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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54화 (54/415)

54화. 뭐라고? 깨어났다고?(3)

* * *

"막내야…? 너 대체 뭘 하려고 그래?"

라르웬은 수상쩍은 하벨의 미소에 당장 말을 걸었다.

"거대 정화 장치를 관리하는 자가 귀족이라고 합니다. 아셨습니까?"

"당연히 알고 있지."

"아라한테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에헴. 이 몸이 다 알려줬어. 검은 물이 흐르지 않고 떠 있었다는 거랑 정화제를 대장의 몸으로 만들었다는 거랑, 음, 어, 또…… 하여튼 막막 말했어.]

"울면서 말했지. 그래서 기억이 잘 나질 않을 거야."

라르웬은 피식거렸다.

"울었어……?"

하벨이 아라를 보자 아라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라르웬은 째려보았다.

[너, 나빠! 말 안 한다며!]

아라가 털을 바짝 세우자 라르웬은 웃음을 터트렸다.

"나한테 '무얼' 말하지 말라고 정확히 알려줬어야지. 나는 다른 걸 말하는 줄 알았네."

[…다른 거라니?]

아라가 정말 모른다는 얼굴로 묻자 루룸은 이미 고개를 돌려 웃음을 참고 있었다.

"하벨이 죽는 거 아니냐며 내 소매를 눈물로 가득 적신 걸 말하는 줄 알았잖아?"

[…씨잉!]

아라가 라르웬의 손가락을 물려고 하자 그는 천연덕스럽게 손바닥을 내보였다.

"방금 네가 물었잖아?"

[푸하하핫!]

루룸은 더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놀리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둘 다 나빠! 물어버릴 거야!]

"그럼 그걸 알고도 내버려 두신 겁니까?"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하벨의 목소리에 아라를 여유롭게 막던 라르웬이 행동을 멈췄다.

마치 자신을 질타하는 것 같지 않은가.

콱.

아라가 라르웬의 손가락을 물었지만, 그는 아라를 대롱대롱 단 채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오염된 물이 떠 있던 상황을 보셨… 아, 보지 못했겠네요."

하벨은 대충 수습하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어쨌든 알고도 내버려 둔 그 일을 내가 수습하겠습니다. 그걸 위해서는 아무래도 사전 작업이 필요하죠. 그래서 좀도둑이 딱 좋을 때 왔다고 말한 겁니다."

"하벨. 나를 질타해도 되지만, 아버지하고 누님은 아니야. 방향이 틀렸어."

"아뇨. 방금 제 물음은 티에라 가문을 향한 겁니다. 티에라라는 이름을 단 누구도 이 물음에서 벗어나지 못할 테지요."

알면서 내버려 둔 건 큰 잘못이다.

하벨이 꺼낸 말로 방 안에 침묵이 흘렀다.

라르웬의 손가락을 물던 아라마저 눈치를 보더니 조용히 하벨에게 돌아와 이불 위에 앉았다.

"저번에 형님께서 왕실이 무너지지 않게 뒤에서 지원하는 건 티에라라고 했습니다."

"…그랬지."

"그 역시 틀렸습니다."

"틀렸다니?"

"껍데기뿐인 왕실이 대체 왜 필요한 겁니까? 왕이 없다면 모르겠지만, 왕이 있는 땅에 왕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만큼 불행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막내야. 도중에 미안하지만, 목소리 높이지 말고 말해. 배도 고프면서 그렇게 억지로 힘을 짜낼 필요 없어."

라르웬은 하벨의 이마를 눌러 억지로 눕혔다.

깨어나자마자 이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우습긴 하나, 하벨이 꺼낸 말은 맞는 말이었다.

베개가 머리에 닿자 하벨은 눈을 깜박거렸다.

"네 말이 맞아. 왕실이 껍데기뿐인 건 잘못됐어."

라르웬은 하벨이 지적한 부분을 인정하고 말을 시작했다.

"하지만 막내야. 네가 모르는 게 있어."

"말해보십시오."

"왕실을 내버려 둔 건 전대 가주 때부터야. 아버지는 이를 되돌리려고 했어. 하지만 물의 오염이 심각해졌고, 둘 중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는 순간이 왔어. 아버지가 무얼 선택했는지 알겠지?"

