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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7화 (37/415)

37화. 말을 건다

* * *

[삐, 삐잇!]

당장이라도 손가락을 벨 기세에 아라가 깜짝 놀라며 나이프를 쥔 하벨의 손가락을 물었다.

안 된다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하벨에게 이 문제는 무척 중요했다.

"자, 잠시만요, 도련님."

아라를 달래던 하벨은 페트리오까지 당황하자 덩달아 말이 빨라졌다.

"왜? 마나가 부족해서 그래? 아니면 오래 걸리는 거야? 만약 오래 걸려도 괜찮아. 기다릴 수 있어."

"마나는 괜찮습니다."

"그럼 왜?"

"제가… 도련님의 기억을 보는 겁니다."

"알고 있어. 그래서 부탁하는 건데?"

"제가 도련님의 기억을 봐도 괜찮은 겁니까?"

"…아."

하벨은 새삼 자신이 한 가지를 까먹고 있다는 걸 알았다.

"예. 제 목줄을 가지고 계셔도 그러시면 안 됩……."

"10일, 아니 2주 전 기억도 볼 수 있어? 아니면 2주 전 흔적이나. 둘 중 하나만 가능해도 괜찮아."

"예. 제 마나 양이 딱 2주 정도를 볼 수 있는 양이라 가능은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괜찮으십니까?"

"미안하긴 한데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누구한테 미안하다는 건지 몰라도 페트리오는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라 어쩔 줄 몰랐다.

"기억을 볼 수 있는 건 무척 무서운 힘입니다. 숨기고 싶었던 기억을 들추는 건 물론 제가 그 기억을 이용해 도련님을 도리어 협박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기억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마치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눈동자에 페트리오는 괜히 움츠러들었다.

"맞습니다. 가장 강렬하고, 깊었던 기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억으로 협박해도 나한테는 아무런 효과가 없어."

자신은 하벨 티에라가 아니었으니.

오히려 페트리오가 하벨 티에라의 기억을 떠벌리면 떠벌릴수록 좋았다.

"피는 어느 정도로 주면 될까?"

"적당히 주셔도 됩니다."

"너한테 돌아가는 부작용 같은 건 없어?"

"……."

페트리오는 하벨의 저 물음이 낯설어 잠깐 말을 멈췄다.

분명 무섭고 징그러운 마법일 텐데.

"없습니다. 다른 마법처럼 마나만 필요하니까요. 물론, 정신계 쪽이라 과하게 들여다보면 두통이 따르기는 합니다."

"피를 수급하는 게 가장 어려웠겠네?"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나가는 상황에 페트리오는 혼란스러워하며 대답을 이어나갔다.

"예. 그래서 병원을 매수했습니다. 누구든 들릴 수밖에 없고, 가장 자연스럽게 피를 뽑을 수 있는 곳이니까요."

"그게 좀도둑 네가 힘을 가질 수 있었던 방법이었구나."

"맞습니다. 제가 정보를 손에 쥘 방법이었죠."

하벨은 페트리오의 말을 들은 후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되도록 흉터는 남기고 싶지 않았다.

"…왜 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십니까?"

페트리오는 숨이 막힐 것만 같아 더는 참지 못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데? 이미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잖아?"

하벨은 나이프를 가볍게 흔들었다.

자신이 페트리오를 이해했기에 그가 가진 자기 혐오가 자신을 찔렀을 수도 있었다.

"이 마법으로 더러운 일을 했습니다."

"그렇겠지."

"그런데 왜 절… 이해하시려고 하십니까?"

"그러면 안 돼?"

도리어 허를 찌르는 하벨의 물음에 페트리오는 거품처럼 일어나는 자신의 끔찍함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제가 시체를 처리하면서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불신이었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친구와 애인, 가족, …심지어 자식까지 죽일 수 있을까. 그런 모습에 저도 메말라갔습니다."

"이해해."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몰라도 페트리오는 잠깐 숨만 몰아쉬었다.

방금까지 그렇게 듣기 싫었던 말인데, 포근함이 느껴졌다.

"…저한테 돈뿐이었고, 그래서 돈에 미쳤고, 돈에 제 인간성마저 갉아먹혔습니다."

"그래. 공허함을 채울 방법이었을지도 몰라."

비로소 제대로 마주한 하벨의 눈빛에 정말로 부드러운 감정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페트리오는 멋대로 움직이는 입을 막지 못했다.

"그런 제가 최근에 정말 기뻤던 일이 있었습니다."

"뭔데? 감옥에서 나온 일?"

하벨은 잠깐 나이프를 내려놓고는 식사를 이어나갔다.

눈앞에 맛있는 음식을 내버려 두고 기다리는 건 꽤 힘겨웠다.

"아뇨. 도련님께서 제게 주신 돈 말입니다. 그게 참 기뻤습니다."

