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뭐가 됐으면 좋겠어?(3)
* * *
숨이 멎을 만큼 거센 검은 물결에 정령들은 놀란 표정으로 정령수로 만들어진 그 힘을 서둘러 밖으로 꺼냈다.
쏟아낸 정령수가 거의 남김없이 회전하는 힘으로 바뀌었기에 위력은 조금 전과 비교할 수 없었다.
'이거라면 할 수 있겠어.'
하벨의 몸이 천천히 흔들렸다.
버티려고 애를 쓰나, 그는 기어코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 더!]
아라가 거대한 힘의 뭉치로 날아가서는 앞발로 자신의 정령수를 밀어 넣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아라야. 거긴 위험한데.'
하벨은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바닥에 얼굴이 쓸렸지만, 아프지 않았다.
그저 밀려드는 후유증에 떨리는 몸을 느끼며 쏟아지는 오염된 물과 정령수로 만들어진 힘이 격돌하는 장면을 바라보았다.
쏴아아아.
물줄기가 거세게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오염된 물줄기를 뚫던 그 힘의 규모가 갑자기 더 커졌다.
'…이걸 아라가?'
하벨은 신이 난 채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아라를 바라보았다.
[대장!]
그 짧은 말 속에 마치 우리가 이긴다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된 것만 같았다.
휘이이익!
거친 소리와 함께 정령수로 만들어진 힘이 아름답게 손을 뻗어가며 오염된 물을 움켜쥐어서는 같이 회전했다.
사르륵 흐르던 알갱이들이 매섭게 저항하는 오염된 부분을 부드럽게 녹였다.
치이익!
불과 물이 만났을 때는 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염됐던 물의 색이 점점 투명하게 변하자 검게 물든 물이 구석으로 내몰렸다.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하듯 도망치려 밖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마저도 붙잡혀 완전히 녹아내렸다.
[…아.]
주먹을 꽉 쥐던 정령들은 서서히 손에 힘을 풀며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염된 물, 오염된 물 때문에 죽어버린 정령들, 그리고 이 둘을 붙잡았던 마법까지.
그 세 개가 얽혀 만들어낸 낯선 공간이 빠르게 사라졌다.
후.
불이 꺼지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잔잔히 일어났다.
'드디어.'
하벨은 천천히 눈을 깜박거렸다.
허공에 멈춰 있던 물이 그대로 쏟아졌다.
쏴아아.
시원한 소리와 함께 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령들은 그제야 하벨에서 떨어져 조심스레 물을 만졌다.
찰랑.
깨끗한 그 소리에 정령들은 기쁨에 가득 차 소리쳤다.
[무, 물이 돌아왔어!]
[대체… 얼마 만에 보는 깨끗한 물이야?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떡해. 나 진짜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
기쁨에 물들었던 그 소리는 점점 눈물로 번져갔다.
뚝뚝.
정령들은 서럽게 울었다.
강 위에 떨어지는 그들의 눈물이 마치 비처럼 보였다.
'…해냈다.'
하벨은 힘겹게 입꼬리를 올렸다.
'나도.'
얼마 만에 이룩한 일이던가.
인형처럼 왕좌에 앉아 흘러가는 시간만 바라보던 자신이 다시 무언가를 해낼 줄이야.
강한 성취감이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거세게 하벨의 가슴을 두드렸다.
'다시… 할 수 있네?'
하벨은 먹먹함을 느끼며 강이 되어가는 물을 바라보았다.
용왕의 힘이 끊어져 더는 물속에 글자가 보이지 않게 됐지만, 아직도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살려줘.
―도와줘.
―아파.
'…이제는 그 아픔이 가시기를.'
하벨은 더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어 눈을 감았다.
[대장?]
아라가 놀라며 하벨에게 찰싹 붙었다.
[대장! 대장!]
그를 흔들던 아라는 순간 움찔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물?]
강을 보는 아라의 눈동자가 너무도 맑게 반짝거렸다.
저 물이 자신을 불렀다.
[대장. 아야.]
아라는 기절한 하벨과 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라야. 너도 이런 일이 생기면 외면하지 말았으면 해. 도망은 정말로 모든 걸 모른 척할 수 있을 때나 하고.
