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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49화 (49/415)

49화. 뭐가 됐으면 좋겠어?

* * *

하벨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카샬이 다급히 말했다.

"제가 베겠습니다. 오늘 소풍 온 건 아니지만, 그냥 소풍 왔다고 생각하십시오."

이제 막 병상을 털고 일어난 사람을 시킬 순 없었다.

'눈치가 너무 빠르네.'

하벨은 카샬에게 가볍게 웃어주고는 다시 마법진을 보았다.

"형님. 혹시 무슨 마법인지 유추할 수 있습니까?"

마법진에 그려진 이상한 문양이 마음에 걸렸다.

"아니. 건드리거나 깨트려봐야 아는 거고, 루룸이 강하다고 했으니 반발은 생각해 봐야지."

라르웬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대체 거대 정화 장치에 뭘 해놨길래 이렇게 꼭꼭 숨기는 건지."

"거대 정화 장치에 뭘 한다고 하면 뻔하죠."

카샬은 검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앞을 노려보았다.

"부서트렸거나, 물에 무슨 수작을 부렸거나. 으레 둘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구린 놈들이 하는 짓거리라고 해봤자 보통 저 두 가지잖습니까."

"그러니까 문제라는 거야. 거대 정화 장치가 여기에만 있는 것도 아니라서 대체 얼마나 구린 짓거리를 했는지 상상이 가질 않네."

라르웬이 카샬의 말에 호응하며 굳은 표정을 했다.

"일단 부수죠."

하벨이 손가락으로 마법진을 가리키자 갑자기 번개가 내리쳤다.

콰르릉.

"……?"

하벨은 순간 번쩍거리는 빛에 깜짝 놀랐다.

라르웬이 한 게 아닌지 그 역시 반쯤 얼어서는 루룸을 보고 있었다.

[계속 말해. 짜증 나는 마법은 내가 지워줄게.]

루룸이 혀를 날름거리며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쿠르릉! 쿠릉!]

방금 친 번개가 마음에 드는지 아라는 루룸 곁으로 가서는 눈을 반짝이며 앞발로 툭 건드렸다.

[저리 치워. 나 지금 집중해야 하니까. 훠이.]

루룸은 가시를 한껏 세워서는 동그란 눈동자를 날카롭게 떴다.

다시 혀를 날름거리며 하벨의 손가락만 바라보았다.

원 없이 마법을 부수는 날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 * *

[헤헤!]

아라는 하벨의 정수리에 배를 닿고 누워서는 뒷다리를 흔들었다.

하벨이 움직일 때마다 나무들은 바깥쪽으로 몸을 살짝 누우며 길을 비켜주었다.

그의 손에는 정령수로 키운 싹이 윤기 있게 반짝거렸다.

처음 루룸의 도움으로 흩어진 마법진을 깨 결계가 부서지고 입구가 드러났을 때만 해도 좋았다.

하지만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만큼 나무들도 빽빽했고, 무엇보다 또 다른 마법진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샬에게 나무를 모조리 베어달라고 해야 하나 싶던 차, 아라가 속닥거렸다.

―대장, 쑥쑥! 쑥쑥!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라가 천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번뜩인 말이었다.

정령수로 키운 이 새싹이 나무보다 더 상위에 있는 존재라 판단했으니.

"저쪽."

하벨이 손가락으로 마법진이 그려진 위치를 가리키자 루룸이 당장 번개로 때려버렸다.

파직.

"…루룸."

라르웬이 하벨을 살피며 자신의 어깨에 앉은 루룸에게 속삭였다.

[왜? 나 지금 좀 바빠.]

"아니, 아무리 봐도 이상해서. 저게 가능한 거야?"

자신한테는 식물의 힘이 없었다.

하지만 그걸 떠나 하벨이 발휘하는 힘은 다른 정령사한테서 보지 못했던 힘이라 고민하다 말을 꺼냈다.

[당연히 가능하지. 라르웬 네가 못 한다고 해서 하벨도 못 한다고 생각하지 마.]

라르웬이 아니꼬운 눈빛을 짓자 루룸이 피식 웃었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과한 부분이 있긴 하지. 우리 힘이 자연의 존재보다 위이긴 하지만, 우리한테 하는 것처럼 너무 말을 잘 듣네?]

루룸은 하벨의 손가락을 계속 바라보다 곧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움찔거렸다.

[…아! 사실 깜짝 놀란 게 있어. 저번에 내가 하벨한테 힘을 줬잖아?]

"그랬지."

[순환의 길이 거의 막혀 있었던 걸 뺀다면 내가 준 힘을 거의 다 흡수하더라.]

"역시 내 동생이야."

라르웬은 점점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 못했다.

[아니, 지금 동생이라고 말할 때가 아니잖아? 이것도 영혼 문제면 어쩌려고 그래.]