하벨의 손가락이 멈췄다.

"처음 뒷세계에 갔을 때 내가 줬던 돈 말이야?"

"예. 그 돈이 맞습니다."

페트리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끄럽지만, 가슴이 뭉클거렸던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렇게 많은 돈을 벌었지만, 인간성을 버리지 않고 번 건 처음이거든요."

페트리오는 말을 마치다 말고 다시 현실을 직시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하게 했습니다."

"그럼 기왕 새로운 목숨을 받았으니까 다른 인생을 살아가 봐. 적어도 너는 네 부하한테 죽진 않았잖아?"

하벨은 씁쓸함이 섞인 미소를 지었다.

그 슬픔이 깊어 페트리오는 말을 더는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정말로 하벨이 부하들에게 죽은 사람처럼 보이질 않는가.

"피는… 조금만 주셔도 됩니다."

"다행이네. 흉터가 남지 않았으면 했거든."

하벨은 속으로 '미안'이라고 말하며 나이프로 손가락을 그었다.

[삐잇…….]

아라가 깜짝 놀라며 식탁에 내려와 하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벨은 피식거리며 아라를 건드렸다.

"아라야. 이런 걸로 안 죽어."

[삐이?]

피가 떨어지자 페트리오는 다급히 손으로 받았다.

"이제 충분하니 지혈하셔도 됩니다."

하벨은 근처에 보이는 냅킨으로 손가락을 감싸며 페트리오를 바라보았다.

그는 등을 돌려 피를 먹었고, 숨을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벨의 손가락에 간지러워 '헤헤' 웃던 아라마저 귀를 쫑긋 세웠다.

[삐이잇?]

아라가 슬쩍 날아가 페트리오를 빤히 바라보았다.

'호기심이 참 많아.'

하벨도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물로 입 안을 적셨다.

페트리오는 보다 제대로 된 기억을 떠올리려 눈을 감았다.

2주 전 기억을 떠올려야 했기에 피를 머금은 상태로 숨을 참으며 마나를 평소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실타래처럼 얽혀가던 마나가 머릿속으로 파고들자 산을 오르던 하벨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야. 저 기억은 2주 전이 아니야.'

페트리오는 마나를 한 번 더 집어넣으며 과거로 들여다보려던 차, 산을 오르던 하벨이 갑자기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쉿.

'……?'

페트리오는 순간 놀라 숨을 내뱉어버릴 뻔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숨과 마나를 유지하며 감정을 억눌렀다.

―당신은 아무것도 볼 수 없어요.

마치 자신에게 말을 걸듯 하벨은 목소리를 냈다.

분위기가 지금과 달리 차분했다.

―아니, 누구도 제 기억을 볼 수 없습니다. 당신을 위한 일이자, 그분을 위한 일입니다. …그자는 대체 어디까지 본 건지.

천천히 살핀 하벨은 몹시 지쳐 보였다.

오염된 눈이 내리는 와중에 산을 오르기 때문일까.

―당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겁니다. 아무것도.

중얼거리는 듯한 그 소리와 함께 멋대로 마법이 멈췄다.

페트리오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기억 속 존재가 말을 걸어오다니.

'기억 속에도 영혼이 존재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은 있어도 …그 말이 진짜였다니.'

"왜 그래? 문제라도 생겼어?"

페트리오가 갑자기 넋을 놓자 하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 다가갔다.

"…보이질 않습니다."

페트리오는 기억 속 하벨이 꺼낸 말을 의식하며 사실을 알렸다.

하벨이 눈밭을 뒹굴고 난 뒤에 기억을 잃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이 보려던 기억이 하벨이 원해서 지워버린 거라면 어쩔 셈인가.

'그게 물의 저주와 다른 병 때문이라면.'

페트리오는 피를 토한 하벨을 떠올리며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문제라 판단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어진 하벨의 재촉에 페트리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몰랐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으니.

"제 마법은 피를 매개체로 해서 영혼에 잠재된 기억과 흔적을 읽는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고마워, 좀도둑."

하벨은 고생한 페트리오를 향해 웃어주었다.

아쉽지만, 영혼이 바뀌었으니 그가 기억을 읽지 못하는 건 당연할지도 몰랐다.

'진짜 아쉽네.'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미안해할 필요 없으니까 고개 숙이지 마."

"그래도……."

"나는 네 주인 같은 게 아니야. 나는 네 복수를 도와주고, 너는 내 부탁을 들어주는 관계지. 물론, 내가 일방적으로 유리하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이건 날 위해서 가진 목줄이니 네가 물지만 않으면 써먹을 일은 없어."

자신을 위한 일이며 동시에 하벨 티에라가 원래 몸으로 돌아왔을 때를 대비할 수 있는 보험 같은 존재였다.

