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접수 완료!
* * *
[…삐잇?]
아라는 빛에 둘러싸인 상태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라야?"
하벨은 아라가 혹여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붙잡지도 못하고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왜 이러는 겁니까, 형님?"
"그러니까. 나도… 이런 상황은 처음 보는 건데?"
라르웬 역시 당황하며 루룸을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원래 정령은 다 자란 상태에서 태어난다고. 쟤가 이상한 거야.]
루룸은 도리어 이상하게 아라를 바라보았다.
"괜찮은 거야?"
하벨이 입가를 핥으며 묻자 루룸은 코웃음을 쳤다.
"루룸."
가라앉은 라르웬의 목소리에 루룸은 활짝 웃었다.
[괜찮아. 우리는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까. 봐봐.]
아라를 둘러싼 빛이 점점 자라났다.
아라의 몸집이 한층 자라 손바닥보다 살짝 더 커지자 빛이 사라졌다.
하벨은 얼른 아라를 안아주다 말고 깜짝 놀랐다.
짧지만, 네 개의 발이 달려 있지 않은가.
"아, 아라야! 발이 생겼어! 발이!"
하벨은 믿을 수가 없어 아라의 발을 만지작거렸다.
아라가 헤헤 웃었다.
[대장!]
"……!"
하벨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어, 아라야?"
[대장!]
아라가 자신의 짧은 발을 보며 신기한지 꼼지락거렸다.
"들었습니까, 형님? 아, 아라가 지금 저보고 대장이라고 했습니다! 제 조기교육이 통했다고요!"
하벨은 크게 웃으며 라르웬의 어깨를 흔들었다.
"…조기교육 어쩌고 했던 거 진심이었어?"
라르웬이 얼빠진 소리를 내자 하벨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보셨습니까? 아라가 저보고 대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나한테도 그러는데?]
루룸은 피식거렸다.
[아라야. 내가 누구라고?]
[대장.]
아라가 해맑은 얼굴로 대답했다.
"어……."
"음, 힘내라, 동생아."
라르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대로 굳어진 하벨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으함. 이제 다 끝났으면 가죠."
카샬은 기지개를 쭉 켜고는 하벨을 재촉하다 으르렁거리듯 사나워진 표정에 흠칫 놀랐다.
* * *
'좋아, 좋아. 분위기도 합격이다.'
하벨은 만족스러워하며 주변을 살폈다.
낮에 찾아왔기에 무언가를 조심하는 듯, 경계하는 듯 계기만 있다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날이 선 분위기가 눈에 더 잘 보였다.
'랜턴에 다시 검은 불꽃이 붙었고.'
역시 다 끝난 게 아니었다.
하벨은 이런 경고와 별개로 즐거웠다.
슬슬 랜턴을 파악하고 있지 않은가.
'알아가는 재미가 묘하게 있네.'
"저쪽에 칼부림이 나기 직전처럼 보이는데요?"
카샬이 고갯짓으로 슬쩍 가리킨 곳은 주점이었다.
한눈에 봐도 주점 앞에서 주점을 지키려는 자와 주점을 부수려는 자의 대치였다.
그곳에 몰린 주변 사람들을 잊을 정도로 열정적이라 정령들도 모여서는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좀 꺼져라, 이 개새끼들아!"
주점을 지키려는 자가 먼저 소리쳤다.
"개새끼는 네놈이지! 그 포도주 당장 내놓으라고! 도둑주제에 뭐가 그렇게 당당해?"
목청만 크지, 실상은 손에 쥔 무기를 휘두르지도 않자 하벨은 웃음을 터트렸다.
저들 전부 뒷세계의 사람이라는 걸 눈치채니 백포도주가 깨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게 눈에 보여 웃음을 참는 게 어려웠다.
"도둑 같은 개소리 하긴, 우린 정당하게 샀어."
"정당하게? 이 미친 새끼들이. 저게 지금 어떤 백포도주인 줄 알아? 가격도 이만 델? 저 비싼 술을 겨우 이만 델로 판다고?"
