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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43화 (43/415)

43화. 다가와 속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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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뮈에르 놈을 티에라 가문으로 데려갔고, 지금 수장들이 오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카샬의 시선은 식탁을 가득 채운 음식으로 향했다.

꼬르륵.

저 환상적인 음식들을 보고 있자니 배가 고프다 못해 아려왔다.

점심을 건너뛰었고, 이제 저녁이 다 되어갔다.

'아까 중간중간 도련님의 간식을 챙겨드릴 때 나도 조금 먹을 걸 그랬네.'

"카샬. 지금 보고를 어딜 바라보고 하는 거야?"

라르웬이 언성을 높였지만, 카샬의 귀에는 닿지 않는 듯했다.

[넋이 나간 것 같은데?]

루룸은 카샬을 빤히 보았다.

아직도 꽃무늬 가면을 쓴 상태였지만, 군침을 삼키는 소리가 너무도 선명하게 들렸다.

"…아직도 먹으면 안 되는 겁니까?"

"카샬. 나도 엄청 슬퍼. 미친 듯이 슬프다고."

하벨 역시 자꾸만 포크로 향하는 자신의 손을 억누른다고 힘겨웠다.

[대장, 얌얌!]

아라가 배시시 웃으며 뭔가를 손에 쥐고 먹는 흉내를 내자 하벨은 더욱 괴로웠다.

차라리 음식의 맛을 몰랐으면 이렇게 슬프지도 않았을 텐데.

"그냥 달님이고 뭐고 때려치우면 안 됩니까? 도련님의 정체를 밝히는 쪽이 훨씬 좋을 텐데요?"

카샬의 언성이 올라가자 하벨은 이름은 모르지만, 아직 따끈따끈한 빵을 카샬에게 내밀었다.

"이 정도는 먹어도 티 나지 않을 테니까. 먹어. 점심도 굶었잖아."

"…갑자기 이렇게 하시면 제가 진짜 못된 놈이 되잖습니까."

말과 달리 카샬이 손을 내밀자 라르웬이 키득거렸다.

"그냥 먹어. 나도 몇 개 날름했고, 막내도 그랬으니까."

"…하. 저 방금 진짜 감동했는데. 도련님께서 언제 이렇게 성장하신 건지 깊은 보람을 느꼈단 말입니다! …망할."

"그래서 싫어?"

하벨이 가면을 올리며 웃자 카샬도 덩달아 가면을 벗으며 웃었다.

"아뇨. 제가 언제 싫다고 말씀드렸습니까?"

누가 뺏어갈까 허겁지겁 먹던 카샬은 빵부스러기까지 소중한지 입가를 핥았다.

"그런데 도련님."

"왜?"

"정말로 정체를 밝히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도련님의 얼굴을 보여드리기만 해도 수장 놈들이 배신하는 일은 없을 텐데요."

"카샬. 내가 분명히 말했지? 뭐든 짊어지는 건 이제 싫어. 네 말대로 정체를 밝히면 뒤탈이 없을 수 있지. 하지만 나는 수장들을 짊어질 수밖에 없어."

누군가의 목숨과 삶을 책임지는 건 왕관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보다 더 무거운 일이었다.

하벨은 그래서 지금이 딱 좋았다.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는 관계.

"그래서 좀도둑한테 다 넘긴 겁니까?"

카샬은 이번에도 왜 짊어지기 싫은지에 대한 이유는 묻지 않았다.

"맞아. 그래서 넘겼어. 복수를 도와주기로 약속도 했고."

"후회는 없어?"

라르웬은 꼰 다리를 흔들며 묻자 하벨은 미련도 없이 웃었다.

"없습니다."

"그럼 됐어. 혹시 땅을 가지고 싶으면 말해. 이 형님이 하나 사줄 테니까."

그 말에 카샬은 일그러지는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땅이 가지고 싶다고 말하면 가질 수 있는 거였다니.

'…제엔장, 티에라.'

"그나저나 나 같으면 땅도 주고, 축하도 해주고, 이런 상사가 있으면 정말 맹세코 뼈를 묻을 건데."

라르웬은 대놓고 카샬을 쳐다보았다.

