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무릎 꿇어(2)
* * *
"방식은 상관없어?"
[상관없어. 우린 너희가 뭘 했든 관심이 없으니까.]
흥미롭지 않으면.
정령은 뒷말을 일부러 하지 않았다.
하벨과 왜 저런 이야기를 나누겠는가.
"알았어. 되찾아 줄게."
하벨이 허락했어도 정령들은 자신에게 일말의 기대조차 하지 않는 듯했다.
[쟤를 넘겨. 잠깐이면 돼.]
"왜?"
정령 기사를 바라보는 정령들의 시선이 분명 자신을 향한 게 아님에도 하벨은 피부가 베인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죽이려고?"
[아니. 당연한 걸 가져갈지도 몰라. 아무리 티에라 가문에 소속되었다 해도 우리가 봐주는 건 딱 너까지야.]
'티에라 가문의 자제들은 비난 정도는 해도 된다는 건가?'
하벨은 정령들에게도 가문의 위치가 제법 높다는 걸 알았다.
"카샬. 데려와."
하벨의 손짓에 카샬은 허공을 바라보았다.
저곳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향긋한 꽃냄새가 났다.
대체 정령들이 얼마나 있는 건지.
"알겠습니다."
카샬은 정령 기사를 하벨에게 데려갔다.
정령 기사가 겁에 질릴수록 페트리오의 얼굴에 웃음기가 짙어졌다.
"사, 살려주십시오. 제발. 제발, 뭐든지 하겠습니다! 뭐든지 할 테니 저를 넘기지 말아 주십시오!"
목이 멘 정령 기사의 부탁에도 하벨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굳이 정령과 척을 질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벨이 정령 기사를 정령 앞으로 밀치자 정령들이 그를 에워쌌다.
딱딱.
이가 맞물리는 소리가 정령 기사에게 들렸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건 안 됩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제발……."
정령 기사는 무릎을 꿇고는 고개를 바닥에 박았다.
[자비를 베풀지 아닐지는 잠시 후에 판단이 날 거야.]
[맞아. 네 마음이 진짜라면 자비를 베풀어줄게.]
잠깐 바람이 불어왔다.
[…아.]
정령들은 웃음기를 지워나가며 천천히 울먹였다.
'……?'
대체 정령이 뭘 하려는지 몰라도 하벨은 갑자기 분위기가 변하자 적응이 되질 않았다.
[우리가 그렇게 싫었어?]
"아닙니다.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정령 기사가 고개를 가로젓자 정령들은 눈빛으로 그를 찌르듯 쳐다보았다.
[못된 아이구나. 넌 정말 못된 아이야.]
정령들은 서로를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기회도 차버렸는데 뭘 더 망설이겠는가.
[너는 이제 우릴 보지 못하고, 들을 수도 없어.]
"아, 안 됩니다! 낙인만은! 그 낙인만은…!"
정령 중 하나가 정령 기사의 이마에 앞발을 올렸다.
치이이익.
"아아아악!"
비명과 함께 지워지질 않을 낙인이 정령 기사의 이마에 새겨졌다.
'저게 뭐지?'
하벨의 눈이 커졌다.
[이제 너는 자연의 노여움을 짊어질 거란다. 우연히 벌어진 일은 없어. 걷다가 네 피부를 스친 식물이 독을 품은 식물인 것도, 우연히 튄 비가 네 입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다 우리의 노여움 때문이라는 걸 잊지 마렴.]
[…안녕, 아가야.]
다정한 그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정령 기사는 퓨즈가 끊어진 것처럼 그대로 멈췄다.
방금까지 보였던 정령들이 아지랑이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저놈한테 뭘 한 거야?"
하벨이 일부러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얼핏 봐도 정령 기사의 정신이 완전히 나가버렸다.
[인간의 말을 빌리자면 심판을 내린 거야. 그 심판대에는 너도 올라갔어.]
[너는 합격이야. 네 말이 진실인 것도 모자라 우릴 아주 좋아하더라.]
정령들은 아직 하벨이 볼 수 없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하벨은 저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언제.
