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말을 건다(3)
* * *
* * *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아르에느의 귀족은 백포도주를 가리키며 손가락을 덜덜 떨었다.
그의 커다란 배도 같이 흔들렸다.
"저건 우리, 우리 백포도주가 아니더냐!"
귀족의 목소리가 절망으로 찢어졌다.
원래 왕실 납품용이었지만, 가난하기 짝이 없는 왕실에 갖다 바쳐봤자 풋돈밖에 돌아오지 않는데 뭐하러 넙죽넙죽 바치겠는가.
왕실 납품용은 저급 백포도주로 바치고, 최상급 백포도로 만든 저 귀한 술은 배부른 귀족들에게 팔았다.
어느새 자금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효자 상품이 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저게 지금 시중에 풀린 것도 모자라 단돈 이, 이, 이만 델로 팔리고 있다고? 이백만 델도 아니라 이만 델?"
귀족은 도무지 믿을 수 없어 당장 백포도주를 보관한 창고로 향했다.
텅텅.
텅 비어버린 창고를 보자마자 귀족은 솟구치는 혈압에 뒷덜미를 잡으며 '억' 하고 소리를 내고 말았다.
이걸 몰랐다니.
이걸.
뒷덜미를 잡은 귀족은 그를 부축하는 시종들의 손길에 겨우 넘어지지 않았다.
"치워라."
귀족은 시종을 밀치고는 탐욕스러운 몸을 유지할 만큼 커다란 배로 우렁차게 소리쳤다.
"창고 관계자들 전부 내 방으로 데려오거라!"
귀족은 그곳에 일하고 있는 자들마저 처죽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다시 방으로 향했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는 집사를 재촉했다.
"어디까지 퍼졌는지 알아내고 당장 제품 회수해! 당장! 제로스한테도 알리고!"
"아, 알겠습니다. 당장 움직이겠습니다."
집사가 나간 후 귀족은 기약 없는 기다림에 식혔던 분노가 차오르자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탁탁.
손놀림은 점점 빨라지고 곧 그는 주먹을 쥐어서는 책상을 강하게 쳤다.
콰앙!
"왜 아무 소식이 없는 것이더냐! 거기!"
귀족의 명령에 옆에 서 있던 시녀가 덜덜 떨며 허리를 숙였다.
"예."
수십 명의 사람이 들어와도 이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방이었기에 귀족의 목소리는 울렸다.
"당장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보고……."
탁탁탁!
다급한 발소리에 귀족은 말을 멈췄다.
"가주님!"
기사가 인사할 틈도 없이 귀족을 불렀다.
"왜?"
"도망쳤습니다."
"…누가?"
"관계자 전부 하나도 남김없이 도망쳤습니다."
"이런 미치이인!"
귀족은 제 화를 참지 못하고 책상을 걷어찼다.
하지만 아픈 건 자신의 발이었다.
귀족은 발을 절뚝거리며 기사에게 걸어와 당장 주먹으로 얼굴을 쥐어팼다.
퍽!
"내가!"
귀족의 주먹은 휘청거리는 기사의 복부를 강타했다.
"…끄읍."
기사는 신음을 삼키며 숙인 고개를 겨우 올렸다.
"당장 쫓으란 지시까지 내려야 움직일 건가?"
"아닙니다! 당장 도망친 놈들을 쫓겠습니다!"
기사가 허리를 숙인 뒤 밖으로 나갈 때쯤, 집사가 다급히 들어왔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라 귀족의 얼굴이 당장 구겨졌다.
"백포도주가 아르에느 마을에만 풀린 게 아니었습니다."
"…뭐? 지금 뭐라고 했나?"
아르에느의 귀족의 닦달에 집사가 마른 침을 몇 번이고 삼켰다.
저 포악한 돼지의 눈이 점점 괴물을 연상시킬 만큼 사나워졌다.
어쩌면 오늘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에 집사는 솟구치는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그, 그러니까, 백포도주가 지금 무르트 마을은 물론 메멘 마을, 비튼 마을에까지 팔리고 있습니다."
"왜…?"
차가운 그 음성에 집사는 당장 무릎을 꿇고 고개를 박았다.
