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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33화 (33/415)

33화. 무릎 꿇어(3)

* * *

'암. 좋은 날에는 다 같이 즐겨야지.'

[삐이?]

아라는 수상쩍은 하벨의 웃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좀도둑."

하벨이 사다리로 오르기 전에 페트리오를 불렀다.

"예, 도련님."

"이 건물은 정말 뒷세계 패거리들만 쓰는 게 확실해?"

"예. 제가 알려드린 건물 3개는 그렇습니다."

"나머지는 아니라는 거네."

"맞습니다. 다른 곳은 일반인과 패거리들이 섞여 있습니다. 하지만 도련님께서는 그런 곳을 원하시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렇지."

하벨이 씩 웃으며 다시 아라를 바라보았다.

"아라야."

[삐이!]

"가자. 우리가 활약할 시간이야."

[삐이이잇!]

활약이라는 말에 아라가 귀를 파닥거렸다.

이 건물에 그려져 있던 부정한 것들을 지운 뒤라서 그런지 이제 좀 기운이 나는 듯했다.

하벨이 물탱크에 오르자 아라가 찰싹 달라붙었다.

정령수가 순환의 길에 차올랐다.

힘이 두 개가 생긴 탓인지 몰라도 머릿속에 선택지 두 개가 떠올랐다.

'물과 독이라.'

게임처럼 화살표는 없었지만, 독을 인지하자 금세 손아귀가 간질거렸다.

처음 독의 힘을 개방했을 때보다 자연스럽게 손아귀에서 만들어지는 모습에 꼭 알을 까고 나오는 물고기를 볼 때처럼 가슴이 뜨거워졌다.

이번에는 굳이 형태를 잡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미리 뚜껑을 연 물탱크에 독을 풀었다.

잘 섞이도록 젓고 싶었지만, 하벨은 금세 입을 가렸다.

미리 준비한 손수건이 조금 붉게 물들었다.

"이걸 두 번이나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카샬은 얼굴을 찡그린 하벨을 보며 물었다.

하벨이 정령사로서 힘을 사용하며 물의 저주까지 반응하는지 상태가 나빠질 때와 증상이 비슷했다.

그렇다는 건 분명 고통까지 덮칠 텐데.

"그럼. 제일 좋은 방법을 두고 왜 돌아가겠어?"

하벨은 바닥으로 내려와서는 해맑게 웃었다.

순환의 길에 두 번째 막이 이제 갓 생길락말락 한 단계라서 아직은 불순물을 막지 못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나아졌어.'

슬슬 통증에 익숙해져 가는 건지, 불순물이 적게 차서인지 몰라도 어쨌든 불순물이 차오르면서 순환의 길을 건드려 나온 피가 이전보다 줄어든 건 확실했다.

"다음번에는 독도… 준비하겠습니다."

카샬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리 자아의 혼동 때문에 사람이 달라졌어도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몸도 좋지 않으면서.'

도련님답게 편안하게 저택에서 기다렸으면 했다.

그럴 위치이기도 했고.

'누릴 수 있을 때 누리는 게 좋은 건데.'

카샬은 밀려오는 자신의 기억을 꽉 짓눌렀다.

* * *

"…으음."

카샬은 문을 보며 침음을 흘렸다.

밤중에 대체 문을 몇 번이나 따는 건지.

이건 집사의 업무가 아니라 도둑으로 취업한 거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아니.

이러다 모르던 재주를 알게 될까 봐 겁이 났다.

"문 따."

주인이라는 작자가 꺼내는 저 태연하게 명령에 카샬은 입가를 핥았다.

"그냥 아래에서부터 베고 올라오는 건 어떠십니까? 간단하고, 공포도 주기 쉽습니다."

무엇보다 구차하게 문을 따고 싶지도 않았고.

"원래 그럴까 싶었는데, 내 몸 상태가 별로야. 이게 더 빠를 거고."

하벨이 숨을 내쉬자 뜨거움이 느껴졌다.

손끝도 떨리고, 몸이 물에 잠긴 듯 무겁기까지 했다.

