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정리해
* * *
비록 끝이 언제 찾아올지 모르겠지만, 또다시 삶이 주어졌다.
자유롭게, 행복하게, 후회 없이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제 마음은 변함없습니다. 제가 움직이겠습니다."
룬델은 하벨을 바라보았다.
평생토록 본 저 아이의 눈빛이 저토록 맑게 빛났던 적이 있었던가.
가문의 무게에 짓눌려.
정령사가 되지 못했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은은히 드러나는 주변의 원망 속에.
그렇게 철부지로 자기 자신을 덮어버린 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듣지 못한 척,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던가.
룬델은 다시금 하벨의 이마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를 따뜻하게 바라보았다.
하벨은 불편함을 느끼며 말을 돌렸다.
저 눈빛은 자신 아니라 하벨 티에라를 향한 것이니.
"제가 뭘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때마침 제가 본 책에 막내는 사고뭉치가 많다고 적혀 있더라고요."
하벨이 실실 웃자 그제야 룬델이 애써 피식거렸다.
"그러니 사고 좀 치겠습니다."
"그래. 뭐가 됐든 수습해주마.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마렴. 그러면 된단다."
"할 수 있는 만큼 소중히 몸을 다루겠습니다."
하벨은 뒤를 맡길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무척 기뻤다.
"…마법사를 고용한 이가 누구인지 알게 됐다."
룬델은 그제야 문 앞에 섰을 때까지 망설이고, 망설이던 말을 꺼냈다.
지금 말할 순간이라 판단했다.
어쩌면 하벨이 '짐작'했다던 상황에 도움을 줄 수 있으니.
하벨은 속에서 일어난 분노를 숨겼다.
"아마 뤤트로가 모았던 정보 중 특정 문양이 있던 옷가지가 제일 큰 도움이 됐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 네 말대로 그 문양이 제일 큰 도움이 되었단다."
"누구입니까?"
룬델이 바로 처리할 수 있었다면 아마 지금 고용한 이를 알게 됐다가 아니라 처리했다로 말이 바뀌지 않았을까 싶었다.
"안타깝게도 옷가지에 있던 문양을 가진 귀족은 돈에 눈이 멀어 이름만 판 가짜였다. 마법사를 고용한 진짜는 따로 있었단다."
룬델은 잠깐 말을 멈춘 뒤 하벨을 불렀다.
창백한 저 모습을 보자 가슴이 너무도 쓰라렸다.
"하벨아."
"예."
"너는 어찌하고 싶더냐?"
"제가 무얼 바란다고 하면 다 들어주실 겁니까?"
"전부를 들어준다고 말은 할 수 없지만, 대부분은 들어줄 생각이란다."
룬델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하벨은 가슴이 간질거리자 시선을 살짝 흘렸다.
"마법사를 고용한 이가 누구인지 알려주십시오."
"마법사 협회란다."
"…마법사 협회요? 이름부터가 벌써 골치가 아픈데요?"
왜 하필 마법사인가.
"간단하게 말하자면 등록된 마법사를 관리하는 곳이란다. 나라마다 하나씩은 가지고 있지."
하벨은 룬델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도 훌쩍이는 아라를 쓰다듬으며 말을 꺼냈다.
"가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면 생각보다 일이 복잡한 듯합니다."
이 독 사건과 얽혔을까.
뭐가 됐든 티에라 가문을 건드리려면 그만한 배짱과 힘이 있어야 하는 법이 아니겠는가.
"귀족들은 결코 혼자서 움직이질 않는단다. 마치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지. 마법사 협회도 마찬가지란다."
룬델은 괜스레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아니, 어쩌면 귀족보다 더 크게, 나라라는 단위에 얽매이지 않고 얽혀 있을지도 모른단다. 나라를 증오하는 이들이 그들 사이에 제법 많으니까."
"왜 계속 절 떠보십니까?"
"하벨아. 나는 널 건든 그 누구든 내버려 둘 생각이 없단다. 하지만 만약 그 과정에서 네 마음이 다친다면 복수든 뭐든 무슨 소용이겠더냐."
룬델이 꺼내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부드러웠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마법사 협회를 쳐부술 준비가 되어 있는 듯했다.
"가주님."
하벨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뜨며 룬델을 불렀다.