"시간만 주신다면 더, 더 제대로 알아보겠습니다."
"거기 너."
귀족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시녀를 재차 가리켰다.
"…예, 가주님."
"저거 가져와."
귀족의 시선이 벽에 걸린 검으로 향하자 시녀의 안색이 창백했다.
"제,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고개를 슬쩍 올렸던 집사는 시녀가 가져오는 검을 보자 발작하듯 소리쳤다.
"아니."
스겅.
귀족은 검을 뽑았다.
"백포도주가 다른 마을에 풀릴 때 동안 아무것도 못 한 등신 같은 너 말고 쓸 만한 놈들은 많아."
비웃음을 그리며 귀족은 집사의 등에 칼을 박아넣었다.
푸욱!
시녀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똑똑.
"들어 와."
귀족은 검을 던지며 자리에 앉아 말했다.
남자는 안으로 들어오다 시체가 된 집사를 보며 흠칫 놀랐지만, 애써 귀족에게 허리를 숙였다.
"조사 결과 무르트, 메멘, 비튼 마을의 귀족들이 합심해 저지른 일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시간이 급박해 조사 과정이 짧았다는 점을 고려해주셨으면 합니다."
남자가 내민 조사 결과를 보더니 귀족은 이를 갈았다.
"…개새끼들. 내 언젠가 이렇게 뒤통수를 칠 거라 생각했는데."
불과 얼마 전에 동맹을 맺지 않았던가.
평소 백포도주를 탐내 한다는 걸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특히, 무르토 마을의 배신이 제일 뼈가 아팠다.
처먹인 백포도주가 몇 개인지.
"…역시 쓸 만한 놈이 너밖에 없어, 제레스."
귀족은 간신히 진정하며 눈을 날카롭게 떴다.
"영광입니다."
제로스는 고개를 숙이다 슬쩍 귀족을 떠보았다.
"가주님. 혹시 이대로 가만히 있을 셈이십니까?"
"아니!"
귀족의 얼굴에 흉악한 미소가 드리웠다.
"날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이참에 보여줘야지. 내가 이번에 손해 본 것 이상으로 토해내 줘야겠어."
* * *
[안녕.]
무르토 마을에 들어서기 전에 정령이 하벨을 보며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본 라르웬은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지금 정령이 하벨한테 인사했다고?"
[에이 잘못 본 거겠지.]
루룸이 핀잔을 줬다.
[안녕, 하벨! 같이 왔네?]
"이름을 말하잖아?"
라르웬은 보란 듯이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루룸의 눈이 커졌다.
"안녕."
하벨마저 손을 흔들자 정령들도 따라 흔들어주었다.
[…손까지 흔들어준다고?]
"내 말이."
루룸을 따라 라르웬까지 멍청한 표정을 짓자 카샬마저 얼빠진 듯 그를 바라보았다.
"정말입니까?"
"그래.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라르웬은 두 주먹을 부르르 떨며 아쉬움까지 드러냈다.
아버지가 이걸 봤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라르웬은 생각보다 큰 변화가 없는 하벨을 보며 무슨 생각인지 알고 싶었다.
'…깜짝 놀랐네.'
놀란 건 하벨 역시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이렇게 반겨주는 게 영 이해가 가질 않았지만, 좋은 게 좋은 거였다.
저번에 정령들의 심판대에 올라간 게 크지 않았을까 싶었다.
하벨의 눈이 웃음으로 감기자 아라가 참다못해 하벨에게 붙어서는 그들을 노려보았다.
[삐삐!]
하벨은 아라를 간질이며 한껏 날이 선 아라를 달랬다.
[뭘 어떻게 했는지 몰라도 요 며칠 사이에 부정한 것들이 엄청 사라졌어.]
[맞아. 우리 쪽도 거의 사라졌어!]
정령들은 재잘거리듯 기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났다.
[부정한 것들을 그렸던 인간들이 도로 지웠던데 어떻게 한 거야? 참 이상한데, 참 신기했어.]
'뒷세계 놈들이 티에라 가문과 엮이지 않으려고 아주 발악을 하네.'
하벨은 요 며칠 요란하게 움직였을 이들을 생각하니 참 우스웠다.
