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다가와 속삭이다(2)
* * *
"복종이라니?"
하벨이 얼떨떨하며 묻자 페트리오는 싱긋 웃을 뿐이었다.
"저 바이온."
바이온이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오늘 일로 크게 깨달았습니다. 영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할 것 같았지만, 달님께서 그 사실을 완전히 깨부숴주셨습니다."
바이온은 뒷세계에 몸을 담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 속내를 드러냈다.
준비는 완벽했다.
그럼에도 긴장이 되었고, 두렵기도 했다.
여태껏 살아가면서 가슴이 뛰었던 순간이 과연 몇이나 될까.
무르토 마을의 귀족, 프렝 크로그.
자신은 물론, 제 부하들까지 그 더러운 시궁창으로 내몬 증오스러운 자가 아닌가.
"프렝, 그놈을 제 손으로 당신께 갖다 바쳤을 때, 떨림이 멎지 않았습니다. 평생 저놈이 누군가에게 무릎을 꿇고 엉엉 우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적도 없었습니다."
혹시 꿈은 아닐까.
꿈이라면 부디 깨질 않길 빌어보았다.
"8살에 그 개새끼가 소유한 광산에 끌려가 10년 넘게 강제노역을 하다 뒷세계에 발을 디뎠습니다. 예, 그 뒤에도 저는 남들에게 떳떳하게 산 적 없습니다. 영원히 제게 이 길뿐이라 생각했으니까요."
바이온은 자신을 가리키며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맹세코 그 개새끼와 달리 저는 인간이기를 포기한 적은 없습니다."
바이온은 치미는 여러 감정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다 하벨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다시 하늘을 보며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지었던 죄들을 갚으며 살겠습니다."
"나도 감사하오. 드디어… 내 딸아이한테 갈 수 있게 되었소."
헤콘 역시 고개를 숙였다.
길고 길었던 복수는 오늘, 끝이 났다.
외로웠을 그 아이에게 얼른 가서 예쁜 꽃을 놓으며 말동무해주고 싶었지만, 고마움을 표하는 게 먼저였다.
"참나, 다들 감정적이시네."
셴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저도 고맙다는 말씀은 드리겠습니다. 당신이나, 페트리오… 님이 정해진 테두리 밖으로 벗어나지 않게 노력도 해보겠습니다."
입에 올려본 적 없는 말을 꺼내려니 온몸이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셴은 하벨에게 고개를 숙이다 다시 올렸다.
"하지만 반성이니 뭐니 그런 건 안 할 겁니다. 저는 어차피 속부터 시궁창인 놈이니까요."
"저도 셴과 비슷한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도미논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어차피 검게 물들었는데 물에 담궈봤자 케케묵은 검은 게 빠지겠습니까? 하지만 의리는 확실히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저 역시 바이온처럼 인간성만큼은 저버리고 싶지 않으니까요."
마지막으로 도미논까지 고개를 움직이자 하벨은 페트리오의 웃음을 이해했다.
설득은 페트리오가 했지만, 마음을 움직인 건 자신이라는 말을 하고 싶었겠지.
"그래. 오늘 나한테 고개를 숙이는 이유는 고마움 때문이겠지. 하지만 두 번은 없네. 난 자네들의 주인이 아니니까."
하벨은 확실히 선을 그었다.
페트리오가 살짝 당황했다.
하벨이 수장들을 움켜쥐지 않겠다고 말을 하긴 했지만, 진심일 줄이야.
"그래도 꼭 이 말은 해주고 싶었네."
하벨은 다시 고개를 든 수장들의 눈동자에 어떤 기대를 보았다.
어떤 기대인지는 몰라도 하벨은 그 기대를 과감하게 쳐냈다.
"자네들이 저지른 죄는 사라지지 않네. 그 사실만큼은 죽을 때까지 기억하게."
식탁에 놓인 음식이 싸늘하게 식어 보일 만큼 분위기가 급히 냉랭해졌다.
"그러니 어떤 형태든 죗값을 갚게. 언젠가 자네들의 죄가 자네들을 찌르기 전에 말일세."
저주에 가까운 말에도 수장들은 누구 하나 얼굴을 찌푸리는 이들이 없었다.
