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날마다 찾아오는 게 아닌데(2)
* * *
기회.
짙어가는 절망을 떨쳐내기에 아주 좋은 말이었다.
"티에라 가문의 분노가 자네들에게 튀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솔직히 잘못한 건 귀족인데 말이야."
하벨이 던진 말은 금세 파문을 일으켰다.
마치 누구도 알아주지 못한 저들의 억울함을 이해해주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자네들이 왜 귀족들에게 또 이용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네."
'또'라는 말에 강하게 힘을 주자 저들은 잠재웠던 분노를 피어 올렸다.
특히 귀족과 악감정이 강해 보였던 헤콘은 아예 이를 갈았다.
"또…!"
헤콘이 화를 못 이겨 부들부들 떨자 하벨은 느긋하게 구경했다.
귀족을 향한 저들의 불만은 이미 장작처럼 차곡차곡 쌓인 상태였다.
자신은 성냥을 던졌다. 이제 잘 타오르길 바라봐야지.
"또 우리를 써먹고 버리려는 게 틀림없소. 언제나 그놈들은 그랬소. 우릴 자신들의 그림자라고 생각하지."
"아니. 맞는 말이긴 하잖아? 우리들은 귀족 나리들께서 누시는 똥이나 받아먹는 존재가 아니었어?"
셴은 코웃음을 치며 바이온에게 화살표를 돌렸다.
"특히 너, 바이온. 처먹은 거로는 여기서 네가 제일 많잖아?"
"헛소리하지 마라. …아, 아니지. 하긴 콩고물이나 주워 먹는 놈이니 큰물에 놀아봤어야 뭘 알겠지."
"이 새끼가 지금……."
"그래서 뭘 하면 됩니까?"
페트리오가 저들의 약점을 꺼내려던 차, 도미논이 물었다.
"저는 당신이 말한 '귀족 대신 땅을 다스리고 싶지 않냐'는 말에 홀렸거든요."
그 누구도 자신에게 꺼낸 적 없던 말이었다.
귀족에게 빌붙어 사는 기생충 취급이나 받았으면 받았지, 단 한 번이라도 사람대접을 받은 적이 있던가?
물론 이 길을 선택한 건 자신이나, 어릴 적 모든 걸 다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던 그때의 기분을 느끼게 해줘 마음이 흔들린 건 사실이니.
"자네는 귀족과 티에라 가문 중 누가 더 두려운가?"
하벨은 다시 이야기가 본 주제를 찾자 만족스러워하며 도미논에게 물었다.
"당연히 티에라 가문입니다. 셴 저놈 말대로 우리는 그 새끼들의 뒤나 빨던 놈이라 티에라 가문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가지고 싶어하는지, 질투하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나도 알아챈 정보를 티에라 가문은 모를 거라 생각하나?"
"제일 병신같은 질문이었네요."
도미논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티에라 가문이 모를 리가 있겠는가.
자신들은 지금 절벽과 절벽 사이를 잇는 다리 한가운데 있는 셈이었다.
"같은 편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지."
하벨은 자연스럽게 덫을 놓았다.
"설마 저희더러 귀족들을 치고, 그 땅을 가지란 말입니까?"
달칵.
바이온이 먼저 덫에 걸렸다.
얼토당토않은 말에 눈에 힘을 가득 주었다.
그게 가능했다면 지금 이러고 살진 않겠지. 모욕을 받으면서도 벌벌 기진 않았겠지.
"아니. 귀족들은 서로를 칠 걸세. 자네들은 지금까지 그랬듯 뒤에서 조용히 분란을 만들면 그뿐이네. 방향이 아래가 아니라 위를 향한다는 게 다르지만."
하벨은 귀족들이 티에라 가문에 분란을 일으키려 사용한 방법에 덧붙여 돌려줄 셈이었다.
"귀족들끼리 싸울 때, 주인 없는 그 땅을 차지하면 된다네."
"그러니까… 당신이 우리의 주인이 되겠다는 말이오?"
