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48화 (48/415)

48화. 마법이 보인다고?(3)

* * *

* * *

"…도련님.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무리하지 않기로 저랑 약속해요."

헤레스가 새끼손가락을 올리며 하벨을 달래듯 말했다.

하벨의 옷 정리를 돕던 카샬은 그 모습에 작게 속삭였다.

"혹시 어디 가는지 헤레스 씨도 아십니까?"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알면 난리 나겠네요. 보기보다 무서운 분……."

"거기 두 분. 왜 자꾸 저 놔두고 속닥거리는 거죠?"

헤레스는 여전히 새끼손가락을 든 채로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아무것도 아니야."

"맞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벨과 카샬이 어색하게 웃었다.

[헤헤.]

아라도 따라 웃으며 이빨을 내보였다.

하벨과 카샬의 웃음이 너무도 닮았기에 헤레스는 흘러내린 안경을 올리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저도 따라가고 싶습니다. 오늘은 도련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제게 찾아오실지 매일 마음을 졸입니다."

헤레스는 숨을 참고 손을 뻗자 벽에 걸린 장식품이 순식간에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

하벨의 눈이 커졌다.

장식품이 손에 들린 걸 보며 눈을 깜박였는데, 바람이 일어나는 소리와 함께 장식품이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 있었다.

만약에 헤레스 손에 들어온 게 단검이었다면 목이 베인 것도 몰랐겠지.

"제 몸은 제가 지킬 수 있으니 이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건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아주 무섭죠."

살짝 매서워진 헤레스의 눈꼬리에 카샬은 입꼬리를 더 바짝 올렸다.

"도련님께서 제게 무언가를 말씀하지 못하시는 건 이해합니다. 저와 도련님은 그날 처음 봤으니까요."

하벨이 자아의 혼동이 찾아온 그 날.

하벨의 시각에서 본다면 자신과 처음 만난 날이 아닌가.

가장 하벨과 가까이 있는 카샬, 가족인 룬델과 라르웬.

두 사람은 하벨과 가까이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그 틈을 메우려 원래도 애를 썼지만,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느낌에 막막한 건 사실이었다.

'…계속, 계속 돌아다니시고.'

헤레스는 다시금 새어 나올 것만 같은 숨을 참았다.

무엇보다 자신은 마법사가 아닌가.

정령사와 마법사 사이에 메우려고 해도 메워지지 않는 벽까지 존재했다.

"아무래도 자네와 약속은 못 할 것 같네."

'탁' 치고 들어오는 하벨의 말에 헤레스는 손가락을 내리며 대답했다.

"그러면 저도 주치의로서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오해하지 말게. 나는 자네가 말하는 '무리'가 어떤 수준인지 모르기에 꺼낸 말이니."

"예?"

"이전에도 생각했는데 나는 꽤 이 몸을 소중히 하고 있네."

하벨이 꺼낸 말에 침묵이 깊게 흘렀다.

카샬은 '농담하시죠?'라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에 불쾌해 하벨은 미간을 찌푸렸다.

"보이는가? 누구든 주관적인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네. 그러니 나는 자네의 기준을 알지 못하지."

"아뇨.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본 겁니다. 도련님께서는 도련님의 몸을 소중히 하고 있지 않습니다."

카샬이 딱 잘라 말했지만, 하벨은 그 말을 무시했다.

"…아!"

헤레스가 깜짝 놀라며 자신의 입을 가렸다.

"정말 그렇게 볼 수도 있네요. 무리라는 것 자체가 굉장히 주관적인 말이었어요."

"오. 그렇지, 그래."

하벨이 실실 웃자 헤레스는 당장 수첩을 꺼내 적었다.

"정화제는 부작용이 없는 약이에요. 이 정화제를 기준으로 하는 건 어떤가요?"

"좋은 생각일세. 정화제보다 객관적인 지표는 없지."

"보통 도련님께서 하루에 사용하시는 양을 평균으로 잡는다면……."

"예, 예. 저는 맨날 찬밥 신세죠."

카샬은 두 사람이 자신만 빼고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자 하벨의 옷차림을 정돈하는 데 신경 썼다.

