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화난 척(2)
* * *
꿀꺽.
바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벨이 귀족을 처벌하겠다고 말하다니.
그 말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내뱉은 소리인지 모르겠지만, 바안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당장 일어났다.
"적겠습니다."
그의 조급한 모습에 하벨은 바안을 이용하고자 한 사실이 내심 찔려 살살 말렸다.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아, 잠깐 소리 좀 질러주시겠습니까?"
"…소리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제 독살 사건이 왕실과 이어져 있다고 귀족들이 꾸며 놓았습니다. 아마 그게 사실이라 믿고 있는 자들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길 원하는 자들이 많겠지요. 하여, 들어줄 생각입니다."
"건방진 소리 하지 마십시오!"
바안은 갑자기 소리를 질렀고, 아라가 깜짝 놀라 허둥지둥거리며 하벨의 등에 매달렸다.
[까, 깜짝아! 이 몸은, 이 몸은 진짜 놀랐다구! 씨잉……!]
아라는 바안을 째려보았다.
"…이러면 됩니까?"
바안이 멋쩍은 표정을 짓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는 게 영 어색한 모양이었다.
"맞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저하."
"이런 걸로 칭찬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참 어색하네요."
"저하. 이번 일로 왕실이 고립될 겁니다."
"이미 예상했습니다.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견뎠던 시간에 비하면 정말로 짧지 않습니까?"
"잠깐, 실례합니다."
하벨은 목을 가다듬고 아라에게 신호를 준 뒤에 똑같이 소리쳤다.
"저하. 지금 이렇게 나오신다 이겁니까? 이러면 곤란하실 텐데요! 티에라 가문을 적으로 돌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잖습니까!"
바안은 표정과 말이 어울리지 않는 장난기가 어린 하벨의 표정에 새어 나올 것 같은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어릴 적, 밤에 몰래 성을 탐험했을 때가 떠올라 이상하게도 가슴이 들떴다.
"티에라 가문까지 돌아섰다 생각하는 순간, 줄어든 왕실의 견제만큼이나 고립되겠지만, 저하께서는 움직이기가 편하실 겁니다."
"귀족들이… 연회를 빌미로 왕실을 압박하겠네요."
바안은 종이를 찾으려 서랍장을 열다 말고 손잡이를 꼭 쥐었다.
"지금으로서 티에라 가문을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왕실뿐이니 압박이 들어오는 건 당연합니다."
룬델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분명 그의 책상에 수많은 초대장이 있었지만, 초대장을 보낸 목록만 정리할 뿐 답신을 보낸 적이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응답하는 건 왕실과 관련된 일뿐.
바안은 금박 무늬가 박힌 종이를 꺼내와 주저 없이 써 내리다 잠깐 손이 멈췄다.
"하벨 공,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콰앙!
하벨은 아라에게 눈짓을 준 뒤 책상을 때리며 대답했다.
"말씀하셔도 됩니다."
"…무례한 질문일지도 모릅니다."
"목줄에서 풀려나도 왕의 자리는 탐나지 않습니다. 아마 가주님 역시 마찬가지일 테지요."
하벨은 바안의 물음을 예측하고 대답했다.
이는 당연한 문제였다.
지금은 귀족들이라는 적이 있기에 티에라가 필요하지, 만약 공통의 적이 사라진다면 목줄이 풀린 티에라 가문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적이 될 수 있었다.
"무례한 질문을 꺼내 미안합니다."
"아직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저하. 그리고 당연한 질문이니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
하벨은 빙그레 웃었다.
마냥 순진한 줄 알았지만, 바안은 천천히 실속을 챙기고 있었다.
"저하, 그럼 일단 서명은 하지 마십시오. 다시 돌아올 때, 티에라 가문은 왕실을 탐내지 않는다는 조항과 함께 가주님의 서명을 받아오겠습니다. 제가 드리는 믿음입니다."
"…고맙습니다, 하벨 공. 공 앞에서 참 부끄러워집니다."
바안은 밀려오는 창피함에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제아무리 형제든 친우든 권력 앞에 모든 게 무너진다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곤 했다.
자신은 그런 왕이 되고 싶지 않고, 그런 사람도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벌써 하벨을 견제하는 자신의 모습이 한탄스럽기까지 했다.
"믿음은 내가 먼저 주겠습니다."
바안은 서명을 마치며 하벨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내가… 공을 위해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분명 자신의 역할이 있기에 하벨이 직접 찾아온 게 아니겠는가.
"저하께서는 공석을 메울 자들을 찾아주십시오."
"공석이라뇨……?"
낯선 말에 바안은 하벨과 눈을 마주했다.
하벨의 눈은 맑았고, 자신을 향한 질타를 찾아볼 수 없자 바안은 자신의 허벅지를 세게 쥐었다.
견제는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이를 후회하며 미안한 마음이 넘쳐 흘렀다.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자신의 처지가 애처롭기까지 했다.