저 목소리를 외면하면 하벨이 말했던 것처럼 도망치는 게 되는 걸까.
아라는 흔들리고, 흔들리다 결심했다.
자신을 부르는 그 간절한 목소리를 더는 외면하지 않고 물로 뛰어들었다.
첨벙!
아라의 몸이 빛에 휩싸였다.
* * *
[…대장!]
다급한 그 소리에 하벨은 눈을 떴다.
주변을 살피다 이전에 처음으로 아라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꿨던 그 꿈이라는 걸 인지했다.
그런데 꿈이 이렇게도 이어지는 걸까.
[이 바보!]
여전히 아라와 자신 사이에 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바보라니…? 우리 아라가 이런 말을 쓸 리가 없는데."
하벨은 아라의 말에 얼떨떨했다.
[죽을 뻔했잖아! 이 몸은 대장이 죽는 게 싫어! 아니, 절대 허락하지 않아.]
아라가 언성을 높였다.
"……아."
하벨은 피식 웃었다.
"조금 무리했을 뿐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지금 몸이 어느 정도로 버틸 수 있는지 가장 잘 아는 자는 바로 나일 테니."
[…대장. 진짜 괜찮아?]
아라가 시무룩한 목소리로 물었다.
"당분간 요양이 필요하겠지만, 괜찮다."
[있지, 대장.]
"그래, 아라야."
[아까 그 물은 정말 무서웠어.]
"나도 솔직히 놀랐구나. 땅을 적시던 비가 검게 내리는 걸 본 적이 없으니."
오염된 물.
모든 걸 죽음으로 몰고 갈 만큼 새카만 그 모습에 하벨은 물이 오염된 세상이 어떤 모습인지를 다시금 알았다.
오염된 물이 인간들이 가진 물의 내성을 넘어 물의 저주에 걸렸을 때 조각이 되어 부서지던 그 모습처럼 충격적이었다.
[이 몸은 세상이 정말 예쁘고 즐겁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세상은 내가 아는 것과 달랐어. 아주 많이.]
"아라야."
하벨이 아라를 부드럽게 불렀다.
[…응, 대장.]
"미안하구나."
[대장이 왜 미안해해?]
"정령이 모든 걸 알고 태어난다고 해도 내 눈에 너는 아직 아이구나."
하벨은 손을 들어 물을 만졌다.
찰랑.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나는 네가 마냥 행복하기만을 바랐는데, 네가 무서움을 알게 됐다고 하니 대장으로서 미안할 뿐이구나."
[대장은 이상해.]
하벨은 그 말에 눈웃음을 지었다.
[뭐든 짊어지기 싫다면서.]
"그래, 그렇게 계속 너한테 말했지."
[그럼 이 몸은?]
"내가 이 몸에 깃든 날과 네가 태어난 날이 같았다. 설령 나로 인해 네가 태어난 게 아니더라도 내가 이 몸에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끼고 있듯 너 또한 그렇구나."
갑자기 나타난 작은 생물체.
엄지만큼이나 작았던 그 생물체에게 호기심을 느꼈고 자신의 물로서 성장시켰다.
"아라야, 너는 내가 짊어지마."
다른 건 몰라도 여전히 작은 저 아이만큼은 짊어져야 했다.
모든 걸 지켰지만, 자신의 소중한 이들을 지키지 못했던 무능함을 후회했다.
그러니 이번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품에 둘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너의 대장이다."
아라가 완전히 성장할 때까지.
자신이 하벨 티에라에게 이 몸을 다시 넘겨줄 한정된 시간 동안.
하벨은 물 너머에 있는 아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대장.]
"그래, 아라야."
[이 몸은 아직 많은 것들을 모르지만, 그래도 이건 알아.]
아라는 배시시 웃었다.
[이 몸은 대장을 좋아해. 대장이 이 몸에게 주는 물만큼이나.]
"……."
하벨은 팔에 힘이 빠진 듯 손을 내렸다.
물과 같다니. 이보다 기쁜 말이 어디 있을까.
[대장은 이 몸이 뭐가 됐으면 좋겠어?]
아라가 물었다.