"아직 아니니까, 목소리 낮춰, 루룸."

라르웬은 하벨을 의식하며 손가락을 입술에 올렸다.

하벨이 괜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물의 저주란 거대한 장벽과 싸우고 있질 않은가.

"정말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도련님?"

하벨의 정화 장치를 계속 쳐다보던 카샬이 참다못해 물었다.

벌써 꽤 걸어오지 않았던가.

하벨이 힘을 사용하면 물의 저주가 덩달아 일어나는 걸 확인했기에 말려야 하나 고민했다.

"아직은 괜찮아. 여기 보이잖아?"

하벨은 정화 장치를 가리켰다.

카샬에게 정령수를 이용해 다섯 번 정도 힘을 사용한다면 물의 저주까지 덩달아 일어난다는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아직 그 횟수가 차지 않아 괜찮았지만, 순환의 길은 달랐다.

쓴 만큼 차올랐기에 아픈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다 온 것 같거든."

하벨이 마지막 몇 그루를 두고 씩 웃었다.

빽빽한 숲속에 넓은 공터가 드러나자 앞서 걷던 하벨의 걸음이 절로 멈췄다.

'왜 거대 정화 장치가 없는 거지?'

이상했다.

이 공터는 대체 왜 존재하는 건지.

"막내야. 일단 가지 말고 가면 써."

라르웬은 움직이려는 하벨을 붙잡았다.

"여기 앞부터 오염된 곳입니까?"

하벨은 공터로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정화 장치를 살피고 공터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는 어떤 증상도 없었기에 하벨은 멈칫거렸다.

"나나 카샬은 물의 내성이 꽤 높은 편이라 괜찮지만, 넌 아니니까 미리 써서 나쁠 건 없지."

"맞습니다. 여기부터 공터라니. 뭔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일단,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카샬도 동의하자 하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공간 주머니에서 가면을 꺼내 썼다.

금세 시야가 좁혀오고, 답답한 기분에도 하벨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 감각에 얼른 익숙해져야지.'

"이제 어디로 가면 됩니까, 둘째 도련님?"

카샬은 사방이 뚫린 공터에 라르웬을 쳐다보았다.

라르웬은 루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왜?]

"네 차례야."

[난 싫다고. 부정한 것들보다 이게 더 싫어. 곁에 있기만 해도 힘이 빠져서 잠깐 쉬어야 한단 말이야.]

"그럼 왜 따라왔어?"

[그건 네가… 씨이.]

루룸은 차마 걱정된다는 말을 잇지 못하고 코만 벌름거렸다.

[알았어. 하면 되잖아. 내가 한다…….]

"아니. 이번에도 내가 앞장설게."

하벨은 가면에 적응되자 바로 움직였다.

물의 저주에 걸린 몸이기에 누구보다 물의 오염에 예민할 테지.

"자, 잠깐만 하벨!"

라르웬이 하벨을 말렸지만, 그는 괜찮다며 엄지를 내보였다.

'왼쪽.'

공기가 무겁게 느껴지는 쪽이 있었다.

'직진.'

머리에 있던 아라가 금세 내려와 자신의 목을 꽉 잡았다.

'다시 왼쪽.'

하벨은 다시 직진하다 말고 갑자기 치미는 현기증에 비틀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랜턴의 빛이 더욱 커진 기분이 들었다.

이 앞에 거대 정화 장치가 있을 텐데.

아니면 다른 뭔가가 있다는 건가.

하벨은 추측을 접어두고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여기 근처에 거대 정화 장치가 있나 봅니다. 몸이 벌써 반응하네요."

[…대장?]

아라가 눈을 깜빡거리다 다급히 뒤를 가리켰다.

카샬과 라르웬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덩달아 하벨도 뒤를 바라보았다.

"……?"

뒤는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안개라니?'

이쪽으로 올 때만 해도 공터뿐, 안개는 보이질 않았다.

'앞에는 여전히 공터인데?'

하벨은 긴가민가하며 안개 속으로 들어갔다.

밖으로 나왔다고 생각한 순간 뒤를 돌았을 때, 그 안개가 보였다.

'설마…….'

하벨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낸 동전 하나를 던져둔 뒤 재차 안개로 들어갔다.

다시 안개에서 나왔을 때, 자신이 던져둔 그 동전이 보였다.

"…아라야."

[응, 대장.]

"아무래도 우리 갇힌 것 같다?"

하벨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면이 숨겨주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원래 모험하는 걸 좋아했어."

하벨은 동전을 주워서는 씩 웃었다.

"나한테는 시간이 많았고, 세상에 모든 걸 알아버렸을 때 정말 마음 한쪽이 뜯기는 기분이더라."

하벨은 천천히 걸어갔다.

"카샬하고 형님이 없어서 하는 말인데, 솔직히 지금 좀 기쁘네. 모르는 게 생겼잖아?"