잠깐 바람이 불어왔을 뿐이었다.
'설마 그게… 힘을 사용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는 건가?'
하벨이 눈을 좁혔다.
'저런 힘이 있으면 왜 부정한 것들이 배치될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한 거지?'
아무래도 라르웬에게 물어봐야 할 문제인 것 같았다.
[우리가 바보도 아니고, 우릴 싫어하는 자를 정령사로 두지 않아. 싫어하면 싫어하는 만큼, 증오하면 증오하는 만큼 돌려줄 뿐이야.]
[이 힘을 사용하면 피곤한 게 단점이라서 꼭 필요할 때만 쓰긴 하지.]
정령 중 일부는 하품하며 가벼운 일처럼 굴었다.
[네가 싫지만, 단지 싫다는 이유로 저렇게 하지는 않으니까 안심해.]
[맞아. 우리 눈에 우리를 향한 감정의 색이 보이니까.]
아직 정령들은 선의 형태에 일부가 수채화로 채색된 듯 군데군데 채워진 게 전부라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하벨은 그들의 씁쓸함이 보였다.
누군가는 방금 일로 정령들이 냉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자신은 정령들이 자신의 마음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 장치가 아닐까 싶었다.
[지켜볼 거야.]
[네가 되찾아 주는 보금자리만큼 축복을 내려줄게.]
정령이 재차 꺼낸 말에 하벨은 방금 전과 달리 그들이 자신에게 어떤 기대를 걸고 있다는 걸 느꼈다.
"되찾아 주는 보금자리만큼이라니?"
[우린 부정한 것들에게 손을 댈 수 없어. 우리의 약점은 정령사들이라면 다 알고 있지.]
[그래서 네가 우리의 약점을 걸고 축복을 거래할 때 열 받았어. 또 이렇게 이용하는구나 싶었거든.]
[삐이잇!]
아라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항의했다.
[알아. 네가 이렇게 당돌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자신들이 하벨을 먼저 무시했다.
무시당한 하벨은 자신들의 관심을 끌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겠지.
[하지만 너는 우리를 좋아해. 이전에 해결한 사건도 있고. 그래서 믿어보기로 했어.]
심판대에 올린 하벨은 자신들이 보았던 그 어떤 색보다 짙고, 아름다운 분홍으로 물들어 있었다.
불쾌감은 여전하지만, 자신들을 좋아하는 저 아이를 왜 배척하겠는가.
[최근 이 마을뿐만 아니라 여러 곳에서 부정한 것들이 칠해지고 있어. 해결만 해준다면 우리도 바랄 게 없지. 이건 보금자리와 별개야.]
'다른 마을까지? 설마 독 사건을 벌인 귀족들이 소유한 마을은 아니겠지?'
하벨은 들끓는 자신의 감정을 눌렀다.
[저 마을 일을 해결해준다면 내가 다른 정령에게도 잘 말해줄게. 넌 부정한 것들을 없애면서 축복을 받을 수 있으니 분명 좋은 일이겠지?]
[그럼, 안녕.]
정령들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밝았다.
'…참 제멋대로인데, 밉지가 않아.'
정령들은 오만하면서도 순진하고, 순수했다.
하벨은 정령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덩달아 손을 흔들어주자 하벨은 그들을 어여쁘게 바라보았다.
찌르르.
갑자기 느껴진 교감에 하벨은 살짝 놀랐다.
하나가 아니라 여럿에게 느껴졌기에 하나의 힘이 되었다.
순환의 길에 만들어진 막 아래로 불순물이 녹아내리며 두 번째 막이 생길 것처럼 얇은 실 하나가 생겨났다.
'선금은 받았네.'
하벨은 뒤를 돌아 여전히 불만인지 한껏 부풀어 오른 아라의 털을 '툭' 하고 건드렸다.
"아라야. 그만 화내고 가자."
[삐이잇.]
딱.
금세 아라가 하벨의 손가락을 물어버렸다.
"이제 끝이 났습니까?"
카샬이 물었다.