'잘하고 있네.'
하벨은 만족스러웠다.
저렇게 비싼 술이 이 정도 헐값에 팔리고 있다는 건 여기서 초특가 세일 중이니 어른 사가라는 홍보가 아니고 뭐겠는가.
"가격이야 산 우리 마음대로지. 억울하든지 말든지 여기 와서 행패 부리면 되나? 자세한 건 네놈 윗대가리한테 물으라고. 자꾸 이러면 경비 부른다?"
"막내야."
라르웬은 조용히 하벨을 불렀다.
험악하며 덩칫값을 하는 이들끼리 모인 것치고 소꿉장난처럼 굴었다.
하지만 그들의 외모 덕인지 몰라도 이런 장난 같은 일도 싸우는 걸로 보여 참 우스웠다.
"예, 형님."
"뭘 어쨌길래 일이 이렇게 재미있게 돌아가는 건데?"
"자세한 건 안에 들어가면 알게 될 겁니다."
하벨은 키득거리며 바이온이 소유한 건물로 향했다.
이미 말이 다 오간 상태인지 검을 빼려던 경비는 카샬의 꽃 가면을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푸흡."
라르웬은 그 모습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카샬의 주먹이 바르르 떨렸다.
문이 열리자 하벨은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당당한 그 걸음걸이가 마치 이곳의 주인 것처럼 보였다.
"오셨습니까?"
언제부터 기다린 건지, 페트리오가 별님 가면을 쓴 채로 허리를 숙였다.
페트리오 옆에 처음 본 사람이 서 있었다.
옆구리에 찬 검을 보면 페트리오가 말했던 부하 중 한 명이 아닐까 싶었다.
"밖이 요란하더라?"
"예. 수장들은 물론 저도 조미료를 첨가한 결과죠."
"아, 그거?"
하벨이 실실 웃자 페트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다 모였어?"
"물론입니다. 여기저기 난리가 나니 귀족들의 감시망도 상대적으로 소홀해질 수밖에 없죠. 아마 결과물을 이어서 들으시면 엄청 재미있을 겁니다."
페트리오는 하벨의 기대를 한껏 달궜다.
* * *
"백포도주 작전이 진행되기 전에 저는 달님 말대로 귀족의 비밀을 손에 쥐고 협상하러 갔습니다."
바이온은 하벨의 시선에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백포도주 작전?
처음 작전명 이름을 들었을 때, 진심으로 저 달 가면을 추격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놈을 죽이면 놈이 움켜쥔 것들이 어떻게 될지 몰랐고, 무엇보다 별님이라고 불리는 놈이 옆에서 감시하니 뭘 어쩌기도 어려웠다.
암살 시도를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놈의 곁에 붙은 실력자 때문에 실패해서는 괜히 꿍쳐뒀던 건물만 뺏기고 말았다.
그 일을 떠올린 게 불쾌한지 바이온은 잠깐 눈살을 찌푸리며 페트리오를 흘겨보았다.
"그래서?"
하벨의 재촉에 바이온은 말을 이어 나갔다.
"아마 백포도주 건에 이어 사건 하나가 더 터지면서 뭘 알아볼 정신이 없는지 백포도주 건으로 조용히 도미논과 접촉할 수 있냐고 저한테 묻더군요."
솔직히 결과를 보면 훌륭했다.
달님이라 부르는 저 남자의 손바닥에 다들 놀고 있는 것만 같았으니.
"꼬리를 남기는 걸 잊지 않았겠지?"
하벨이 묻자 바이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아르에느 마을 귀족이 무르토 마을을 의심할 수 있게 꼬리를 남겼습니다."
"셴. 불은 확실히 질렀고?"
하벨의 물음에 셴이 손을 번쩍 올렸다.
"물론입니다. 바이온한테 무르토 마을 귀족이 돈을 은닉한 장소를 들었을 땐 탐이 났지만, 필사적으로 참아봤습니다."
셴의 갑작스러운 존대에도 하벨은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움직인 건 저들이나, 귀족들의 갈등에 불을 지핀 건 자신이었으니.