"저한테도 뭘 좀 주시고 말씀하시죠? 땅만 주신다면야 뼈는 무슨, 영혼도 같이 묻겠습니다."

"이상하다.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네 생일날에 아버지께서 고생한다고 너한테 땅 하나를……."

"제 뼈와 영혼은 이미 티에라 가문에 묻었죠. 방금은 농담한 겁니다."

카샬이 급 환하게 웃으며 양손마저 가지런히 배꼽에 올렸다.

누가 봐도 참된 집사의 모습이었다.

봐, 동생아. 카샬은 이렇게 다루는 거다.

마치 라르웬이 이렇게 말하는 듯해 하벨은 알겠다며 엄지를 살짝 올렸다.

'그런데 돈을 좋아하는 티를 내는 것치고 생각보다 검소하던데.'

카샬이 평소에 뭘 사는지, 어떻게 생활하는지 몰라도 카샬의 방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편지가 가득 쌓여 있는 게 특이할 뿐, 비싼 것들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신은 비싼 것들을 구분할 줄 몰랐지만, 하벨 티에라는 맨날 보던 것들이라 그런지 대충 구분은 가능했다.

"아차, 도련님께서 들릴 때가 있다고 하셨는데 거기가 어디입니까?"

"너도 지헬 론이 말한 걸 들었잖아?"

지헬 론, 뒷세계 수장 셴이 있는 비튼 마을의 귀족이었다.

―동맹을, 흑, 동맹을 추진한 건 뮈에르 그놈입니다. 저는 진짜, 멍청이처럼 그 말에 속아 넘어간 것밖에 없습니다. …아! 그, 그놈이 저지른 중한 죄를 알고 있습니다.

지헬이 말하던 뮈에르의 중한 죄.

―놈이 마법사와 결탁해 정령들이 오지 못하게 막는 뭔가를 설치했다고 합니다.

마법사가 정령을 막으려 부정한 것들을 그리거나 설치한 건 생각보다 자주 봤기에 그 입을 막아버릴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곳이 거대 정화 장치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마법을 부려 장소 자체를 가렸다고 보고 받았는데 자세히는 몰라도 거대 정화 장치를 건드리는 건 귀족도 용서받지 못할 엄청난 중죄입니다.

"…아. 거대 정화 장치로 가실 셈이십니까?"

카샬이 묻자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도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마음이 동요됐다.

바다를 잃어버렸던 정령들의 기억을 본 탓인지.

열심히 버리려고 애를 써도 결국 아직도 버리지 못한 용왕으로서의 오지랖 때문인 건지.

그것도 아니면 바다와 물의 지배자였던 자신이 지금도 그리워하는 물과 관련된 이야기였기 때문인지.

어쩌면 이 모든 이유가 복합해서 벌어졌을지도 몰랐다.

"맞아. 정확히 뭔지 몰라도 여기 달린 정화 장치와 비슷한 역할을 할 거 아니야?"

하벨은 자신의 정화 장치를 한번 바라보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장치 내부에 든 물이 조금 빨리 도는 것 같았다.

정화제는 저택을 떠나기 전에 넣어서 아직 가득할 텐데.

"그렇지. 하는 역할은 비슷해. 오염된 물을 정화한다. 하지만 네가 달고 있는 정화 장치와는 달라."

라르웬의 대답을 이어 카샬까지 말을 꺼냈다.

"맞습니다. 도련님께서 달고 계시는 정화 장치는 단지 오염된 물이 아니라 변종으로 변해버린 물의 저주를 대항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도련님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존재죠."

"알고 있어. 부서트리지 않고 잘 간직하고 있잖아."

하벨은 실금 하나 없이 멀쩡한 정화 장치를 가리키며 씩 웃었다.

카샬이 이따금 자신에게 놓는 주사기가 진통제가 섞인 정화제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게 웬만하면 부서질 일이 없지. 엄청 튼튼하니까."

라르웬은 발을 흔들며 숨을 짧게 내쉬었다.

"막내야. 네가 뭘 생각하는지는 아는데,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하고 집에 돌아가자."

"왜요?"

"정화 장치가 빨리 돌고 있는 걸 너도 봤잖아?"

"예. 봤습니다."