"함부로 말해서 미안합니다."

하벨은 바로 사과했다.

내막은 모르고 상황만 보고 질타한 자신이 잘못했다.

"됐어. 몰랐으니까. 하지만 결과적으로 네 말이 옳아. 뭐가 됐든 핑계겠지. 정말 사람이 갈리듯 했으면 어쩌면 왕실까지 살렸을 수도 있었을 거야."

라르웬이 빈정거림을 담자 하벨은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내가 하겠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묻자, 네가 왜? 굳이?"

"꼭 해보고 싶었던 일이라서요. 부탁도 받았습니다."

"부탁이라니? 누가? 설마… 아버지께서? 아니야. 그럴 리가 없는데."

하벨은 라르웬이 더 혼란스럽기 전에 손가락으로 하벨 티에라의 몸을 가리켰다.

라르웬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는 말을 돌렸다.

"어쨌든, 막내야. 정확히 네가 뭘 하려는 건데?"

"내가 어떻게 귀족들의 땅을 뺏는지 보셨잖습니까? 무언가 달라지고자 한다면 위를 바꾸어야만 합니다. 그 사실은 아마 형님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위?]

아라가 관심을 가지며 물었다.

"그래, 아라야. 위가 바뀌지 않으면 아래도 바뀌지 않아. 그런데 웃기게도 위를 노리려면 아래에 있는 자들을 끌어들여야 해."

[왜? 왜 아래에 있는 인간들을 끌어들여야 하는데?]

"위를 바꾸려고 하는 욕망이 가장 강한 자들이 바로 아래에 있기 때문이지. 뒷세계 수장들이 가장 쉬운 예시라고 볼 수 있어."

[그러면 만약에 있지, 대장. 위도 아래도 바뀔 생각이 없으면 어떡해?]

"썩어버릴 뿐이겠지? 세상에 영원한 위도, 아래도 없으니까."

"요컨대 거창하게 말했지만, 아직은 계획이 없다 이거지?"

라르웬이 찌르듯 꺼낸 말에 하벨은 실실 웃었다.

"들켰네요. 이건 좀도둑이 오면 같이 상의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나도 듣자. 그래도 괜찮지?"

"저야 괜찮지만, 일 안 하셔도 됩니까? 혹시 백수 됐습니까?"

라르웬의 웃음이 터졌다.

백수라니.

"아니. 네 소식 듣고 일단 이 근방으로 일을 대체하기로 했거든."

[맞아. 내가 본 라르웬 중에서 가장 움직임이 빨랐어.]

"원래 여기가 틈의 세계가 많이 일어나지 않는 편이라 휴식을 취하는 셈 치려고 했는데 벌써 세 번이나 틈의 세계를 닫았어."

이 근방이라고 해봤자 넓으면 얼마나 넓겠는가.

"두 번 아닙니까?"

하벨이 손가락을 꼽으며 묻자 라르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기 전에 다른 곳에서 한 번 열렸어. 반쯤 쉬러 왔는데 일을 더 하게 생겼다니까."

라르웬은 한숨을 내뱉었다.

"세 번도 많은 겁니까?"

"그래. 클로저라는 이름이 워낙 거창하게 들려서 막 엄청난 일을 할 것 같지만, 지역과 유착 관계를 유지하지 않도록 담당 지역을 매번 바꾸는 편이라 사실상 움직이는 시간이나 보고서를 적는 시간이 더 길어."

라르웬은 보고서를 언급할 때 잠깐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아차, 원래 다른 클로저들은 이렇게 위치를 정할 순 없어. 다 아버지 덕이라 허락이 떨어진 거니까 오해하지 마."

혹여나 하벨이 잘못된 지식을 얻을까, 라르웬은 다급히 뒷말을 보충했다.

"보통은 어느 정도로 일어납니까?"

"내 기준에서 한 달에 많으면 한 번. 물론, 세계 단위로 치니까 수백 건이 일어나는 셈이지."

아라의 꼬리를 만지던 하벨의 손이 그대로 멈췄다.

"그런데 지금 세 번이나 일어난 겁니까?"

"그래. 엄청 이상하지?"

