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46화 (46/415)

46화. 마법이 보인다고?

* * *

"얼마나 더 빨리 죽습… 니까?"

"하벨…!"

하벨이 다시 묻자 라르웬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통증 때문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건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

라르웬은 하벨의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

"하벨아. 네가 그렇게 되지 않게… 반드시 막을 테니까, 그런 말 하지 마라. 제발……."

간절한 그 목소리에 하벨은 걱정을 넘어선 슬픔과 애절함을 느꼈다.

뭐가 그렇게 슬픈 걸까.

하지만 이번에도 묻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이 하벨 티에라의 몸에 있다 해도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었다.

지금이 바로 그 선 앞까지였다.

[…대장?]

아라까지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자신을 흔들자 하벨은 할 수 있는 만큼 웃었다.

"그냥… 물어본 겁니다."

여기서 이 주제를 가지고 더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

"이만 편안히 주무십시오. 마차가 비를 막아준다 하더라도 비 때문에 평소보다 더 아프실 테니까요."

카샬의 말을 들으며 하벨은 다시 눈을 감았다.

몸이 금방 바닷속 저 아득한 곳까지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 * *

짝.

손뼉을 마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듣고 있습니까, 용왕님?"

익숙한 목소리에 하벨은 흠칫 놀랐다.

어떻게 그 목소리를 잊을까.

'너는… 죽지 않았더냐.'

류아.

죽은 후까지 잊을 수 없었던 이름이었다.

'아……. 이 또한 꿈이구나.'

인간들이 꾼다는 꿈을 한때는 아주 깊도록 갈망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고, 한 번이라도 좋으니 만나고 싶었다.

이제야 꿈을 꾸다니.

하벨은 류아를 보고자 고개를 올리고 싶었지만, 턱을 괸 자신의 시선은 멋대로 왼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곧 심드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듣고 있지 않구나."

"여보세요. 저번에, 그, 뭐냐, 돌멩이 하나 부쉈다고 이러는 겁니까?"

"그냥 돌멩이가 아니었다. 내가 처음으로 조각한, 영광스러운 조각이었느니라."

"그게요? 뭐였는데요? 복어 한 마리가……."

"햇님이었다."

류아는 곧 웃음을 터트렸다.

"이놈!"

자신이 왕좌에서 일어나 겨우 고개를 올렸을 때, 류아는 등을 돌리며 계속 웃고 있었다.

'이 매정한 것. 그리도 내게 얼굴을 보이기가 싫었던 것이더냐.'

하벨은 코끝을 간질이는 짙은 아쉬움에도 어쩔 수 없다는 걸 인지했다.

이건 꿈이었으니까.

"뭐가 그리도 웃기더냐?"

자리에 다시 앉은 자신은 아까처럼 턱을 괴며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용왕님께서 조각하셨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를걸요? 다들 알면 아마 엄청 좋아할 텐데."

"시끄럽다."

"왜 그렇게 거리를 두려고 하십니까? 다 용왕님의 사람이 아닙니까?"

"……."

"알겠습니다. 제가 용왕님이 부끄러움쟁이라는 걸 잊어버렸네요. 이건 넘어가죠. 그럼, 용왕님."

류아가 실실거리며 다가오는지 발소리가 들렸다.

"말해보거라."

"만약에 용왕님께서 길었던 업에서 벗어나실 수 있다면……."

"불가하다. 나 이외에 용왕은 나올 수가 없다."

"성질도 급하셔라."

류아가 왕좌를 가볍게 쳤다.

덩달아 거품이 뽀글뽀글 올라왔지만, 자신은 여전히 왼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만약이라고 가정해봅시다. 그렇게 꽉 막히면 이제 막 자라나는 아이들한테 구닥다리라고 놀림받을지도 몰라요."

"…계속 말해보거라."

"푸핫! 역시 용왕님께서는……."

"류아."

"알았어요. 알았다니까요. 그러니까 만약에 업에서 벗어나실 수 있다면 제일 처음 뭘 해보실 겁니까?"

류아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점점 빠졌기에 덩달아 자신 역시 진지해졌는지 고민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벨은 착잡함을 느꼈다.

류아와 저런 이야기를 나눴던가. 불안정한 기억 때문에 더 안타까웠다.

