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3)
* * *
카샬이 쓰러지는 하벨을 다급히 받아내고서는 잠깐 숨을 멈췄다.
눈을 깜박이지도 못하며 밀려오는 두려움에 손끝을 떨었다.
'…왜?'
의문이 넘실거렸다.
[삣!]
순간,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그제야 카샬은 제 손에 느껴지는 하벨의 발작을 눈치챘다.
'빌어먹을…….'
하벨의 입에 검붉은 피가 고였고, 카샬은 하벨의 고개를 젖혀 피가 목을 막지 않도록 했다.
'빌어먹을……!'
카샬은 당장 아공간 주머니에서 임시 해독제를 꺼냈다.
"퉷."
바늘을 가린 뚜껑을 뽑고는 그대로 하벨의 목에 꽂아 넣었다.
'제발. …제발.'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카샬은 하벨을 안고는 달렸다.
* * *
콰앙!
카샬은 문을 걷어차고서는 침대에 바로 눕혔다.
"독입니다!"
헤레스가 바로 하벨의 상태를 살피며 마법으로 주사기를 꺼냈다.
"얼마나 됐습니까?"
"몇 분 안 됐습니다."
"제가 드린 임시 해독제는 맞았나요?"
"예. 맞았습니다."
헤레스는 고개를 끄덕인 후 손가락으로 밖을 가리켰다.
"잠깐 나가 있어 주세요."
카샬은 대답도 하지 않고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하."
익숙한 복도가 보이자 카샬은 그제야 미끄러지듯 자리에 앉아서야 숨을 몰아쉬었다.
"…미친."
자신의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두 손이 아직도 덜덜 떨렸다.
발작하듯 흔들리던 하벨의 떨림이 옮은 것만 같았다.
'독이라니. 어떻게 독이. 내가… 내가 다 확인했는데?'
카샬은 의문에 휩싸이다 말고 발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령들이 건넨 소식을 듣고 그대로 달려온 모양인지 룬델의 숨이 거칠었다.
"…하, 하벨은 괜찮더냐?"
새하얗게 질린 룬델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여 카샬은 목이 메어왔다.
"죄송… 합니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카샬은 허리를 숙였다.
한 번도 아니고 벌써 두 번째였다.
하벨이 눈이 내린 산에 오를 동안 아무것도 몰랐고, 이번에는 독이 든 음식도 몰라봤다.
"카샬. 하벨은. 하벨은 괜찮더냐?"
룬델은 카샬을 재촉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더냐?"
침착하려고 애를 쓰는 룬델의 모습에 카샬은 한없이 미안했다.
"독입니다."
카샬은 자신의 옷자락을 세게 붙잡았다.
새로운 발소리를 들었지만, 카샬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주먹을 맞았다.
뻐억!
두 눈이 뻘게진 라르웬이 카샬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카샤알…! 네가 미리 확인했어야지!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잖아! 하벨의 집사 자리를 원했던 너였잖아! 네가 하벨을……."
"확인했습니다. 제가 분명히 확인했다고요!"
답답함에 카샬의 언성이 같이 올라갔다.
밀려오는 죄책감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뭐?"
라르웬은 멱살을 잡은 상태로 눈을 크게 떴다.
"제가 먼저 맛을 봤습니다. 저는 괜찮았는데 도련님께서는……."
"그만하거라."
룬델은 바람에 선 촛불 같은 카샬의 모습에 라르웬을 말렸다.
"제기랄. …하."
겨우 숨을 내쉰 라르웬의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미안해."
라르웬은 그제야 멱살을 놓고는 카샬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다, 카샬."
순간 '독' 이야기에 눈이 뒤집혔어도 이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두 분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카샬은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은혜를 갚고자 하벨의 집사가 되겠다고 한 것도 자신이었고, 최선을 다해 하벨을 지키겠다고 저들 앞에 맹세한 것도 자신이었다.
침묵이 흘렀다.
탁.