이미 귀족들을 짓밟고 올라간 그곳에서 저마다 느꼈기 때문이었다.
어둠은 이제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쨌든, 축하하네."
하벨은 언제 수장들을 향해 경고를 날렸냐는 듯이 그들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이유가 뭐가 되었든 잠깐이나마 같은 배를 탔고, 그들이 위로 올라간 건 사실이었다.
하벨은 식탁을 가리켰다.
"그대들을 위해 준비했네. 열심히 즐기다 가게."
하벨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페트리오가 다급히 하벨을 불렀다.
"달님."
"왜?"
"함께… 하지 않으십니까?"
마치 주인에게 버려진 것 같은 표정이라 하벨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주인인 적이 없는데, 왜 자꾸 착각하는 건지.
"어차피 가면 때문에 먹지도 못하고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하잖아? 그건 고문이야."
카샬까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제가 실수했습니다."
페트리오는 자신이 욕심을 부렸다는 걸 알아채고는 민망해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지금 겨우 마음을 연 저들에게 하벨의 정체를 알리는 건 독이었다.
"무슨 실수까지야. 이제 저들과 함께 제대로 해 봐."
"예. 물론입니다. 이번에는 제대로… 제대로 해내 보이겠습니다."
페트리오는 그제야 굳어진 얼굴을 풀었다.
돈에 미쳤던 때는 이제 지나갔다.
이전과 같은 실수는 절대로 되풀이하지 않을 셈이었다.
"달님."
헤콘이 하벨의 발을 붙잡았다.
"왜?"
"은인의 얼굴과 이름을 모르는 건 부끄러운 일이오."
머뭇거리다 헤콘은 말을 이었다.
"언제 은인의 얼굴을 볼 수 있겠소?"
"떳떳해지면."
알 수 없는 대답에 헤콘은 방을 나가는 하벨을 보면서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누구에게 떳떳하라는 건지.
"처음 등장했을 때처럼 바람같이 왔다 바람같이 사라지는 걸 보니 정체가 더, 더 궁금하네."
셴은 자리에 앉으면서도 닫혀버린 문으로 시선을 뒀다.
"오늘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 생일상도 누가 차려준 적이 없는데 축하상이라니."
바이온은 잠깐 일렁거리는 눈으로 식탁에 놓인 음식을 하나씩 담았다.
꼴에 어울리지도 않는 모습에 도미논은 속이 니글거리는지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가슴을 세게 쳤다.
"생일상은 앞으로 내가 챙겨주마."
페트리오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됐습니다. 이 나이 먹고 무슨 생일상이겠습니까? 그리고 여기 원래 제 건물입니다."
"이제 내 건물이라는 거 잊지 말아 주게. 그러게 왜 내 목을 노렸는지. 아, 후회해도 늦었네. 다시 돌려줄 생각이 없으니."
페트리오는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자, 일단 먹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 하나씩 의논해보자고."
미래를 그리는 대화에 바이온은 물론 수장들 모두 낯설어하며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 못했다.
철컥.
검집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자 수장들은 본능적으로 몸을 떨며 페트리오 옆에 서 있던 호위를 쳐다보았다.
페트리오에게 덤비다 저 검집에 맞지 않은 이들이 어디 있는가.
"실례. 잠깐 걸려서."
그녀는 차디찬 눈으로 수장들을 쳐다보며 강하게 경고했다.
페트리오 님이 물으시면 뭐든 말해, 이 거지들아.
"타냐."
페트리오의 말에 타냐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예, 페트리오 님."
"압박은 거기까지면 충분해."
"알겠습니다. 그럼 저도 같이 먹어도 됩니까?"
"물론이지."
타냐는 각을 유지하며 의자를 빼서는 자리에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숟가락을 들고 힘차게 외친 후에 타냐는 수장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든지 말든지 며칠 굶은 사람처럼 밥을 먹기 시작했다.
"오. 진짜 맛있는데요? 역시 보시는 눈 하나는 제대로입니다."
자신이 호위하는 페트리오의 주인이 하벨 티에라라니.
'그것도 놀랍지만, 역시 제일 놀라운 건…….'
페트리오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정말 놀랐다.