"음, 일반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 하루 평균 사용되는 정화제 양은 2~5개 사이입니다. 하지만 도련님께선 그보다 3배 이상 사용하시죠. 15~20개 사이를 평균이라고 잡는 게 어떠십니까? 그 개수를 초과하면 무리하는 거라고 하죠. 물론, 카샬 씨가 놓는 주사기까지 포함입니다."

"…그렇게 많이 사용하는가? 오늘 처음 알았네."

"제가 그만큼 도련님께 열과 성을 다해 모신 겁니다. 그 점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카샬이 턱을 치켜올리며 대답하자 하벨은 가려운 입을 참아야 했다.

뭐가 됐든 사실이었다.

"도련님께서는 특별하시니까요."

헤레스는 볼펜을 잡은 손을 괜히 만지작거렸다.

"헤레스."

"예, 도련님."

"그럼, 무리의 기준도 정했으니 이제 움직여도 문제없을 것 같네. 지금부터 시작이 아닌가?"

개구쟁이 같은 하벨의 순진한 미소에 카샬은 말을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짜 치사하시네요. 오늘 아침만 해도 벌써 3개는 들어갔는데."

"저, 저… 뒤통수 맞은 겁니까?"

헤레스가 당황하며 묻자 카샬은 동질감을 드러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뒤통수 제대로 맞으신 겁니다. 조심하십시오. 저 입이 그냥 입이 아닙니다. 아주, 그냥, 아우……."

카샬은 아주 힘겹게 뒷말을 삼켰다.

딱 한 번이라도 하벨의 뒤통수를 때릴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지도 몰랐다.

* * *

마차가 멈췄다.

하벨은 손에 반쯤 먹은 샌드위치를 소중히 쥔 채로 내렸다.

'날씨도 좋고, 랜턴에 검은 불꽃도 켜져서 꺼지지도 않고.'

우물우물.

이쯤 되면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자신이 움직이는 곳에만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자발적으로 목숨이 위협을 느낄 일을 하고 있다는 건가.'

그럴 리가.

하벨 티에라의 몸을 언제나 아끼고 있는 자신이 그럴 리가 없었다.

"다 드시고 내리셔도 됩니다."

"도착했으니까 소풍 온 기분 정도는 느끼고 싶어서."

"소풍이라뇨?"

카샬은 잠깐 나무로 가득한 숲을 둘러보았다.

숲의 청량함보다는 음침함이 가득 차 돈을 쥐여준다고 해도 소풍 올 마음이 들지 않는 곳이었다.

"귀신이 들리지만 않으면 다행인 곳이라 생각합니다."

"그래, 막내야. 여긴 소풍이란 말을 꺼낼 장소가 아니야."

뒤늦게 마차에서 내린 라르웬은 주변을 보며 찝찝함에 괜히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숲이나 바다 등 한적한 장소에서 음식을 먹으면 소풍 아닙니까?"

"아니야."

단호한 라르웬의 대답에 하벨이 실망하며 샌드위치를 베어먹었다.

소풍 온 건 아니지만, 소풍이라는 단어의 뜻을 생각해 한껏 들떴는데.

[대장. …지지. 지지.]

하벨의 목에 매달린 아라는 아예 눈을 꼭 감았다.

우물우물.

"부정한 것들이 있어서 소풍이 아니라는 겁니까?"

하벨은 피로 그려진 선을 발로 지우며 물었다.

'귀찮게 말이야.'

여러 번 봐서 그런지 몰라도 부정한 것들이 눈에 익다 못해 근처에 있으면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까지 들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자꾸만 코웃음이 나왔다.

"막내야. 소풍은 그게 아니라… 아니다. 아버지께 들었는데 바다가 보고 싶다며?"

한 번씩 하벨이 나사가 빠진 듯한 말을 했기에 라르웬은 이해하고 넘어갔다.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그때, 겸사겸사 소풍도 가면 되겠네."

"오. 정말입니까?"

하벨은 발을 멈추며 밀려드는 즐거움에 활짝 웃었다.

