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날마다 찾아오는 게 아닌데(3)
* * *
"좀도둑을 불러줘."
하벨이 태연하게 말하자 카샬의 입꼬리가 치미는 화로 바르르 떨렸다.
"잘 지내는 좀도둑은 왜 부르십니까?"
설마.
지금 그 꽃 가면을 써야 한다는 말은 아니겠지.
카샬은 불안함으로 가슴이 크게 뛰었다.
"확인할 게 있어."
페트리오가 피를 통해 기억을 확인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하벨 티에라의 피를 준다면 대체 그가 뭐 때문에 자신을 이 몸으로 불렀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헤레스가 바뀐 몸을 되돌릴 방법을 아는 다른 마법사에게 연락한다고는 했지만, 그동안 가만히 놀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왜 이렇게 놀라? 좀도둑이랑 아직도 사이가 나빠?"
"그건 뭐어… 어쨌든, 알겠습니다. 곧 불러드리겠습니다."
카샬은 가려다 말고 재차 물었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습니까? 속이 이상하시다거나……."
"들어올 때 동전 소리가 들리더라. 되게 행복해 보였고."
"…들으셨습니까?"
"어디에서 받았어?"
하벨의 미소가 길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가주님께서 주셨습니다."
"카샬."
"예, 도련님."
"봐봐, 내가 움직이니까 네 주머니가 풍족해지잖아?"
하벨은 식사 전 카샬이 퍼부었던 잔소리를 의식하며 그를 슬쩍 설득했다.
자신이 움직이면 추가금이 떨어진다고.
'나하고 같이 움직여 놓고.'
이제 와서 자신한테 무모한 행동 하지 마라, 몸이 아프면 쉬어라, 충동적으로 움직이지 말라는 등 그런 말을 하면 소용이 있겠는가.
"전 집사입니다. 돈에 현혹될 정도로 나약하진 않습니다."
"거짓말쟁이. 그럼 왜 받았어?"
"도련님께서는 땅에 보석이 굴러다녀도 줍지 않으실 겁니까?"
"안 주울 것 같은데?"
빈정거림도, 장난기도 안 섞인 그 대답에 카샬은 속이 뜨거워졌다.
'망할, 티에라.'
"화났어?"
하벨은 샐러드를 포크로 찌르다 말고 카샬의 눈이 떠질 듯 말 듯해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자신이 뭘 했는지 몰라도 화가 났다니, 뿌듯했다.
'설마 보석 때문은 아니지?'
가짜 보석과 진짜 보석이 무슨 차이인지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운데 길거리에 뭐가 떨어진 들 줍겠는가.
애초에 길거리에 있는 건 함부로 주우면 안 된다고 알려준 건 카샬이였다.
"제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죽어도 백기를 들기 싫었기에 카샬은 최선을 다해 웃었다.
"그래서 놈이 배후에 왕자가 있다고 밝혔다고?"
하벨은 카샬이 떠나기 전에 자신이 물었던 질문을 떠올리며 재차 말을 꺼냈다.
"예. 그렇습니다."
페트리오와 독 사건을 연달아 터트리며 티에라 가문의 분노를 어디로 향하게 하려는지가 이제야 드러났다.
'왕실까지 손도 안 대고 무너트리겠다?'
하벨은 샐러드를 우물거리며 날이 한껏 오른 포크로 고기를 찍었다.
욕심이 너무 과했다.
대체 뭘 믿고 저러는 건지 의문이 들 정도로.
"카샬. 티에라 가문과 왕실의 관계는 어때?"
"음……."
[삐이?]
카샬이 고민하는 찰나 하벨 머리 위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아라는 눈을 살짝 뜨며 문을 바라보았다.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분께 물어보면 되겠네요."
똑똑!
거친 노크 소리가 들리자마자 문이 바로 열렸다.
어디에서 뒹굴다 왔는지 몰라도 라르웬은 지저분한 옷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둘째 도련님. 적어도 씻고 오시면 안 됩니까? 청소하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카샬이 빈정거렸지만, 라르웬의 귀에는 닿지 않는 듯했다.
"…막내야, 막내야."
라르웬의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 있었다.
"가주님 허락은 받았습니다. 절대로 가출은 아닙니다."
