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45화 (45/415)

45화. 다가와 속삭이다(3)

* * *

* * *

'오오. 이게 말로만 듣던 납치인가?'

하벨은 잠깐 놀랐지만, 납치라는 사실을 깨닫자 신기함이 앞섰다.

납치를 경험할 줄이야.

그래서 랜턴에 불이 붙었을까.

아직 꺼지지 않았다.

'대체 누가 나를…….'

하벨은 힘겹게 고개를 돌리다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순간, 소름이 일어났다.

자신을 납치한 이가 등에 팔이 가득 달린 괴물이라니.

이런 식으로 납치를 겪을 줄은 몰랐는데.

'분명 형님이 괴물에게 지능이 있다고 했는데 왜 날 납치하는 거지?'

하벨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일단 이해고 뭐고 죽게 생겼으니까.'

아라가 저 멀리서 날아오는 게 보였다.

정령수는 없어도 자신은 원래 물의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벨 주변으로 물이 몽글몽글 올라왔다.

[물! 얌얌! 대장!]

아라가 필사적으로 앞발을 움직여 하벨에게 겨우 붙었다.

유난히 눈동자가 반짝였다.

왜 자신이 아니라 물부터 먼저 나오는 건지. 물을 보고 침을 흘리는 아라를 보니 하벨은 내심 섭섭했으나, 일단 집중했다.

'지능이 있으면 마음의 양식부터 쌓거라!'

물의 형태를 책으로 바꿔 괴물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쳤다.

빠악!

뒤통수가 부러진 듯한 소리가 났다.

지금으로서는 그 위력이 예전과 비교하면 턱없이 약할 수 있으나 결코 무시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괴물은 멈추질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돌려서는 날카로운 이빨이 내보일 정도로 활짝 웃었다.

흠칫.

하벨이 깜짝 놀라자 책의 형태를 띤 물이 흐트러졌다.

'저 괴물이 웃을… 줄도 안다고?'

금세 코 밑이 뜨거워졌다.

[대장! 바보!]

아라가 괴물의 머리에서 쏟아지는 물을 보며 속상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읍, 읍."

하벨은 아라를 불렀다.

괴물이 얼마나 멀리 왔는지 몰라도 체감상 2분 넘게 흐른 듯했다.

그 시간이라면 분명히 라르웬이 핵을 자르고도 남을 시간일 텐데.

'그런데 저 괴물이 틈의 세계로 사라지지 않았다는 건…….'

하벨은 생각의 꼬리를 늘이며 자신에게로 흘러오는 정령수를 느꼈다.

'저놈이 핵을 가진 놈이다.'

하벨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물, 독, 식물 중 식물을 선택했다.

'놈을 잡을 힘이 필요해.'

양 손바닥에서 피어난 싹이 손가락을 간질였다.

정령수를 밀어 넣자 식물이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무엇이 되면 좋을지를.

'저 덩치를 잡을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나무가 되거라.'

식물은 그대로 손바닥을 벗어나 땅으로 파고들어서는 길고 굵은 뿌리를 땅에 박고 튼튼한 몸통에서 뻗어 나오는 가지를 괴물에게 쏘듯 자라났다.

가지가 괴물을 휘감았다.

하지만 괴물의 저항 또한 만만찮았다.

움직임을 멈추는가 싶더니 가지를 끊어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투툭.

툭.

덩달아 몇 그루의 나무가 쓰러졌는지 몰랐다.

가지가 괴물의 움직임을 멈추고, 괴물이 그런 가지를 끊어버리고.

그렇게 반복되는 상황에 하벨은 이 사태를 끝낼 방법을 떠올렸다.

밀려드는 정령수로 2/3는 식물을 유지하는데 쏟았고, 1/3은 물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하벨은 자신이 가진 힘을 이용해 물을 불러들였다.

몽글몽글.

투명한 물이 하벨 주위로 쌓일수록 코밑에 흘러내리는 뜨거움이 짙어졌다.

