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쏟아지는 시선들
* * *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카샬이 입가를 핥으며 물었다.
갑자기 하벨의 표정이 굳어졌으며 누군가 하벨을 쫓았다는 라르웬의 말에 무언가가 벌어졌다는 걸 알게 됐다.
'정령… 이 뭔가 한 건가?'
카샬은 긴장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차는 그냥 조금 전처럼 굴러갔을 뿐이니.
"아라가 가리킨 곳을 보니 아이가 있었어. 시간이 느려졌고, 창문 바로 앞까지 온 것처럼 보였어."
하벨은 혼란스러운 상태로 입을 열었다.
"'찾았다.' 그렇게 나한테 말했는데……."
아이의 미소가 너무도 해맑았다.
보석을 찾은 듯하고, 소중한 물건을 찾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랜턴이 불길할 정도로 짙은 검은 불꽃을 뿜어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형님. 혹시 하벨한테 특별한 뭔가가 있는 겁니까?"
하벨의 시선이 라르웬에게 향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라르웬은 갈등했다.
'하벨 티에라에게 뭔가가 있다.'
하벨은 그렇게 생각하며 속마음을 숨겼다.
"…있긴 뭐가 있겠어? 루룸. 너, 혹시 느꼈어?"
라르웬의 물음에 창문을 바라보던 루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나는 모르겠는데? 뭔가가 있었다면 내가 못 느낄 리가 없잖아?]
"그렇긴 한데, 아라하고 하벨이 봤다잖아."
[맞아! 이 몸은 거짓말 몰라. 대장이 거짓말하는 건 엄청 나쁜 행동이라고 했어!]
아라가 목소리를 높이자 하벨은 괜히 가슴이 찔렸다.
'미안하다, 아라야. 작은 거짓말은 괜찮아.'
나중에 다시 아라에게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역시 답은 하나네요."
루룸이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자신 혼자서 봤으면 모르겠지만, 아라까지 본 이상 환상조차도 아니었다.
"둘 다 사실이라는 거죠."
"…그렇다는 건 정체 모를 무언가가 아라와 널, 특히 널 더 주목하고 있다는 소리겠지."
라르웬이 상황을 정리하자 카샬이 굳은 얼굴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꺼냈다.
"기사들에게 주변을 더 살피도록 지시하겠습니다."
라르웬도, 정령들도 뚫고 하벨을 봤다는 게 아니겠나.
무서운 존재였다.
부디 적이 아니길 속으로 빌었다.
* * *
착.
왕궁으로 향하기 전, 첫 번째 문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처음 보는 문장을 단 마차를 향해 당장 창을 겨눴다.
"멈추십시오. 여기부터는 에르티안 왕궁입니다."
그 모습에 하벨은 의외라는 듯 '오'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저거 다 연기란다, 막내야."
라르웬은 턱을 괴다 카샬에게 눈짓했다.
"둘째 도련님."
"왜?"
"제 주인은 둘째 도련님이 아니십니다. 저쪽 마차에 둘째 도련님의 집사가 있잖습니까?"
카샬이 꼼짝도 하지 않자 라르웬은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생각해보니 그건 그렇네."
하벨이 맞장구치자 라르웬의 심기가 더 불편해졌다.
"그럼 내가 내릴까? 지금 내려서 마차까지 걸어가 내 집사 이름을 부르면서 나오라고 하길 원하는 거야, 카샬?"
"나쁘지 않네요. 솔선수범하시는 둘째 도련님의 모습을 본다면 시종들도 기뻐할 겁니다."
카샬이 싱긋 웃으며 뻗대자 라르웬은 입술을 꽉 다물었다.
평소라면 어쭙잖게 달려드는 카샬을 짓누를 테지만, 오늘은 보는 눈이 많았다.
자신이 철저히 불리한 상황이었다.
"그래, 너만큼 잘난 집사가 없어서 그런다. 제발, 너만큼 잘난 놈이 있으면 좀 구해다 줘라. 됐어?"
"좀 약했지만, 오늘은 어쨌든 중요한 날이니 여기서 멈추겠습니다."
카샬이 간만에 승리를 만끽하며 그제야 천천히 움직였다.