하벨은 라르웬이 주먹을 들기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
"아니, 왜 그 몸으로 그런 무모한 짓을 한 건데, 하벨? 나하고 같이 갔으면 됐잖아."
같이 가면 된다는 말에 하벨은 일단 머릿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나저나 어딜 갔다 오는 길입니까?"
라르웬은 그제야 자신의 몰골을 바라보며 깜짝 놀라서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룬델에게 보고하다 들은 하벨의 소식에 열이 올라 앞뒤 가리지 않고 오고 말았다.
뒷세계를 털고 왔다니.
애초에 뒷세계는 상종해서도 안 되는 곳이었다.
카샬이 있어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곳에서 죽으면 시체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악랄한 놈들이 가득했다.
라르웬은 다시금 치밀어 오르는 화를 삼키며 대답했다.
"틈의 세계가 열렸다는 말에 다급히 닫고 오는 길이야."
"왜 형님이 가시는 겁니까? 정령사는 그런 일도 하는 겁니까?"
"……아."
라르웬은 그제야 자신을 제대로 소개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카샬이 나가라며 대놓고 눈치를 줬지만, 라르웬은 꼼짝도 하질 않았다.
"나는 틈의 세계를 전문적으로 닫고 다니는 '클로저'에 소속되어 있어."
라르웬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반지 하나를 꺼냈다.
보석이 박혀 있어야 할 곳에 문으로 된 조각이 새겨 있었다.
"틈의 세계를 닫는 단체라고요?"
"그래. 모든 나라가 공인한 단체고 꽤 오래전에 만들어진 곳이야. 틈의 세계가 더는 열리지 않을 때까지 활동하기로 약속된 단체이기도 해."
"위험한 만큼 월급이 셉니다."
카샬이 덧붙여주었다.
돈을 좋아하는 카샬이라면 당연히 했을 텐데.
하벨은 의외라고 생각하며 물었다.
"그럼 너도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니야? 집사는 겸직이 불가능해?"
"그건 아니지만, 둘 다 하기엔 제 몸이 모자랍니다. 게다가 전 빨리 죽고 싶지 않습니다."
"제안이야 나도 엄청 많이 해봤지. 그런데 봤지? 저런 식으로 말도 안 되게 거절하더라고."
라르웬은 입맛을 다시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럼 나도 할 수 있는……."
"안 돼!"
"안 됩니다!"
하벨이 묻자 라르웬과 카샬이 동시에 소리쳤다.
아라는 깜짝 놀라 잠에서 깼고, 하벨은 눈을 깜박거렸다.
"…놀래라. 조곤조곤 말해도 알아듣습니다. 왜 소리까지 지릅니까?"
[삐이잇!]
아라도 항의하며 소리쳤다.
"여긴 쳐다도 보지 마. 발을 디딜 생각조차도 하지 말고. 이건 뒷세계와 달리 내가 화내는 일에서 끝나지 않을 거다."
라르웬은 낯선 얼굴을 하며 강하게 경고했다.
"그렇게 위험한 걸 아는데 형님은 왜 하는 겁니까?"
라르웬은 자신에게 달려든 아라를 쓰다듬어주며 하벨을 복잡하게 바라보았다.
"…찾아야 할 놈이 있어."
누굴 찾는다는 건지 몰라도 망설이다 꺼낸 그 말에 하벨은 더 캐지 않았다.
라르웬은 적이 아니었고, 그의 얼굴이 번지는 깊은 슬픔을 건드리고 싶지도 않았다.
"어쨌든, 하벨."
"예, 형님."
"도련님께서는 무사히 돌아오셨고, 저도 한소리 했고, 무엇보다 잘 해내셨습니다. 그러니 그만하시죠, 둘째 도련님."
카샬은 라르웬을 말렸다.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리는데 라르웬은 지금 개보다 못한 짓을 하고 있었다.
"네가 같이 있었다며? 하벨이 지금 상태가 어떤 줄 알고 말리지는 못할망정 같이 가? 같이?"
"또 이렇게 불똥이 튈 줄 알았습니다. 보셨죠, 도련님? 맨날 저만 이렇게 혼쭐이 납니다. 가주님한테 깨지고, 둘째 도련님한테도 깨지고, 아가씨께서 계셨으면 또 깨지겠네요."
