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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50화 (50/415)

50화. 뭐가 됐으면 좋겠어?(2)

* * *

하벨의 목소리는 하벨 티에라였지만, 그 속에 숨어든 위엄은 용왕 그 자체였다.

바람이 불어오는 것도 아님에도 하벨의 주변만 천천히 바람이 일어났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더냐."

물이 하벨의 목소리에 반응하는지 금세 떨림이 일어났다.

한 걸음.

하벨이 또 나아가자 물이 조금 뒤로 물러섰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걸음걸이나, 그 무게가 달랐다.

묵직하고, 거칠었다.

"비키거라."

날이 선 그 목소리에 깃든 위엄이 한층 더 커졌다.

물이 또 뒤로 물러섰다.

마치 겁을 먹은 모습처럼 거품마저 보글보글 일어났다.

한 걸음.

두 걸음.

하벨의 눈동자에 피어난 용왕의 힘이 거침없이 그를 감쌌다.

감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가벼웠다.

이전 힘과 비교하면 새끼발가락조차도 되지 못하는 힘이었지만, 하벨은 굳이 의식하지 않았다.

지금은 이대로 나아가기만 하면 충분했다.

하벨은 물에 일어난 글자를 바라보았다.

'그렇게도 아팠더냐.'

고통과 괴로움만이 가득한 저 글자는 하벨의 분노를 더 지폈다.

'그렇게도 고통스러웠더냐.'

의미 없는 희생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저들이 무슨 생각으로 정령을 부정한 것들에게 둘러싸이게 한 뒤 오염된 물의 먹이로 줬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몇 번을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몰랐으면 몰랐지 이미 봤으니 하벨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대장…?]

아라가 조심스레 하벨을 불렀다.

그만큼 하벨의 분노는 매서웠고, 그 분노로 물러서는 물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무서웠다.

하벨이 처음으로 무서웠다.

"놀라지 마, 아라야."

하벨은 뒤에서 아주 조심스레 자신을 졸졸 쫓아오는 아라를 보았지만, 평소처럼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대신 목소리를 누그러트렸다.

"나는 오늘 좀 화가 났으니까."

[대장, 착해.]

아라는 얼른 하벨에게 매달려 앞발로 쓰다듬었다.

[여기, 아야야.]

주변을 둘러보던 아라의 귀가 힘없이 늘어졌다.

"혹시 너도 보여? 저들의 고통이?"

하벨이 묻자 아라는 고개를 가로젓고 짧은 앞발로 열심히 자신의 귀를 가리키려 애를 썼다.

"너는 들리는구나."

[응!]

"아라야."

하벨의 걸음은 더 빨라졌다.

그를 피하려 물러서는 모습은 마치 거대한 검은 물살이 이는 것만 같았다.

"저들이 너에게 뭐라고 해도 슬픔에 빠지지 않았으면 해."

하벨은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이 지독한 슬픔에 빠져보았기에 그 끝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기에 아라는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응응.]

아라는 조금 울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마워, 아라야."

그제야 하벨은 아라에게 웃어줄 수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하벨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개새끼들.'

하벨은 이를 갈았다.

칙칙.

검은 물로 둘러싸인 곳에 조용히 돌아가는 기계가 있었다.

무언가를 빨아들이기 위한 기다란 주둥아리, 다시 무언가를 내뱉기 위한 배출구.

검은 물에 잠겨 쉴 새 없이 움직이며 돌아가는 모습은 마치 광기에 어린 춤을 보는 것만 같았다.

물에 잠겼음에도 침묵을 깨는 그 소리가, 기계가 돌아갈수록 점점 더 짙게 변해가는 물의 색깔이, 그리고 그 두 부위를 강제로 돌아가게 만드는 마법이.

그 모든 걸 하벨은 증오스럽게 쳐다보았다.

'이곳에 있던 정령들은…….'

하벨은 뒤는 생각하지 않았다.

저 기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멈춰야만 했다.

"아라야."

하벨은 손가락을 풀며 아라를 불렀다.

[대장, 아야.]

하벨의 몸이 달궈진 듯 뜨거웠기에 아라는 머뭇거렸다.

"괜찮아. 아프지 않으니까."

이미 머리가 뜨거워진 후라서 그런지 몰라도 아프다는 느낌 자체가 들지 않았다.

그저 고양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용왕의 힘과 정령의 힘.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사용해야 했지만, 하벨은 걱정하지 않았다.

'하벨 티에라가 가진 물의 친화력이라면 충분하다.'

몇 번을 달구다가 어쩌다 켜진 용왕의 힘을 하벨 티에라가 일단은 받아주고 있지 않은가.

이 힘을 꺼트리는 순간, 다시 용왕의 힘을 꺼내오는 게 가능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더더욱 유지해야만 했다.

저 검은 물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아라야."

하벨은 한 번 더 아라를 재촉했다.

