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너희가 누구라고?
* * *
[우와아! 가면단 출동!]
아라가 만세를 불렀다.
하벨과 카샬이 가면을 쓰고 돌아다니면 책에 그려진 장난꾸러기 요정을 실제로 만나는 것 같아 너무 행복했다.
장난꾸러기 요정도 사람들 몰래몰래 장난을 치곤 했으니까.
"…가면단이요?"
레디나는 웃음을 참아보려 하나 어깨가 들썩거렸다.
"하……. 진짜 최악이야."
카샬이 책상이 꺼지라 한숨을 내쉬었고, 페트리오는 신중하게 하벨에게 물었다.
"도련님. 그럼 기한은 5일로 잡으면 되겠습니까?"
"맞아. 넉넉하게 일주일로 잡고 싶지만, 나도 그 이상은 여유 시간이 없어. 아마 오늘이나, 내일 초대장이 날아오겠지?"
고작 왕실로 오는데 준비 기간이 이틀 넘게 걸린 걸 보면 연회 준비는 얼마나 더 빡빡 할까.
"솔직히 이틀도 빡빡합니다. 새 옷을 맞추는 건 글렀네요."
카샬은 집사로서 촉박한 일정에 혀를 내둘렀다.
"그냥 있는 옷으로 입자. 반짝거리는 게 많던데?"
"구색이든 뭐든 연회잖습니까. 아주 그냥 콱 눌러놔야 합니다."
"카샬."
"예, 도련님. 무엇이든 준비해 보이겠습니다."
"연회에 입을 옷은 검은색으로 부탁해."
"검은 옷이요? 도련님께서는 밝은 옷이 더 잘 어울리십니다."
카샬은 금세 불만을 터트렸다.
방금 자신이 귀족들을 눌러줘야 한다는 말을 잊었는지.
"아니. 계획이 변경될 것 같아서."
어쩌면 귀족 세계에 진출하지 못할지도 몰랐다.
느긋하게 한 놈씩 처리하려고 했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다면 그쪽으로 시선을 돌려야 하지 않겠는가.
"자, 지도 펼쳐줘, 좀도둑."
하벨의 지시에 페트리오는 미리 가져왔던 지도를 펼쳤다.
"지금 선택과 집중을 할 차례야. 중간 허리 끊어버리고, 머리를 치면 밑에 있는 귀족들은 넙죽 엎드릴 수밖에 없어."
[어…?]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장, 아닐 수도 있잖아. 왜 엎드린다고 생각하는 거야?]
"음, 도련님. 제가 아는 귀족들은 죄다 질겼어요. 완전히 박멸하지 않는 이상 잘라내도 잡초처럼 또 자라나죠. 그런 놈들이 엎드린다고요? 말도 안 됩니다."
레디나는 하벨의 말을 부정했다.
"레디나 말이 맞습니다. 허리를 끊어내기 전에 분명 눈치채고 다 같이 손을 잡고 덤빌 게 분명합니다."
페트리오 역시 하벨이 꺼낸 말을 회의적으로 생각했다.
귀족이 왜 귀족이겠는가.
"참나, 미리 반대하지 말고 끝까지 제대로 잘 들어. 뒤에 뭐가 더 있을 거니까."
카샬만이 하벨의 편에 선 상황에 하벨은 가볍게 웃었다.
"보통 때라면 나도 너희랑 똑같이 생각했을 거야."
하벨은 귀족들이 가진 정보력을 무시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하벨은 가슴에 손을 올려, 두어 번 가볍게 쳤다.
"하벨 티에라가 등장하지 않았다면."
"맞습니다. 도련님의 등장으로 모든 게 바뀌었죠."
하벨이 가정한 사실에 카샬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보십시오, 제가 도련님의 집사입니다.
그런 말이 담긴 듯 카샬은 활짝 웃었다.
'…대체 뭘 요구하려고 저러나.'