"맞아, 끝났어."
"죽일까요?"
카샬은 정령 기사를 가리켰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시체 처리는 제 전문이니까요."
페트리오가 품에서 단검이라기에 길고, 장검이라기에 짧은 검을 꺼냈다.
검집에서 칼을 꺼내자 유난히 날이 두꺼웠다.
"그리고 길도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마치 방법을 알아낸 것처럼 페트리오는 처음과 달리 자신감을 드러냈다.
* * *
무트라 마을은 밤이 찾아왔음에도 낮 못지않게 환했다.
특히 일정 구역에서만 그 밝기가 유난히 빛났는데 페트리오는 그곳이 바로 뒷세계 세력들이 활동하는 중심지라고 했다.
마을을 에워싼 부정한 것들을 눈에 보이는 족족 일단 치웠지만, 아라는 제 주머니에서 나오지 않았고, 정령들도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마을에 들어오자마자 랜턴의 검은 불꽃이 사라지지 않는다라.'
하벨은 그 사실에 주목하며 주변을 살폈다.
"뒷세계 수장의 목을 바로 치시려거든 방금 제가 가리켰던 건물을 포함해 총 세 곳 중 하나를 뒤지시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페트리오는 이미 지나온 건물 하나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낮췄다.
"도련님. 더는 주변을 돌아보지 마십시오. 교육에 좋지 않습니다."
카샬은 술에 취해 토한 곳에 얼굴을 파묻는 사람이나, 주사기로 무언가를 찌르는 등 불쾌하고 불결한 상황에 제 몸으로 하벨의 시야를 가렸다.
"이런 게 질이 나쁘다는 거야?"
"…이런."
하벨이 순진하게 묻자 카샬은 바로 제 가면을 붙잡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직 이런 곳에 올 때가 아닌데.
카샬은 페트리오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이 얼마나 날카로웠으면 가면을 뚫고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도련님."
하지만 페트리오는 가면이 아니라 철면피를 덮었는지 카샬을 의식하지 않고 하벨을 불렀다.
"왜?"
"계획이 있으시죠?"
"당연히 있지."
"어떤 계획인지 말씀해주시면 숙지하겠습니다."
"우당탕 계획이라고……."
"그거 또 나왔습니까?"
카샬은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티에라 마을 뒷세계에서 한 번 써먹었으면 충분하지 않은가.
"마법사도 없다며? 그럼 더 완벽한 계획인데?"
무엇보다 지금 타이밍이 좋았다.
'하벨 티에라가 독을 먹어 생사를 오락가락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축배의 잔을 올려야지.'
귀족이 소유한 영토가 잘나가야 뒷세계도 얻어먹을 반찬이 생기는 법.
요컨대 제일 시끌벅적한 곳을 찾으면 된다는 말이었다.
"우당탕 계획이라뇨? 그게 무슨 계획입니까?"
"우당탕 쓰러트리는 거. 딱 보면 모르겠어? 그럴 눈치도 없나?"
페트리오의 물음에 카샬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장난으로… 하신 말씀입니까?"
"도련님께서는 장난 같은 거 모르시는 분이야. 그것도 몰라?"
이 역시 퉁명스럽게 받아치자 페트리오는 더는 참지 못했는지 카샬과 마주했다.
카샬은 여유만만했고, 페트리오는 짜증이 살짝 났다.
'…살판이 났네, 카샬.'
하벨은 알아서 서열을 정하는 모습에 간섭하지 않으려 다시 페트리오가 가리켰던 건물로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주변도 시끌벅적하고 개처럼 싸우는 이들도 한두 명이 아니라 뒤쪽에서 카샬과 페트리오가 서로를 물어뜯는 말을 꺼내는 게 그다지 이상하지 않았다.
이미 이런 분위기가 익숙한지 지나가는 사람들 역시 개싸움을 벌이는 이들 곁에서 떨어져서는 삶에 찌든 얼굴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만하시죠. 제가 당신한테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먼저 굽힌 쪽은 의외로 페트리오였다.