아라의 귀가 쫑긋거리더니 눈을 질끈 감고 정령수를 밀어 넣었다.

하벨은 기계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단번에, 망설임 없이 베어내야만 했다.

칙칙.

여전히 돌아가는 기계를 바라보며 하벨은 라르웬이 그랬던 것처럼 손에 검 손잡이를 쥐는 듯한 흉내를 냈다.

투명한 검 손잡이가 만들어졌고, 쏟아지는 물을 따라 검이 모습을 드러내려다 멈췄다.

'…이런.'

순환의 길에 도는 정령수로는 검의 형태를 유지하기에는 짧았다.

하벨은 부족한 부분을 자신의 물로 채워 넣었다.

한창 가열된 엔진이 꺼지기 전에.

일도양단.

하벨은 눈을 번쩍였다.

팔에 힘을 가득 주며 길게 뽑은 검을 머리 위에서 거세게 휘둘렀다.

촤르륵.

날을 세운 물로 된 검이 검은 물을 자르고, 기계를 베어내려던 순간, 검은 물이 어설프나마 형태를 이뤄 기계를 보호하고자 앞에 섰다.

팅!

"……?"

검을 막아낸 모습에 하벨은 잠깐 놀랐지만, 흔들리지 않고 명령을 내렸다.

"비키거라! 감히 누구 앞에 서는 것이더냐!"

위엄이 담긴 하벨의 거친 목소리에 검은 물은 형체를 이루지 못하고 순식간에 주변에 흩어졌다.

덩달아 기계를 둘러싼 검은 물마저 벌어지자 하벨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숨을 참고.

파지직!

마법을 깨부수고.

콰앙!

기계를 절단했다.

반으로 쪼개진 기계 속에 바람이 불어오고, 벼락이 위로 솟구쳤으며 불이 일어났고, 나무가 자라는 등 다양한 현상이 한 번에 몰아쳤다.

하벨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지만, 하벨은 기계 속에서 하나씩 튀어나오는 작디작은 정령들의 모습에 눈웃음을 지으며 나아갔다.

[…으흑.]

밖으로 나온 정령들은 서로를 안은 채로 몸을 덜덜 떨며 눈물을 흘렸다.

"다행이……."

하벨은 뒷말을 잇지 못했다.

뜨거워졌던 머리부터 녹아내리는 듯한 통증에 다리가 더는 말을 듣지 않았다.

무릎을 꿇었다.

나사가 하나씩 빠지는 듯 몸이 고장 나고 있는 게 느껴졌다.

하벨 티에라가 가진 물의 친화력과 별개로 그의 몸이 용왕의 힘을 담기엔 힘든 모양이었다.

'…내가 무리했나?'

하벨은 가면 틈으로 흘러내려 땅을 적시는 붉은 핏빛을 보며 휘청거리다 기어코 주저앉았다.

상처도 없건만, 어디선가 피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벨은 아직 느껴지는 자신의 힘을 계속 움켜쥐었다.

이것까지 무너지면 위험했다.

'이게 무리한 거라면 미안하다, 하벨아. 오늘은 사과하마.'

아직 할 게 남아 있었다.

저 오염된 물이 한 번에 방류된다면 그 여파가 얼마나 클까.

하벨은 순환의 길에 조금 차오른 불순물과 아직은 보글보글 끓고 있는 정화 장치를 확인한 뒤에 팔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몸이 무거운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끄응.]

아라가 하벨의 팔을 잡고 위로 밀었다.

하벨은 아라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싶지만, 자신을 노리는 저 물이 오지 못하게 용왕의 힘을 움켜쥐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도와!]

아라는 아직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정령들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그제야 정령들은 하벨과 아라를 바라보았다.

[우릴… 구해준 거야?]

[응!]

아라는 보고도 모르냐는 듯 타박하며 정령들에게 목소리를 냈다.

[도와! 대장, 도와!]

다시 아라가 재촉하자 그제야 정령들이 나무를 자라게 하거나, 바람으로 천천히 밀며 하벨을 일으켰다.

[이봐, 인간.]

정령이 하벨의 가면을 붙잡자 아라가 다급히 정령의 손을 쳤다.

딱!

[지지!]

[저기 가면 안에 피가 찬 거 안 보여? 빼줘야 숨을 제대로 쉬지. 인간은 우리랑 달리 매초 숨을 쉬어야 한단 말이야.]

[지지!]

아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았어. 안 건들게.]

크기도 자신들보다 작고 말도 어눌하지만, 정령들은 이상하게 저 말을 거역하지 어려웠다.

[이봐, 인간.]

정령은 하벨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평소라면 말은커녕 쳐다도 보지 않을 만큼 불쾌함이 넘쳐 흘렀지만, 지금은 정령사가 필요했다.

기계가 부서지면서 물을 붙잡고 있던 마법도 곧 사라질 테니.

[지금 상황이 급한 거 너도 알고 있지? 우리는 저 물을 해결해야 해.]