"뒤가 없네? 형님을 이렇게 쑤셔도 되는지 모르겠어."
하벨이 묻자 카샬은 낄낄거렸다.
"둘째 도련님께선 절 내치지 못하시거든요. 다 알면서 하는 거죠."
"그렇지. 대신 다른 뒷감당은 알아서 하는 거고."
라르웬이 이를 갈자 카샬은 여유롭게 미소를 내보였다.
"이런 날이 참 희귀해서 저도 모르게 무례를 범했으니 부디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카샬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서는 마차 밖으로 나왔다.
"진짜 얄밉네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벨이 먼저 그 말을 꺼내자 라르웬은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니까. 돌아가는 길에 멱살이라도 잡아야 속이 후련하겠어."
"카샬이 일을 잘하긴 하는데 왜 쫓아내지 못한다는 겁니까?"
"네가 주웠는데 어떻게 쫓아내? 네가 쫓아내기 전까지는 아버지나 나나 누구도 카샬을 쫓아낼 마음은 없어."
"하벨 티에라가요…?"
[그래. 나도 봤는데? 다 죽어가던 카샬을 네가 주웠잖아.]
마차만 계속 타다 보니 지루해하던 루룸이 곧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대답했다.
"처음 듣는 말인데?"
[처음 들을 수밖에. 지금 네가…….]
라르웬은 루룸의 입을 막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카샬이 말을 안 한 이유가 있겠지. 네가 카샬을 주웠을 때, 나나 누님은 자리를 비워서 구체적인 일은 잘 몰라."
[어, 대장! 저거 돈주머니 맞지? 카샬이 엄청 좋아하는 거?]
계속 창문에서 떨어지지 않던 아라가 꼬리를 흔들었다.
[이 몸도 색깔이 너무 예뻐서 동전 하나를 가지고 있어!]
아라가 자신의 꼬리를 만지작거리더니 금빛으로 빛나는 동전을 꺼냈다.
[짜자잔!]
"……?"
얼마나 쓸고 닦았으면 동전이 저렇게 반짝이는지.
하벨은 아라가 앞발로 소중히 동전을 쥐고 있는 사실보다 꼬리에서 튀어나왔다는 사실에 기가 찼다.
"상황이 딱 좋네. 막내야, 왕실 상황을 직접 봐봐."
라르웬이 창문을 가리키자 하벨도 창문에 붙었다.
카샬이 일부러 마차에서 잘 보이는 장소로 기사들을 데리고 가서는 뒷돈을 찔러주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일단 뒷돈을 거절하는 기사의 모습에 하벨은 라르웬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처음 보였던 그 모습은 뒷돈을 두둑이 챙기려는 시작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왕실은 정말로 기둥만 간신히 유지하는 상태였어. 대체 얼마나 썩은 건지.'
수문장이야말로 왕의 얼굴이며 나라의 얼굴이었다.
그런 자가 당연하게도 뒷돈을 챙겨받다니.
"다시 잘 생각해 봐도 돼.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니까."
비꼬는 게 아닌, 걱정이 담긴 말에도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르웬이 에르티안이라는 나라가 썩을 대로 썩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지 몰라도 하벨은 굽힐 마음이 없었다.
여기서 굽힌다면, 바보처럼 자비라는 이름 뒤에 숨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이전 삶과 대체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때도 싹 쓸어버렸으면 많은 게 달라졌을 텐데.
"괜찮습니다. 더 불이 붙네요. 일단 저놈들부터 보내죠?"
하벨은 카샬에게 돈을 받은 수문장을 바라보았다.
카샬이 마차에 올라타자 하벨이 말했다.
"카샬."
"예, 도련님."
"저 수문장한테 어떤 죄를 물을 수 있어?"
"뇌물을 받아먹은 죄겠죠. 현실은 좀 다르지만요."
"다르다니?"
"적당히 찔러도 저 기사를 배출한 귀족 가문이 알아서 기사의 목을 가지고 굽신거리면서 찾아올 겁니다. 어쩌면 목과 함께 금덩어리까지 가지고 올지도 모르죠."
미래를 본 것처럼 카샬은 장담했다.
"그러면 일단 모르는 척하고 할 수 없이 뒷돈을 찔러주는 척해."