카샬은 하벨을 원망했다.
"…하벨. 마음 같아서는 진짜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데, 몸은 어때?"
라르웬은 으르렁거리다가 말고 어깨에 힘을 뺐다.
이제야 링거가 눈에 들어왔다.
앞뒤가 안 맞는 말에 하벨은 수프를 먹으려다 말고 멈췄다.
"화가 나신 겁니까? 걱정하는 겁니까?"
"둘 다. 진짜 딱 한 대만 쥐어박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다 상태가 나빠질까 걱정되고. 하여튼 막내야, 이 말썽꾸러기야, 제발 좀……."
"지금 귀족들이 티에라 가문을 공격하려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가주님께서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네 이야기만 듣고 열 받아서 뛰쳐나왔는데, 귀족들이 우릴 공격한다고?"
라르웬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어쩌다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뒷세계 놈들이 필요했던 겁니다. 귀족들을 서로 이간질하려면 놈들만 한 이들이 없잖습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진짜 우리를 공격한다고?"
"예. 좀도둑 일과 독 사건에 더해 부정한 것들을 이용해 정령들이 오지 못하게 막은 걸 보면 분명합니다."
"병신들이네."
"오."
하벨은 귀를 쫑긋 세웠고, 라르웬은 대놓고 귀족들을 비웃었다.
"우리가 시끄러운 걸 싫어했을 뿐이지, 힘이 없어서 가만히 있던 게 아니야. 만약 힘이 없다면 우릴 탐내 하던 놈들한테 진작 먹혔겠지."
하벨은 말없이 하벨 티에라를 가리켰다.
그렇게 대단하다면 이 작은 아이 하나 지키지 못하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너만은 예외야. 정령사의 힘은 정령한테서 나오니까."
라르웬은 민망한 듯이 시선을 흘렸다.
"어쨌든 가장 병신같은 건 근시안밖에 없는 놈들의 머리통이야."
"맞는 말씀입니다."
카샬은 라르웬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라르웬이 찌푸린 인상은 좀처럼 펴지질 않았다.
"형님."
하벨이 부르자 라르웬은 인상을 피려고 애를 쓰며 대답했다.
"왜?"
"왕실과 티에라 가문은 어떤 사이입니까?"
"그건 갑자기 왜 물어?"
"독 사건과 관련해 붙잡은 놈들이 배후로 왕실을 지목했다고 합니다."
"…이 망할 놈들. 진짜 병신들이 맞네."
라르웬은 코웃음을 쳤다.
왕실과 티에라 가문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모양인데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왕실을 남몰래 지원하는 건 우리야. 그런 우리한테 왕실이 칼을 들이밀었다고? 그런 개소리는 세 살짜리도 안 믿겠다."
"에이, 세 살이라면 믿지 않을까 싶네요. 내가 만났던 어여쁜 아이는 형님이나 카샬과 달리 용왕이라는 사실을 믿어줬습니다."
하벨은 볼때기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던 아이의 웃음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건 맞죠. 순수하지 못한 쪽은 둘째 도련님이 아닐까 싶습니다."
라르웬이 노려보자 카샬은 다급히 입을 다물며 허리를 숙였다.
"그럼, 좀도둑을 데려오겠습니다."
라르웬의 시선은 카샬이 밖으로 나갈 때까지 따라붙다 문이 닫히는 걸 보고는 다시 하벨로 옮겼다.
"좀도둑이라면 페트리오 비발체라고 하는 놈 말하는 거지?"
"예. 맞습니다."
"신뢰해?"
"반쯤요."
"어떤 놈인지 한 번 보고 가고 싶은데."
"또 틈의 세계를 닫으러 갑니까? 생각보다 자주 열리네요."
"아니. 목욕해야지."
라르웬은 자신의 몸을 재차 살피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루룸은 어디 갔습니까?"
하벨이 루룸을 찾자 라르웬 근처를 맴돌던 아라가 깜짝 놀라며 하벨에게 달라붙었다.
[삐이이! 삣!]
아라가 갑자기 털을 부풀리며 화를 냈다.