'류아야. 나는… 죽어서야 왕관을 벗을 수 있었다.'

류아에게 닿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하벨은 말을 꺼냈다.

참 신기하게도 왠지 마음이 가벼워진 것만 같았다.

"바다 위에서."

"바다 위에서?"

"…해가 뜨고 지는 걸 보고 싶구나."

"왜… 왜 이렇게 소박하십니까?"

"류아. 나한테 그 소망은 결코, 소박하지 않구나. 나는… 왕좌를 벗어날 수 없으니."

시선이 돌아가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왕좌를 쳐다보았다.

"그럼 오늘 저랑 같이 봅시다. 저도 하늘 보는 거 좋아합니다. 아, 기왕 볼 거 다 같이 보죠? 좋아할 놈들이 엄청 많을 겁니다."

류아의 목소리에 기쁨이 섞여서 들리자 드디어 고개가 정면을 향했다.

그 순간, 갑자기 거품이 일어났다.

보글보글.

움직이지 않았던 자신의 몸이 갑자기 움직일 수 있게 되자 하벨은 주변을 살폈다.

류아는 없었다.

류아가 살아 있었던 때의 알현실이 아니었다.

"류아야…!"

다급히 뛰어 문을 열었을 때, 뾰족한 창들이 자신에게 겨눠지며 조금 전까지 없던, 자신의 다리에 매달린 쇠사슬이 보였다.

찰랑.

굵디굵은 쇠사슬이 흔들렸다.

"…용왕님."

자신의 호위대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죽기 전에도 늘 보았던, 그 눈빛이었다.

"얌전히 앉아 계십시오."

호위대의 손가락이 창보다 더 매섭게 자신을 찔러왔다.

그들이 가리킨 곳은 왕좌였다.

찬란하게 황금빛으로 빛났던 왕좌, 그 왕좌의 빛은 이미 오래전 퇴색했다.

"저 왕좌만이 용왕님께서 계셔야 할 곳입니다. 이곳을 벗어나지 마십시오."

잔인한 그 말을 끝으로 끝없는 바닥에 떨어지는 기분이 자신을 사로잡았다.

* * *

번뜩.

하벨은 다급히 눈을 뜨며 자신과 마주하고 있는 아라를 쳐다보았다.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장? 아야야?]

아라의 청량한 눈동자가 꼭 바다를 연상케 해 그제야 하벨은 숨을 내쉬었다.

"…하악."

[아야…?]

아라의 눈이 커지자 하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그냥… 그냥 나쁜 꿈을 꿨어."

꿈은 연기와 같았다.

보이되, 잡으려야 잡을 수 없는, 낯선 소망이었으니.

악몽으로 끝났어도 하벨은 기뻤다.

류아를 만나지 않았던가.

'…반가웠다.'

하벨은 간신히 숨을 고르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하벨 티에라의 방이었다.

왼손에 꽂힌 링거를 힐끔 쳐다보다 푸른 기가 돌았던 오른손 손등을 살폈다.

'없어졌네.'

팔이나 여기저기 붙은 반창고 등이 보였지만, 물의 저주로 나타난 증상이 사라져서 다행이었다.

돌려줘야 할 몸인데 상태가 악화가 되면 어쩌나 걱정했다.

똑똑.

문이 열리자 카샬은 자신을 보며 깜짝 놀랐다.

"깨, 깨어나셨습니까?"

"좋은 아침, 카샬."

"좋은 아침… 은 무슨. 이틀이나 주무셨습니다!"

카샬은 당장 욕이라도 할 기세로 말을 퍼부었다.

"왜 그렇게 많이 잤어? 날 깨우지 그랬어."

"깨운다고 일어납니까? 그랬으면 난리가 났겠습니까?"

카샬은 툴툴거리며 링거도 확인하고, 정화 장치도 확인하며 말을 쏟아냈다.

덩달아 아라가 카샬의 어깨에 매달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보았다.

"가주님이랑 둘째 도련님께서는 밤을 꼬박 새셨지만, 가주님께서는 더는 일을 지체하실 수 없어 지금 집무실에 계시고, 둘째 도련님께서도 어쩔 수 없이 일 때문에 나가셨습니다."