"물론이지. 네가 어떤 식으로 가문에 들어왔는지 잊었나?"
"잊지 않았습니다. 아니, 잊을 생각도 없었고요. 제가 어떤 말을 한들 변명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쨍그랑.
카샬이 다급히 하벨을 잡아당겼고, 하벨이 있었던 곳에서 유리병이 깨져 조각이 튀고 액체가 바닥에 번지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카샬의 물음에 하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방을 지나던 사람들은 잠깐 놀라다 다시 제 갈 길을 재촉했다.
이런 상황마저 익숙한 모양이었다.
킁킁.
하벨은 가면을 살짝 들어 깨진 유리병 속 냄새를 맡았다.
'술이다.'
곧 고개를 올렸다.
창문이 열려 있었고, 술에 잔뜩 취한 남자가 보였다.
미안하다는 듯 손을 대충 흔들자 그에게 누군가 다가와 어딘가를 가자는 행동을 했다.
그 역시 술에 취한 듯 보였다.
하벨은 다시 고개를 아래로 내려 건물을 바라보았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페트리오가 지적했던 다른 건물들을 떠올려보자 이곳만큼 밝은 곳은 없었다.
'여기네.'
만약 아니더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건물 3개 중 하나에 수장이 있을 테니까.
하벨은 옆 건물을 바라보았다.
높이는 낮아도 뛰면 옥상까지 충분히 닿을 듯했다.
'물탱크도 보이고.'
하벨은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련님?"
"카샬."
"예."
"내가 보기에 여기인 것 같은데. 넌 어때?"
"눈썰미가 좋으십니다. 좀도둑이 가리켰던 건물 중 이곳을 지나쳤을 때 바로 알았습니다."
카샬은 자신의 코를 가리켰다.
"술 냄새가 아주 강하게 진동하더라고요. 지금 그럴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 쪽에서 인상을 찌푸릴 일이 저쪽에서는… 혹시 도련님께서도 술 냄새 때문에 알아채신 건 아니시죠?"
"맞는데?"
"……."
카샬은 잠깐 말을 아꼈다.
"안 됩니다. 절대 안 되니까, 주십시오. 눈 감아 드리겠습니다."
"카샬."
"…아. 죄송합니다."
카샬은 뒤늦게 지금 하벨이 '음식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자유가 억압된 사람'이라고 본인을 인지한다는 걸 떠올렸다.
"여기 말고 다른 곳부터 돌자."
하벨이 깨진 유리병을 유심히 바라보는 페트리오를 쳐다보며 말했다.
* * *
"…으음, 괜찮습니다. 딱 복통을 일으킬 정도입니다."
카샬은 입맛을 다시며 대답했다.
"진짜 괜찮아?"
하벨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또 물었다.
"예. 방금 제가 몇 번이나 독에 내성이 좀 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하벨은 여전히 인상을 구겼다.
아까 건물 위에 있는 물탱크를 확인하다 저들의 발목을 붙잡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독의 힘이 생기지 않았던가.
문제는 독이 어느 정도로 강한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망설이던 차 카샬이 독 맛을 보겠다며 재촉했다.
혹시 몰라 물과 섞었는데 다행이었다.
"…미친놈."
"저보다 도련님의 상태를 먼저 살피시는 게 어떠십니까? 지금 격렬하게 반대하고 싶으니까요."
카샬은 입을 닦은 수건에 묻어난 하벨의 피를 보자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누가 미친놈인지.
"그럼 독 좀 가지고 있어?"
하벨은 돈 좀 달라는 것처럼 페트리오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는 감옥에서 막 나왔습니다."
하벨의 시선이 자연스레 카샬에게 옮겨졌다.
"제가 그런 무서운 걸 가지고 있을 리가 없죠. 그런데 어디에서 돈 좀 뜯어봤습니까? 자세가 완벽하신데요?"
"돈 말고 다른 걸 많이 뜯어봤지. 어쨌든 역시 나밖에 없네."
하벨은 아라를 쳐다보며 사악하게 웃어 보였다.
축제는 다 같이 즐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