"귀족들을 처리한다고 말씀드렸는데 벌써 잊으셨습니까?"
하벨의 눈이 조금 커졌다.
"처리가… 죽음이었단 말입니까?"
그 자리가 공석이 될 방법은 죽음 하나뿐이었다.
"그 방법 이외에 뭐가 있겠습니까?"
하벨이 개구쟁이처럼 웃자 바안은 뱀 앞에 선 쥐가 된 기분을 느꼈다.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 만남을 짧을수록 좋을 테니까요."
하벨은 계약서를 챙긴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하."
"…그래요."
바안은 이상할 정도로 밝은 하벨의 목소리에 긴장이 됐다.
하벨은 아까 자신이 놔둔, 정령수로 만들어진 씨앗을 의식하며 바안에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 바안. 안녕, 씨앗.]
아라는 앞발을 흔들며 미리 작별을 고했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 마시고, 저와 싸웠다는 사실만 기억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 점만 기억하겠습니다."
하벨은 분노를 삭이지 못한 얼굴로 밖으로 나왔다.
'두 걸음.'
안에서 언성이 올라간 소리가 들렸기에 시종들과 왕실 기사들은 물론 카샬과 정령 기사들까지 굳은 얼굴로 하벨을 쳐다보았다.
"…망할 새끼."
하벨은 소리는 죽이되 입 모양으로 똑똑히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어떻게 되셨습니까?"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해?"
카샬이 달려와 묻자 하벨은 바로 언성을 높였다.
누가 보아도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어떻게 된 것 같아? 응? 네가 보기에 어떻냐고."
하벨은 씩씩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네 걸음.'
하벨은 아라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카샬을 가리켰다.
[지금이야? 지금?]
아라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다 눈을 질끈 감고 카샬에게 매달렸다.
[에잇!]
카샬이 밀려오는 폭신거림에 흠칫거렸지만, 곧 아라라는 걸 알아챘다.
하벨이 보내는 신호였다.
하벨은 카샬을 곁눈질로 바라보다 마지막 발걸음을 내디디며 화분 사이에 둔 씨앗을 의식했다.
단계의 성장은 정령수가 닿는 범위도 넓혀 주었다.
'피어나라.'
하벨은 명령과 함께 화분에서 피어나는 어여쁜 꽃을 느끼며 입가에 살짝 고인 피를 삼키지 않고 일부러 흘러냈다.
정령수를 이용한 힘은 일정 횟수를 넘어서면 물의 저주까지 발동됐다.
원격 조종은 그런 횟수를 여러 번인 셈 쳤지만, 한 번만으로 물의 저주가 발동될 만큼 크게 잡아먹진 않았다.
'하지만 피가 흘렀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지.'
소문이라는 게 번지면 커지기 마련.
귀족들이 왕실을 압박해 티에라 가문을 불러내기 전까지 요양이라는 핑계를 대 시간을 버는 용도로는 완벽했다.
'여기서 이제 카샬의 역할을 커.'
"도, 도련님!"
카샬이 호들갑을 떨며 외쳤다.
'훌륭하네, 카샬.'
목소리와 표정까지 좋았다.
하벨은 일부러 피를 번지게 닦아서는 손바닥에 옅게, 넓게 퍼진 피를 내보였다.
천천히 비틀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아직도 몸도 낫지 않아서 무리하시면 안 된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남들이 오해할 말을 자연스럽게 이어가던 카샬은 하벨을 부축해서는 라르웬의 집사를 바라보았다.
"둘째 도련님께 알려주십시오. 바로 티에라로 향한다고요."
"맡겨 주십시오."
집사의 대답에 카샬은 하벨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정령 기사들이 하벨과 카샬을 둘러쌌을지라도 이미 귀족들의 시선을 막기는 어려웠다.
"…정말 이래도 괜찮은 거 맞습니까?"
카샬은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하벨을 재촉했다.
이미 하벨의 계획을 듣긴 했어도 사태가 많이 커졌다.
왕실에 몰려온 귀족들이 몇이며 그들의 수족인 왕실 시종이 몇인가.
하벨은 창가에 턱을 괴며 눈동자를 돌렸다.
카샬이 호들갑을 떨어도 랜턴에 켜졌던 검은 불꽃은 꺼지지 않았다.
왕실 밖을 벗어나서야 랜턴의 빛이 꺼졌으니 피어난 검은 불꽃을 꺼트리기에는 뭔가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하벨 티에라가 이런 이미지가 맞다며?"
"귀족들이 멋대로 만든 이미지입니다."
"대부분 사실이긴 하잖아."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확정 지을 줄은 몰랐습니다."
"괜찮아. 거기 있던 놈들 대부분이 사라질 텐데."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지금 만들어 놓은 이미지는 어차피 일회용일 뿐이었다.
"저놈들이 사라지면 그때, 다시 예쁘게 만들게."
