
패배했다는 그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고자 했다.
"간단히 말해서 지도자가 바뀌었지만, 딱히 달라지는 건 없어. 가면단에 반기를 들지 않으면 평소처럼 해도 된다는 말이야."
하벨은 자연스럽게 상석에 앉은 수장에게 걸어갔다.
사색이 된 수장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하벨은 자리에 앉아 회의에 모인 자들을 쳐다보았다.
옷차림을 보아 수장이 맞는 듯했다.
무슨 회의가 열렸건 간에 이제는 아무 상관 없었다.
"너희가 이제 누구라고?"
"……."
그들이 침묵했고, 하벨은 별수 없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조금 모자랐던 모양이었다.
"이제부터 움직이는 놈들은 죽어."
가벼운 말임에도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벨은 독의 힘을 선택했다.
단계를 넘어서자 독은 하나가 아닌, 세 개의 힘으로 나뉘었다.
헤레스와 함께 독을 확인할 때, 색별로 구분이 가능했다.
보라색을 띠는 힘은 죽지 않지만, 어떤 효과를 지닌 독 류.
빨간색을 띠는 힘은 조건이나, 시간이 필요한 극독 류.
검은색을 띠는 힘은 그 자리에서 바로 죽는 극독 류.
색을 선택할 수는 있으나, 색마다 어떤 식의 독 효과가 오는지는 아직 조절할 수 없었다.
'자, 오늘은 어떤 독이 나오려나.'
하벨은 집중했다.
아직은 독의 힘을 조절하지 못할 뿐이지, 나중에는 아닐 테니.
"붙잡고, 입 벌려."
하벨의 지시에 카샬은 바로 움직였던 수장 중 한 명의 볼을 세게 쥐어서는 고개를 젖혔다.
저항해보지만, 이미 하벨의 손가락을 타고 보라색을 띤 독의 힘이 놈의 혀에 닿았다.
꿀꺽.
억지로 삼켜지자, 30초도 되지 않아 놈의 얼굴이 붉게 타오를 듯 빨개졌다.
"뜨, 뜨거워! 몸이 뜨겁다고!"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카샬의 검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허벅지에 쑤셨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해독제를 원하나?"
하벨이 묻자 고통을 이겨내며 자신의 옷을 찢던 수장이 추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합니다! 제발, 제발 해독제를 주십시오!"
"이제 네가 누구라고?"
"가, 가면단입니다! 저는 가면단 소속입니다!"
하벨은 다시 수장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 이제 너희가 누구지?"
당연한 대답을 원하는 저 말과 달 무늬가 들어간 가면 너머로 섬뜩한 이채가 뒤섞여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 말문을 터트렸다.
"가면단입니다!"
대체 저런 괴물이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가끔 수장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튀어나온 송곳과 달랐다.
위만 바라봤고, 위를 알기에 자신들을 통째로 삼킬 만한 자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콰앙!
문이 부서지며 피로 범벅이 된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에 있던 자들은 바짝 긴장했다.
"왔어?"
하벨의 말은 마지막, 혹시나 하는 저들의 희망마저 앗아가 버렸다.
"예. 오래 걸려 죄송합니다."
"아니야. 좋은 순간에 왔어. 더 빨리 왔으면 내가 민망할 뻔했으니까."
하벨은 페트리오의 부하들을 한 명씩 바라보며 정예가 맞음을 확인했다.
저들 몸에 묻은 피는 상처로 생긴 게 아니었고, 지친 기색도 보이질 않았다.
하벨은 다시 상석으로 걸어가 앉았다.
"오늘 처음 봤겠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나? 어차피 수장이 바뀐 것도 한두 번이 아닐 테고."
독에 당한 수장을 포함해 총 다섯 명이 보였다.
저기에서 얼마나 죽을지는 모르겠지만, 저 자리를 원하는 이들은 많았다.
"그대들이 무엇을 위해 움직이는지 알고 있네. 명예나 대의, 뭐 그런 걸 올리는 건 좀 우습고. 그냥 귀족에게 들러붙어 그들이 주는 돈과 힘 때문이 아닌가?"
하벨은 뒷세계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이유를 적나라하게 언급했다.
"뒷세계에서도 급이 있다고 들었어. 오늘 너희가 왜 모였는지는 궁금하지 않네. 그냥 이렇게 여러 명 모여야만 하나를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약해빠졌다는 건 확실히 알았으니까."