헤콘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닐세. 자네들이 뿌리를 내린 땅의 주인은 자네들일세. 하지만 자네들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선을 넘는 건 허용하지 않을 셈이라네."
"아니, 네 말을 어떻게 믿는데?"
셴은 갑자기 나타나 자신들을 한자리에 모을 뿐만 아니라 귀족을 엎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자진하는 저 남자가 몹시 수상했다.
"죽이는 것만큼 편한 일이 없는데 굳이 왜 이렇게 번거롭게 하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은은하게 퍼져가는 하벨의 위압에 셴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 남자에게 돌아갈 이득이 없질 않은가.
"나도 수상한 건 마찬가지요."
헤콘은 셴의 의견에 동의 표를 던졌다.
"일이 잘 풀려 정말 그렇게 된다 한들, 당신이 받을 건 아무것도 없소. 그럼 대체 왜 이 같은 일을 벌인단 말이오?"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 여기 자네들의 비밀을 손에 쥔 별님이가 감시자 겸 자네들의 상관이 될 예정이네. 내가 아니라. 그러니까, 자네들이 말하는 주인인 셈이지."
하벨이 페트리오를 가리키자 그는 깜짝 놀랐다.
진짜로 하벨은 자신에게 복수의 기회를 줄 셈이었다.
"그런데 나는 별님의 목줄을 쥐고 있네. 물론, 아까 말했듯 주인 노릇을 할 생각은 없지만, 얼마든지 자네들을 갈아치울 수는 있네. 감시자라고 봐주면 편할 걸세."
자유이되, 제한이 있는 자유.
그 어감이 불쾌한 건지, 페트리오가 불편한 건지 수장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달님. 저놈들이 제 주제를 모르는데요?"
카샬은 그 모습을 대놓고 비웃었다.
"지금 목이 있는 걸 고맙다고 여기지 않는 것도 모자라, 밑바닥에 구르던 놈을 위까지 끌어올려 주겠다는데도 불만을 토로하다니. 벌써 한계가 보이잖습니까? 그냥 여기서 정리하시죠."
"그래서야."
하벨은 오히려 카샬의 말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렇게 밑바닥이 보이니까 더 편하잖아?"
머리도 잘 굴리고, 속도 모를 귀족들보다 저들을 상대하는 게 훨씬 편했다.
"오늘일지, 내일일지 모르겠지만, 귀족들이 자네들을 부를 걸세. 마법사를 숨겨달라는 부탁일 수도 있고, 다른 부탁을 할 수도 있는데 귀족한테 죽을지, 티에라 가문 손에 죽을지, 아니면 위를 노려볼지 잘 생각하게."
하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협박으로 가득 칠한 말을 꺼내 선택지를 하나로 좁혔다.
"아 참."
밖으로 나가려다 셴에게 손을 내밀었다.
"목줄 내놔야지 않겠나. 자네한테만 받지 않는 건 공평하지 않아서."
"……."
"싫으면 그 열쇠인지 뭔지 가져가면 될 테니 걱정하지 말게."
마치 열쇠를 맡긴 사람처럼 뻔뻔한 말투에 셴은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풀어줬다.
"에이씨……."
하벨은 목걸이 속에 숨은 열쇠를 확인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침묵이 흘렀다.
"…이제 어떻게 할 건데? 저 말을 믿고 한번 목숨을 걸어봐야겠어? 아니면 저놈 뒤를 칠까?"
목걸이를 뺏긴 셴이 슬쩍 수장들의 의중을 떠봤다.
"이 병신아. 우린 죄다 목줄이 걸렸어. 귀족들도 못 한 걸 저자는 해냈다고. 머리가 달렸으면 생각 좀 해라."
도미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님이 수장을 꿇릴 때부터 알아봤다.
수장이 아니라, 달 문양이 박힌 가면을 쓴 남자 쪽이 내려주는 줄이 더 튼튼하고 굵다는 걸.