분명 그 일을 시키려고 한 건 맞지만, 일단 귀족들을 잡는 게 중요해 지시를 내리지 않았는데.
"협박했어. 말이 통하는 상대라서 다행이야."
[협박이든 뭐든 넌 우리의 부탁을 들어줬어.]
"아직 부정한 것들이 완전히 다 지워진 건 아니라며?"
[우리가 부탁한 건 부정한 것들을 완전히 지워달라는 게 아니라 보금자리를 되찾아달라는 말이었어.]
정령들은 정직한 하벨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조금 더 다가왔다.
[원래 어딜 가든 부정한 것들은 늘 있어서 그 정도로는 괜찮아. 저기 있는 것들은 앞으로 더 지워지겠지.]
정령들이 벌써 하벨에게 찰싹 매달리기 시작했다.
[삐이잇!]
아라가 깜짝 놀라며 하벨에게 꽉 붙었다.
"아라야. 더 붙을 때도 없어. 질투 나는 건 알겠지만, 잠깐 참아 봐."
[이상하네?]
정령 중 일부가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자 아라를 쓰다듬어주던 하벨의 손이 멈췄다.
"왜? 문제라도 생긴 거야?"
[아니. 너한테서 이상하게 좋은 냄새가 나서.]
"당연히 씻고 왔으니까. 티에라 가문에서 쓰는 비누 향이 정말 좋더라."
"오. 그거 제가 고른 겁니다. 제 안목이 제법 높지 않습니까?"
카샬은 하벨이 꺼낸 칭찬을 얼른 주워 먹었다.
"네가?"
"예. 접니다."
카샬은 우쭐거리며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순수한 칭찬에 보람을 느꼈다.
[아니야. 우리가 비누 향도 못 알아볼까 봐? 넌… 진짜 이상하네.]
"내 기준에서 너희도 이상해."
키득키득.
정령들 사이에서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축복을 내려주기 전에 하나 물을게. 저 아이는 우리를 보지 못하지만, 이번 일을 함께했어?]
"맞아. 함께했어."
"혹시 듣고 계신다면 저는 괜찮습니다. 제 몫까지 도련님께 주시면 됩니다."
카샬은 대충 무슨 상황인지 눈치채고는 먼저 말을 꺼냈다.
[아쉽네. 저 아이는 우리의 축복을 받아도 될 텐데.]
정령이 카샬에게 매달리자 그는 순간 깜짝 놀랐다.
[착하다, 착해.]
정령은 카샬을 쓰다듬어주고는 다시 하벨에게 붙었다.
[자, 이제 축복을 내려주지.]
정령의 말과 함께 교감이 시작됐다.
사아아아.
몸으로 타고 들어오는 간질거리는 느낌이 몸에 퍼지자 갑자기 파도 소리가 되어 들려왔다.
―…잃어버렸어. 우리의 소중한 바다가 사라졌다고.
절망이 섞인 목소리와 함께 푸르렀던 바다가 새카맣게 물들어가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게… 뭐야?'
하벨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몸으로 들어오는 정령들과의 교감이 저 기억 덕에 더 짙어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건데?
―안 돼. 안 된다고! 바다가 죽어버리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이어지는 격한 목소리와 바다로 뛰어드는 작은 생물체의 모습에 하벨은 그제야 정령들의 기억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바다가 오염됐을 때일까.
그러면 저 바다로 뛰어들면 안 될 텐데.
'하지만 이게 왜…….'
하벨이 멍하니 있던 사이, 아라가 '삐이'하고 울자 몸속에 들어왔던 힘이 더 커졌다.
거침없이 불순물을 녹이며 두 번째 막을 형성했다.
이어 힘이 거의 빠진 상태지만, 세 번째 막이 실보다는 조금 두껍게 모습을 드러냈다.
'세 번째 막까진 진입했다고? 이렇게 빨리?'
원래 뭐든 첫 단계가 가장 쉬운 법이나, 두 번째부터는 달랐다.
적어도 몇 번의 부탁을 들어준 뒤에나 두 번째 막이 생길 거라 판단했다.
그런데 바로 세 번째 막 앞까지 도달하다니.