그래도 한때, 같이 일한 사이였기에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 도도하던 페트리오가 무릎을 꿇다니.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티를 내지 않았지만, 부하들과 겸상을 하는 모습이 새삼 낯설었다.
'역시 하벨 티에라라는 사람 때문에 변하신 건가?'
하벨 티에라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지만, 오늘은 배불리 먹다 죽어야 할지도 몰랐다.
* * *
"…하."
카샬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에 데려간다니까. 약속했잖아?"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던 하벨은 시름으로 가득한 카샬의 목소리가 이제는 지겨운지 짜증을 살짝 냈다.
벌써 몇 번이나 말하는 건지.
이놈의 팔찌는 왜 자꾸 빠지질 않는 건지.
"제가 도련님처럼 어린아이인 줄 아십니까?"
카샬은 미간을 찌푸리며 팔찌를 손목에다가 걸고 빼는 척 반복하는 하벨을 바라보았다.
팔찌 가지고 장난치는 하벨에게 저 말은 듣고 싶었다.
"그럼 왜……."
하벨의 말꼬리가 애매하게 끝이 났다.
갑자기 랜턴에 검은 불이 붙었다.
점보다는 조금 큰, 불꽃이.
"그놈들만 처먹을 걸 생각하니 배가 아파서 그러죠. 뭘 잘했다고 먹는 건지? 그 돈이 아까워 죽을 것만 같습니다."
"넌 참 배가 아플 것도 많다."
라르웬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안쪽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다급히 확인했다.
"……!"
라르웬이 갑자기 마차 벽을 세게 두드렸다.
덜컹!
마차가 요란하게 멈추자 하벨은 깜짝 놀랐다.
[대장……?]
하벨의 머리에서 잠을 청하고 있던 아라까지 눈을 크게 뜨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무슨 일이 생겼죠?"
이미 창문에 붙어 주변을 경계하는 하벨의 모습에 라르웬은 나지막하게 말을 꺼냈다.
"…틈의 세계가 열렸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침에 하나 열렸으니 또 열리는 건 반칙 아닙니까?"
카샬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아침에 틈의 세계가 열렸고, 누군가 그 건을 들고 갔기에 라르웬이 하벨을 따라온 게 아닌가.
애초에 틈의 세계가 하루에, 그것도 비슷한 장소에 두 번이나 열린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 말이 저 말이야. 그 망할 세계가 왜 또 열려? 지금 엄청, 엄청 당황스럽네.]
루룸은 라르웬이 손에 쥔 임무용 기기를 빤히 보았다.
"황당한 건 아는데, 지금 열린 건 아침에 열린 그 틈의 세계야."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이해할 수 없는 말에 하벨은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번에 기억나? 틈의 세계를 닫으려면 괴물의 핵을 부숴야지만, 틈의 세계가 닫힌다는 거 말이야."
"기억합니다."
"그 핵이 덜 부서져도 일단 틈의 세계는 닫혀. 그리고 지금처럼 나중에 열리는 거지."
"예……?"
"새내기가 그랬든 확인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든 둘 중 하나인데.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는 편이야. 당황할 필요 없어."
라르웬은 임무용 기기에 이것저것 누르더니 곧 장갑을 꼈다.
"카샬. 먼저……."
쿠웅!
갑자기 마차가 흔들렸다.
[…괴물이 왔어.]
"하벨!"
"도련님!"
라르웬과 카샬이 하벨을 붙잡고 마차 밖으로 날렸다.
부웅.
마차가 허공에 떴다 떨어졌다.
쨍그랑!
"푸히이잉!"
유리가 사방으로 튀며 바닥에 나뒹군 말이 울음소리를 냈다.
하벨은 몇 바퀴 구르다 수풀에 부딪혀서야 겨우 멈췄다.
"…으윽."
살갗이 다 쓸려 쓰라렸지만, 하벨은 상체를 일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차는 이미 찌그러져 있었고 마차의 두 세배 정도 될 듯한 괴물이 제 몸만 한 주먹으로 말을 으깨버리고 있지 않은가.
하벨은 넋을 잃은 듯한 아라의 눈을 가리며 다른 손으로 배를 간질였다.