"잠깐 생각했는데 진짜 이상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이상하더냐?"
"마법사와 정령사 사이가 좋지 않다는 건 저도 이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판이 알아서 만들어지다뇨."
하벨은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너무 수상하니 지금은 돈을 받고 이름을 팔아넘긴 귀족만 처리해주십시오. 대신 확실하게 밟으셔야 합니다. 한 줌의 재도 남지 않게 말입니다. 해줄 수 있으십니까?"
"무슨… 생각이더냐?"
룬델은 하벨이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싹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고를 치겠다고 선언한 뒤라 하벨의 미소에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마법사 협회든 뭐든 결국, 놈들도 한자리를 가지고 있는 귀족이 아닙니까?"
"마법사라고 해서 모두가 귀족은 아니지만, 마법사 협회에 소속된 이들은 관료지."
"아시다시피 적을 처단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하벨은 굳어지는 룬델의 표정을 보면서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맞닿는 룬델의 손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정령사 가문이라는 이름으로 마법사 협회를 치시든, 귀족들을 치시든 결국 전쟁이 일어나는 건 똑같습니다."
"설령 그렇다 한들 다른 누구도 아닌, 너를 건드렸다. 나는… 용서할 수가 없구나."
누굴 향해 꺼내는 말인지, 룬델의 눈빛은 천천히 슬픔에 잠겨갔다.
하벨은 조용히 룬델의 손가락을 잡았다.
"하지만 저는 그 방법을 사용하고 싶지 않습니다. 뭐가 됐든 가문을 지킨 가주님의 노력을 허투루 만들고 싶지 않아요."
다시 원래 몸으로 돌아올 하벨 티에라를 생각해서라도 룬델에게 피해가 최대한 덜 가도록 애를 쓰는 수밖에.
'그렇다면 랜턴을 더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수밖에 없다.'
아직 불확실성은 있었다.
하지만 랜턴이 자신을 위험으로부터 경고하는 셈이라면 내버려 둘 이유는 없지.
룬델은 전해지는 하벨의 온기에 섣불리 말이 나오질 않았다.
"저는 이번 일이 귀족들이 일으킨 일이라 생각합니다. 저들은 선을 넘었습니다. 대놓고 분란을 일으키려 준비하고 있는 게 이제는 보이잖습니까?"
하벨은 옷자락을 꽉 잡았다.
룬델의 방법이 잘못된 게 아니라 적들이 많았다.
암살자, 마법사, 그리고 귀족까지.
어떻게든 티에라 가문을 물어뜯어 사이좋게 나눌 준비를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독 사건 역시 그런 의도가 아닐까.
"정화제를 걸고넘어질 겁니다."
티에라 가문의 힘은 정화제에서 나왔다.
당연히 공격 대상이었다.
"이미 예상했다."
룬델의 덤덤함에 하벨은 조금 더 크게 경고했다.
"가주님께서 준비를 철저하게 하셨다 한들, 선동에 뒤집힐 겁니다."
"아니. 그럴 일은 없단다."
룬델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마 놈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정화제를 우리가 거의 독점하고 있으니 이를 선동하면 되겠구나. 티에라 가문의 힘은 정화제에서 나오는구나."
잠깐 룬델의 비웃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나는 오히려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구나. 고생하지 않아도 적을 알 수 있는 순간이 아니더냐?"
하벨은 잠깐 숨을 멈췄다.
지금까지 부드러운 모습만 보았기에 느낄 수 없었던 룬델의 포악함을 엿보고 말았다.
룬델은 야수였다.
그것도 사냥이 아주 능숙한 야수.
하벨은 안도하며 미소를 지었다.
"미안합니다. 제가……."
"아니, 사과하지 마렴. 너를 알게 되어 나는 무척 기쁘단다."
하벨이 룬델을 살핀 것처럼 룬델 역시 하벨을 살폈다.
서로를 모르기에 관찰하는 건 당연한 행동이었다.
"가주님."
하벨은 이전보다 더 즐겁게 룬델을 불렀다.
"참 재미있게도 '명분'이라는 이놈만 있으면 똑같은 일을 저질러도 상황이 다르게 흘러갑니다."
용왕을 보호하고자 만들어졌던 호위대가 '보호'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감시하며 감금에 이르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명분은 그대로였다.
보호.