자신은 저들에게 확실히 보여줬다.
존대를 받기엔 충분하지 않은가?
"근처만 태웠겠지?"
"당연합니다. 산도 가깝고, 때마침 계절도 가을이다 보니 이상하진 않을 겁니다."
"백포도주는 계속 빼돌리고 있나?"
하벨은 이어 도미논을 쳐다보았다.
"예. 당연히 지금도 백포도주를 몰래몰래 빼돌리고 있습니다. 그 돼지 새끼가 얼마나 악랄한지 알고 있어서 협력하는 이들도 많고, 덕분에 꽤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도미논이 씩 웃자 덩달아 그의 얼굴에 흉터 역시 쫙 펴졌다.
"그 돼지 새끼가 얼마나 날뛰고 있는지 직접 보셔야 했는데."
"별님, 정리한 내용 줘봐."
하벨이 손을 내밀자 페트리오는 현재 상황을 정리한 내용을 넘겼다.
백포도주를 도미논이 빼돌려 동맹을 구축한 나머지 세 마을에 유통하면서 사건이 시작됐다.
이번 일로 아르에느 귀족이 쌓아둔 동맹의 불신을 터트리는 데 성공했다.
분노에 눈이 먼 아르에느 귀족이 뒤를 쫓을 수 있게 바이온이 일부러 흔적을 남겼다.
이 사건으로 한껏 날카로워진 아르에느의 귀족이 품은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을 테지.
아르에느의 귀족이 무르토 마을의 귀족을 찔렀을 때, 셴이 무르토의 귀족이 돈을 숨긴 은닉처 근처에 불을 질렀다.
무르토 마을의 귀족이 이를 보고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아르에느 귀족이 미쳐 날뛴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하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번에 일부러 없앤 마약 무더기들은 어떻게 됐소? 아르에느 마을과 무르토 마을은 물론 내가 관리하고 있던 메멘까지 큰 손해를 봤소."
헤콘은 우락부락한 근육에 어울리지 않게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물었다.
그 말대로 마약이 사라지면서 메멘 마을의 귀족은 예상치도 못한 타격을 입고 말았다.
"자네는 바이온에게 받은 정보를 메멘의 귀족 넘겼기 때문에 잘 넘어가지 않았는가?"
아르에느의 귀족과 무르토의 귀족 사이에 벌어진 은밀한 거래.
그 정보를 넘겼기에 헤콘은 오히려 메멘의 귀족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럼 정말 손해일까, 아니면 이득일까?"
이어 하벨이 풋돈에 연연하는 모습까지 꼬집자 헤콘은 입을 다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하벨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여기에서 네가 조미료를 뿌렸지."
대충 정리가 됐기에 하벨은 손에 쥔 종이를 카샬에게 넘기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페트리오는 허리를 넙죽 숙이며 대답했다.
동맹을 체결한 마을은 아르에느, 무르토, 메멘, 그리고 비튼 마을이었다.
앞서 세 마을에 피해가 있었지만, 셴이 둥지를 트고 있는 비튼 마을만 피해가 유일하게 없다면 어떻게 될까.
"의심의 싹이 얼마나 자랐어?"
하벨은 즐거움을 숨기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냈다.
"모든 귀족이 서로를 의심하고 물고 뜯고 난리가 날 정도로 자랐습니다."
페트리오 역시 즐겁게 대답했다.
"놈들 측근 매수도 잘됐겠고. 네 덕이 커, 별님."
하벨은 페트리오를 칭찬했다.
페트리오가 가진 힘으로 귀족들의 측근을 협박해 매수를 성공했다.
덕분에 일이 훨씬 수월하게 흘러갔기에 공이 컸다.
"아닙니다. 달님이야말로 훌륭한 작전이었습니다."
페트리오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하벨의 목적은 처음부터 귀족이었다.
누구보다 귀족을 아는 뒷세계 수장들이 필요했기에 그들의 목줄을 먼저 쥐어야 했다.