"알겠습니다. 그런 거라면 저도 편안히 즐길 수 있겠네요."
하벨이 하고자 한 일이 예상 가능한 범위였기에 카샬은 안도했다.
[그런데 대장. 그거 나쁜 행동 아니야?]
아라가 다시 꼬리에 동전을 숨기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나쁜 행동이 맞긴 하지."
[그럼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대장이 나쁜 건 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그랬지. 나쁜 건 하면 안 되지."
하벨은 문이 열리는 모습을 보며 기쁘게 대답했다.
"그런데 아라야. 그 나쁘다는 기준은 아라 네가 정하는 거야."
아라가 하벨과 눈을 마주했다.
[이 몸이?]
"그래. 방금 내 행동이 나빴다고 생각하면 그게 네 기준에서 '나쁘다'는 거겠지."
[응. 이 몸은 그렇게 생각해.]
"좋은 마음가짐이야, 아라야. 법이 있으면 법을 지켜야 하는 게 당연해. 다 같이 정한 기준 역시 마찬가지야. 그런데 아라야."
[응.]
"법이든 기준이든 다 네 밑에 있는 거야. 네가 경계해야 하는 건 '악'이야. 외부에 있는 악이든, 아라 너의 내면이 있는 악이든 가까이하면 네가 모르는 사이, 천천히 물이 들지도 몰라. 그런데 아라 너는 아직 기준이 없잖아?"
[아! 그래서 이 몸한테 나쁜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 말했던 거야?]
"맞아. 스스로 정한 기준이 없으면 이미 정해진 기준을 따라야겠지? 그리고 천천히 정하면 되는 거야."
하벨이 아라를 기특하게 바라보며 쓰다듬자 아라는 활짝 웃었다.
[루룸!]
[왜?]
[루룸도 몰랐어? 이 몸만 몰랐던 거야?]
[아니. 나도 몰랐지? 그 기준은 나도 다른 정령한테서 배웠고. 지식이 있다는 것과 실제로 하는 건 다르니까. 넌 잘할 거다, 아라야.]
루룸이 손을 뻗자 아라는 그 손을 내쳤다.
루룸이 웃는 만큼 아라 역시 귀를 팔랑거리며 웃었다.
오늘 하나를 배웠다.
하벨이 왜 배움이 행복하다는 건지 아라는 이제야 제대로 알았다.
하벨이 주는 맛좋은 물만큼이나 기분이 좋았다.
탕탕.
카샬이 마차 벽을 두드리자 마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 * *
"…크흠."
마지막 문만이 남았을 때, 기사들은 문양을 보더니 이젠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다.
볼품없는 귀족들이 여기까지 올 방법이 돈 말고는 뭐가 있겠는가.
이번에는 카샬이 내리지 않았다.
굳이 집사까지 나설 일이 아니라는 뜻을 내포하자 기사들의 시선이 미묘해졌다.
수많은 귀족이 왕실을 오가면서 그들을 따라온 시종들 역시 누구보다 많이 봐왔기에 마차에서 내린 자가 집사나 시녀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단번에 알아보았다.
"건방지긴."
왕실의 문을 지키는 자신들에게 겨우 시종을 보내다니.
기사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뜻을 나눴다.
자신들의 등에 누가 있는 줄 알고.
착.
손에 쥔 검을 뽑아 당장 겨눴다.
"물러가거라. 어디 허락도 받지 않고 왕실로 들어오려고 하느… 냐."
딸꾹.
호기롭게 검을 겨눴던 기사는 시종이 말없이 내민, 가문을 상징하는 증표에 그만 딸꾹질을 하고 말았다.
탁.
기사들 손에 쥐어졌던 검이 일제히 떨어졌다.
"저런."
마차 문이 열리고, 라르웬이 내려왔다.
현실감이 없었다.
라르웬 티에라?
"검이 떨어졌지 않더냐."
차분한 그의 목소리에 하벨과 카샬이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썼다.
라르웬은 뒤쪽에서 들려오는 그들의 웃음소리를 흘리며 걸어갔다.
분명 거리가 짧음에도 라르웬이 다가오자 기사들은 겁에 질린 채 단번에 무릎을 꿇었다.
왜.
왜 여기서 티에라 가문이 나오는 건지.