"그냥 이상한 수준이 아닌데요?"

"그래서 계속 조사 중이야. 그러니까 나도 한가한 게 아니라고, 동생아."

"아, 난 또 백수가 된 줄 알았잖습니까."

"백수가 돼도 솔직히 나쁠 건 없지."

라르웬은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아서는 가볍게 흔들었다.

"우리 가문이 돈이 좀 많아, 막내야."

"카샬이 매일 그렇게 입에 달고 살아서 진짜인지 아닌지도 헷갈립니다."

"정말이야."

"그럼 돈으로 어느 정도 입막음이 가능합니까?"

"해보진 않았는데 수천 명 이상도 무리 없이 가능할 것 같네."

라르웬이 여유롭게 웃다 말고 문득 싸한 느낌에 눈살을 찌푸렸다.

"막내야…?"

"아, 그냥 물어본 겁니다. 지금 뭐가 더 편안한 방법인가 생각했습니다. 오늘은 맹세코 아무것도 안 할 겁니다. 헤레스가…, 음, 엄청 화낼 것 같으니까요."

"너도 이제 헤레스가 무섭다는 걸 알아가고 있어서 참 다행이네."

"형님. 움직이진 않을 건데, 정화제를 한번 만들어봐도 됩니까?"

"막내야 너 진짜……."

똑똑.

빠른 노크 후 문이 벌컥 열렸다.

"미치셨습니까?"

카샬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말이 묘하게 이어져 하벨은 탐탁지 않게 카샬을 보았다.

카샬 뒤에 서 있던 페트리오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대로 굳어 상황을 살폈다.

"지금 삼 일 만에 깨어나시고 하시는 말씀이 뭐요? 정화제요? 자꾸 이러시면 저도 집사란 직함 떼고 말할 겁니다."

카샬은 당장 소매를 걷었다.

"안녕, 카샬. 어서 와, 좀도둑."

갑자기 하벨이 환하게 웃자 카샬은 분통함에 피가 위로 솟는 기분을 느꼈다.

"…제 복창을 터트리시려고 이러는 거 맞습니까?"

카샬은 뒤늦게 문을 닫으며 말했다.

"맞아. 한… 반쯤?"

하벨이 키득거리자 카샬은 화를 내면서도 제일 먼저 링거와 정화 장치, 그리고 열을 이어서 확인했다.

"좀 살 만하시니 입이 그렇게 움직이는 거겠죠?"

"그럴지도 모르지. 카샬."

"예, 도련님."

카샬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너도 봤잖아?"

그 강에서 만들어진 반영구적인 정화제를.

"봤죠."

"확인해볼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압니다. 다 이해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아니, 모레까지 절대로, 무조건 안 됩니다."

카샬은 머리를 차갑게 하려고 애를 썼다.

그때, 반영구로 만들어진 정화제를 보여주길 참 잘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만약 보여주지 않았다면 정말로 밤에 몰래 가출하지 않았을까?

"이건 제 부탁이기 전에 헤레스 씨의 말입니다. 무조건 안정입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저도 들을 수 있습니까?"

페트리오는 어떻게든 이야기에 끼어들고 싶어 조심스레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호위는?"

"응접실에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페트리오는 하벨의 말에 대답하면서 그의 상태를 살폈다.

"많이… 안 좋으십니까?"

"그럼 네 눈에는 괜찮은 걸로 보여?"

카샬이 툭 건드리자 페트리오가 욱하며 받았다.

"괜찮은 걸로 보이면 묻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 나는 너랑 달리 그게 안 돼서 말이야. 하벨 님께 충성을 바쳤거든."

'…충성이라니?'

하벨도 처음 듣는 이야기에 눈을 깜박거렸다.

"충성? 추웅성? 개소리 좀 그만하지, 그래? 평생 누구 위에만 살아본 놈이 누구 밑에 들어가는 게 쉽겠어?"

라르웬은 카샬의 말에 잠깐 비웃음을 그렸다.

"그러니 지금 믿음을 더 드리기 위해서 아르에느, 무르토, 메멘, 비튼을 관리하는 네 수장의 확실한 약점까지 쥐었다고 보고드리려던 참이니까!"

