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왕실로 간다(3)
* * *
하벨이 아라의 눈을 살짝 가렸지만, 아라는 질색했다.
[이, 이 몸은 저런 선물은 싫어!]
"고마워. 선물 잘 받을게."
하벨이 웃자 레디나는 실망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왜 안 놀라세요? 은근 기대했는데요."
"내가 놀라는 걸 원하는 것 같아서 말이야."
하벨은 레디나가 던진 시종을 곁눈질로 바라보다 힘없이 자신의 옷자락을 흔드는 손길에 시선을 내렸다.
[대장은 저런 선물을 좋아했어? 이 몸도 좋아… 할 수 있게 노력… 노력…….]
아라는 필사적으로 말을 이어 나가려 했지만, 아라의 눈동자가 금세 일렁거렸다.
저건 아름답지도, 반짝거리지도 않았다.
차라리 저기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가 더 어여뻐 보일 정도였다.
"좋아하는 거 아니야."
하벨은 아라만 들을 수 있게 작게 속삭였다. 아라의 귀가 쫑긋 세워지자 하벨은 피식 웃었다.
[응응!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아라가 행복해하며 하벨을 안았다.
하벨은 다시 레디나를 바라보았다.
"레디나. 이건 애초에 놀랄 일도 아니야. 널 시종들 사이에 심은 건 나잖아?"
"그래서 마음에 드네요. 역시 합격입니다."
"……?"
하벨이 눈을 깜박거리자 레디나는 천천히 걸어왔다.
"저는 신념을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농담이 아니라 도련님을 제 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하지만 기왕 모시기로 한 신인데, 제 마음에도 들면 좋잖아요?"
"건방지긴."
카샬이 코웃음을 쳤다.
"어머, 몰랐어? 나 원래 그래. 그러니까 그만 좀 째려보실래요, 둘째 도련님?"
레디나는 옅지만, 살기를 드러내는 라르웬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막내야, 잘 생각해. 저 눈에 어린 광기가 보인다면 말이야."
아무리 하벨이 불법 마법을 시술한 레디나의 대가를 손에 쥐고 있다지만, 그녀의 눈에 깃든 날이 선 포악함이 제 눈에 보여 말릴 수밖에 없었다.
"괜찮습니다. 다 감수하고 레디나를 받아들였습니다. 무엇보다 검은 달이라는 단체를 막으려면 저 정도는 되어야죠."
레디나는 검은 달에서 하벨 티에라의 목에 건 의뢰를 독차지하고 돌아왔다.
저 정도의 독기가 없어서는 불가능할 테지.
"맞습니다. 제가 도련님의 목에 걸린 의뢰를 독차지했다고 한들, 경쟁자라는 놈이 끊임없이 늘어날 가치가 있는 의뢰라서요. 제가 아니면 막기 힘들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레디나는 자신의 강점을 드러냈다.
현재 검은 달이라는 세력을 잠깐이나마 막을 벽이 될 수 있는 자는 자신이라고.
'무엇보다 내 목적이 레디나와 비슷하니 잠깐 손을 잡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아.'
―검은 달은 모든 나라에 퍼져 있었으며 소위 말해서 세계에 '악'이 될 자를 죽이는 비밀 결사대였습니다.
변질되어 버린 비밀 결사대.
그런 비밀 결사대를 바로 잡으려는 레디나.
현재 에트리안 왕국의 '악'이라 할 수 있는 귀족을 처단하려는 자신.
각자 목표도 있는 상태에 자신이 악이 아닌 이상 레디나의 손을 놓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레디나. 네 검이 하벨을 향하지 않아야 할 거다.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면."
라르웬은 하벨을 존중했기에 새어 나오는 한숨을 꾹 누르며 레디나에게 경고했다.
"제 검이 도련님을 향하는 일은 제 신념을 걸고 맹세코 없을 테니 안심하셔도 좋아요."
레디나는 치마 끝자락을 살짝 잡고는 고개를 숙였다.
