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말을 건다(2)
* * *
'…왜 저래?'
하벨은 다시 얼빠진 표정을 짓는 페트리오를 보다 손뼉을 마주쳤다.
페트리오는 깜짝 놀라며 괜히 이마를 만지던 손을 내렸다.
"좀도둑. 다음에 또 해줄 수 있지?"
하벨은 페트리오에게 피를 통해 기억을 보길 요구했다.
"또… 해도 되는 겁니까?"
"이번에 실패했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잖아? 너도 여기서 머물지 않을 거고.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아래가 아니라 위를 바라봐야지."
페트리오는 하벨의 손가락을 따라 올려다보았다.
기억 속 하벨이 자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단정했다.
이 문제는 자신이 건드리면 안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기회가 또 있다면…….'
페트리오는 불타올랐다.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아니. 의욕은 좋은데 이 종이가 뭐 하는 건지 알려줘야지."
"…아, 죄송합니다."
페트리오는 힘차게 나가다 말고 민망해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이 종이는 제 마나를 넣어 만든 마법 종이라고 하는 건데, 마법사라면 누구나 만들 수 있죠."
뭔가 횡설수설하는 것 같지만, 하벨은 다시 식사를 이어나가며 얌전히 기다렸다.
"제 마나와 반응해 글자가 떠오를 겁니다. 잠시만요."
페트리오가 숨을 참자, 종이에 '신호'라고 글자가 떠오르다 잠시 뒤에 사라졌다.
"오오."
하벨은 처음 보는 물건에 마음이 흔들렸다.
"어떻게 한 거야? 이거 마법사만 되는 거야?"
"그렇습니다. 저도 딱 한 장만 만들어봤습니다."
"왜? 많이 만들면 좋은 거 아니야?"
"제 순환의 길과 이어져 있어 찢어지면 상처가 생기거든요."
"……."
하벨은 말없이 페트리오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또 목줄 하나를 드렸습니다."
하벨이 종이를 간절하게 내밀었지만, 페트리오는 키득거릴 뿐이었다.
"아마 내일 바로 출발할 것 같습니다. 그럼, 식사 맛있게 하십시오."
페트리오는 허리를 숙인 뒤에 도망치듯 방을 벗어났다.
"야, 좀도둑. 이거 가져가라고!"
애꿎은 종이가 팔랑거리자 하벨은 흔드는 걸 멈췄다.
[삐이?]
"안 돼, 아라야."
하벨은 아라가 종이를 향해 다가오자마자 다급히 주먹을 쥐었다.
'미친놈 아니야? 순환의 길이 불순물로 찔리기만 해도 아파 죽겠는데, 찢어지면 얼마나 아프겠어?'
누군가의 목숨이라고 생각하니 종이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코팅은 못 하나.'
* * *
며칠 뒤.
―2차 임무로 진입 중 두 놈이 갑자기 끼어들어 목표가 늘어 남. 첫 번째 신도가 화가 났지만, 미안한 마음으로 기다려 주길 요청. 아, 언제나 응원 바람. 1주일 내로 끝남을 예고함.
'…하. 이게 쪽지야, 문자야?'
하벨은 레디나가 보낸 쪽지를 바라보다 기가 막혔다.
"왜 그러십니까?"
날아온 새를 쓰다듬던 카샬이 물었다.
"아니. 레디나가 열이 좀 받은 모양이야."
"도련님의 목에 걸린 돈이 많은 만큼 경쟁자도 많을 겁니다. 그러고 보면 제가 참 비싼 분과 함께하네요. 대체 얼마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1주일 뒤에 레디나가 올 것 같으니 준비해 둬. 아 참, 가면은 준비됐어?"
"…아침부터 왜 이렇게 입이 살아 움직이십니까?"
카샬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제발'이라는 말이 턱밑까지 치밀어 올랐다.
"맛있는 걸 먹어서 그러나?"
하벨은 여유롭게 차를 홀짝 마시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는 정원과 어울린 하벨이 한 폭의 그림과 같다는 말을 꺼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카샬은 애간장이 탔다.