"'예, 봤습니다'가 아닙니다. 제가 이전에도 말씀드렸잖습니까. 아무 이유도 없이 정화 장치가 저렇게 빨리 돌아가면 저에게 알리거나, 헤레스 씨를 불러야 한다고요."

카샬은 입가를 쓸며 말했다.

그의 눈가 사이가 좁혀졌고, 주름까지 잡히자 하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헤레스 씨한테 분명히 도련님께서 앓으시는 물의 저주가 '변종'이라는 말도 들었을 겁니다."

카샬의 웃음기가 쫙 빠졌고, 변종이라는 말을 재차 강조하자 하벨은 뭔가 혼나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라르웬을 슬쩍 쳐다보았지만, 그는 평소와 달리 카샬을 말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

"저건 이제 물의 저주가 악화가 될 거라는 조짐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집에 가셔야 합니다."

"하지만 거대 정화 장치는 어쩌고? 그때, 형님도 너도 심각한 문제라고 했잖습니까?"

"하벨."

라르웬이 말문을 열었다.

"거대 정화 장치 문제는 고질적인 문제야."

"알고 계셨습니까?"

"모르는 게 이상하지. 우리 가문에서 정화제를 그렇게 쏟아부었는데도 물의 오염이 이전과 비교하면 미미해."

[맞아. 오염 진행 속도가 살짝 느려진 정도야. 정화제가 제대로 돌고 있지 않다는 의미겠지.]

아라와 술래잡기 놀이를 하던 루룸이 잠깐 멈춰 불쾌함을 드러냈다.

[미친놈들. 물의 오염 진행 속도가 다시 빨라지면 다 죽는 건데, 정화제를 가지고 어떻게 장난칠 생각을 해?]

"진짜 정화제로 오염을 막고 있다는 겁니까?"

하벨은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에 입을 살짝 벌렸다.

"맞아. 지금 물의 오염을 막을 방법은 정령사와 정령이 만드는 정화제뿐이니까."

라르웬의 대답에 하벨은 새삼 룬델과 티에라 가문이 다시 보였다.

분명히 세계에 공급되는 정화제 양 중 61.5%가 티에라 가문에서 나온다고 카샬이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검은 달은 모든 나라에 퍼져 있었으며 소위 말해서 세계에 '악'이 될 자를 죽이는 비밀 결사대였습니다.

하벨은 레디나가 말했던 '검은 달'과 관련한 말을 떠올렸다.

그때, 분명 검은 달은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망가졌다고 했다.

―악을 죽이는 검은 달이 망가졌다면, 세상을 구하려는 티에라 가문, 그 가문의 막내아들을 죽지 않게 막는 것부터가 검을 달을 고치는 방법이라 생각했죠.

'…그래서 레디나가 '세상을 구할'이라는 말까지 쓴 거였다니.'

"그게 우리가 정령사 가문으로 불리는 이유이고, 유명한 이유이기도 하며 우릴 건드리는 이유이기도 해."

정화제.

그 매력적인 약품에 탐욕으로 가득 찬 눈빛을 한 이들은 정말 무수히도 많았다.

라르웬은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정화제는 물의 내성이 있는 사람에게도 필요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모두가 쓸 수밖에 없는 필수품이지. 그런 필수품을 욕심쟁이가 차지한다면 어떻게 될까?"

라르웬은 때가 되면 말해주려고 했던 이야기였기에 하벨이 멍한 얼굴이 되어도 말을 멈추질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정화제 때문이라도 티에라 가문을 오래 벗어날 수가 없어. 그래서 누님이 아버지를 대신해 돌아다니지. 누님께서 돌아오실 때 이것저것 들어보면 기가 막힐 거다."

라르웬은 일그러진 하벨의 표정을 보며 그가 꺼낼 말을 기다렸다.

"그럼 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겁니까?"

귀족 데론이 관리한 마을에 기상국이 잘못된 날씨 정보를 꺼냈을 때도 하벨은 이를 보고 지나치질 않았다.

하벨이 의식하고 있진 않아도 물의 저주로 괴로웠던 기억 때문에 물의 오염 일을 더 강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지금도 하고 있어. 그런데 현실적으로 힘든 편이야. 우리는 지금 세계에 유통되고 있는 정화제를 가지고 장난치는 것들을 막는 데 힘을 쓰고 있거든."