살짝 의심하는 듯한 하벨의 시선에 카샬은 웃음기를 금세 지웠다.
"도련님. 저는 저들과 다릅니다. 몇 년을… 아니, 어쨌든, 제가 도련님의 집사라는 사실은 잊지 말아 주십시오."
하벨은 대충 고개를 끄덕인 뒤에 아라를 이어 페트리오, 레디나까지 눈을 마주쳤다.
"내가 생각도 없이 왕자를 만났겠어?"
"아닙니다. 그런 생각한 적 없습니다."
페트리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몸도 그런 생각한 적 없어.]
아라도 깜짝 놀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단지, 귀족들이 도련님의 계획을 읽고 저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드리는 말씀이었습니다."
"걱정하지 마, 좀도둑. 방금 티에라 가문이 왕실과 돌아섰다는 귀족들의 바람을 이뤄주고 온 길이니까."
중도의 길을 걷던 티에라가 왕실과 돌아섰다.
계기 또한 완벽했다.
왕실에서 독을 사용해 룬델이 아끼던 막내아들이 죽을 뻔했다는데 멍청이가 아니고서야 왕실 편에 서겠는가.
"왕실이 티에라를 건든 이유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그건 다들 알고 있잖아? 솔직히 이유야 뭐든 가져다 붙이면 그만이지. 중요한 건 진실이든 아니든 티에라가 어디 편에 서느냐에 따라 이미 판도가 뒤바뀔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는 거야."
[…아! 알겠다! 이 몸은 대장이 뭘 하려는지 이제 알았어!]
꼬리를 꽉 껴안으며 고민하던 아라의 귀가 나비처럼 파닥였다.
[대장은 지금 이 몸한테 하던 장난을 하는 거야! 이 몸이 제일, 제일 좋아하는 물을 두고 정신 못 차렸을 때.]
아라가 양발을 높이 들었다.
['와악!' 하고 대장이 소리치면.]
아라는 곧 바짝 올린 양발을 옆으로 살짝 틀며 귀를 쫑긋 세웠다.
[이 몸이 '우오오옵!' 하고 소리치는 걸 보려는 거지?]
'역시 우리 아라가 제일 똑똑해.'
하벨은 자신이 정령사라는 사실을 티 내지 않으려 웃음을 삼켰다.
[헤헤, 이 몸이 맞았어! 이 몸이 맞았다고!]
아라의 꼬리가 붕붕 흔들렸다.
"죄송합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래서 도련님께서 이토록 서두르시는 거였습니까?"
"맞아. 연회 준비가 시작된 이후까지 귀족들의 시선은 서로를 향해 있을 거야. 어제의 동료가 이제는 경쟁자인 셈이니까."
하벨은 페트리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가면단이 뭘 하는 건가요?"
레디나의 목소리에 아직도 웃음이 섞여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면단'이라는 이름은 정말 최악이었다.
"아까 말한 선택과 집중이 바로 가면단이라는 이름을 써서 해야 할 일이지."
하벨은 페트리오를 보며 지도를 건드렸다.
"수도에 있는 귀족 중 중간급 귀족들이 어디에 있는지 표시해봐. 내가 말하는 중간급 귀족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위의 명령을 아래로 전달하는 자들이 아닙니까?"
"맞아."
하벨이 웃자 페트리오는 지도를 살피더니 거침없이 손을 놀렸다.
가슴이 요동쳤다.
평생 시체 처리와 정보나 여러 가지를 조작하는 삶을 살아왔다.
조작에 있어 가장 중요하건 진실이었다.
누가 무얼 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진실도 가짜로 꾸밀 수 있는 법.
'…이날을.'
수천 번 이상 머릿속에 박아뒀던 정보가 쉽게 사라지겠는가.
'기다렸다.'
페트리오의 손이 멈췄다.
그는 꽉 다문 입술을 세게 짓누르며 울분을 참는 듯 보였다.