1분, 10분이 되던 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모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지금 간신히 진정되어 잠이 드셨습니다."
헤레스가 흘러내린 안경을 올리며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이마에 땀이 흘러내렸다.
"하벨은, 하벨은 괜찮은가?"
룬델이 바짝 마른 입술로 물었다.
"예. 다행히도 드신 독이 소량이라 괜찮습니다."
"…하."
룬델은 비틀거리다 벽을 붙잡고는 숨을 거세게 내쉬었다.
"고맙네. 정말 고맙네, 헤레스."
"인사는 카샬 씨가 받아야 합니다. 조치가 빨라 도련님께서 무사하실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헤레스는 카샬에게 고개를 숙였다.
카샬에게 간단히 몇 가지를 알려줬는데 이렇게 빛을 발하게 될 줄이야.
카샬은 안도하며 그제야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헤레스 씨."
헤레스에게 숙인 카샬의 허리가 좀처럼 들리질 않았다.
* * *
[안녕!]
뭔가 익숙한 목소리에 하벨은 뒤를 돌려다 멈칫거렸다.
이상했다.
바닥도, 벽도 없는 세상이라니.
하벨은 눈동자를 천천히 굴렸다.
'…아.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그제야 하벨은 알았다.
인간들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꿈을 통해 꾸곤 한다는 걸.
'수프 한 숟가락을 먹고 쓰러진 이후인 건가.'
랜턴의 검은 불꽃이 피어났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하벨은 안타까움과 신기함을 느끼며 뒤를 돌았다.
물이 넘실거렸다.
그 속에 누군가 있었는데 잘 보이지 않았다.
[쭉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물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꼬마 왕자가 근엄한 척 꺼내는 목소리를 닮아 있었다.
[그런데 이 몸이 그럴 수준까지 자라지 못했어. 지금도 정말 간신히 들어온 거라구.]
하벨은 혼자 이것저것 떠드는 목소리에 눈을 깜박였다.
[있지. 이 몸이 뭐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것보다 그대가 누구인지부터 말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 싶다."
[…이러면 나빠. 실망이야, 대장.]
대장이라니.
하벨은 곧 환하디환하게 웃었다.
실제로 들어보지 못했지만, 꿈에서라도 들을 줄이야.
"미안하구나. 내 조금 더 빨리 너를 알아봤어야 했다. 아라야."
[응! 이 몸은 아라야!]
갑자기 물이 신나게 흔들렸다.
[대장은 이 몸이 어떻게 됐으면 좋겠어?]
아라는 다시 물었다.
"너는 뭐가 되길 바라는가?"
꿈에서라도 아라와 이렇게 말을 나눌 수 있다니.
하벨은 참 즐거웠다.
[이 몸은… 어음, 몰라. 모르는 것들뿐이야. 어려워.]
하벨은 그 말에 키득거렸다.
[대장이 알려줘. 대장은 이 몸의 대장이잖아?]
아라가 눈을 크게 뜨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하벨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아라야. 나는 네가 자유로웠으면 좋겠다."
[헤헤. 이 몸은 이미 대장 덕에 자유로워. 정말이야!]
"다정했으면 해."
[다정하다는 게 뭐야? 대장이 이 몸을 쓰다듬어주면 밀려오는 간지러움 같은 거야?]
"그래."
하벨은 눈웃음을 지었다.
[어려워. 이 몸에게는 아직 감정이 어려워.]
"그리고 늘 행복했으면 해."
[아! 이 몸은 행복이 뭔지 알아. 제일 처음 느꼈던 감정이야. 지금도 계속 행복하구. 대장이 맛있는 물을 줄 때가 제일 행복해!]
헤헤.
아라가 배시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몸은 계속, 계속 자랄 거니까, 다정하게 대해 줘. 그럼 이 몸이 대장을 보고 다정함을 배울게.]
"그래. 그러마. 약속해."
하벨은 만약 아라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면 꼭 물어보고 싶었다.
"아라야. 내가 붙여준 이름이 마음에 들었으면 하는구나."