"나쁠 만하시죠. 헤레스 씨가 못해도 3일은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했으니까요."

카샬은 하벨을 살핀 뒤에 문 앞으로 걸어갔다.

"가주님께서 혹시 화를 내셨어?"

이제야 룬델이 생각 나는 건지, 참 늦게도 물어본다 싶었다.

"화만 내셨겠습니까?"

핀셋을 이용하다 말고 카샬은 갑자기 마른 침을 삼켰다.

정말로 방 안에 겨울이 찾아왔다. 아직 겨울이 오려면 2개월은 더 남았는데.

다시는 그곳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무시무시해 카샬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몸을 떨었다.

"다음에는 전문 도구를 이용하는 게 좋겠네. 느려."

태연하게 던지는 하벨의 말에 카샬은 잠깐 발끈했다.

또 이런 일을 벌이겠다는 선언이질 않은가.

"진심이십니까? 또 문을 딸 일이 있다고요?"

"그럼."

"전 도둑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알아. 다음에는 내가 할 거야."

"……?"

딸깍.

카샬이 당황한 것과 별개로 문이 열렸다.

실랑이가 멈추질 않자 페트리오는 앞을 가리켰다.

"문 열렸습니다."

어느새 그의 손에 정령 기사를 죽이고 도륙 냈던 검이 쥐여있었다.

"나도 눈이 달려 있으니까, 신경 꺼."

카샬이 페트리오에게 사납게 반응했다.

"카샬, 좀도둑."

하벨은 보다못해 두 사람을 불렀다.

여기까지 오면 서열 정리고, 신경전이고 다 끝날 거라 생각했는데.

'예전에 아이들은 그래도 내 눈치를 보는 척이라도 했는데 이 아이들은 아니라니.'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아라가 저 모습을 배울까 걱정스러웠다.

벌써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라는 걸 알아챈 건지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이렇게 됐으니 여기서 한번 치고받는 게 어때?"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했으니 카샬과 페트리오에게 필요한 조치라 생각했다.

"제가 이깁니다."

"예. 제가 집니다."

우쭐거리는 카샬과 덤덤하게 패배를 받아들이는 페트리오를 보자 하벨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이건 뭐…….'

"죄송합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페트리오가 당황하는 하벨을 보자 고개를 숙였고, 카샬은 목을 뻣뻣하게 들었다.

"쟤가 없다 해도 작전을 제대로 수행할 자신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지. 그 방법을 사용하는 수밖에.'

하벨은 자신의 세계에서 쓰던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다.

"둘 중 누가 나이가 더 많아?"

"33살입니다."

"…33살이라고?"

카샬은 페트리오의 나이에 깜짝 놀랐다.

자신보다 어린 줄 알았는데.

"카샬 너는?"

"27살… 입니다."

카샬이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이겼어."

하벨은 페트리오의 어깨를 두드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인간이 서열을 따질 때 대뜸 나이를 먼저 물어봤던 기억이 났다.

'그때 뭐라고 했더라. 장유유서 어쩌고 했는데…….'

하벨은 아라를 위해 부정한 것들을 지우며 앞으로 걸어갔다.

아라를 보내 정찰하도록 부탁하고 싶었지만, 오늘따라 아라는 자신에게 떨어지질 않았다.

아마도 부정한 것들 때문이겠지.

마을에서부터, 건물 3곳을 들리다가, 그렇게 발견한 부정한 것들은 꽤 많았다.

'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뭘 숨기려고 정령사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정령까지 경계하는 건지.'

"…꺽."

계단을 내려가자 창문에 기대 트림을 내뱉는 남자가 보였다.

얼마나 신나게 마셨으면 이렇게 가까이 온 것도 모를까.

하벨은 웃음기를 지웠고 밀려드는 정령수를 통해 물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독을 꺼내 아공간 반지에 휘감았다.

'……!'

아직 독의 형태를 잡기가 어려워 반지에 휘감아 날만 조금 세울 생각이었는데 뜻밖에 사실을 깨달았다.

'한 번 휘감으니 가만히 둬도 일단 제어력이 유지가 되네?'