페트리오는 하벨이 말하는 관계가 대체 무슨 관계인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내 일은 도와주되, 너 하고 싶은 대로 살라는 말이야."

"제가 원하는 거요?"

"그래. 너는 귀족이고, 같은 귀족 놈들 뒤치다꺼리해주기 전에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었을 거 아니야?"

"도련님은… 하고 계십니까?"

"물론이지."

하벨은 즐겁게 웃었다.

"하루하루가 행복한데? 아침에 눈을 뜨는 게 이렇게 즐거울 줄은 몰랐어."

지겹도록 반복되던 삶이 비로소 달리 보였다.

용왕이었을 때도 자신의 노력으로 분명 많은 게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렇게 짙은 후회와 미련이 남았기에 지금 페트리오가 꺼내는 진지한 대화도, 둥둥 날아다니다 자신과 눈이 맞으면 '헤헤'하며 웃어주는 아라도, 먹기만 해도 행복한 음식마저 다 소중했다.

"그럼 도련님께 그 행복을 배우고 싶습니다."

"내가 분명히 말했……."

"그게 지금 제가 바라는 일이자, 하고 싶은 일입니다."

페트리오는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너도 카샬 욕할 자격이 없네. 아주 치졸해."

"죄송합니다. 제가 원래 정보로 먹고살아서 치졸함이 몸에 밴 상태라 잘 떨어지지 않습니다."

"가면은?"

"별님이 가면이라면 가지고 있습니다."

"방금 말은 취소. 넌 카샬과 달리 사람이 됐네. 걔는 부서트렸다고 하는데."

그렇게 예쁜 가면을.

하벨은 볼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제 적성에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집사 공부도 한 번 해보겠습니다."

페트리오가 키득거리자 하벨도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참 좋은 생각이야. 카샬의 경쟁자가 늘면 나야 좋지."

카샬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좋아할지 눈에 훤했다.

"좀도둑, 혹시 돈 필요해?"

"예. 필요합니다. 다 털렸습니다."

"다시 시작해보게?"

"아까 도련님께서 하신, 제가 부하들에게 죽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어쩌면… 제가 놓은 끈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럼 계약서 한 장은 써야지. 그렇지 않아?"

하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수익에 10% 이상 보장합니다."

"더 줘봐. 내게 아니라서 그래."

"15%요. 더는 못 드립니다. 저도 먹고살아야 하잖습니까?"

"이 돈 먹고 튀면 쫓아갈 거야."

"만약에… 실패하면 집사로 받아주실 셈입니까?"

"카샬만큼 잘하면 생각해볼게."

"어렵네요. 카샬이 얼마나 잘하는지는 봐서 자신도 없고요."

페트리오는 이제 농담은 접어두고 웃음기를 살짝 지우며 말했다.

"바이온 곁에서 감시하며 보고드리겠습니다."

"괜찮겠어?"

"티에라 가문 근처 뒷세계는 티에라 가문 덕에 그렇게 위험하지 않아 괜찮습니다. 게다가 저도 그냥은 맨몸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래. 죽지는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

하벨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보석을 꺼내 페트리오에게 넘겼다.

"수익에 15% 부탁해."

"예.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페트리오의 목소리에 다시 웃음기가 가득 섞여 있었다.

"받으십시오."

페트리오가 주머니에서 엄지만 한 종이를 꺼내자 아라가 덥석 물었다.

아사삭.

페트리오는 순간 깜짝 놀랐다.

덩달아 하벨도 움찔거렸다.

"…뭔가 제 손을 문 것 같은데, 혹시 정령님입니까?"

"아팠어?"

하벨은 놀란 마음 반, 신기한 마음 반이 뒤섞여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정령이 보이지 않으면 당연히 정령을 만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좀 따끔합니다. 이빨이었습니까?"

"맞아. 내가 사과할게."

"아닙니다.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정령님과 닿다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페트리오는 아라에게 물린 손가락을 보며 기뻐했다.

"아라야."

[삐이?]

아라는 입을 오므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척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잘못했으면 사과해야지."

[삐잇.]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그렇게 순진한 표정을 짓자 하벨이 인상을 찌푸렸다.

[…삐잇!]

아라는 털을 부풀리며 입을 삐죽 내밀다 페트리오의 이마에 힘차게 몸을 부딪쳤다.

"……!"

페트리오는 또 깜짝 놀랐다.

인형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푹신한 감각이 이마에 닿았다.

하벨은 갑자기 얼빠진 페트리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가 뒤늦게 반응하자 하벨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아라가 사과한대. 받아줄 수 있어?"

"무, 물론입니다. 아니, 당연히 받아드려야죠."

페트리오는 자신의 이마를 매만지며 처음 느껴보는 이 보드라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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