"물론, 둘째 도련님을 향하는 일도 없을 겁니다."
라르웬은 레디나가 꺼내는 도발에 가까운 말에도 차분했다.
악의는 없었으니.
"제 신념이랑 맞지 않거든요. 제가 악의 편에 서는 일 역시 없을 겁니다."
레디나는 또 아쉬워하며 괜히 치맛자락을 만졌다.
반응이 왜 이렇게 다 미적지근한지.
상대방이 날뛰어줘야 시비를 거는 맛도 생길 텐데.
[…음. 이 몸이 계속보다 보니까 레디나가 루룸이랑 닮았어!]
아라가 해맑게 꺼내는 말에 루룸은 아라의 이마를 가볍게 쳤다.
[아얏! 왜 때려?]
[아직 잠이 덜 깼어? 아니면 눈이 좋지 않은 거야? 인간들이 안경이라는 걸 쓰긴 하는데 정령한테도 필요할 줄은 몰랐네.]
[아닌데? 진짜 비슷한데?]
아라가 억울해하자 루룸은 귀찮은 듯이 짧은 앞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래, 그래. 어서 쑥쑥 자라라.]
[씨잉. 진짠데?]
아라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바사삭.
무언가를 베어 먹는 소리에 모두가 멈췄다.
에그타르트를 숨죽여 먹던 하벨은 갑자기 쏟아지는 시선에 눈을 말똥히 뜨며 물었다.
"혹시 먹으면 안 됩니까?"
오늘 너무 일찍 일어난 탓인지 몰라도 방금 먹은 에그타르트 하나로는 '꼬르륵' 소리를 숨기기가 어려웠다.
"아뇨. 먹으셔야죠. 신경 쓰지 마시고 배가 고프시면 언제든 그냥 드세요."
갑자기 카샬이 이토록 든든할 수가 없었다.
어서 먹으라고 손짓하는 라르웬의 허락까지 떨어지자 하벨은 레디나가 자신을 보며 웃음을 터트리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레디나 컬."
라르웬이 레디나를 부르자 그녀는 간신히 웃음을 참아내며 라르웬과 마주했다.
"어디든 널 보고 있다는 거 잊지 마."
라르웬은 레디나에게 재차 경고한 뒤에 카샬에게 눈짓을 줬다.
정보를 캐라는 의미인 걸 눈치챈 레디나는 한쪽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제가 더 잘할 수 있어요. 자주 하던 거라 그냥 저한테 맡기세요."
"죽이지 않고?"
카샬이 물었다.
"응. 정보도 못 캐냈는데 죽이는 건 삼류나 하는 짓이지."
레디나가 손가락 세 개를 펼치며 카샬을 향해 웃자 그는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레디나와 같이 정보를 캐겠습니다. 허락해주셨으면 합니다."
카샬은 하벨에게 허락을 구했다.
"원하는 대로 해. 뭐가 됐든 저 입에서 정보만 나오면 되니까."
하벨이 승낙하자 카샬은 레디나와 함께 시종을 끌고 나무 뒤쪽으로 향했다.
"괜찮습니다, 형님. 내가 물지 않으면 레디나도 날 물지 않을 겁니다."
하벨은 걱정이 담긴 라르웬의 시선에 싱긋 웃었다.
부스럭.
나무 뒤편에 작은 소음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카샬이 먼저 걸어왔다.
옷에 묻은 나뭇잎을 떼며 말했다.
"숨죽여 있던 귀족 끄나풀입니다."
"누군데?"
하벨이 묻자 카샬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트로이 체닐라라고 합니다."
'트로이 체닐라.'
페트리오가 주었던 정보 속 인물이라는 걸 떠올린 하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랜턴에 검은 불꽃이 나타났기에 살폈는데.
'이게 이렇게 이어지네?'
하벨은 팔찌에 달린 랜턴을 살짝 튕겼다.
"그래. 그럼 출발하자."