자신이 수도 없이 겪어봤던 그 명분을 이용할 셈이었다.
"그렇지. 아주 까다로운 놈이지."
"가주님. 보호라는 명분으로 저들에게 똑같이 달려든다고 해도 저와 가주님의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하벨아. 그 문제는 내 분명히 다시 생각해본다고 했다."
룬델이 움찔거려도 하벨은 그대로 밀어붙였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일반인으로 알려져 있죠. 놈들이 무슨 명분을 가져다가 붙일 겁니까?"
"하벨아."
"상황이 저번과 다릅니다."
하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제 침묵의 시간은 끝이 났습니다. 적이 이만큼 했으면 티에라 가문에서도 뭔가를 내보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까지 알았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몇 번을 생각하셔도 저만큼 가장 뾰족한 창은 없을 겁니다. 장담하죠."
하벨은 느긋하게 웃으며 룬델의 말을 기다렸다.
"…하."
룬델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픈 만큼 반짝이는 하벨의 눈동자와 옳은 말에 말문이 막혔다.
'하벨아. …하벨아. 이러지 말거라.'
귀족이든 등록된 마법사든 무언가를 행동하고자 할 때, 명분이라는 게 필요한데 하벨은 그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명분을 가져다 붙이기에 어려운 존재였다.
일단 하벨은 성년이 아니었다.
비록 이름뿐이나, 미성년자를 보호하는 법이 있고, 정령사 가문의 자제임에도 정령사가 아니며 병약하기까지 한 하벨을 비아냥거리고자 '시든 푸른 꽃'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가 아닌가.
이미 저들이 흠을 만들며 물어뜯기엔 하벨이 가진 흠이 많았다.
뭘 덧붙이려고 해도 효과도 크지 않을뿐더러 고작 덧칠한 수준밖에 되지 않겠지.
'나를… 흔들려 하벨을 건드렸을 거다. 이번 일도.'
효과는 아주 좋았다.
정령들이 하벨을 외면하고 그 틈을 이용해 적들이 밀려오니 하루하루 피가 말라가는 기분이었다.
룬델은 지금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는 것만으로도 모든 기력을 뺏기는 기분이었다.
"하벨아."
"속상하실 거 압니다. 하지만 누군가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 절 위해서입니다."
하벨은 자신을 가리켰다.
이는 하벨 티에라를 위한 일이기도 했다.
―부디, 이 세상을, 제 가족들을 지켜주십시오.
그가 가족들을 위해 어떤 일까지 벌였는지 아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하벨. 이번 일은 나와 너의 부탁이 이해관계가 맞았기 때문이라는 잊지 말았으면 한다.'
하벨은 하벨 티에라에게 간단히 알리고는 다시 말을 꺼냈다.
"저번 외출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룬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 아이가 저토록 진심으로 웃는 모습은 얼마 만인지.
제 나이에 맞지 않는 철부지 같은 행동은 다 자신의 부덕함 때문이었다.
사랑하겠다, 아끼겠다고 맹세했지만, 그 사랑이 부족했던 게 아닐까.
하벨이 쌓아 올린, 보이지 않는 벽을 자신이 결국 무너트리지 못한 탓이 아닐까.
그렇게 전전긍긍했던 마음이 저 미소 하나에 싹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저들이 원하는 건 티에라 가문이고, 가문을 뺏기는 순간 제 자유는 사라지는 셈이니까요."
잠잠했던 하벨의 눈동자에 야성이 어렸다.
"하지만 이제 아무도 제 행복을, 하벨 티에라의 행복을 뺏을 수 없어요."
룬델은 그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독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욕심이라는 걸 알지만, 조금만 더 하벨의 순수함을 지켜주고 싶었다.
"내가 하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내가 너를 지키마."
"가주님."
하벨은 장난스럽게 룬델을 불렀다.
"독립 예정은… 음, 제가 하는 게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지켜봐 주세요."
자신이 무얼 해내는지를.
어떻게 이뤄내는지를.
"사고 친다고 말했잖아요."
"……."
룬델은 자신만만한 하벨을 바라보며 백기를 올렸다.
이미 약속한 일도 있었다.
"그래. 내가 뒷수습해주기로 했으니."
떨어지지 않는 말을 꺼내며 룬델은 하벨을 믿어보고자 했다.
"…해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