"물론이지. 생각해보니 나나 아버지나 누님까지 바쁘다고 어딜 가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며칠 전에 보고하러 갔다 깜짝 놀랐거든. 내가 이렇게 일만 했나 싶은 거지."

업무 상황을 살피다 죄다 동그라미만 되어 있는 모습에 라르웬은 무의식적으로 하벨을 피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누님도… 역시 나랑 비슷하겠지?'

라르웬은 손가락을 매만지다 행복하게 샌드위치를 먹는 하벨을 곁눈질로 살폈다.

진짜 못된 생각이긴 하지만, 이렇게 다시 시작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둘째 도련님?"

주변을 먼저 살피던 카샬이 라르웬을 불렀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라르웬은 뒤늦게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돌렸다.

"왜?"

"여기에 거대 정화 장치가 있는 거 맞습니까? 아무리 봐도 나무뿐인데요?"

"위치는 일단 여기가 맞아. 마법사도 관여되어 있으니 아마도 마법으로 숨겨뒀을 것 같은데."

[맞아. 마법의 냄새가 나.]

라르웬의 시선에 루룸이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역시 마법이 있다고 하네?"

"그럼 여기 어딘가에 마법진이 있단 말씀입니까?"

"그렇겠지. 이제 어디 있는지 찾아야 할 테……."

"혹시 저것 말하는 겁니까?"

하벨이 근처 바위에 앉아 샌드위치를 우물거리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까부터 '웅웅' 소리를 내는 것도 모자라 허공에 둥글고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려진 무언가가 여러 개 보이던 참이었다.

티에라 마을의 뒷세계에서 마법을 처음 봤을 때는 이런 건 보지 못했는데.

"……?"

샌드위치를 빤히 보는 아라만 빼고 모두가 하벨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너, 너 마법이 보인다고?]

루룸이 당황해하며 물었다.

"저렇게 허공에 떠 있으면 보라고 만든 거 아니야?"

[정말 보여? 분명 결계 마법일 텐데?]

마법사들이 주로 쓰는 마법은 마나에 자연의 힘이 덧붙여진 것들이라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 결계 형식으로 된 마법은 아니었다.

그 마법은 제자리에 머물기만 하면 되기에 오직 마나만으로 만들어져 마법사가 아니라면 맨눈으로 보는 건 불가능했다.

아니, 마법사들도 확인이 어려운 일이었다.

"정말 보여. 내가 뭐하러 거짓말을 하겠어?"

[하벨, 너 영혼에 문제가 생긴 거야? 아니면…….]

루룸은 다급히 말을 내뱉다 바로 입을 다물었다.

너무 당황해 꺼낸 실수였다.

"그게 무슨 말인지 물어봐도 될까?"

하벨은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으며 물었다.

[몰라도 돼. 그냥 모른 척해.]

루룸은 아예 시선을 돌려버렸다.

"루룸, 어서 말해봐. 나도 이건 그냥 못 넘어갈 것 같으니까."

라르웬이 언성을 높이며 루룸을 재촉하자 루룸은 평소와 달리 불만을 드러냈다.

[실수였어! 재촉하지 마.]

"루룸!"

라르웬의 언성이 덩달아 올라갔다.

[…씨. 나도 몰라.]

루룸은 씩씩거리며 말을 꺼냈다.

[마나의 흐름은 눈으로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니야! 마법사들이 일을 저지르고 왜 부정한 것들로 뒤덮는지 몰라서 그래?]

"알아. 너희들의 눈을 가리려는 거잖아."

[맞아. 우리가 접근하지 못하게, 마나를 보지 못하게 막으려는 수작이지. 그런데 하벨은 정령도 아니고 우리한테 선택된 사람이야.]

루룸은 하벨에게 가까이 와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눈은 영혼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역시 하벨의 눈이 예전과 달라.'

뭔가 문제가 생긴 건 확실했다.

순간, 끝을 알 수 없는 깊이와 위엄이 몰려오자 루룸은 흠칫거렸다.

하지만 잘못 본 건지, 다시 쳐다볼 때는 그런 감각을 느낄 수 없었다.