"도련님."
레디나가 뒤이어 걸어오며 하벨을 불렀다.
그녀 역시 카샬처럼 옷가지에 피 하나 튀지 않았다.
"왜?"
"제게 시키실 일이 있지 않나요?"
"나한테 믿음을 주게?"
"검은 달 일은 아무래도 도련님께서 감흥이 없을 테니 다른 일로 대체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네요."
레디나는 지금 자신이 '트로이 체닐라'를 죽이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름만 알고 있는데 어떻게 하려고?"
"검은 달은 도련님께서 생각하신 것보다 위험한 단체랍니다."
레디나의 눈꼬리가 휘었다.
"때론, 이름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죠."
"잘 들어보니 위험하다는 말은 검은 달이 아니라 널 말하는 것 같은데?"
"제가 검은 달을 사랑하니, 검은 달이 곧 제가 아니겠어요?"
레디나의 청록색 눈동자가 피에 절은 듯 보였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검은 달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게 제 목표라고요. 지금 제게 신인 도련님만큼이나 소중한 일이랍니다."
"레디나."
"예, 도련님."
"그럼 장난 하나를 치고 싶은데 가능하겠나?"
"장난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죠. 도련님께서 하시는 장난이 어떤 장난일지 궁금해지네요."
레디나는 하벨을 따라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 * *
데구르르.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묻힐 정도로 왕실 주변에 사람들이 내는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티에라 가문이 왕실로 온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몰렸지만, 안타깝게도 하벨이 탄 마차에는 티에라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이 아닌, 엉뚱한 문양이 찍혀 있었다.
"…이 사람들이 진짜 하벨을 보러 왔다는 겁니까?"
하벨이 경악하며 묻자 라르웬은 쏟아지는 햇살을 커튼으로 가렸다.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마차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만큼 쏟아졌다.
"그만큼 네가 저지른 일이 크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네."
"왕자를 만나는 일이 이렇게 큰일입니까? 좀 유난스럽다고 생각하는데요?"
하벨은 말과 달리 창문에 찰싹 붙은 아라와 같이 조금 전부터 사람 구경을 하느라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아갔다.
"유난스럽지 않습니다. 아마 도련님의 행보가 다른 나라까지 전해졌을 겁니다."
카샬이 웃음기를 섞으며 말했다.
지금 하벨이 하는 행동을 보니 여간 철부지가 아닐 수 없었다.
"왜?"
하벨은 정말로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만큼 티에라가 유명하다고 생각하면 돼. 무엇보다 하벨 티에라가 은둔 생활을 접고 나온다는데 놀라지 않는 게 이상하지."
라르웬은 티에라를 향한 자랑스러움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하벨이… 밖에 잘 안 나갔습니까?"
"맞아. 나가더라도 후드로 얼굴을 가리곤 했지. 참, 이미 알고 있겠지만, 밖에서는 너를 그렇게 부르지 마."
"밖에서는 어떤 얼굴을 해야 하는지 모르니 말이 나온 김에 묻겠습니다. 하벨 티에라는 어떤 사람입니까?"
하벨은 잠깐 창문에서 시선을 떼 라르웬을 쳐다보았다.
포탈을 넘었을 때 느꼈던,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충동과 함께 일어나는 편안함.
물의 저주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 눈이 쌓인 산을 올랐다는 점.
세상이 멸망한다고 믿고 있으며 멸종했다고 알려진 용을 제 몸에 불러들이려고 한 점.
그 모든 게 방금 라르웬이 꺼낸, '하벨이 밖에 돌아다니지 않는 편이다'와 맞물리지 않아 더 수상해졌다.
그럼 대체 그 정보들은 어디서 얻은 거라는 말인가.
[지금도 너한테서 나는 불쾌함 때문에… 아니, 이건 됐어. 내가 보기에 착한 아이였던 것 같아.]
루룸이 꺼내는 말에 아라가 잠깐 루룸을 바라보았다.