"예?"

세계라니.

하벨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카샬을 바라보았다.

카샬의 얼굴에 비웃음이 걸리지 않은 걸 보면 아무래도 정말 제대로 잘 들은 모양이었다.

"설마 가문과 영토에만 있는 정령사가 전부라고 생각했어?"

라르웬이 피식 웃었다.

"아버지께서는 세계로 퍼진 정령사들의 구심점이야. 그렇기에 정령들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거고."

"가주님께서 그렇게… 큰 역할을 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몰랐던 게 당연해. 나나 카샬이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네가 자랑스럽네. 내가 관심을 가진 문제는 틈의 세계였지만."

라르웬의 칭찬에 하벨은 흠칫거렸다.

'…당연한 문제에 관심을 두는 게 칭찬을 받을 일인가?'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처리해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누구에게든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했고, 항상 웃는 얼굴로, 감정을 내비치지 말고, 누군가의 죽음에도 초연해야 하며, 훌륭하게, 완벽하게, 그렇게 매일.

매일.

매일.

자신은 왕이 되어야 했다.

수많은 시간이 흘러도, 관료들이 바뀌어도 왕은 오직 자신뿐이었으니.

갑자기 밀려오는 그 무거움에 하벨의 손끝이 잠깐 흔들렸다.

슥슥.

하벨은 갑자기 이마에서 느껴지는 손길에 흠칫 놀라며 상념에서 벗어났다.

루룸이 짧은 앞발로 자신을 쓰다듬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착한 일을 했으니 칭찬을 해야지. 우린 너 같은 아이를 좋아해. 정말로.]

"왜……?"

자신이 이상한 건지, 저들이 이상한 건지.

하벨은 낯설었다.

[뭐가 왜야? 우리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그게 다야.]

루룸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며 하벨의 반응에 즐거워했다.

[…씨잉.]

아라가 그 모습을 보더니 인상을 쓰며 루룸의 반대편에서 하벨을 쓰다듬었다.

[대장, 착해!]

루룸과 경쟁하려는지 아라는 아직은 어색한 짧은 앞발을 부지런히도 놀렸다.

하벨은 그 모습이 웃겨 두 눈을 포근하게 감으며 웃음 지었다.

"도련님."

카샬이 밑에서 올라오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제법 진중하게 하벨을 불렀다.

"그래."

하벨은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도련님께서 무얼 하시든 막장까지 치닫는 게 아니라면 툴툴거려도 언제나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조금 특별하신 상태라는 것만은 받아들여 주셨으면 합니다. 도련님께서 계속 안고 가셔야 할 특별함이니까요."

너무도 정중한 카샬의 부탁에 하벨은 잠깐 소름이 돋아났다.

평소와 달랐기에 본능적으로 일어난 반응이었지만, 하벨 역시 곧 진지한 표정으로 임했다.

"면역력이 약해지면 병이 심해지십니다. 그래서 도련님께서 먹는 것도, 주무시는 것도 제가 그렇게 신경 쓰는 겁니다."

"고마워, 카샬. 오늘은 집에서 쉬고 다음에 움직일게."

하벨은 하벨 티에라를 대신해 대답했다.

자신 기준으로 하벨 티에라의 몸을 소중히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라르웬과 카샬의 기준으로 본다면 부족한 모양이었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카샬은 허리를 숙인 뒤에 가면을 가리켰다.

"이제 옵니다. 가면을 쓰십시오."

하벨은 가면을 내렸다.

똑똑.

잠시 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페트리오와 함께 네 명의 수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면서 페트리오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그는 가면을 벗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이전에 봤던 호위가 여전히 붙어 있었다.

"시간이 걸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무르토, 아르에느, 비튼, 메멘 전부 손에 넣었습니다."

페트리오는 마을을 언급할 때마다 점점 더 비장해졌다.

이는 뒤에 서 있던 수장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모든 걸 이뤄내고 말았다.

"달님."

페트리오가 기쁜 표정을 드러내며 하벨을 불렀다.

"그래."

"제가 하나 더 받아냈습니다."

"그게 뭔데?"

하벨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달님께서 우려하던 저들의 배신. 그 배신을 막을 복종을 받아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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