라르웬이 왜 장갑이나 다른 물건에 힘을 덮어씌우는지를 이제야 알았다.

'이렇게 좋은 정보는 진작 알려주시지, 형님.'

제어력이 유지가 되니 독의 형태를 잡는 게 훨씬 수월해졌다.

엄지손가락만 한 날을 만들어 쥐었다.

'아직 다듬어야 할 곳이 많지만.'

날을 한껏 세운 뒤, 피부에 무언가 스쳤는지 모를 만큼 뒷덜미를 살짝 그었다.

독이니 굳이 힘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갑자기……."

남자는 뒷목을 만지다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큰소리가 나기 전에 뒤따라 온 페트리오가 놈의 머리를 잡고 살포시 바닥에 눕혔다.

보글보글.

입에 튀어 오르는 거품과 함께 온몸이 덜덜 떨렸다.

"즉사는 아니더라도 10분을 넘기기는 힘들 겁니다."

페트리오는 하벨이 손에 쥔 저 작은 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가면 때문에 하벨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웃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커헉."

하벨은 벽을 붙잡고는 다급히 가면을 올렸다.

"도, 도련님?"

페트리오는 하벨의 손가락 사이에 흐르는 피를 보자 바짝 굳었다.

아까와 피의 양이 다르지 않은가.

'카샬에게 맛 좀 보라고 한 번. 물탱크에 독을 풀어 넣으려고 세 번. 지금 새로운 방식을 이용해 보고자 또 한 번.'

총 다섯 번.

하벨은 횟수를 생각하며 망토를 걷어 정화 장치를 바라보았다.

역시나 빛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지금은 다섯 번 만에 물의 저주가 제대로 움직인다.'

버틸 수 있는 횟수가 늘어난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또 차오르는 불순물을 욕해야 할지.

하벨은 식은땀을 흘리며 주사기 하나를 꺼낸 카샬을 바라보았다.

"도련님. 우산 뒀다가 뭐 하십니까?"

"그래서 지금 들려고."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요."

"무리한 적 없어. 그냥 확인만 한 건데 얘가 버티질 못하네."

하벨은 억울해하며 하벨 티에라의 몸을 가리켰다.

카샬은 잠깐 말을 멈추다 다시 물었다.

"이제 원하시는 만큼 확인하셨습니까?"

반지에 휘감았던 독의 힘이 사라진 걸 보며 하벨은 씩 웃었다.

"물론. 좋은 방법도 알아냈어."

정령수로 생긴 힘을 물건에 깃들게 하면 애써 유지하지 않아도 잠깐이나마 고정된다는 점을.

"…어? 너희 뭐야?"

복도에서 술에 취한 남자가 키득거리며 말을 걸어왔다.

이미 페트리오가 그에게 걸어간 상태였다.

"얼굴이 왜 이래? 꽃에, 달에, 별에, 술을 대체 얼마나 먹은 거야?"

푸욱.

페트리오는 망설이지 않고 남자의 복부를 쑤셨다.

"…커, 커헉."

남자가 덜덜 떨며 무너져내렸고, 페트리오는 그와 함께 무릎을 굽혔다.

이미 찔렀음에도 페트리오의 손이 잠깐 위로 움직였다.

뒤쪽에서는 페트리오가 뭘 하는지 보이지 않아 하벨은 눈을 반쯤 감았다.

"절 따라오십시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페트리오의 가면을 뚫고 빛이 잠깐 반짝였다 사라졌다.

* * *

무르토 마을의 뒷세계 수장은 7층 건물 중 당연하게도 7층에 있었다.

옥상에서 내려와 두 놈을 죽인 후에도 소란이나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리는 이들은 없었다.

술에 취해, 기쁨에 취해, 그렇게 행복으로 젖어 들어가다 비로소 수장의 방 근처에서 낯선 이들과 마주했다.

"꼴이 그게 뭐야?"

어쩌다 마주했던 이들도 지금 경비들처럼 카샬의 가면을 보며 비웃을 뿐이었다.

"아주 멋진데, 왜?"

꽃무늬가 가득 그려져 있었기에 하벨은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자신의 가면엔 달이, 페트리오는 별이.