"괜찮습니까, 도련님?"
카샬이 달려오며 물었다.
워낙 상황이 급해서 던지긴 했지만, 그 반동으로 여기저기 쓸린 모양이었다.
파직.
"씹새끼가……!"
라르웬은 손에 번개, 그 모습을 띤 창이 만들어졌다.
라르웬의 눈동자에 핏발이 서며 곧바로 창을 괴물에게 날렸다.
파지지지직!
번개가 터지며 일어난 폭발적인 힘에 괴물이 쓰러졌다.
쿠웅!
타는 냄새가 짙게 흘러나왔다.
"틈의 세계가 여기에서 열린 겁니까?"
하벨은 다급히 라르웬한테 물었다. 아무리 봐도 허공에 무언가 열린 장소가 보이질 않았다.
"아니. 저놈이 도망쳐 온 거야."
"도망치다뇨?"
"놀랍겠지만, 저놈들, 지능이 있어."
라르웬은 차오르는 정령수와 함께 두 주먹을 마주치며 불꽃을 피어 올렸다.
곧 무언가를 잡는 흉내를 내자 그의 손에 손잡이가 만들어졌다.
화르르륵!
불꽃이 아래로 타오르며 거대한 대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도망친 걸 보면 70% 이상 저놈이 핵을 가진 놈이다! 카샬!"
"예!"
카샬은 검을 뽑으며 하벨을 잠깐 바라보았다.
"더 뒤로 물러서십시오."
힘을 사용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다.
저놈을 잡아야 틈의 세계가 닫히니까.
카샬은 당장 달려서는 양손으로 검을 잡고 미끄러지듯 괴물의 발에 휘둘렀다.
끼기기기기긱!
벽에 검을 휘두르는 느낌이 들었지만, 카샬이 쥔 검 끝은 하늘을 향했다.
기우뚱.
발이 잘리자 괴물의 중심이 무너졌다.
카샬의 발은 멈추질 않았다. 숨을 깊게 삼키며 남은 괴물의 다리를 향해 검을 포악하게 휘둘렀다.
서걱.
순식간에 두 발이 잘린 괴물이 더는 중심을 잡지 못하자 라르웬은 팔에 힘을 가득 주었다.
"흐아아아!"
대검이 괴물을 육중하게 내리찍어버렸다.
콰아앙!
동시에 퍼진 불꽃이 괴물을 먹어갔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하벨은 근질거리는 손을 숨기지 않으며 아라를 보았다.
하지만 아라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대장? 저기.]
아라가 앞발로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자 여러 개의 팔이 수풀에서 뻗어왔다.
"……?"
순식간에 하벨의 입과 눈을 가리고 팔과 다리, 몸까지 붙잡으며 수풀 속으로 끌고 갔다.
그 시간이 불과 눈을 깜박일 시간밖에 되질 않았다.
[대장! 대장!]
아라가 기겁하며 소리쳤지만, 라르웬이 휘두른 대검 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아라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다 얼른 수풀 속으로 몸을 날렸다.
"…빌어먹을. 더럽게도 크네."
라르웬은 새카맣게 타버려 꼼짝도 못 하는 괴물의 몸을 가르며 핵을 찾아다녔다.
"……?"
핵이 있을 만한 곳들을 전부 뒤져도 보이질 않았다.
"핵이 없다고?"
탁.
검을 땅에다 꽂으며 어깨로 숨을 몰아쉬던 카샬이 그 말에 어이없어하며 하벨에게 말을 걸었다.
"핵이 없다는 말 들으셨죠, 도련님? 그냥 저하고 같이……. 도련님?"
카샬의 시선 어디에도 하벨이 보이지 않았다.
카샬은 다시 검을 뽑아서는 하벨이 서 있었던 곳으로 달려갔다.
"…하벨이 왜?"
라르웬은 잠깐 괴물에게서 시선을 떼어서는 하벨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
하벨이 없었다.
[아라도 없는데?]
라르웬의 머리 위에서 머리카락을 잡고 늘어져 있던 루룸마저 눈을 크게 떴다.
카샬은 땅에 끌린 자국을 확인하고는 살기를 드러내며 말했다.
"도련님이… 끌려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