[응! 물! 대장 물!]

아라도 알고 있는 사실, 식물이 살아가려면 제일 중요한 건 햇살과 물이었다.

햇살은 자신이 줄 수 없지만, 물은 가능했다.

만들어낸 물을 식물에 쏟아붓자 가지의 두께가 조금 전보다 두 배 이상 더 두꺼워졌다.

끼기기긱.

괴물이 가지를 끊는 손길이 느려지자 거침없이 늘어나는 가지가 더욱 괴물을 휘감았다.

'하나 더.'

하벨은 느슨해진 괴물의 손을 느끼며 아공간 반지에 휘감은 물을 날카롭게 만들어 끊어냈다.

서걱.

"어……!"

[어!]

허공에 잠시 뜨다 말고 바닥에 그대로 철퍼덕 주저앉았다.

"…에이씨."

하벨은 밀려드는 쓰라림을 참아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코피가 바닥을 적셨다.

뽀글뽀글.

정화 장치에서 거품이 일어나는 소리와 함께 불안한 소리가 뒤를 이었다.

삐삐삐!

순간 밀려드는 어지러움에 하벨은 팔로 버텨야만 했다.

'…왜?'

자신은 정령수를 통한 힘을 다섯 번 이상 사용한 적이 없었다.

겨우 두 번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두 번째 막까지 생겨 사용 가능한 횟수가 늘어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건 이제 물의 저주가 악화가 될 거라는 조짐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집에 가셔야 합니다.

정화 장치가 빨리 돌고 있을 때 카샬이 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

물의 저주가 악화될 거라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몸소 체험하니 확실히 알았다.

시간이 없었다.

"아라야."

하벨은 부들부들 떨리는 몸으로 굵은 가지를 잡아 겨우 일어났다.

나무의 수많은 가지가 괴물을 잡고 있을 때, 저 괴물의 핵을 부숴버려야만 했다.

[대장, 아야.]

아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순식간에 하벨의 얼굴이 창백해져 아라가 보기에도 불안해 보였다.

"아라야. 저 괴물을 틈의 세계로 돌려보내지 않으면 지금도 누군가 죽을지도 몰라."

[대장, 아야. 아야야.]

아라는 또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언가를 책임지는 건 이제 싫어."

자신은 클로저도 아니었기에 저 괴물의 핵을 꼭 부술 필요도 없었고, 이렇게 붙잡을 이유도 없었다.

그럼, 저 괴물을 두고 떠난다면 틈의 세계에 튀어나온 괴물들 때문에 죽어버린 이들을 과연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까.

혹여 우연히라도, 틈의 세계에 죽은 가족들의 넋을 기리는 그 소리를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들을 수 있을까.

아니, 틈의 세계라는 말 자체를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지만 이건 책임과 달라, 아라야.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빤히 알고 있는데도 모른 척하는 건. 이건, 내가 아니야."

다른 걸 버릴 순 있어도, 자신이 자신을 이루는 그 작은 조각들까지 버리고 싶진 않았다.

자신은 용왕.

저 괴물을 두고 떠났을 때의 결과를 마주할 용기조차 없는 겁쟁이의 이름이었다.

"아라야. 너도 이런 일이 생기면 외면하지 말았으면 해. 도망은 정말로 모든 걸 모른 척할 수 있을 때나 하고."

아라는 걱정 반, 불만이 반 섞인 표정으로 하벨에게 붙었다.

[대장, 바보. 바보.]

앞발로 하벨의 얼굴을 매만지다 정령수를 불어넣었다.

하벨은 씩 웃었다.

"고마워, 아라야."

밀려드는 정령수로 식물에 독을 모조리 불어넣었다.

될지 안 될지 몰랐지만, 그냥 저질렀다.

'……!'

정령수로 자란 식물이었기에 그런지 몰라도 금세 독을 머금어 색이 변해갔다.