루룸은 괜히 가시를 세웠다.

[보일 수가 없다고. 아니, 마법사도 어려운 일인데 그게 왜 보여? 보이는 건 문제가 있는 거야.]

"하벨, 이전에는 분명 보이지 않았잖아?"

라르웬이 조심스레 묻자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번에 봤던 마법에 비하면 강한 편이야. 그래서 저번에는 보지 못했고, 이번에는 볼 수 있는 것 같은데, 어쨌든 그렇다고 해서 정령사인 네가 마나를 보는 게 당연하다는 말은 아니야.]

루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마법사는 마나에게, 정령사는 우리한테 영혼에 각인이 찍힌 상태지. 네가 뒤늦게 우리를 볼 수 있게 됐든 뭐든, 마나로 가득 찬 마법을 본다는 건 뭔가 문제가 생긴 거야. 그래서 내가 영혼을 언급한 거고.]

루룸은 입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불만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말이 길었지만, 내 생각이 과한 게 아니었으면 해. 진심으로.]

하벨에게 풍기는 불쾌감은 여전해 한 번씩 깜짝깜짝 놀랄 때도 있지만, 루룸은 진심으로 하벨이 걱정스러웠다.

"만약 네 말이 사실이라면 이걸 고칠 방법은 있어?"

하벨은 샌드위치를 베어 먹으며 물었다.

태평한 그의 모습과 심각한 라르웬의 모습이 대비되어 카샬은 혼란스러웠다.

심각한 건지, 아닌 건지 들리지 않으니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거기까지 허락되지 않아서 몰라. 아마… 아니, 역시 잘 모르겠어.]

"알았어. 알려줘서 고마워, 루룸."

하벨은 방긋 웃었다.

루룸이 말하는 '허락'이라는 게 또 정령왕과 관련된 건지 몰라도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헤레스에게 바뀐 몸을 원래대로 되돌릴 방법이 있는지를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무조건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영혼 1과 영혼 2가 서로의 몸에 들어갔다면 말입니다.

연락이 닿았다던 마법사가 이쪽 전문가이니 어쩌면 정말 문제가 생긴 건지 아닌지도 알 수 있지 않을까.

[너, 바보야?]

루룸이 하벨의 뺨을 잡았다.

"세렌이랑 친구가 맞네. 이렇게 날 걱정해주고."

[루룸, 가!]

아라는 루룸을 살짝 밀고는 양팔을 벌려서는 루룸을 째려보았다.

하벨은 아라의 행동에 행복함을 드러냈다.

[세렌 이야기는 됐고! 만약 내 추측이 진짜라면 너 진짜 위험해. 영혼이 다치거나 모자라면 어디에 영향이 가는 줄 알아?]

"…설마 육체야?"

하벨은 그제야 눈을 크게 떴다.

[맞아, 육체야.]

"어떻게, 얼마나 빨리 진행되는데?"

하벨까지 다급해 보이자 카샬은 입이 간지러웠다.

대화가 도중에 끊겨서 들렸지만, 육체가 언급됐다.

뭔가 문제라도 생긴 게 틀림없었다.

[그건 모르지. 솔직히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야. 그래서 실수라고 한 거야.]

루룸이 으르렁거리는 아라를 보며 그제야 화를 살짝 풀었다.

"그래, 일단 알았어."

하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시는 겁니까?"

카샬은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내 영혼에 상처가 생겼을 수도 있대."

"예? 여, 영혼이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하벨이 지금 마법을 볼 수 있는 사실에서부터 출발한 거니까."

라르웬은 제법 침착했다.

세상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이뤄지는 걸 자주 봤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지금부터 요란할 필요 없었다.

가장 무서운 건 하벨일 테니까.

"맞습니다. 중요한 건 지금 제 눈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죠."

하벨은 마법진 앞으로 걸어갔다.

"적들은 아마 여기저기 잘도 숨겨뒀다 생각하겠죠? 이렇게 하루 만에 죄다 깨질 걸 몰랐을 테니까요."

장난기가 어린 미소가 하벨의 입꼬리에 걸렸다.

"전 벌써 즐겁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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