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쏟아지는 시선들(3)
* * *
[대장? 갑자기 즐거워 보인다?]
아라가 옅게 피어난 하벨의 미소를 보더니 덩달아 활짝 웃었다.
하벨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고, 알현실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서 다들 기다리게."
알현실로 들어가기 전, 라르웬은 정령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이미 왕실까지 기사를 데려온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자신들은 예외였다.
티에라라는 이름이 있는 이상, 누가 자신들을 노릴지 몰랐기에 오히려 당연한 행동이었다.
"알겠습니다."
정령 기사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다녀오십시오."
카샬 역시 알현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정령 기사들이 서 있는 곳에서 멈춰 허리를 숙였다.
"혹시 너야?"
알현실로 걸어가다 라르웬이 슬쩍 하벨에게 물었다.
그대로 하벨의 걸음이 느려지자 라르웬은 키득거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면 피가 덜 닦인 코밑부터 닦는 게 어때?"
라르웬은 장식으로 가슴팍 주머니에 넣은 손수건을 꺼내 하벨에게 넘겼다.
"잘했어, 막내야. 아주 꼴좋더라."
웨인 톨의 능글맞던 입에서 비명이 터질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왜 했냐고 말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들키지도 않았고, 의심도 사지 않았는데 왜 그런 말을 해? 아니, 설령 그랬다고 해도 나는 더 잘했다고 손뼉 칠 건데?"
"말리러 온 거 아닙니까?"
"이 정도는 눈감아줄 수 있어. 이 정도는 말이지."
"그런데 형님."
하벨이 걸음을 일부러 늦췄다.
"왜?"
"왕실에 왜 정령들이 없는 겁니까?"
조금 전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사실을 꺼냈다.
혹시 부정한 것들이 있나 살폈지만, 아직은 발견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 왕실을 좋아하진 않더라? 정령 기사들을 따라왔던 정령들도 왕실 안까지 따라오기 싫어한 거 봤잖아?"
라르웬은 태연하게 루룸을 바라보았다.
[왕실은 뭔가, 뭔가 들어오고 싶진 않아.]
[왜? 이 몸은 괜찮은데? 엄청 반갑고 그립고 막 그래.]
[넌 좀 희한하네. 나는 룬델을 때리는 기분이 들어서 뭔가 좀 그런데.]
[응?]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루룸은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렸다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막 밀려오거든.]
"그럼, 부정한 것들이 있다는 건 아닌 거죠?"
하벨은 중얼거리듯 라르웬에게 물었다.
"왕실은 그게 불가능해. 초대 왕의 가호가 있거든."
"가호요?"
"비가 오는 날에 하늘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어쨌든, 지금은 집중하자고."
"알겠습니다."
하벨은 긍정했다.
라르웬 말대로 지금은 왕실에 온 목적에 중점을 잡을 때였다.
두 사람이 알현실 앞에 섰다.
"전하께 고하게."
라르웬의 지시에 왕실 시종 중 한 명이 얼른 알현실로 들어갔다.
곧 밖으로 나온 왕실 시종은 허리를 넙죽 숙이며 얼른 알현실 문을 열었다.
"드시지요."
앞서 몇 명의 귀족이 오갔는지 알현실에 다과가 놓여 있었고, 모두가 떠난 그곳에 왕이 홀로 앉아 있었다.
화려한 왕좌에 앉아 있음에도 고독하며 쓸쓸함을 내뿜는, 왕이란 이름을 단 존재에 하벨은 심기가 불편했다.
자신도 남이 봤을 때 저런 모습이었을까.
랜턴에서 은은하게 나는 밝은 빛과 참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밝은 빛이지 않은가.
[왕이라고? 우리 대장이 더 고귀해 보이는데? 음…….]
아라가 꺼내는 말에 하벨은 헛숨을 들이키다 아라가 왕에게 관심을 보이자 곧 안도했다.
"신, 라르웬 티에라가 이 땅에서 가장 존귀한 자를 뵙습니다."
라르웬이 무릎을 꿇었고, 하벨에게 눈짓했다.
"하벨 티에라가 전하를 처음 뵙습니다."
하벨까지 무릎을 꿇자 왕이 입을 열었다.
"어서 오게. 오는 길이 멀지 않았던가."
"멀지 않았으니 개의치 마십시오, 전하."
라르웬과 허울뿐인 대화를 이어 가볍게 이어가다 왕이 내뱉은 숨과 함께 진중하게 목소리를 냈다.
"모두 물렸네."
왕은 왕좌에서 일어나 옆에 놓인 자리로 향했다.
걷는 모습이 불안해 보였다.