이어 회의가 열린 사실을 꼬집으며 비아냥거렸다.
그럼에도 누구 하나 입을 벙긋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시퍼런 칼날이 주변에 보이는데 어떻게 뭘 하겠는가?
"하지만 이제는 다르지. 분명 처음에 우리가 등장했을 때, '고작'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꽤 많을 거야. 그래서 그 끝이 어떻게 됐을까?"
하벨이 꺼내는 여유로운 손짓에 아라가 당당하게 웃었다.
[다 대장 손에 박살 났지! 이 몸이, 어음, 반쯤 봤지만!]
하벨은 웃음을 참지 않고 그대로 흘렸다.
지금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저들 모두 예민하게 받아드릴 때니, 가만히 있는 것도 신경 쓰일 테지.
"다른 건 몰라도 딱 두 개는 약속하지. 배신자는 용서하지 않아. 배신자가 나오는 어느 쪽이든 수장들이 책임질 거야. 이게 싫으면 제대로 관리해."
슬금슬금 기어오르는 불만에 하벨은 대놓고 쳐다보았다.
금세 고개를 숙이는 꼴이 참 우스웠다.
"배신자를 고발하는 자들에게 상을 주지. 그게 수장의 자리일지라도."
"그게 지금 말이……."
콱!
카샬이 불만을 품는 자 손가락 바로 옆에 검을 내리찍었다.
"단, 거짓으로 꾸미거나 위증의 죄는 죽음이야."
하벨은 손가락을 하나 올렸다.
언급한 한 가지가 끝났다는 말이었다.
"첫 번째를 지킨다면 너희가 그간 상대하지 못했던 뒷세계 세력들이 너희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야."
가벼운 목소리와 달리 말은 무거웠다.
단순히 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들자 그곳에 있던 수장들의 눈빛이 천천히 바뀌었다.
돈을 밝히는 만큼 계산이 빠른 모습에 하벨은 번지르르하게 혀를 놀린 보람을 느꼈다.
"어떤가? 이래도 가면단이 되기 싫은가?"
* * *
시퍼런 칼날이 가면을 스치려던 차, 그녀의 머리카락부터 연기에 휘감겼다.
검이 벤 건 애꿎은 연기였다.
실처럼 이어진 연기는 검을 휘둘렀던 자의 뒤에서 나타나 조용히 목에 사선을 그려주었다.
푸시식.
동맥을 끊어버리자 거침없이 피가 쏟아졌고, 그녀는 피가 튈 곳을 정확히 예상한 듯 자리를 옮겼다.
"이제는… 없네."
가면을 벗은 레디나의 눈이 휘었다.
피를 머금은 꽃이 폈다.
몇 송이나 폈는지 세보진 않았지만, 단검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갑자기 들려오는 발소리에 레디나는 활짝 웃으며 가면을 쓴 상태로 문으로 향했다.
소리 없는 발걸음과 함께 문을 살짝 열던 레디나는 순간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으음.'
힘이 제법 센 뒷세계 수장이었던 만큼 그를 지키던 호위 역시 일반인이 아니었다.
항복하지 않아 모조리 죽여버렸지만, 이 모습을 하벨에게 보여도 괜찮을지.
'도련님이 사람 죽는 모습을 봤어도 이건 조금 심하지 않을까. 날 무서워하면 어떡하지?'
레디나는 피가 튀지 않은 자신의 옷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우물쭈물하다 하벨을 향해 조용히 물었다.
"안이 엉망인데 괜찮겠어요?"
"괜찮아."
하벨은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말에 키득거렸다.
"진짜 놀라지 마세요."
"대충 예상이 되니까, 놀라지 않아."
레디나는 몇 번이나 하벨에게 물어본 뒤에야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하. 적당히 좀 하지."
안을 본 카샬이 대놓고 불만을 터트리며 하벨 앞에 섰다.
"왜?"
"간단히 청소할 테니 나중에 들어오십시오."
"괜찮은데? 나보다는 쟤들이 심각한데?"
하벨이 엄지로 자신들을 뒤따라 왔던 뒷세계 수장들을 가리켰다.
처음 그랬듯 힘으로 굴복시킨 이들 중 일부였고, 뒷세계 수장이 아닌가.