"오늘은 아니죠? 제가 오늘 일이 많습니다."
"내가 얌전히 있었는데 무슨 일이 그렇게 많대?"
"도련님의 관리를 제외해도 도련님의 방이 있는 이 D 구역의 총괄은 저입니다. 출입한 시종들 명단과 기사들을 관리하고, 청소 상태부터 시작해서……."
"카샬."
"…예, 도련님."
카샬은 하벨의 표정을 살피러 무던히 애를 썼다.
하지만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기는 어려웠다.
"기사들의 숫자가 줄어든 것 같고, 정령들의 위치도 바뀌었는데 네가 가주님께 말했어?"
하벨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예. 도련님의 의견으로 제안했습니다."
"좀도둑한테서 연락 오면 갈 거니까, 그럴 필요 없어."
"제가 무슨 맨날 아부나 떠는 줄 아십니까? 도련님의 의견이 제가 생각해도 훌륭했기에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방금 긴장한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카샬은 평소처럼 투덜거렸다.
'날씨 좋네.'
하벨은 꽃 속에 숨은 아라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백포도주 작전.
자신이 페트리오를 통해 각 수장에게 전한 작전명이었다.
무트로 마을과 아르에느 마을이 맺은 동맹의 결과물이 백포도주였으니 도리어 역으로 작용하게끔 해야 하지 않겠는가.
"혹시 그 작전을 생각하십니까?"
카샬은 차를 따르며 물었다.
"맞아."
"그렇게 맛있는 술이 값싸게 팔린다면야 난리가 나는 건 당연하겠죠. 원가격 육백만 델짜리 술이 단돈 이만 델로 팔리는데요. 전 이미 가득 사뒀습니다."
카샬은 상상만으로도 좋은지 벌써 얼큰하게 취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샀어?"
"예, 당연하죠. 이제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면 왕실 납품용이니 살 수도 없잖습니까. 팔리는 시간에 맞춰 샀는데요?"
"나한테 말했으면 좀도둑한테 따로 빼두라고 했을 텐데. 아쉽네, 아쉬워."
하벨은 대놓고 실실 웃으며 차를 후후 불었다.
"헤레스 씨가 오십니다."
달칵.
"왜? 이제 괜찮은데?"
하벨은 찻잔을 바로 내려놓으며 엉덩이를 반쯤 들었다.
독에 중독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나갔다고 얼마나 많은 소리를 들었는지 몰랐다.
카샬이 하는 잔소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 다시 보니 둘째 도련님이시네요."
카샬은 해맑게 웃었다.
하벨이 인상을 구기자 카샬의 미소는 더욱 길어졌다.
* * *
"…아, 왜 정령들이 부정한 것들을 봐도 가만히 있냐고?"
오도독.
라르웬은 쿠키를 먹으며 시선을 살짝 흘렸다.
"예. 그게 이해가 안 갑니다."
하벨은 자신의 품에 찰싹 붙은 아라가 루룸을 노려보자 손으로 슬쩍 가렸다.
정작 루룸은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이게 질투일까.
'내가 대장으로서 모범을 보였나 보네.'
하벨은 아라의 질투에 흡족했다.
"제약이 걸려있는 상태라서."
라르웬의 시선이 루룸에게로 향했다.
그 말을 꺼내도 되겠냐는 듯한 물음에 루룸이 알아서 사실을 알렸다.
[지금 '인간을 죽이지 마라'라는 명령이 유지되고 있는 상태거든.]
명령이 유지가 되고 있다니.
하벨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오만한 저들이 누군가의 명령을 듣는 게 가능한 일일까.
"누가 명령한 건데?"
[당연히 정령왕께서 하셨지.]
루룸은 우울해 보이는 얼굴로 대답했다.
'정령왕이라고……?'
―모든 정령의 지배자이자, 자연이 선택한 왕을 '정령왕'이라고 부른다라……. 언젠가 한 번 봤으면 좋겠는데.