예쁘지 않은가.

"웃음 값이라 생각하고 모르는 척할 테니까, 빨리 꺼져. 두목님의 기분이 좋을 때 근처에 누가 있는 거 싫어하는 거 알잖아. …아, 잠깐만. 기왕 온 김에 내려가서 술 좀 빨리 가져오라고 말……."

카샬이 신경질적으로 목을 그어버렸다.

실실 웃는 얼굴 그대로 쓰러지자 페트리오가 잘 받아서는 소리가 나지 않게 눕혔다.

짧은 정적의 시간 동안 카샬의 손은 멈추질 않았다.

소리 없이 달려가 다른 경비의 입을 틀어막고 목을 찔렀다.

바로 다음 표적을 향해 돌진하는 카샬의 뒤로 페트리오가 수습하며 조용함을 지켰다.

'툴툴거리더니 손발이 착착 맞네.'

하벨은 아라가 있는 주머니를 확인한 뒤, 우산을 흔들며 문 앞에 섰다.

콰앙!

힘차게 발로 문을 열었다.

세상의 주인이 된 것처럼 고독을 씹고 있던 남자와 눈이 맞았다.

'…아흑.'

발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찌리리'한 감각에 하벨은 자신이 잘못 걷어찼다는 걸 알았지만, 꾹 참으며 당당하게 걸었다.

"누구냐?"

정적을 깬 건 이곳의 수장이었다.

하벨은 대꾸하지 않고 수장에게로 향했다.

삑!

수장이 다급히 버튼을 눌렀지만, 하벨은 걸음을 멈추질 않았다.

어차피 저놈은 자신의 손아귀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콰앙!

하벨이 우산을 머리 위에서 아래로 휘두르자 책상이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요동치는 감각이 손끝에서 금세 팔로 번졌지만, 하벨은 이 역시 꾹 참았다.

책상에 올려진 술병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에 수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거 원목……."

하벨은 한 걸음 다가가 발로 책상을 걷어차서는 우산을 머리 위로 한 번 더 올렸다.

"자, 잠깐만……."

콰앙!

수장이 앉았던 의자가 앞부분이 박살이 나며 그대로 뒤로 넘어졌다.

눈을 뜨자 바로 보이는 우산 끝부분에 수장은 마른 침을 삼켰고, 표정도, 감정도 알 수 없는 저 가면에 두려움을 숨기기 어려웠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이봐, 이러지 말고 우리 대, 대화를 하자고."

대체 어디에서 보냈는지 몰라도 짐작 가는 곳이 너무 많았다.

귀족.

다른 뒷세계 놈들.

제 부하들.

다다다다.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오자 수장의 얼굴에 아주 잠깐 이채가 어렸다.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말해봐. 다 들어줄 수 있어."

수장은 시간을 끌었다.

고작 셋이었다.

'고작 셋으로…….'

하지만 자신에게 겨눠진 우산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기에 수장은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대체 우산을 가지고 뭘 할 수 있겠냐고 누군가 비웃는다면 머리통을 깨부쉈을지도 몰랐다.

분명 우산인데 원목으로 된 책상을 부쉈다.

저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기에 머릿속에 끔찍한 상상들이 떠올랐다.

'고작 셋으로 뭘 할 수 있다면?'

수장은 두려움을 떨치려 다시 말을 꺼냈다.

"제발, 대화를 하자고. 뭐든 들어줄 수 있다니까?"

그의 시선은 남자의 뒤를 향했다.

시야가 반쯤 가려져 있어도 어떤 상황이 펼쳐졌는지 생생하게 보였다.

허우적거리는 건 제 부하들의 몸뚱어리요, 땅에 떨어지는 것 역시 제 부하들의 머리였다.

발소리가 줄어들고, 피가 번졌다.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

잡아먹히는 쪽은 자신이었는데.

고작 셋이 아니었다.

단지 셋이 아니었다.

괴물이 셋이나 온 것이다.

드디어 눈동자에 어린 수장의 공포를 보며 하벨이 목소리를 냈다.

"무릎 꿇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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