[대장, 대장! 이 몸도 잘했지?]
아라는 카샬을 끌어안았던 흉내를 내며 물었다.
"맞아. 잘했어, 아라야."
"아라님. 혹시 다음에도 이런 일이 있다면 조금 더 세게, 오래 끌어안으셔도 괜찮습니다."
카샬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디 있는지 모를 아라를 향해 문제점을 알려주었다.
아라의 말도 안 될 만큼 부드러운 감각은 오래 즐기고 싶었다.
[그래? 이 몸이 다음에는 더 꽉 안아줄게!]
아라가 카샬을 껴안자 그는 웃음을 흘렸다.
"수작이 다 보인다, 카샬?"
하벨은 카샬에게 눈으로 경고했다.
"아라님께서 가끔 절 안아주곤 하십니다. 다음에라도 신호와 헷갈리면 안 되잖습니까."
[오, 카샬 말이 맞아! 이 몸이 카샬을 가끔 안아줘.]
"……?"
하벨은 깜짝 놀라며 아라를 쳐다보았다.
묘한 배신감이 들었지만, 치졸해 보일까, 말을 꺼내진 못했다.
하벨이 언짢아하는 모습을 보며 카샬은 태연하게 물었다.
"이제 좀도둑과 합류하면 되겠습니까?"
"맞아. 가주님도 알고 계시니 마차만 보네. 누가 가주님의 기사들인지 알고 있지?"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카샬의 목소리에 여전히 불만이 섞여 있자 하벨은 등받이에 기대다 말고 말했다.
"카샬. 나중에 하벨한테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준다니까?"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카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벨은 병약하다고 알려진 자신의 이미지를 이용하겠다고 말했다.
이미 다 아는 사실에 왜 불만을 품겠는가.
"도련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도 이해합니다. 처음부터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고 말씀하셨잖습니까?"
"맞아. 뒤에서 다른 일을 하려면 시선을 돌려놔야지."
이번 왕실 방문으로 귀족들이 원하던 흐름도 끌어냈고, 바람도 들어주었으니 시선이 쏠릴 건 당연했다.
낯가림도 있고, 유약하다는 말까지 퍼지면 얼마나 더 달려들 텐가.
잠깐이라도 막아 놔야 더 애가 타지 않겠는가.
'두꺼웠던 티에라 가문의 문이 열린 이상, 어차피 귀족들이 움직일 방향은 이제 하나다.'
이 틈에 티에라를 해치려들든, 포섭하려들든 그들이 원하는 존재는 하벨 티에라였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이해하는 표정이 아닌데? 아, 혹시 꽃님이가 되는 것 때문이야?"
하벨이 실실 웃었다.
"그것도 이미 말했잖아. 이해한다며?"
"제가 언제 이해한다고 말씀드렸습니까? 억지로 하는 거죠. 꽃 가면은 진짜, 제가, 아우……."
갑자기 높아진 언성을 억누르며 카샬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이번에 도련님께서 또 얼마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실지 걱정이 돼서 그럽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 내가?"
하벨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묻자 카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누가 있겠습니까?"
"카샬. 나는 절제를 알아. 그런 내게……."
푸흡.
카샬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 죄송합니다. 절제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갑자기 웃겨서요. 요새 왜 이렇게 단어가 웃긴지 모르겠습니다. 가을이라서 그런지."
"카샬."
"예, 도련님."
카샬이 얄밉게도 방긋 웃었다.
"네 가면은 내가 새로 구해줄게. 저번에 보니까 꽃이 덜 들어갔더라."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냥 무조건 잘못했습니다."
"그럼 뒤탈 없는 사람 몇 명만 포섭해봐. 입이 가벼우면… 아니다. 이건 좀도둑이 어떻게 했는지 들어본 뒤에 판단해야겠네."
"조작된 트로이 체닐라의 유서 내용을 퍼트리실 셈입니까?"
"맞아. 같이 일도 한 사이인데 의리 없게 일부 귀족들만 알고 있으면 되겠어?"
"귀족들끼리 싸움이 붙겠는데요?"
"싸움만 붙이겠어? 싸움도 붙이고, 놈들 손으로 자신들을 베어버릴 칼도 되려고 오늘 출동하는 거야."
하벨은 씩 웃자 카샬도 덩달아 수상쩍은 미소를 지었다.
"카샬."
"예, 도련님."
하벨이 무얼 할지 기대가 됐기에 카샬은 힘차게 대답했다.
"레디나도 데려오지 않고 출발하는 거야? 지금쯤 시녀들이랑 같이 있을 거잖아."
"……!"
카샬은 그대로 멈칫거렸다.
[뛰어, 카샬! 얼른!]
아라의 재촉이 들린 것처럼 카샬은 마차에서 내려 다시 왕실로 뛰어갔다.
하벨은 부리나케 달리는 카샬을 보며 아라와 함께 낄낄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