푸르렀던 잎이 보랏빛으로, 갈색 계열의 색을 띠었던 가지가 날카로운 가시를 품으며 검게 모습을 바꿨다.

솟아난 가시가 괴물의 몸을 파고들었다.

점점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던 괴물의 몸은 이전처럼 갑자기 투명하게 변해갔다.

하벨은 자신에게는 가시를 세우지 않는 나무를 붙잡으며 천천히 걸었다.

아직 사라지지 않은, 반지에 휘감긴 물로 날을 바짝 세웠다.

괴물이 고개를 돌려 하벨을 보았다.

서늘했던 괴물의 눈이 살포시 감기더니 갑자기 활짝 웃었다.

"…가……."

'…가?'

하벨은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갑자기 놀란 마음이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휘청.

하벨은 다시금 밀려드는 어지러움을 감당할 수 없자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으.'

푸욱!

바람을 가로지르며 어디선가 갑자기 날아온 비수 하나가 괴물의 핵을 부숴버렸다.

파직.

'뭐……?'

핵이 깨지는 소리를 이어 '후' 하고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하벨은 괴물이 잘게 쪼개져 어딘가로 향하는 모습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깊게 후드를 눌러쓴 자가 걸어왔다.

소리도, 그림자조차 없는 그 모습은 흡사 유령과도 같았다.

"…커헉!"

하벨은 밀려드는 토악질을 참지 못했다.

순환의 길을 제외한 온몸에 불순물이 차올라 격렬한 통증이 덮쳤다.

기다란 바늘 수천 개가 몸을 찌르는 듯했다.

[대, 대장!]

쏟아지는 피와 함께 하벨의 상체가 무너졌고, 그는 누군가의 발이 보았다.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저자가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하벨이 몸을 일으키려 무던히 애를 쓰던 그때, 그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

"…용을."

속삭이는 듯한 말.

장갑에 감싸진 손이 랜턴을 건드렸다.

"찾으십시오."

하벨이 힘겹게 고개를 올렸을 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희미해진 하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 대체 누구… 야?'

삐삐삐삑!

요란한 정화 장치 소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처럼 들려왔다.

손등부터 푸르게 번져갔다.

아라가 정령수를 넣어도 마치 별개의 일이라는 듯 소용이 없었다.

하벨은 아라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힝. 대장!]

아라가 울상을 지으며 하벨을 흔들었다.

[대장. 대장!]

타타탁.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와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아라가 고개를 돌렸다.

"하벨!"

라르웬이 바람을 다리에 두르고 날아오다시피 하며 땅에 착지했다.

콰앙!

땅이 깊게 파였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라르웬은 시들어가는, 가시가 가득 돋친 나무를 쳐다보다 말고 당장 아라를 재촉했다.

뭔지 몰라도 한바탕 전투가 벌어진 건 분명했다.

[대장, 아야야.]

아라는 훌쩍이며 푸르게 물든 하벨의 손으로 파고들어 힘차게 머리로 들었다.

라르웬은 푸르게 물든 손등을 보자 가슴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럴 줄 알고 집으로 가자고 한 거였는데.

당장 하벨을 바로 눕혔다.

아직 의식이 있었다.

"…이거, 되게……."

"카샬!"

라르웬은 하벨이 꺼내는 희미한 소리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금 진통제가 섞인 정화제를 가지고 있는 건 카샬뿐이었다.

카샬은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주사기를 하벨에게 사용했다.

"하벨, 의식 잡고 있어."

라르웬은 하벨의 팔과 다리를 주물렀다.

"하나 더 놔야겠어?"

라르웬이 일그러진 얼굴로 묻자 카샬은 이미 새로운 주사기를 꺼내 약물을 담고 있었다.

"바로 저택으로 가야겠습니다. 당장 말입니다."