이전에 물었던 '어떻게'가 아니라 '무엇이'라는 말에 하벨은 아라가 루룸이나 세렌처럼 형태를 정하는 순간이라는 알아챘다.
"너는 무엇이 됐으면 하는가?"
하벨이 되물었다.
[이 몸은 뭐든 좋아. 대장이 이 몸보다 더 많은 걸 봤잖아?]
"그렇지."
[뭐가 예뻤어?]
"예쁜 것들은 많았다."
하벨은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의 어여쁨을 생각했고, 시간에 따라 색도, 모습도 달라지는 하늘을 생각했다.
하지만 저것들은 아라가 원하는 형태가 될 수 없었다.
"하얀 세상을 본 적이 있었다. 소중한 자를 잃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을 때 말이다."
하벨은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그곳이 어디였는지, 어떻게 그곳까지 갔는지 알지 못했다.
그냥 가다 보니 새하얀 세상에 갇힌 것만 같은 그 장소에 자신이 서 있었다.
"그건 눈이었지. 차가웠고, 깨끗했단다. 당연하게도 말이야."
하벨은 당연한 소리를 늘어놓는 자신이 참 우스운지 웃음소리를 냈다.
"그곳에서 나는 눈만큼이나 하얀 동물을 보았다."
[하얀 동물?]
"그래. 북극… 여우라고 불리더구나."
하벨은 이름과 함께 비틀거리며 앉아 있던 여우의 모습을 떠올렸다.
"여우도 날 보았지. 그리고 마치 길을 비켜주듯 떠나더구나."
무엇이 급했는지 모르겠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그 작은 생물체에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하얀 세상에, 눈만큼이나 하얀 존재가 걸어가는 모습이 너무도 쓸쓸해 보여 그 모습이 잊히질 않아."
다 잃어버리고 손에 아무것도 쥔 게 없는 자신 같아 하벨은 여우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직 어린 여우였단다. 어미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지."
[혹시 후회하고 있어?]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내가 작고 어렸던 여우를 보듬어주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만, 그때 나는 지쳤다. 지치고 지쳐서 내 마음에 빈 곳이 없었지."
[알았어!]
아라가 헤헤 웃었다.
[이 몸이 대장의 후회가 될게.]
"후회가 될 거라니?"
[대장이 이 몸을 짊어지겠다며?]
"그래. 그렇게 말했지."
[그러니 이 몸은 그때의 후회를 다시 바꿔주려고. 대장이 이렇게 또렷이 기억한다는 건 그만큼 중요했다는 거잖아?]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기억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간직하고 있는 기억이 왜 크지 않겠는가.
[응! 이 몸은 이제 뭐가 되어야 하는지 알겠어.]
"아라야. 그래도 내가 아니라 널 위한 존재가 되거라."
[그것도 생각해 볼게, 대장.]
아라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아 참, 대장.]
"말해보거라."
[모르는 곳에 함부로 들어가는 거 안 돼. 이 몸도 함부로 아무거나 먹으면 안 된다는 거랑 아무 곳이나 들어가면 안 된다는 걸 알아! 그런데 어떻게 대장은 그것도 몰라?]
"……?"
하벨은 황당함에 눈을 크게 떴다.
"아, 아라야…?"
[잘 기억하고 따라 해, 대장. 함부로 뭐 먹지 말고, 들어가지도 마. 알았지?]
아라의 앞발이 물을 뚫고 불쑥 튀어나왔다.
앙증맞은 발이 펴졌다가 하벨이 뒤로 물러서자 '씨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그러마."
하벨은 웃음을 꾹 누르며 대답했다.
* * *
"……."
하벨은 천천히 눈을 떴다.
나무들이 왜 이렇게 흔들리는지.
"막내야? 정신이 들어?"
라르웬의 목소리에 묻어난 걱정이 짙어 하벨은 손가락이라도 꼼지락거리려 했으나, 힘이 빠졌다.
"…형님."
하벨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내자 라르웬은 그대로 멈췄다.
앞서가던 카샬도 그 목소리에 그대로 뒤돌았다.
"도련님. 정신이 드십니까?"
정신을 차렸다면 차린 거지만, 솔직히 당장이라도 눈이 감길 것만 같았다.