"무슨 일로 이렇게 찾아왔는지 물어도 되겠나?"
목소리에 담긴 걱정에 왕이 얼마나 오래 티에라의 방문을 고민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전하."
라르웬이 입을 열었다.
"그래, 말해주게."
"귀족들이 왕실과 저희의 관계를 이번에 벌어진 독 사건으로 엮고 말았습니다."
"…미안하네. 내 먼저 물었어야 했는데. 몸은 괜찮은가, 하벨 공?"
화장으로 가린 듯하나, 하벨의 얼굴이 창백한 편이라 왕은 정말로 미안한 얼굴로 물었다.
그 표정이 룬델과 닮아 있어 하벨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 내가 부덕한 탓이네. 왕실이 그대들을 지켰어야 했는데."
왕은 자책했지만, 눈빛은 결코, 죽지 않았다.
부덕함마저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 하벨은 마음에 들며 동시에 안타까웠다.
왕에게 힘이 있었다면 분명 좋은 왕이 됐겠지.
"하면 그대들은 귀족들이 믿는 진실을 사실로 만들기 위해 이렇게 찾아왔는가?"
날카로운 통찰력에 라르웬은 긍정했다.
"맞습니다."
"전하. 허락만 해주신다면 제가 간단히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벨은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대화가 길어질수록 귀족들이 왕실과 티에라 사이에 뭔가가 있다고 의심이 들게 하는 꼴이었으니.
"허락하네."
"왕실을 고립시킬 겁니다."
시작부터 강한 말에도 왕은 팔에 힘을 줄 뿐이었다.
"저는 귀족들에게 왕실에서 독을 사용한 사실이 맞으며 이를 통해 귀족들의 편에 섰다고 착각하게 할 겁니다."
"……?"
왕은 이어지는 말에 놀랐지만, 차분히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그런 귀족들의 허점을 찔러 끝을 볼 셈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하여 공들이 바안을 만나러 온 모양이군."
"맞습니다, 전하."
귀족들이 현재 노리는 건 왕권의 완전한 몰락이었다.
다 쓰러져 가지만, 적어도 왕실의 성문을 지킬 힘이 왕에게는 아직 있었다.
그럼 왕자는 어떻겠는가.
지지 세력도, 기반조차 없이 이미 왕에게 기대고 있는 상태였다.
왕권이 바안에게 넘어갈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굳이 보지 않아도 하벨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바안이 움직여야 했다.
귀족들이 왕자의 몰락을 지켜보고 싶어 할 테니까.
'안타깝지만, 그대가 선택할 건 하나뿐이야.'
하벨은 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는… 허락하겠네."
왕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이번 일로 바안이 지금보다 더 고립되겠지만, 미래를 본다면 감안해야 할 무게였다.
"여기서 뭘 더 주저할 수 있겠는가? 부디, 이 모든 게 바안에게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네."
하벨을 보는 왕의 시선에 간절함이 어려 있었다.
티에라 가문이 움직였다.
그토록 자식을 아끼는 룬델이 둘째와 막내까지 보내지 않았던가.
어떻게 본다면 티에라 가문에서 왕실을 살릴 마지막 기회를 가져온 셈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사라지면 바안에게 기다리는 건 죽음, 아니면 죽음과도 같은 삶뿐이니.
"감사합니다, 전하."
하벨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니네. 내 언제나 그대들에게 고맙고, 미안할 뿐이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전하."
라르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만 가보게. 내 저들에게 먹이를 주고 싶지 않으니. 만나서 반가웠네. 계속 무탈하길 빌겠네"
왕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라르웬이 그를 붙잡았다.
"전하, 잠깐 제게 시간을 허락해주십시오."
왕이 주춤거릴 사이, 라르웬은 하벨을 불렀다.
"하벨. 아버지께서 전달하신 말씀이 있어서 그래. 자리 좀 비켜줄 수 있겠어?"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형님도 나올 때 잊지 마십시오."
"그래."
하벨은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왕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아라가 루룸에게 손을 흔들자 루룸은 귀찮다는 듯이 몇 번 휘둘러주다 말았다.
"오늘은 느긋하게 말씀을 나눌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라르웬이 웃었지만, 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괜히 그대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 공도 이만 가보게. 귀족들이 하벨 공을 얼마나 물어뜯겠는가."
"제 동생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유롭게 차를 마실 시간까지 벌어줄 테니까요."
라르웬은 가볍게 웃으며 룬델이 왕에게 전달해달라 했던 말을 꺼내고자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벨을 믿어주길 바라셨습니다. 그 어떤 지원도 아끼지 말고요. 이게 아버지가 제게 부탁한 언질입니다, 전하."