하지만 하벨은 거기서 끝내지 않았다. 그들의 분노조차 이용해 불을 지폈다.
그 결과 정말로 귀족들이 서로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까지 이뤄내지 않았던가.
"그리고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게 해준 자네들도 고맙네."
하벨의 인사에 수장들은 당황함을 숨기지 못했다.
"…고맙다뇨? 지금 제정신입니까?"
셴이 황당해하며 물었다.
"보다시피 제정신이네."
하벨의 당당한 대답에 셴은 말문이 막힌 듯 보였다.
"무슨… 수작이오?"
헤콘이 물었다.
"안타깝게도 수작은 없네. 내가 목줄을 쥐었다고 해서 자네들이 내 지시를 무조건 따를 거라 생각하지 않았어. 그건 당연하지. 나도 귀족들처럼 자네들의 약점을 쥐고 흔든 셈이니 왜 화가 나지 않겠는가? 그래서 고맙다고 말하는 걸세."
하벨은 거짓을 섞지 않고 말했다.
간단한 마음조차 전하지 못했던 용왕이었을 때와 달라지고 싶은 마음에 꺼낸 말이기도 했다.
"달님. 저들의 부끄러움을 이해해주십시오."
페트리오의 뜬금없는 소리에 하벨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부끄러움이라니?"
"제가 수장들을 가장 가까이서 보지 않았습니까?"
하벨을 향한 그들의 시선과 태도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직접 봤기에 알고 있었다.
"입 좀 닥칠래?"
바이온이 바로 발끈했다.
확실히 처음에는 잡힌 목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움직였기에 달님을 향한 분노를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자신이 움직인 만큼 상황이 변했다.
그 변화가 낯설어 발끈한다는 걸 알지만, 좀처럼 인상이 펴지질 않았다.
"확실히 이번 일을 맡는 동안 즐거웠습니다."
도미논은 솔직하게 마음을 터놨다.
하벨의 지시대로 행동하자 모든 게 달라졌다.
그 상황을 제 눈으로 보았기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가 움직여 뭔가가 달라지는 건 처음 봤거든요. 저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건 나도 동감이오."
헤콘이 괜히 책상에 손가락을 튕기며 대답했다.
"…뭐어, 즐겁긴 했지. 특히 귀족 놈들이 발끈하는 게 아주 볼만했고."
셴 역시 마지못해 팔짱을 꼈다.
"다들 즐거웠으면 됐네. 앞으로 더 즐거울 일이 남아 있으니 그 감정을 잊지 말아 주게."
하벨은 수장들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자 처음으로 부하들이 생겼을 때가 괜히 생각이 났다.
―그러니까 손이 더럽게 매운 댁이 용왕이고, 진짜, 정말로 바다에서 태어났단 말이오?
짝짝.
라르웬은 더는 침묵을 유지하지 않고 손뼉을 마주쳤다.
"달님."
페트리오가 입을 열었다.
"왜?"
"…누굽니까?"
페트리오는 아까 전부터 침묵을 유지하던 라르웬을 바라보았다.
꽃무늬 가면은 카샬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아, 나는 신경 쓰지 마."
라르웬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사실 들어오면서부터 계속 시선을 받던 참이었지만, 라르웬은 모든 시선을 무시하며 하벨이 일궈놓은 것들을 열심히 경청하기 바빴다.
저들을 한곳에 모은 것도, 움직인 것도 다 하벨이 벌인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훌륭해 손뼉을 마주쳐주고 싶었다.
탁.
하벨은 가볍게 탁자를 때렸다.
어떻게 하면 시선을 잡을 수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소리가 달랐다.
흩어졌던 시선이 한 번에 하벨에게 쏠렸다.
"자, 이제 하나만 남았지?"
하벨은 손가락을 올려 천장을 가리켰다.
덩달아 수장들의 기대감이 눈동자에 어렸다.
직접 변화를 봤기에 다음 행보가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귀족의 모가지를 따러 가자."
간결하고, 깔끔한 하벨의 지시에 수장들은 한마음으로 소리를 냈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