[응응!]

아라도 덩달아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아라는 곧 하벨의 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땅이 점점 검게 변했고, 하벨은 몸이 점점 짓눌리는 기분에 휩싸였다.

[대장, …지지. 지지.]

하벨이 한 걸음을 내디디자 '찰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검게 변한 물이 보였다.

그의 키보다 더 높이 올라온 상태로 커다란 투명 벽에 둘러싸인 듯 떨어지지 않고 그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이건…….'

하벨은 소름이 돋아났다.

물은 흘려내려야 했다.

이 당연한 사실을 거부하는 물을 보자 속이 울렁거렸다.

입을 꽉 다물다 말고 아래로 툭 떨어지는 아라를 다급히 붙잡았다.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들을 부정한 것이라고 부르니 저 또한 부정한 것이었다.

"아라야, 괜찮아?"

아라의 상태가 심상치 않자 하벨은 물을 만들어냈다.

조금이나마 저 검은 물의 영향을 막아줄 테지.

뽀글뽀글.

자신의 물이 아라의 얼굴을 감싸자 천천히 눈을 떴다. 언제 기절했냐는 듯 눈동자마저 반짝였다.

"절대 먹으면 안 돼, 아라야."

[…물, 얌얌.]

아라는 입술을 바짝 올리며 구슬픈 눈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아라야. 지금 저 물 먹으면 네가 아파. 방금 아팠잖아? 참을 수 있지?"

아라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물과 하벨을 번갈아 바라보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어주고는 다시 물을 바라보았다.

'이걸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칙칙.

무언가 돌아가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거대 정화 장치에서 나는 소리인가?'

하벨은 당장 흘러내리는 코피를 닦고 싶었지만, 가면을 벗으면 큰일이 날까 애꿎은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왜 자신만 이곳에 들어왔는지, 정확히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저 물을 뚫고 가야 하는 건 분명했다.

'그 전에 이게 필요하지.'

하벨은 숨을 몰아쉬었다.

이전에는 당연히 할 수 있었던 일이나, 몸이 바뀐 뒤로 연거푸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은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하벨은 장갑을 낀 손으로 물을 건드렸다.

찰랑.

물이 흔들림과 동시에 하벨은 눈을 감았다.

'찰랑'거리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물이 가진 기억을 읽으려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응답하지 않았다.

'아직 너 자신을 잊지 않았다면 내게 보여주거라.'

찰랑.

마치 자신을 잊지 않았다는 듯 물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왔다.

손가락에 찌릿한 감각과 함께 흐릿하나 천천히 머릿속에 기억이 번져갔다.

'…누군가 왔어.'

많은 사람이 보였다.

뭐라고 말하는지 들리진 않아도 그들이 뮈에르 진젤과 마법사 협회로 추정됐다.

치직.

장면이 바뀌었다.

작은 생물체가 어딘가 갇힌 듯 나가지 못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령?'

치직.

또 바뀐 장면에 하벨의 팔부터 이어진 떨림이 몸까지 전해졌지만, 그는 멈추질 않았다.

―도와줘! 누구든! 제발!

검은 물에 잠긴 정령의 작은 손을 마지막으로 하벨은 튕겨가듯 그대로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허억!"

하벨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필사적으로 뒤로 움직였다.

가면을 살짝 들었다.

따가운 공기와 함께 피가 후두두 떨어졌다.

[대장…?]

아라의 목소리에 하벨은 괜찮다며 손을 들었다.

'…정령이었어.'

정령이 맞았다.

안개든, 떠 있는 검은 물이든 이 이상한 현상은 저 오염된 물이 정령을 삼키면서 벌어진 일일지도 몰랐다.

하벨은 다시 가면을 써서는 숨을 들이마셨다.

숨을 쉴 때마다 피 냄새가 일어났고, 잠깐의 노출에 정화 장치가 천천히 요동쳤다.

'…이건 아니다.'

하벨의 가슴 속부터 분노가 일렁거렸다.

오만하나, 정령만큼 순수한 존재가 있는가.

그 작은 존재가 어루만져주던 손길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 짓거리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머릿속에 스파크가 튀며 끊어졌던 선이 이어지는 느낌이 몰려왔다.

에메랄드빛을 띤 하벨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푸르게 물들었다.

랜턴이 크게 흔들렸다.

기억을 본 후였기에 물에 깃든 사념이 눈에 그려졌다.

살려줘.

도와줘.

아파.

수많은 글씨가 물에 일렁거렸다.

하벨은 글자를 곱씹으며 물 앞으로 걸어갔다.

한 걸음.

오염이 됐든, 무엇이든 자신은 물의 지배자였다.

모든 물과 바다의 지배자, 용왕.

손아귀에 물이 느껴졌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었다.

하벨은 용왕으로서 명령을 내렸다.

"물러서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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