머릿속이 의문으로 가득 찼지만, 나올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오늘 분명히 티에라 가문이 왕실을 방문한다고 했으니까.
"왜 그렇게 놀라는가?"
라르웬이 떨어진 검을 주워 기사들에게 건넸다.
"사, 살려주십시오!"
"저런, 안타깝지만, 자네들의 삶과 죽음은 내가 쥐고 있질 않네. 그것보다 문 좀 열어주겠나?"
"여, 여, 열어드리겠습니다! 당장 말입니다!"
어떻게든 살고자 헐레벌떡 뛰어가는 모습을 라르웬은 가만히 쳐다보았고, 문이 열리자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그래. 이제 얼마를 주면 되겠는가?"
"……."
기사들이 그대로 멈췄다.
아까도 듣던 말이었고, 매 순간 이곳에 섰을 때마다 듣던 말이었지만, 이토록 무서울 말이 될 줄이야.
전신을 돌던 피가 빠져나간 기분에 휩싸였다.
"아, 값은 나중에 주겠네. 오늘 바빠서 말일세."
라르웬은 그대로 뒤를 돌아 시종에게 물러가라 명한 뒤 마차에 올라탔다.
탁.
마차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기사들이 체면도 차리지 않고 그냥 다급히 뛰어왔다.
하지만 정령 기사들이 내뿜는 매서운 시선에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도, 도련님! 도련님!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이놈이 실성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자, 잠깐 돈에 눈이 먼 것뿐입니다. 정말입니다!"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간절한 그들의 말에도 마차는 움직여 왕실로 향했다.
자신들이 지켜야 할 영역조차 잊어버린 채로 덩달아 뛰어가다 왕실 기사들에게 가로막혔다.
"비켜라!"
기사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네놈들이 기어코 미쳤는가? 이 앞은 전하께서 계시는 곳이다. 네놈들이 돈을 주고 산 지위가 발휘되는 곳은 저기 마지막 문까지다. 거기서 더러운 돈을 받아먹든 뭐든 네놈들은 이곳 신성한 왕실에 발을 디딜 수 없다."
"비, 비키라고, 개새끼야아!"
"…아."
왕실 기사단은 자신의 뒤쪽에서 멈춘 마차를 보다 기사들의 꼴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오늘 티에라 가문에서 왕실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잊은 모양이지?"
"……."
"주제도 모르고 돈만 뜯을 때부터 알아봤다. 꺼져라, 쓰레기들아. 여기만큼은 네놈들의 더러운 발을 디딜 곳이 아니니까."
"우, 우리가 모은 돈을 줄게! 얼마면 되겠어?"
기사들이 발악하며 소리를 지르던 차 그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마차 문이 열렸고, 라르웬이 내려왔다.
"살려주십시오, 도련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아까부터 왜 이렇게 시끄럽습니까, 형님?"
안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오자 라르웬은 숨을 짧게 내쉬었다.
"아무래도 멍청이들이 따라온 모양이야. 신경 쓰지 마."
"아뇨. 그럴 수 없죠. 여기는 왕실이니까요."
하벨이 마차에서 내려왔다.
그 순간, 왕실 기사들도 기사들도 하벨을 바라보았다.
멍청이가 아닌 이상, 누가 내리는지 뻔하지 않은가.
하벨 티에라.
"…헙."
누군가 숨을 멈췄다.
하벨의 뒤에 누군가 빛이라도 켜놓은 것처럼 왜 이렇게 찬란한지.
고귀하다는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아버린 것만 같았다.
분명 머리로는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걸 알지만, 도무지 시선이 떼어지질 않았다.
하벨은 모두의 시선을 익숙하게 받으며 정령 기사 중 누군가 앞에 섰다.
"내, 영광스러운 임무를 내리겠네. 받겠는가?"
"무, 물론입니다."
정령 기사가 자신도 모르게 크게 대답했다. 투구에 얼굴이 가려져 있어도 상기됐다는 게 느껴졌다.
이곳에서 선택받을 줄이야.
"그럼 저기서 가장 시끄러운 자를 죽이게."
하벨은 주제도 모르고 이곳까지 쫓아온 기사들을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봄바람처럼 포근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