대체 어떻게 인간이 이 오염된 물속으로 들어왔는지는 몰라도 오염된 물을 이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저 물이 퍼진다면 입을 피해가 얼마나 클까.

인간들은 물론, 태어날 정령들 역시 또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네가 필요해. 정령사인 네가 필요하다고.]

"…자."

하벨은 또 치밀어오르는 피를 삼키며 다시 말했다.

"…하자."

뭘 하려는지 몰라도 정령들이 방법을 알고 있다면야 얼마든지 응할 생각이 있었다.

[저건 예상했겠지만, 오염된 물이야. 물을 정화하려면 정화제가 필요하고, 정화제를 만들려면 반드시 정령사를 거쳐야만 해.]

정령은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변에 있는 정령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얼추 비슷하게 쏟아지는 정령수의 양에 하벨은 깜짝 놀랐다.

[우리의 힘이 몰려들어도 놀라지 마. 네가 우리의 그릇이 되어야 하니까.]

정령은 하벨을 다독였다.

지금 그가 흐트러지면 모든 게 물 건너가는 셈이었다.

'아라나 루룸에게 정령수를 받았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한 번에 몰아치니 꼭 내가 힘을 쓸 때랑 느낌이 비슷한데?'

하벨은 충만히 차오르는 힘과 함께 그리움을 느꼈다.

정령수 덕인지 몰라도 머리를 뜨겁게 달구던 감각이 차츰차츰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대장? 아야?]

아라는 정령수를 불어넣지 않고 하벨을 살폈다.

자신은 정화제를 만들 줄도 몰라서 괜히 사태를 망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니, …괜찮아."

하벨은 순환의 길에 모여드는 정령수가 빙글빙글 돌며 하나의 힘으로 바뀌는 걸 느꼈다.

이 또한 익숙한 감각이었다.

'내가 바다를 청소할 때 쓰던 힘과 비슷한데?'

하벨이 가진 순환의 길에 정령수가 그리는 원이 점점 작아지며 엄지만 한 크기로 압축이 됐을 때, 갑자기 몸이 당기는 듯한 감각에 상체가 철렁 흔들렸다.

아프지는 않았다.

'…….'

다만, 하벨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됐다.

정령수로 만들어진 힘이 몸 밖으로 빠져나왔고, 빛을 뿌리며 회전하고 있었다.

빛은 빨강, 파랑 등 여러 가지 색을 품어 꼭 보석 같았다.

[우와!]

아라가 입을 벌렸다.

하벨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색을 띠는 빛에 검은 물이 닿자 녹아내렸다.

'정화제……?'

하벨 자신이 아는 오염된 물을 정화할 방법은 오직 정화제뿐이었다.

라르웬도, 방금 정령들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진짜 저 빛이 정화제라고? …그럴 리가.'

자신이 아는 정화제는 분명히 가루였다. 하얀 가루.

'아니. 생각해보면 색이 반짝거리긴 했어.'

하벨은 생각에서 벗어나서는 빛이 회전하며 추는 춤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빛이라 생각한 부분은 하나의 작은 알갱이였다.

그 알갱이가 오염된 부분을 죽이고 있지만, 자신이 보기에는 아직 부족했다.

[한 번 더!]

정령들은 다시금 하벨에게 정령수를 밀어 넣었다.

하벨은 밀려오는 정령수를 자신이 움직였다.

아까처럼 단순 회전으로는 오염된 물들을 지워버리기에는 부족했다.

몇 번이나 시도하기에는 자신이 얼마나 버틸지 몰랐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이렇게 움직이면…….]

"날… 믿어."

하벨은 자신에게 항의하는 정령들을 쳐다보았다.

순간, 정령들은 그 시선에 흠칫거리며 입을 열지 못했다.

무어라 말하면 좋을지 모를 만큼 거대한 존재감에 그들은 하벨의 존재 자체를 의심했다.

[…너 인간 맞아?]

"일단은."

하벨은 정령수의 주도권을 잡았다.

정령들이 주는 힘 역시 기본 형태는 물이었다.

이름에서부터 이미 물이 들어가지 않는가.

하벨은 일단 정령수를 회전시켰다.

하벨 티에라가 가진 순환의 길에 쌓인 불순물들이 많고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좁았기에 잘 활용해야만 했다.

'하나 더.'

하벨은 다음 정령수 일부를 비스듬히 만들어 가장 가운데 있는 정령수를 덮듯 회전시켰다.

'또 하나 더.'

하벨은 멈추질 않았다.

계속 밀려오는 정령수로 차곡차곡 고리를 이어 나가며 순환의 길이 버틸 수 있을 만큼 회전시킨 뒤, 압박했다.

"지금이야…!"

하벨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그때, 오염된 물을 붙잡고 있던 힘이 끊어져 버렸다.

'……!'

손아귀가 텅 비었고, 오염된 물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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