* * *

천천히 돌아오는 청력에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벨은 자신의 목을 꽉 끌어안는 말랑한 아라의 앞발과 보드라운 털 감촉을 느끼며 익숙한 소리를 들었다.

툭.

투툭.

'빗소리다.'

하벨은 무거워진 눈을 떴다.

창문밖에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도 꼼짝할 수 없을 만큼 몸이 알 수 없는 힘에 짓눌리는 듯했다.

'…아. 틈의 세계가 닫히면 비가 왔지.'

마차는 뭐 때문인지 몰라도 빠르게 나아가질 못했다.

하벨은 잠깐 눈을 찌푸렸다.

무거운 몸을 억지로 움직이자 머리 전체가 울려왔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이마가 뜨거웠다.

"…도련님, 안 됩니다.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카샬이 하벨을 말렸다.

"콜록."

하벨이 기침하자 아라가 흠칫 놀랐다.

하벨은 힘겹게 아라를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저게… 뭐야?"

갈라진 목소리에 하벨의 당혹감이 묻어났다.

라르웬은 차마 그를 바라보지 못하고는 알려주었다.

"틈의 세계가 닫히면 비가 온다던 말 기억해?"

하벨은 고개를 끄덕이지도 못했다. 그저 바라보았다.

"틈의 세계가 닫히지 않은 시간만큼 비례해서 비가 내려. 이번에는 완전히 닫히지 않았기에 열린 시간이 길다고 판단할 테고, 당분간 비가 계속 쏟아질 거야."

라르웬이 자신이 원하는 대답만 피해갔기에 하벨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형님."

"막내야."

라르웬은 하벨을 부른 뒤에 숨을 짧게 내쉬었다.

"잘 들어."

최대한 하벨이 겁에 질리지 않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소용없을 듯했다.

[물의 저주 때문에 죽은 거잖아?]

루룸이 참다못해 라르웬보다 먼저 말을 꺼냈다.

호흡을 따라 크게 움직이던 하벨의 어깨가 잠깐 멈췄다.

'저게… 정말로 물의 저주에 걸린 자의 최후라고?'

비가 내리는 칙칙한 땅에서 푸르게 변한 조각상은 너무도 눈에 띄어 막 정신을 차렸을 때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분명 멀리서는 움직였던 것 같다고 생각할 무렵, 조각상은 무너져내렸다.

산산이.

그리고 그 옆에 조각이 되어가고 있는 자를 보았다.

자신이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선명한 푸른색이 자꾸만 주변에서 아른거리지 않는가.

무엇보다 그들 머리 위에 비를 막을 수 있는 어떤 것도 보이질 않았다.

[새삼 놀랄 것도 없어. 물이 오염된 지금, 비를 맞는다는 게 저런 의미니까.]

루룸은 평소처럼 말을 했다.

그럼에도 그 목소리가 왜 이렇게 잔인하게 들려오는지.

'…그렇구나.'

하벨은 아직 움직이는 저들을 구하고 싶다는, 아주 작은 생각을 놓아주려다 다시 잡았다.

왕이 되고, 첫 패배에서 배운 건 할 수 있고, 없고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냉정하지 않으면 죽어가는 건, 자신의 백성들이니.

하지만 이제는 더는 포기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루룸."

가뜩이나 창백한 하벨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라르웬이 이를 악물며 루룸을 불렀다.

[왜? 어떻게 말해도 사실은 변하지 않아. 저렇게까지 번지면 정화제를 쏟아부어도 되돌릴 수 없어. 알잖아?]

"…고마워."

하벨은 힘 빠진 소리를 냈다.

쥐었던 아주 작은 생각을 다시 손에서 놓았다.

루룸이 빨리 말해줬기에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하벨은 창문에서 시선을 겨우 뗐다.

푸른 기가 가시지 않은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비를 맞으면… 이 몸도 저렇게 됩니까?"

덤덤한 물음에 라르웬과 카샬은 침묵을 유지했다.

하벨에게 영원히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상황이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