"자네들이 싫긴 하지만, 쓸데없이 머리를 굴려 목이 베이는 일은 없었으면 하네. 이건 진심일세."
헤콘은 경고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저 남자는 결코 귀족이 아니라는 걸.
그럼 충분했다.
방에 셴과 바이온만이 남자 셴이 물었다.
"티에라 가문에서 보낸 것 같지 않아?"
"넌 대가리 좀 굴리라니까."
바이온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티에라 가문에서 보냈으면 우린 다 모가지야, 병신아."
"하긴. 그건 맞지. 아… 미치겠네."
셴은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기댔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아니, 생각해보니 다 저 바이온 놈 때문이 아닌가.
바이온이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키자 셴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뭐?"
"꺼지라고."
"망할 새끼. 잘 처먹고 뒈져라!"
셴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그래서 도련님이 가주님께 범인을 찾는 척 연기를 해주시길 바라셨습니다."
카샬은 룬델의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채로 보고했다.
침묵이 흘렀다.
룬델은 밤중에 하벨이 저지른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하룻밤에 이 일을 해낸 걸 자랑스러워해야 할지.
뭣도 모르고 뒷세계에 발을 내디딘 무모함을 혼내야 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그 노련함에 놀라야 하는 건지.
밀려오는 감정이 복잡했다.
"하벨은 어떻더냐?"
"잠이 드셨습니다. 열이 높아져 해열제를 맞고 있지만, 곧 괜찮아지실 겁니다."
"하벨이 건넨 놈들이 입을 열었다."
"누가 그랬다고 합니까?"
"왕자가 보냈다고 하더구나."
룬델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살기를 드러냈다.
"이간질해도 하필 왕실이랑 이간질이라니."
겉으로 드러난 에르티안 왕실과 티에라 가문은 접점이 없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에르티안과 티에라 가문 사이에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강한 접점이 존재했다.
왕실이 무너지지 않게 뒤에서 몰래 떠받들고 있는 존재가 바로 티에라 가문이었으니.
―룬델 공. 부탁이 있네. 어쩌면 내 마지막 부탁일지도 몰라.
저번 왕의 탄생일에서 룬델은 왕에게 부탁을 하나 받고 말았다.
―이제 곧 바안, 그 아이의 즉위식을 열 거라네. 하지만 눈치 빠른 귀족 놈들이 그 아이를 먼저 허수아비로 만들겠지. 내 부탁할 사람은 그대밖에 없네. 염치없다는 걸 알지만, 그대가… 그 아이를 도와주게.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하벨은 이미 바안을 만나고야 말았다.
룬델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대로 도련님께 전하겠습니다."
카샬이 허리를 구부려 이만 물러나려 할 때 룬델이 그를 불렀다.
"카샬."
"예, 가주님."
"페트리오 비발체는 어떻더냐?"
"믿을 만한지 아닌지는 조금 더 지켜보겠습니다. 하지만 다름 아닌 마법사라 쓸 만합니다."
"…마법사?"
"예. 피를 통해 정보를 빼내는 마법을 부렸습니다. 어쨌든, 전투 능력은 아닙니다."
"그래. 계속 지켜봐 주게."
"가주님. 아시다시피 전 도련님의 사람입니다. 도련님께서 숨기라고 하시면 숨길 수밖에 없으니 부디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카샬은 하벨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기에 룬델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다.
"알고 있단다. 그러니 내 너를 이리도 믿는 게 아니더냐?"
룬델은 화를 내기보다는 활짝 웃었다.
이 넓은 티에라 가문에서 진정한 하벨의 편은 카샬뿐일지도 몰랐다.
"카샬. 마지막으로 물으마."
룬델은 돈주머니를 꺼내며 말을 꺼냈다.
"저번에 화내신 게 민망하셔서 이러는 겁니까? 이건 도련님과 상의되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카샬의 손은 돈주머니를 잡고 있었다.
룬델은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다 가까스로 진정했다.