하벨이 처음 듣는 말에 의문을 가질 무렵, 머릿속에서 하벨 티에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실 지금은 그냥 정령이라도 보고 싶어. 나도… 제발, 제발 보고 싶어.
이어진 말에 슬픔이 깊게 베여있자 하벨은 아라를 내려다보았다.
[삐이?]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으며 정원 근처에서 모여 있는 정령들과 건물 주변에서 둥둥 떠 있는 정령들, 자신을 멀리서 빤히 바라보는 정령 등 다양한 정령을 눈에 담았다.
'봐, 하벨. 또렷하진 않아도 그대도 이제 볼 수 있다. 내 덕이라고 몇 번을 외쳐도 좋다. 사실이니까.'
하벨은 곧 뿌듯함을 드러냈다.
"막내야?"
라르웬은 쿠키를 손에 쥐려다 갑자기 혼자 뿌듯해하는 모습에 하벨을 부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곧 카샬을 쳐다보며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벨. 나랑 대화 중에 이러면 곤란해.]
루룸은 말과 달리 갑자기 실실 웃었다.
하벨은 영문 모를 웃음에 잠깐 입을 다물다 다시 목소리를 냈다.
"너흴 무섭게 보는 게 싫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
[…어? 이런 질문은 처음인데.]
루룸은 재미있어하며 반응했다.
[당연히 '그럼 죽이지 않으면 괜찮은 거 아니야?'라는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게 가능했으면 이미 했을 테니까."
하벨은 차를 홀짝였다.
정령들은 정령사가 아니면 보이지 않았다.
정령사가 아닌 존재들에겐 미지의 존재이자 어쩌면 이미 두려운 존재가 아닐까 싶었다.
그런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의 공격은 얼마나 두려울까.
[맞아. 우린 사랑받고 싶지 미움을 받고 싶진 않아. 이 이상 우릴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하고.]
루룸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쑥스러운 건지, 몸을 동그랗게 말며 속닥였다.
[…우리 때문에 아이들이 죽지 않았으면 하니까.]
"뭐라고? 나도 잘 안 들리는데?"
라르웬은 씩 웃으며 루룸을 놀렸다.
루룸이 말한 아이들은 정령사인 게 분명했으니까.
[그럼 못 들은 걸로 해! 치사하네!]
루룸은 가시를 세우며 라르웬에게 돌진했다.
"따갑다, 루룸아."
[그렇다고 우리가 언제까지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야.]
루룸은 차가운 라르웬의 반응에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좋아하며 둥글게 말았던 몸을 폈다.
곧 하벨을 바라보며 천천히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의 자비도 한계가 있어. 이 이상 우리를 자극한다면…….]
파지직.
갑자기 번개 하나가 떨어지자 하벨은 차를 머금은 그대로 눈을 크게 떴다.
처음 번개를 목격했을 때처럼 강한 전율에 말을 잇지 못했다.
라르웬은 루룸의 이마에 손가락으로 튕겼다.
"조심 안 해? 하벨이 맞았으면 어쩔 뻔했어?"
[나도 그런 건 안다고.]
"웃기고 있네."
라르웬이 코웃음을 치자 루룸은 이전보다 더 기뻐하며 코까지 벌름거렸다.
[…삐이이!]
살짝 경직되어 있던 아라가 눈을 반짝이며 루룸에게 다가가자 단번에 가시를 세웠다.
[저리 가. 너한테 번개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려주고 싶지 않으니까.]
[삐이잇!]
아라가 털을 부풀리자 그제야 루룸은 반응을 보이며 말을 던졌다.
[하지만 생각은 해볼 수는 있어.]
'참 별나네.'
하벨은 성격은 물론, 저 작은 몸짓에서 어떻게 강한 힘이 나올 수 있는지가 참 신기했다.
이제 슬슬 돌아갈까 싶은 생각이 들 때쯤, 탁자에 올려둔 코팅된 종이에 '성공'이라는 글씨가 떠올랐다.