"공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물론입니다."
라르웬은 하벨을 떠올리며 기특함을 담아 웃었다.
* * *
"…하."
하벨은 밖으로 나오자마자 이를 갈았다.
[……?]
아라는 눈을 깜박거렸다.
[왜 갑자기 화가 났어, 대장?]
방금 나올 때만 해도 하벨이 싱글벙글 웃지 않았던가.
한순간에 바뀐 기분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연기야."
하벨은 왕실 시종을 의식하며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리는 척, 아라에게 알려줬다.
[…어음, 이 몸은 잘 모르겠어. 잘 모르겠으니까 계속 볼 거야.]
아라는 얼른 자신의 꼬리를 잡고는 하벨을 앞질러 그를 빤히 보았다.
"…도련님?"
카샬은 잔뜩 성이 나 보이는 하벨의 모습에 적당히 맞장구쳐줬다.
방금 '연기야'라는 입모양을 보았으니.
아무래도 계획이 시작한 모양이었다.
"화가 나 보이십니다."
"…빌어먹을."
"도련님. 여기는 왕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아니, 잘못했으면 사과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도련님. 제발, 자중하십시오."
카샬은 어떻게든 하벨을 말리려 했지만, 하벨의 일그러진 표정이 좀처럼 식질 않았다.
"됐어. 들으라고 하지. 들어. 다 들어버리라고."
언성을 크게 높이진 않았지만, 하벨의 행동을 아닌 척 살피던 왕실 시종과 귀족들의 눈빛이 천천히 달라졌다.
"카샬."
"예, 도련님."
"지금 바로 바안 저하를 만나러 갈 거야. 앞장서."
"아직 둘째 도련님께서도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카샬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하벨은 정령 기사들 일부만 데리고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뭐 해? 앞장서지 않고?"
가다 말고 하벨은 모두가 자신을 잘 볼 수 있는 자리에 서서 카샬을 질타했다.
"도련님. 바안 저하를 방문하는 일에 둘째 도련님과 동행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설마 날 내치시기야 하겠어? 저하께 꼭 들어야 할 말이 있다는 거 너도 알잖아?"
천천히 이를 가는 하벨의 모습은 누가 봐도 원수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저하께서 내게 하신 일이 있는데. 그렇지 않아?"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게 일부러 앞뒤를 쏙 빼낸 말만 꺼냈다.
'자, 얼른 간지러운 입을 참지 말고 여기저기 소문을 내거라. 왕실과 티에라 가문 사이에 균열이 생겼음을.'
하벨은 미간을 아주 강하게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카샬."
"…알겠습니다."
하는 수 없이 앞장선 카샬은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야 이런 상황에서 익숙하다고 하지만, 하벨은 아직 이런 방식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카샬. 내가 외부에 서는 일은 평생 없을 건데 표정을 숨기는 법이나, 자연스럽게 표정을 짓는 법 같은 걸 굳이 배워야 해? 나는 뭘 더 숨기고 싶지 않은데.
시무룩하던 하벨의 표정과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룬델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몰라도 하벨은 결국,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다.
'…무엇보다 지금 도련님께서 상황마저 이용하시고 계신다.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모두가 아는 하벨 티에라라는 이미지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철부지'였다.
라르웬처럼 귀족의 세계에 발을 디뎌본 것도 아니며 병약함과 정령사도 되지 못한 사실을 비꼬아 만든 시든 푸른 꽃이라는 원치 않은 칭호마저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귀족들이 생각하는 머릿속 하벨도 철부지라는 사실에서 별반 다를 게 없을 테지.
만약 라르웬이 알현실 밖으로 나와 화를 내고 걸어오면서 똑같은 소리를 했다면 분명 절반 이상 그의 수작을 눈치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도련님께선 다르셔.'
저 속에 수천 마리의 뱀이 있는 줄도 모르고.
천천히 흔들리는 건 귀족들 자신이라는 것조차도 모른 채 하벨의 표정에, 화를 참지 못하는 저 행동에 자연스럽게 이미 다들 속고 있었다.
[대장! 대장이 화내는 척만 했을 뿐인데 갑자기 인간들이 독 이야기를 꺼내고 있어. 엄청 신기해!]
주변을 둘러보고 오던 아라가 다급히 날아오며 키득거렸다.
'잘하고 있네.'
하벨은 표정을 유지하되 가벼운 마음으로 카샬의 뒤를 따랐다.
일부러 조바심이 난 것처럼 걷던 카샬이 드디어 걸음을 멈췄다.
'이 앞에 바안이 있다 이거지?'
하벨은 바안의 방 문을 쳐다보았다.
자신의 계획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