"…틈의 세계가 또 열렸어?"

"아뇨.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거든요. 비슷한 사례도 있을 수 있고, 새로운 사례도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게 쌓여서 지침서처럼 만들 수 있잖습니까?"

열을 확인하던 카샬은 곧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활짝 웃었다.

카샬을 힐끔 쳐다보던 아라도 앞발로 자신을 가리켰다.

"아, 물론 저도 엄청 고생했습니다. 원래 일이란 고되지만, 도련님께서 깨어나지 않으시니 주변에 받는 눈초리가 장난이 아니라 상당히 섬뜩하고 괴로웠습니다."

그때를 떠올리는지 카샬은 인상을 쓰며 몸을 살짝 떨었다.

"아직 안 물어봤는데."

"곧 물어보실 거잖습니까. 말 아끼십시오. 기운도 없잖습니까."

카샬은 싱긋 웃었다.

"이것저것 확인했을 때, 제가 보기에는 상태가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몸은 어떠십니까?"

"혹시 심심했어?"

"예.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서 입도 못 떼고 있었더니 지금 입이 너무 간지럽네요. 부디 이해해주십시오. 아, 대부분은 흘려들으셔도 됩니다."

[아. 아. 아라. 아라.]

계속 자신을 가리키던 아라가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하벨은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양손을 위로 올렸다.

"그래! 그거야!"

"…예?"

카샬이 겁에 질린 듯 살짝 뒷걸음질 쳤다.

"왜… 그러십니까?"

"네 이름은 아라야!"

[아라! 대장! 아라!]

"진짜 제 이야기를 하나도 안 듣고 있었습니까?"

"반쯤?"

"저 방금 흘려들으시라는 말을 꺼냈는데 너무하시네요. 제일 고생 많이 한 건 헤레스 씨고 두 번째가 저란 말입니다."

"고마워, 카샬."

하벨이 고마움을 표하자 카샬은 정말로 당황했는지 눈을 살짝 떴다.

[오오오!]

아라가 카샬의 눈을 보더니 신기해하며 당장 달려들었다.

"…보면 볼수록 종잡을 수 없는 분입니다."

"하벨 티에라와 나는 다른 존재니까 다를 수밖에."

카샬이 그 대답에 망설이던 차 아라가 카샬의 얼굴에 달라붙었다.

흠칫.

"…혹시 정령님입니까?"

"맞아. 아라가 네가 눈을 뜬 게 신기했나 봐. 아라야, 이리 와."

아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떠. 떠!]

"눈이야 사람마다 다 달린 건데 신기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카샬은 여전히 느껴지는 보드라운 촉감에 실실 웃으며 말했다.

계속 이렇게 자신한테 매달려도 좋을 만큼 폭신폭신했다.

"너는 눈을 감고 있잖아?"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대로 눈을 뜨고 있습니다. 눈도 안 뜨고 어떻게 앞을 봅니까?"

"……?"

"아 참, 대체 누가 도련님을 끌고 간 겁니까? 전투 흔적은 있었는데 누가 그랬는지 찾지 못했습니다. 지금 가주님께서 눈에 불을 켜고 계십니다."

"괴물이 날 납치했어."

"…혹시 토할 것 같습니까?"

열은 괜찮았는데.

카샬은 중얼거리며 다시 온도계를 꺼냈다.

"아니. 여기저기 쑤시긴 하지만, 어지럽지는 않은데?"

"그럼 누가 도련님을 끌고 간 겁니까?"

"괴물이 납치했다니까?"

카샬은 하벨의 말에 침묵을 유지했다.

곧 숨을 깊게 내쉬며 허리를 숙였다.

"…도련님. 헤레스 씨를 불러오겠습니다."

"카샬."

"예, 도련님."

"형님이랑 너랑 마차를 부순 괴물을 상대하고 있을 때, 팔이 정말 많이 달린 괴물이 손을 뻗어와 날 납치했어."

[응! 응!]

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카샬은 아라를 볼 수가 없기에 여전히 침묵을 유지했다.

"……."

"나도 완전 놀랐어. 너처럼 당황했다니까. 그런데 진짜 괴물이 그랬어."

"둘째 도련님께서 지금 자리를 비우신 게 진짜 한탄스럽네요."