탁.
하벨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를 카샬에게 내보였다.
"신호가 왔어!"
"…망할."
카샬은 이를 갈았다.
결국, 이날이 오고 말았다.
백포도주 작전을 시작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효과가 이렇게 크게 날 줄이야.
"이번에는 나도 같이 갈 테니까, 준비해."
라르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는 곧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왜 그러십니까?"
라르웬은 주머니에서 얇고, 네모난 뭔가를 꺼내서는 확인했다.
'휴대폰을 닮았네?'
하벨은 그 물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로이스체 마을 근처에 틈의 세계가 발생.>
'로이스체 마을이라면… 바안, 아니, 왕자를 만나고 데론이라고 불리던 귀족 놈을 만난 곳인가?'
라르웬은 얼굴을 구겼다.
"얼마 전에 나타났는데 또 나타난다고? 이런 미친."
손에 든 물건을 부술 듯 힘을 세게 쥐다 하벨을 쳐다보았다.
"가시죠. 저게 더 급하잖습니까."
"…아니야. 다른 클로저가 향했네."
라르웬은 굳은 얼굴로 사라진 메시지를 보며 말했다.
"이게 뭡니까?"
"임무용 기기야. 클로저끼리만 사용하는 건데 방금 본 것처럼 주로 틈의 세계 알림과 위치 파악하는 용도, 그리고 임무 수락용으로 사용이 돼. 물론, 클로저만 사용할 수 있고."
"혹시 이걸로 연락도 됩니까?"
하벨은 임무용 기기를 가리키며 재차 물었다.
얼핏 봐도 휴대폰과 비슷했다.
[삐이!]
아라가 그 물건에 달려들자 라르웬은 가볍게 피하며 대답했다.
"가능하지. 가격대가 있긴 해도 이미 시중에 연락용 기기가 있잖아?"
"가격대가 있는 게 아니라, 엄청 비쌉니다. 레디나가 새에 쪽지를 달고 날리는 걸 보면 모르시겠습니까?"
카샬은 코웃음을 쳤다.
시중에 풀리면 뭐 하는가. 비싸서 사지도 못하는데.
"그렇지 않아도 최근에 클로저에서 연락용 기기를 하나 만들었거든. 기존 연락용 기기에서 쪽지 기능이 추가된 건데."
하벨이 눈을 반짝이자 라르웬은 모르는 척 슬쩍 말을 꺼냈다.
"이전에는 내가 사준다고 해도 필요 없다고 해서 말았는데. 혹시 이번에도 필요 없어?"
라르웬의 제안에 카샬은 당장 말했다.
"저는 필요합니다!"
"넌 네가 사. 돈도 많으면서."
"제가요?"
카샬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응했다.
티에라 가문 앞에서 웬만한 부자도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는 와중에 저런 말이라니.
"어때?"
라르웬의 이어진 제안에 하벨은 흔들렸다.
인간들이 사용하던 '스마트폰'이라는 기계가 몹시 탐났지만, 바닷속에서는 무용지물이라 사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하벨 티에라를 존중하기로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긴 머리카락도 안 자르고 있었는데.
"쓸래요."
하벨은 더는 참지 못하고 라르웬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가지고 싶었다.
간절하게.
"좋아. 그럼 나오면 줄게."
"좋습니다."
하벨은 기뻐하며 물었다.
"그럼 형님은 무슨 가면으로 하시겠습니까?"
"제가 양보해드리겠습니다. 꽃무늬 말입니다."
카샬은 얼른 꽃무늬가 박힌 가면 하나를 꺼냈다.
"아니, 난 따로 구해놨어."
라르웬은 카샬만큼이나 빠르게 가면을 꺼내 보였다.
하벨은 그대로 바짝 굳은 카샬을 비웃듯 키득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요 며칠 귀족들이 얼마나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리고 있으려나.'
네 명의 수장들이 조용히 저지른 이간질 위에 자신이 예쁘게 장식할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