조작한 클로이 체닐라의 유언장에 적힌 귀족들은 물론 추가된 귀족들까지 동그라미 표시가 되어 있었다.
왕실을 중심으로 둥글게 둘러싼 모습에 하벨은 주저 없이 레디나를 불렀다.
"레디나."
"네. 몇 명을 처리하면 될까요? 아무래도 상대가 귀족이라 많이는 안 된다는 거 아시죠?"
눈으로 숫자를 세던 레디나가 활짝 웃었다.
"아니. 지금 처리해야 할 대상은 귀족이 아니라 뒷세계 수장들이야."
"그럼, 말이 다르죠. 반 이상도 가능하겠는데요?"
"되도록 많이. 아무것도 묻지 말고 죽여."
하벨의 목소리에 여전히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지금은 이전 뒷세계 사건처럼 무언가를 캘 이유가 없었고, 티에라 가문을 보호하기 위해 벽을 세울 필요도 없었다.
"죽이… 다뇨?"
페트리오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가면단은 이제 수도에 있는 뒷세계를 전부 장악할 거야. 귀족들이 놈들을 움직이기 전에 아주 빠르게 말이야."
뒷세계는 어차피 귀족들이 쓰다 버릴 말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었다.
서로의 뒷세계를 건들지 않은 이유는 그 뒤에 귀족들이 있기 때문일 뿐, 하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럼, 뒷세계를 모조리 장악하면 어떻게 될까.
"장악할 수 없는 건 아니지만, 통일은 불가능합니다. 무너질 겁니다."
뒷세계에 몸을 담았기에 페트리오는 하벨이 하려는 일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소리인지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알아. 그런데 좀도둑 너도 알잖아? 뒷세계를 장악해 정보를 되도록 억누르지 않으면 이번 작전은 무조건 실패한다는 걸."
"예. 잘 알고 있습니다. 뒷세계는 귀족들의 말이자, 눈이라는 것도요."
하벨은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쳤다.
"최대 5일. 이 정도는 버틸 수 있겠어?"
"그 정도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이후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괜찮아. 지금까지 하늘이라 믿었던 귀족들이 사라진 상태에서 놈들이 뭘 어떻게 하겠어?"
"도련님."
카샬이 무겁던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하벨이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은 듯했다.
"조용히 일을 처리한다고 해도 소란이 일어날 겁니다. 이건 어떻게 막으실 셈입니까?"
"그건 문제없어. 이 바닥에 싸움은 일상이니 소란이 일어난다고 해도 뒷세계 수장을 차지하기 위한 패거리로 위장하면 그뿐이니까."
페트리오가 입꼬리를 슬쩍 올리자 카샬은 눈살을 찌푸렸다.
몇 번을 봐도 재수 없었다.
"좀도둑, 너는 모스튼 벨의 현재 약점을 캐. 네가 알았던 사실과 같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정확해야 하니까 수단과 방법 가릴 필요 없어."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겠습니다."
다시 또 자신의 힘을 귀족에게 쓸 날이 올 줄이야.
이전과는 반드시 다른 방식으로 쓰여야 함을 가슴 속에 명심하며 페트리오는 허리를 숙였다.
"레디나, 너는 신경 쓰지 말고 네 방식대로 해. 패거리로 위장하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암살자가 우르르 몰리는 것도 우스웠기에 하벨은 레디나에게 내렸던 지시를 다시 언급했다.
"도련님. 혹시 가면단이라는 이름을 꺼내도 될까요?"
"편할 대로."
하벨에게 허락을 받자 레디나는 바로 손을 내밀었다.
"그럼, 저도 가면 하나 주세요."
카샬이 당장 아공간 주머니를 뒤지자 하벨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손 내려, 카샬."
다른 건 몰라도 꽃무늬 가면만큼은 놓게 둘 수 없지.
카샬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 * *
[…대장, 대장!]
아라가 세차게 날아왔다.
[이 몸이 정령들한테 물어봤는데, 어디 있는지 금방 알아냈어.]