라르웬도 아직 모든 힘을 다루지 못하는 걸 보면 분명히 단계별로 진입할 때 이전보다 배나 더 많은 교감이 필요한 것 같은데.
'왜 이전과 다른 거지? 기억은 왜 또 보이고?'
분명 처음 정령들에게 축복을 받았을 때는 이런 기억이나, 흘러오는 교감이 크지 않았다.
하벨은 아직 그 차이가 뭔지 알지 못했다.
[하벨.]
하벨이 정신을 차리자 가지 않고 기다렸던 정령들이 그를 불렀다.
[심심하면 언제든 찾아와도 돼. 우리랑 놀아도 되고.]
[우린 네가 마음에 들었어.]
정령이 하벨의 손가락을 꼭 쥐었다.
[티에라 가문의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네가 마음에 든 거야.]
"왜?"
[그거야 우리 마음이지.]
정령의 얼굴에 눈과 코, 그리고 입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맑게 웃는 모습에 하벨도 따라 웃었다.
"그래. 심심하면 놀러 올게."
[미안해. 처음에 되게 못되게 굴어서.]
정령은 그 작은 앞발로 하벨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참 따스했다.
찌르르.
교감이 또 느껴졌다.
[그럼, 안녕!]
정령들은 처음 그랬던 것처럼 앞발을 흔들며 무르토 마을로 날아갔다.
"하벨, 네가 진짜 마음에 들었나 봐. 정령들이 이렇게 행복해하는 건 처음 봤어."
라르웬이 덩달아 기뻐했다.
[나도야.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거지?]
루룸은 라르웬의 머리에 안착해서는 혀를 날름 내밀었다.
"난 마법사가 아니라서. 아라야."
하벨은 새롭게 생긴 힘을 알아채고는 아라를 불렀다.
그 힘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삐이잇!]
아라가 신나게 소리치며 얼른 정령수를 넣었다.
물과 독, 그리고 새로운 힘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하벨은 단번에 새로운 힘을 선택했다.
싱그러운 냄새가 코끝에 맴도는 것 같았다.
손바닥을 펼치자 조그마한 새싹이 자라났다.
'…오.'
하벨은 새싹을 건드리며 배시시 웃었다.
"식물 계통인가 본데? 참 신기한 힘부터 얻네?"
라르웬이 하벨의 손바닥에서 피어난 새싹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럼 이걸로 식물도 자라게 할 수 있습니까?"
카샬은 호기심을 드러내며 말했다.
"맞아. 이 힘으로 꽃도 피우고, 채소도 키우고, 과일도 키우고 그러더라."
"그거 완전 농사……."
라르웬이 카샬의 입을 막아버렸다.
"형님이 가진 힘 중에는 없습니까?"
"없어. 루룸이 번개의 힘이 강하고, 나도 번개의 특성을 가져서 힘을 틔우는 게 좀 힘들더라."
[뭐야. 왜 내 탓해? 언제는 찌릿찌릿한 게 좋다며?]
"그리고 나 좋다고 쫓아다니는 정령도 루룸뿐이고."
[내가? 라르웬 네가 매달렸잖아!]
"봤지?"
라르웬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라르웬!]
"어쨌든 축하해, 막내야! 물, 독, 식물까지 벌써 3개나 힘을 얻었네."
"빠른 겁니까?"
하벨이 묻자 라르웬은 황당해하며 말을 꺼냈다.
"미친 듯이 빠른 건데? 네 몸은 뭐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아내고 싶을 정도인데?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두 번째로 보니까 너 완전 스펀지잖아?"
하벨은 흘러내리는 피를 손등으로 쓱 닦으며 귀를 기울였다.
"원래 저렇게 축복을 받아도 절반쯤 그 힘을 받으면 잘 받았다고 해. 우리가 자연에서 태어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자연의 힘을 받아들이는 게 쉽진 않으니 당연한 거지."
"이 몸은 쑥쑥 잘 받아들이는데요?"
"그러니까."
라르웬은 하벨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별종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럼 이제 갑시다."
하벨은 개운한 마음으로 무르토 마을로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갑자기 옆에서 반짝이는 빛에 그대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라?'
그 빛은 아라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