세렌도, 다른 정령들도 하벨에게서 나는 '불쾌감'을 언급하며 자신에게 여러 번 물었다.
'…이 몸은 그런 거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는데.'
하벨에게서는 늘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바람처럼 상쾌하고, 바다처럼 깊고, 꽃처럼 달콤한 냄새.
"낯을 가렸지만, 집에서는 장난기가 많았어. 잘 웃고, 밝고, 말이 좀 가벼웠어도 악의는 없었고, 겁도 많고, 엄살도 심했고……."
라르웬은 말을 하다 말고 얼굴이 살짝 굳었다.
"외로움이… 많았어. 참 많이."
"그러니까 생각 없이 말해도 된다는 말이죠?"
하벨이 요약하자 라르웬이 가볍게 웃었다.
자신도 그 말을 꺼내고 뒤늦게 아차 했는데 하벨이 가볍게 넘어가주어 다행이다 싶었다.
"맞아. 그런데 눈치는 빨랐어. 그냥 지금보다 조금 더 천진난만했지."
"지금 최대한 근엄하려고 노력한 결과가 나오네요."
푸흡.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리자 카샬의 입꼬리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뭐가 웃긴대?"
"죄송합니다, 도련님. 오늘따라 근엄이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웃기네요."
하벨은 코웃음을 쳤다.
지금 말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알면 저런 소리가 나오지 않을 텐데.
[대장, 대장!]
아라가 갑자기 하벨을 다급히 불렀다.
"왜 그래, 아라야?"
[저기 봐봐!]
아라가 앙증맞은 발로 가리킨 그곳에는 다른 곳처럼 사람들이 우글거렸고, 마차를 쳐다보며 어쩌다 눈이 맞은, 그런 상황이라 요란함과 달리 뭔가 특별한 게 보이지 않았다.
"아라야. 대체 뭐가……."
하벨은 말을 멈췄다.
무언가에 끌린 것처럼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사람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거대한 존재감과 세로로 줄을 그은 듯한 날카로운 눈동자.
무엇보다 사람들 틈 사이에 아이가 저렇게 또렷이 보일 리가 없었다.
화르르륵!
강렬한 검은 불꽃이 피어오르며 랜턴이 흔들리기까지 했다.
하벨이 의문을 느낀 순간, 갑자기 모든 게 느려졌다.
마치 자신과 저 아이만 다른 장소에 온 것처럼 멀었던 거리마저 좁혀져 창문 밖에 아이가 보였다.
아이는 자신을 바라보며 입을 움직였다.
찾.
았.
다.
선명한 입 모양에 깜짝 놀라며 하벨이 눈을 깜빡였다.
아이의 해맑은 미소가 드러나자 언제 세상이 느려졌냐는 듯이 굴러가는 바퀴에 맞춰 사람들이 흘러갔고, 아이는 사라졌다.
하벨은 멍하니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찾았다고? 누굴?'
[대장, 대장, 봤어?]
아라가 하벨의 옷자락을 흔들며 물었다.
"아라 너도 저 아이가 보였어?"
[응, 봤어. 아까부터 대장을 보고 있었어. 그리고 이 몸하고도 눈이 마주쳤어!]
"혹시 말하는 것도 들었어?"
[아니. 그건 못 들었는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라르웬이 도중에 끼어들었다.
하벨과 아라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하기에 하벨의 얼굴이 너무도 심각했다.
[이 몸도 자세히는 모르겠어. 대장을 계속 쫓아오면서 쳐다보길래 너무 무서워서 대장을 불렀어.]
"누가… 하벨을 쫓았다고?"
[이 몸도 몰라.]
아라는 자신의 꼬리를 잡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르웬은 하벨을 재촉하고 싶었지만, 얼이 빠져 있어 건들지 못했다.
'대체… 정체가 뭐지?'
하벨은 갑자기 나타난 저 존재가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창문에 비친 하벨 티에라의 표정에 어둠이 드리운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