아라는 꼬리를 흔들며 앞발로 방향을 가리켰다.
[이 몸만 따라와.]
하벨은 카샬과 페트리오의 사람들과 합류해 첫 번째 먹잇감을 노렸다.
페트리오가 대략적인 위치를 알려줘도, 지금 랜턴에 점보다 작은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지만,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다.
현재 가장 믿음직한 존재는 바로 아라였다.
정령들이 불쾌함을 언급하며 자신의 등장에 물러서는 것과 별개로 아라는 어디든 환영받았으니.
[이 몸이 들었는데, 저기 앞에 있대. 지금 어음, 회의하고 있다고 했어!]
하벨은 아라의 말을 들으며 아라가 가리킨 건물로 나아갔다.
'회의라니. 상황이 딱 좋네.'
뒷세계 수장들도 위아래가 있었다.
혼자 움직이는 레디나는 위에 있는 자를, 다수로 움직이는 자신은 아래에 있는 자들을 노렸다.
레디나가 뒷세계에 혼란을 주면 자신은 그 틈에 작은 세력부터 흡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그런데 회의라니.
'뒷세계 수장들이 모이는 회의였으면 좋겠는데.'
"누가 보냈어? 당장 안 꺼져?"
건물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로 보이는 이들은 열대 명 될까 말까 한 무리에 살짝 경계하며 날카롭게 짖어댔다.
"누구 앞이라고 그렇게 시끄럽게 떠들어?"
카샬은 피식거렸다.
"뭐? 누구 앞……."
경비가 말을 잇기 전, 카샬은 얼굴을 잡아서는 벽에 뭉개듯 내리쳤다.
쾅!
카샬이 손을 떼며 남은 경비들을 쳐다보자 화사한 꽃무늬가 들어간 가면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에 그대로 행동을 멈췄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하벨은 뒤늦게 들려오는 놈들의 비명에도 주변을 쳐다보지 않고 문으로 향했다.
페트리오의 부하들이 당장 문을 박살 내 하벨이 가는 길을 열어주었고, 갑자기 일어난 소란에 계단을 타고 사람들이 내려왔다.
"어느 뒷세계에서 보낸 거냐!"
"네놈들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날 한번 잘 잡았다. 회의 중에 쳐들어오다니, 운도 없지."
페트리오 말대로 이런 일이 빈번한지 바로 다른 뒷세계를 언급하는 모습에 하벨은 코웃음을 치며 중앙 계단으로 향했다.
스겅.
페트리오의 부하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대장, 대장! 여기 엘리베이터가 있어!]
"오."
하벨은 아라가 알려주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를 반겼다.
엘리베이터로 가기 전에 하벨은 페트리오의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위로 올라갈 테니까, 다 죽일 수 있나? 항복만 받아내도 충분해."
"물론입니다.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겠습니다."
페트리오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들의 목소리에 기합이 단단히 들어가 있었다.
―저는 티냐가 있어서 괜찮습니다. 도련님께서는 저들을 데려가십시오. 제 사람 중 정예로 된 이들입니다.
'뒷세계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데리고 다닐 건데, 얼마나 강한지도 알아야겠지?'
"달님."
카샬은 하벨에게 뛰어오던 적의 머리를 꿰뚫어 그대로 바닥으로 찍었다.
"왜?"
"위험하게 왜 혼자 돌아다니십니까?"
적의 머리에 박혔던 검을 뽑으며 카샬은 하벨을 혼냈다.
"혼자 아니야. 아라가 있는데?"
[응응! 이 몸이 있다구.]
"내 무기도 아직 안 꺼냈고."
하벨은 신이 난 목소리로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아마 적이 대기하고 있을 거야."
"예, 뻔하죠."
"부서트려. 할 수 있지?"
"뼈가 갈리도록 배운 것 중 하나라 자신 있습니다."
띵.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안을 재빨리 확인한 카샬은 평소처럼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손짓했다.
"타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