[대장!]
불쑥 낯설되,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하얀 털이 가득하고, 귀는 짧은 여우였다.
자신이 보았던 그 어린 북극여우와 비슷했지만, 어딘가 달랐다. 마치 외형만 유사하게 가져온 듯했다.
눈이 더 컸고, 동그랗되 푸른색 눈동자를 띠고 있었으니.
화르륵.
랜턴에 갑자기 불이 붙었다.
처음 아라가 탄생했을 때보다 더 환해지고 커지지 않았는가.
"…아라?"
하벨이 조심스레 묻자 여전히 짧은 다리가 활짝 열리며 하벨을 꽉 안았다.
[눈 떴어, 대장?]
아라는 헤헤 웃으며 제 몸통만 한 폭신한 꼬리를 흔들었다.
"사고를 거창하게 쳤더라, 막내야."
라르웬은 고개를 돌려 자신이 업은 하벨을 쳐다보았다.
바뀐 아라의 모습에 입꼬리를 올리던 하벨은 라르웬의 시선에 어떤 사고인지를 눈으로 물었다.
"저곳을 정화한 거 너 맞지?"
라르웬은 그대로 걸음을 옮겨 졸졸 흐르는 강을 보여주었다.
하벨의 눈이 점점 커졌다.
'…진짜 강이 됐다.'
청아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그 모습에 하벨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나무 사이로 보이는 물이 너무도 깨끗하지 않은가.
"오염이… 정말 다 사라졌습니까?"
숨과 뒤섞인 하벨의 물음에 라르웬은 금방 대답했다.
"그래. 나도 정령들한테 정확히는 듣지 못했지만, 네가 엉망이 된 거대 정화 장치를 부수고 물을 정화했다며?"
"저… 아닙니다."
자신은 그저 몸을 빌려줬을 뿐, 정말로 오염을 정화한 건 정령들이었다.
[네가 한 거 맞아, 하벨.]
강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루룸이 나무 사이에서 튀어나왔다.
루룸은 아주 활짝 웃고 있었다.
[방금 다 들었어.]
"……?"
루룸의 뒤에서 정령들이 쏙쏙 튀어나왔다.
정령들이 하벨을 보며 루룸처럼 활짝 웃었다.
[일어났어, 하벨?]
정령들은 당장 하벨 주변에 몰려들었다.
[네가 갑자기 기절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
정령들은 곧 아라를 쳐다보았다.
[네 곁에 있던 아라도 물속에 뛰어들더니 한참 나오지 않았고. 우리가 옮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얼마나 말을 나눴는데.]
[아파 보여서 우리가 계속 쓰다듬어줬어.]
'…교감이 된 건가? 그래서 지금 아프지 않은 건가?'
하벨은 순환의 길을 살피고 싶었지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대신 눈으로 라르웬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냐고.
"네가 갑자기 사라졌어."
시선을 읽은 라르웬이 말문을 열었다.
"맞습니다. 갑자기 사라지셨고, 사방에 안개가 나타났습니다. 어딜 나가도 다시 제자리라 도련님을 쫓을 수가 없었죠."
카샬은 분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안개가 사라진 후에도 사라져버린 하벨의 흔적을 쫓기란 어려웠다.
[안개가 사라지고 내가 널 찾았어!]
루룸이 앞발을 흔들며 히히 웃었다.
하벨에서 나는 특유의 불쾌감을 쫓았기에 찾을 수 있었다.
하벨이 힘겹게 씩 웃자 루룸도 입꼬리를 바짝 올렸다.
[고마워.]
정령은 하벨을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그에게 풍기는 불쾌함은 이제 뭐가 됐든 상관할 게 아니었다.
[이렇게… 오염되지 않은 강이 흐르는 건 정말 오랜만이야.]
[아! 하벨, 잠깐 이리 와봐. 너한테 꼭 보여줄 게 있어.]
[너희도 이리 와.]
정령들은 라르웬과 카샬의 팔을 당겼다.
먼저 가서 그걸 본 루룸만이 다시금 행복감에 젖어 들어갔다.
저곳에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게 있었다.
아주 소중하고, 아주 아름다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