"내가 거의 다 쓰러트렸는데, 누가 나타났어."

"누가… 나타났습니까?"

"누군지 모르겠는데 그 사람이 핵을 부서트렸어. 내가 손만 휘두르면 부순 거였는데."

"…푸흡. 크흡."

카샬의 웃음이 갑자기 터졌다.

멈추려 애를 쓰나 멈춰지질 않았다.

이전에 하벨이 티에라 마을 뒷세계에서 자신이 하려던 마무리를 뺏어가지 않았던가.

"지금 꼴 좋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제가요? 에이, 설마요. 저는 언제나 도련님께서 잘되시길 바라고 있는 사람입니다."

카샬은 웃음기를 숨기지 못하며 말했다.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

하벨이 기가 막힌 듯 말하자 카샬은 얼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어쨌든 괴물한테 납치되셨고, 마무리는 하지 못하셨지만, 도련님께서 틈의 세계를 닫으셨단 말이죠?"

카샬은 온도계를 집어넣었다.

구태여 꺼낸 '마무리'에 하벨이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자 카샬은 기쁨을 드러냈다.

"…그래."

"어떻게 보면 도련님을 도와준 셈이 아닙니까?"

"결론만 본다면 그런 셈이지."

"진짜 이상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벨은 아직도 그 사람이 꺼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용을 찾으십시오.

이상했다. 분명히 용은 없다고 했는데.

―세상의 수호자이신 용들의 왕이시여…….

하벨 티에라가 원래 불러들이려고 했던 용.

그 용과 자신에게 '용'을 언급한 그 사람이 말했던 용과 이어져 있는 걸까.

'만약에 용이 살아 있다면. 그럼… 찾아야 하나?'

자신은 하벨 티에라가 부탁했던, 세상을 구해달라는 말을 들어줄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왜 저쪽도, 이쪽도 전부 용을 찾는 거지?'

하벨은 망설였다.

무언가 얽매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 사람의 말은 분명 자신을 향한 소리처럼 들렸다.

하벨 티에라는 이미 용을 찾았다 생각해 자신을 불렀으니.

만약 그게 아니라면 정말 그 사람은 어떻게 하벨 티에라가 용을 찾는다는 걸 알았을까.

짤랑.

하벨은 팔찌에 달린 랜턴을 바라보았다.

왜 건드렸을까.

대체 무얼 말하고자 하는 건지.

'…흐음.'

하벨의 표정이 굳어지자 카샬은 몇 박자 느리게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너무 이상합니다. 어쨌든 자리를 당장 떠난 것도 아닐 테니 둘째 도련님의 얼굴을 봤는데도 그냥 갔다고요?"

"……?"

"아니, 둘째 도련님이 티에라인 걸 몰랐다고 해도 그냥 가다뇨. 당연히 구해줬으니 보상금을 요구해야 하잖습니까?"

"뭐?"

아까부터 카샬이 꺼내는 말이 뭔가 달랐다.

"예? 도련님께서 그 사람이 둘째 도련님을 몰라봤던 걸 말씀하셨던 게 아닙니까? 아, 보상금 문제도요."

"아니. 내가 이상했던 건 그게 아니야."

"그럼요?"

"이 팔찌에 달린 랜턴을 건드리더라."

"비싼 걸 알아보는 게 아니겠습니까? 팔찌에 박힌 보석이며, 작지만 랜턴에 세공된 부분만 봐도 엄청나니까요."

"그리고 나보고 용을 찾으래."

"……?"

"그리고 눈앞에서 바로 사라졌어."

"…와. 이거 진짜 이상한데요?"

카샬은 그제야 진지해졌다.

없는 용을 언급한 것도, 사라졌다는 말까지.

"그래서 말이야, 카샬."

"예. 뭐든 말씀하시죠."

하벨이 목소리를 낮추자 카샬 역시 덩달아 마른 침을 삼켰다.

"밥 먹자. 배고파."

하벨은 씩 웃었다.

카샬은 잠깐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빠르게 치미는 분노를 삼키려 했으나, 얼굴이 붉어졌다.

이런 식으로 '마무리' 건을 돌려주다니.

"…와아."

하벨에게 맞은 뒤통수가 얼얼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