하지만 레디나가 만들어낸 참사에 마치 끔찍한 걸 보듯 쳐다보았다.
오죽하면 헛구역질하는 이가 나올 정도였다.
'아라한테 주변 정령들과 놀고 있으라고 말하길 잘했네.'
사람 죽는 게 뭐가 좋다고 아라한테 보여주겠는가.
아라는 좋은 것만 보고 자라야지.
"저놈들이 병신인 겁니다. 도련님께서는 이런 거 보시면 안 됩니다. 잠깐 저쪽에 계십시오."
카샬은 방 밖 구석진 곳을 가리켰고, 곧 수장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따라와. 청소해야지."
"…청소라뇨?"
수장들이 기겁했다.
보는 것도 끔찍한데 청소라니.
"그럼, 달님이 저곳에 앉을 텐데 더러운 꼴을 봐야겠나?"
'…아.'
하벨은 카샬이 뭘 하려는지 눈치채고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시체를 직접 치우면 공포심이 마음에 깊게 자리 잡는 건 당연했다.
"이제 얼마나 남았어요?"
레디나가 하벨의 뒤를 따라 물었다.
하벨은 자신을 따라오는 페트리오의 부하들에게 잠깐 대기하라는 신호를 보내며 구석으로 걸어갔다.
이곳 뒷세계 수장들을 포섭할 때보다 랜턴의 검은 불꽃을 조금 더 커졌다는 걸 확인하며 대답했다.
이건 또 무슨 경우일까.
"한… 반 정도? 처음에 운이 좋았지."
뒷세계 수장들이 모여 회의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작은 세력 여러 개가 모였기에 큰 세력 하나를 무너트리기엔 충분했다.
그들이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이유는 서로를 향한 불신과 불확실한 사실에 미리 겁에 질렸기 때문이었다.
한두 번 점령에 성공하다 보니 벌써 자신감이 샘솟는 자들도 있고, 시키지도 않았는데 가면단이라는 이름까지 적에게 언급하곤 했다.
"벌써 반이나요? 저보다 더 빠르잖아요?"
레디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빠르면 좋은 거지만, 잊으면 안 돼. 진짜 목표는 저들도, 뒷세계도 아니니까."
자신의 계획에서 지금 제일 중요한 사람은 페트리오였다.
그가 모스튼 벨의 약점을 캐내야만 다음으로 향하는 다리가 만들어질 수 있으니까.
"도련님."
레디나가 작게 속삭였다.
"왜?"
"이런 말을 해서 죄송한데요.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요."
"언제는 물어보고 말했어?"
"그 랜턴 장식을 가끔 보시곤 하시던데. 감정 조절, 뭐 그런 건가요? 제가 보기에도 예뻐요."
역시 보지 못하는 건가.
아라도 가끔 이 장식을 건드리지만, 불꽃이 피어오르는 건 몰랐다.
지금까지 랜턴의 불꽃을 볼 수 있는 자는 오직 자신뿐이었다.
"그런 셈이지."
"그럼 하나 더 물어봐도 돼요?"
이게 진짜 묻고 싶은 질문인지 레디나의 표정이 달라졌다.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그래."
"지금 이 일을 왜 하시는 거예요? 도련님께서 굳이 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요."
레디나는 얼른 내내 품었던 궁금증을 꺼냈다.
자신이야 하벨의 지시이자 에르티안 왕국을 좀먹었던, 악당인 귀족들을 처리하기에 한다고 하지만, 하벨이 굳이 이번 일에 끼어들 필요가 있는지 의문을 느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벨은 손가락으로 목을 긋는 흉내를 냈다.
"예전부터 개 같은 귀족들을 없애고 싶었거든."
지독한 슬픔에 빠져 손을 놓아버렸던 백성들이, 자신이 자비라는 이름으로 죽이지 않고 내버려 뒀던 관료들의 손에 어떻게 무너져내렸는지 알기에 하고 싶었다.
―용왕님. 백성들을 지키고 싶으시다면 아무것도 하지 마시고, 그냥 왕좌에 앉아 계십시오. 그것만이 백성들을 지킬 유일한 방법입니다.
하벨은 관료들의 인형이 되기 전날에 들었던 그 말을 떠올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보고 싶어. 내가 움직이면 얼마나 달라지는지 궁금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