"확실한 약점?"

하벨이 묻자 페트리오는 언제 언성을 높였냐는 듯이 미소를 띠며 종이를 건넸다.

"예, 이 약점은 네 수장이 도련님께 바친 충성의 증표입니다."

카샬은 진정성이 묻어나는 페트리오의 말에도 양팔을 붙잡으며 소름 돋는다는 듯이 반응했다.

"이야, 카샬 네가 누굴 싫어하는 건 진짜 오랜만에 본다."

"…혹시 그때도 오신 겁니까?"

페트리오는 라르웬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하벨 티에라는 몰라도 라르웬 티에라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맞아. 가면 쓰고 있었어. 왜? 속아서 억울해?"

라르웬이 웃었지만, 그 웃음이 섬뜩해 페트리오는 괜히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좀도둑."

"예, 도련님."

하벨의 부름에 페트리오는 곧바로 대답했다.

"충성이라니? 나는 그런 거 필요 없다고 분명히 말했잖아. 너와 나의 관계도 그래."

"그럼 정정하겠습니다. 믿음의 증표입니다."

말만 그럴듯하게 포장한 셈이었지만, 뭐든 첫 단추가 중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충성보다 믿음이라는 단어의 선택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내가 왜 뒷세계 수장들을 죽이지 않은 건지 알고 있지?"

"알고 있습니다. 제2의 뮈에르 진젤이 나오지 않게 막기 위함이 아닙니까?"

"맞았어. 다시는 누구도 티에라를 건들지 못하게 밑에서부터 작업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땅 네 곳을 넘기면서 너한테 바랐던 유일한 거라는 걸 알고 있지?"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야말로 수장들이 티에라를 위한 벽이 될 겁니다."

페트리오는 종이를 다시 건넸다.

"잘하고 있네. 그래서 말이야, 좀도둑."

뱀이 제 몸을 기어가는 듯한 압박에 페트리오는 곧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 곧 오리라 짐작했다.

"귀족들 정보, 아직 가지고 있지?"

"……."

페트리오는 잠깐 머뭇거렸다.

"대답하지 않고 뭐 해?"

카샬이 재촉해서야 페트리오는 입을 열 수 있었다.

정보를 얻는다는 것 자체는 곧 그들과 싸우겠다는 게 아닌가.

"…있습니다."

"그럼 내게 줄 수 있어?"

하벨이 손을 뻗어오자 페트리오는 두려움이 찬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도련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이 정보로 모든 걸 뺏기고… 좀도둑이 되어야 했습니다. 제가 가진 힘을 숨긴 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멍청한 놈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디 한번 발버둥 쳐봐라.

그렇게 자신을 풀어준 피나토 웬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췄다.

정화제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줄 알면서도, 티에라 가문에 숨긴 놈의 시종들 감시하에.

더는 피나토를 찌를 무기도 숨통을 쥘 독약 같은 정보도 없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여야만 했다.

그래야 자신도, 가문도 안전할 수 있었으니까.

"…위험합니다. 놈이 도련님께서 피나토 그놈을 찌를 정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걱정은 고마워."

하벨은 방긋 웃었다.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이는……."

"티에라잖아?"

하벨이 꺼낸 말에 라르웬은 흡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카샬은 얼굴을 왈칵 구겼다.

라르웬이나 하벨이나 형제라 그런지 왜 이렇게 닮았는지.

하지만 '티에라'라는 이름으로 모든 게 이해되어 카샬은 더 짜증이 났다.

"가주님을 말린 건 나야. 쥐새끼를 잡으려고 호랑이를 풀면 되겠어?"

하벨은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쥐새끼를 잡을 고양이야."

"고양이 욕하지 마십시오."

카샬이 딱 잘라 말했고, 라르웬은 카샬을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내 동생이 고양이 수준도 안 된다고? 아니, 고양이 하라고 해도 내가 허락 못 해. 막내는 내가 보기에 삵이야."

"……."

페트리오는 갑자기 고양이니, 삵이니 하는 상황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사실 그게 그거 아닌가.

"그러니 내게 주면 돼, 좀도둑."

하벨이 키득거리며 다시 손을 뻗었다.

"내 뒤에 호랑이가 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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