"그래. 내 저번에 미안한 것도 있고 하벨을 무사히 데리고 와줘서 고맙다는 뜻이기도 하며 고용주로서 자네에게 줘야 할 추가 임금이기도 하지."
"언제나 그렇듯 감사합니다. 그럼 뭐든 물어보십시오. 늘 성실한 집사, 이 카샬이 무엇이든 대답하겠습니다."
"네가 본 하벨은 어떤 사람이더냐?"
싱글벙글 웃던 카샬은 잠깐 행동을 멈췄다.
"…으음, 음식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자유가 억압된, 사기꾼?"
카샬은 자신이 말하면서도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은 표정이었다.
당연히 룬델 역시 그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해가 힘드신 건 압니다. 저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상태가 나쁘더냐?"
"아뇨. 뭐라고 아직 단정 짓기엔 이른 듯합니다. 하지만 뒷세계 수장 4명을 사로잡으시는 모습에 사기꾼 기질이 있다는 걸 확신했습니다."
카샬은 하벨이 도둑이 될 생각도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하려다 굳어지는 룬델의 표정에 그만뒀다.
"하벨에게 집안 청소는 깔끔히 해둘 테니 이제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두렴."
하벨 덕에 내부에 있는 쓰레기들은 이제 다 정리될 참이었다.
"아, 가주님."
카샬은 돌아가기 전에 떠오른 기억에 룬델을 불렀다.
"도련님께서 정령들에게 수상한 자나 행동을 하는 경우로 한정 짓지 말고 저나 시종들처럼 구역을 지정한 후에 교대로 돌아가면서 일과를 보고하는 쪽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시종처럼이라니……."
룬델은 자신의 손가락을 매만졌다.
* * *
"…왕자가 그랬다고 자백했다고?"
하벨은 고기를 우물우물하며 물었다.
"잘 넘어가십니까?"
카샬은 조심스레 물었다.
하벨이 눈뜨자마자 배고프다는 말에 카샬은 긴장하며 준비했다.
요리장이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계속 지켜보았고, 혹여 독이 있는지 먹어보았고, 헤레스까지 더해 마지막 확인까지 끝마쳤다.
그래도 한 번 당한 독 때문에 무서울 법한데 걱정이 웃음거리가 될 정도로 너무 잘 먹고 있었다.
"물론이지. 엄청 맛있네. 고기가 이런 맛이었다니."
"무섭지 않으십니까?"
"전혀. 아라가 있거든."
하벨은 카샬을 위해 아라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자신이 독을 먹은 후였긴 해도 아라가 알려주지 않았던가.
그리고 랜턴도 있었고.
[삐잇!]
아라는 늠름하게 눈을 뜨며 입을 꽉 다물었다.
"그런데 아까 해산물을 가져왔을 때는 왜 그렇게 놀라신 겁니까? 저는 기절하는 줄 알고 헤레스 씨를 부르려고 했습니다."
"해산물은… 됐어. 앞으로 줘도 안 먹을 거니까 줄 생각하지 마."
하벨은 해산물을 보자마자 질겁했다.
평생 바다에서 살았는데 자신이 바라보던 생명체가 요리로 나오는 모습에 얼마나 놀랐던지.
아무리 맛이 있다 한들 먹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니, 보고 싶지도 않았다.
"아 참, 가면은?"
"당연히 부서트렸습니다."
카샬은 속이 후련한지 환하게 웃었다.
"다시 하나 사둬."
"왜… 그래야 합니까?"
카샬은 잠깐 목소리를 떨었다.
"다시 놈들을 찾아가야지. 당연히 내 제안을 물 테니까."
무르트 마을에서 나오자마자 랜턴의 빛이 사라졌지만, 아직 꺼지지 않았다.
무언가 더 부족한 게 틀림없었다.
"도련님께서 분명 하루만이라고 했잖습니까."
"카샬."
"……."
"꽃님이가 될 기회는 날마다 찾아오는 게 아니야."
나름 진지한 표정에 카샬은 한 가지를 떠올렸다.
'…속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