"이 냄새가 싫어서 세렌한테 놀러 갔겠지. 아라가 좀 특이한 편이고. 그나저나 막내야."
"예."
"너 혹시, 왕실하고 얽힐 생각이야?"
하벨이 그 물음에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귀족들은 그렇다고 쳐도 왕실하고 얽히면… 으음."
"기왕 저렇게 거짓 자백을 했으니 이용당해 줘야죠. 이 사실을 따지러 왕실에 갈 겁니다. 귀족들도 그러면 안심하겠죠?"
"따지러… 간다고?"
라르웬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재차 물었다.
"나는요. 내가 머무는 이곳 주변에 날 노리는 놈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그것만으로 답답합니다. 사이좋게 동서남북에 있는 귀족끼리 손을 잡는 모습은 죽어도 못 볼 것 같네요."
하벨은 여전히 얼빠진 표정을 한 라르웬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아, 물론 가주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내 마음대로 해도 된대요."
'…이것 참, 어떤 말을 해줘야 할지 곤란하네.'
자아의 혼동으로 다른 사람이 된 건 맞지만, 그래도 너무 다른 게 아닌가.
"어디까지 가려고?"
라르웬은 하벨의 끝이 알고 싶었다.
"원래 몸을 돌려줄 때까지 하고 싶은 대로 할 겁니다."
하벨은 실실 웃었다.
'병이… 나을 때까지인가?'
라르웬은 지금 하벨도 마음에 들었다.
위험한 행동을 저지르는 것만 뺀다면 주어진 능력 안에서 여러 가지를 해결하는 모습은 정말로 기특했으니까.
"아버지도 한 고집하시는데 네 고집은 더 하네. …아. 너 혹시 정체를 드러냈어?"
"아뇨. 하루 안에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가면단'이라는 이름으로 가면을 써서 접근했습니다. 나중에 음성 변조기도 사용했고요."
똑똑.
"들어와."
하벨의 말이 떨어지자 카샬이 페트리오와 함께 들어왔다.
"가면단…? 진짜 최악이네. 누가 지은 거야?"
라르웬의 물음에 카샬이 대답했다.
"도련님께서 친히 지으셨죠."
"아, 최악, 그러니까 최고의 악당 같은 느낌이 넘실거리네. 아주 악랄한 이름이라 마음에 들어."
라르웬은 다급히 말을 바꾸며 하벨을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역시 형님이 뭘 좀 아십니다. 되게 있어 보이는 이름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하나 더 있습니다."
"도, 도련님!"
카샬이 기겁했지만, 하벨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난 달님, 좀도둑은 별님, 카샬은… 꽃, 큽, 꽃님이……."
"푸하하하!"
웃음을 간신히 참은 하벨과 달리 라르웬은 대놓고 카샬을 비웃었다.
"꼬, 꽃님이? 네가 꽃님이라고?"
"이제 가시죠. 지나가다 둘째 도련님의 시종을 만나 욕조에 물을 받으라고 알려줬으니까요. 도련님께서도 식사를 해야 하고 저도 바쁩니다."
"네가, 푸핫, 네가… 꽃님이……."
라르웬은 카샬이 멱살을 잡듯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도 그저 웃기 바빠 얌전히 끌려 가주었다.
"막내야."
문밖으로 나가기 전에 라르웬이 하벨을 부르며 엄지를 치켜 올렸다.
"넌 최고다."
"알죠. 난 최곱니다."
하벨 역시 엄지를 치켜 올려 보였다.
"부르셨습니까?"
문이 닫힌 후에야 페트리오가 말을 꺼냈다.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지만, '꽃님'이라는 말에 웃음을 간신히 참느라 애를 썼다.
"얼굴이 좋아졌네."
"도련님 덕분입니다. 진심으로요."
"피를 통해 기억을 보는 거야, 아니면 다른 걸 보는 거야?"
"기억과 흔적, 이 두 개를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동시에 볼 수는 없고, 충분한 마나도 필요합니다."
"그럼 이 몸의 기억을 봐줘. 피가 얼마나 필요해? 아쉽지만, 많이는 못 줘."
하벨은 카샬이 여분으로 놔둔 나이프를 쥐었다.
이런 기회는 날마다 찾아오는 게 아니니 당연히 손에 쥐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