[아라가 좋아. 이 몸은 대장이 아라라고 불러줘서 아라가 됐는걸?]
"다행이구나. 마음에 들어서."
[아차차, 대장.]
"말하거라."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마. 이 몸이 엄청 슬펐다구.]
아라는 투덜거렸다.
"아무거나 주워 먹지 말라니. 그게 무슨……."
하벨이 말을 잇기도 전에 자신의 몸을 낚아채는 듯한 느낌에 휩싸였다.
"잠깐만. 아직!"
* * *
깜박깜박.
"…정신이 들었더냐?"
하벨이 눈을 뜨자 옆에서 룬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라가 많이 걱정했단다."
그제야 훌쩍이는 아라의 울음소리가 들려와 하벨은 손을 뻗었다.
[…삐이.]
'역시 꿈이었나.'
하벨은 아쉬웠다.
꿈에서 나눴던 아라와의 대화가 정말 즐거웠는데.
'대장 소리도 좋았지.'
늘 딱딱하게 들려왔던 '용왕님'이라는 말보다 훨씬 친근하게 다가왔다.
하벨이 아라를 달래러 팔을 뻗자 이상하게 몸이 무거웠다.
"밥… 먹고 있었는데요."
하벨은 아라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룬델에게 말을 꺼냈다.
"갑자기 피가 흘렀고,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어요."
이전 몸은 독에 당해도 물이 알아서 해독해줬기에 무슨 느낌인지 몰랐다.
만약 자신이 독에 당한 거라면 호기심은 이미 해결됐으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이게 독일까요?"
하벨이 힘없이 웃자 룬델은 하벨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많이… 아팠더냐?"
"글쎄요. 정화 장치가 시끄럽게 '삑삑' 거릴 때가 더 아팠습니다."
아플 틈도 없이 정신을 놓고 말았다.
정신은 온전한데 아프기만 한 물의 저주가 더 지독하지 않을까 싶었다.
"독이 맞단다."
만난 지 겨우 1주일밖에 되지 않아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우습다는 걸 알지만, 하벨은 숨을 잠깐 내쉰 후에 목소리를 꺼냈다.
"카샬은… 아닙니다."
"알고 있단다. 누가 뭐라고 해도 카샬은 너에게 그럴 수 없지."
카샬을 향한 룬델의 강한 신뢰에 하벨은 도리어 의문이 생겼다.
지금도 티에라 가문 여기저기에 구멍이 송송 뚫려있지 않은가.
"왜 그렇게 카샬을 믿으십니까?"
"기억이 나지 않겠지만, 카샬을 선택한 건 너란다."
'하벨 티에라가?'
하벨은 무언가를 떠올려보려 했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기억에도 발이 달려 있는지 순 자기 마음대로 떠올랐다.
"…카샬은 괜찮습니까?"
하벨은 시선을 돌리다 하벨 티에라의 방이라는 걸 알아챘다.
"음식에 독이 나오지 않아서 카샬은 괜찮구나."
"독이 나오지 않았다뇨?"
"너만을 노린 독이었다. 자세한 게 나오면……."
"제가 하겠습니다."
하벨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룬델의 손을 붙잡았다.
"그게 무슨 소리더냐?"
평소와 달리 부드럽지 않은 목소리에 룬델이 화가 났음을 알았지만, 하벨은 입꼬리를 올렸다.
"짐작 가는 놈이 있습니다. 제가 할 테니, 가주님께서는 가문을 시끌벅적하게 뒤집어주시면 됩니다."
"하벨아. 너는 독에 당해 죽을 뻔했다."
룬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그 사실부터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더냐."
"받아들이면 뭐가 달라집니까?"
"가만히 있거라.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미 지겹도록 가만히 있어 봤습니다."
하벨은 순간 울컥해 배에 손을 올렸다.
여러 개의 날붙이가 제 몸뚱이를 관통했다.
차가웠고, 서늘했던 그 감각을 어떻게 잊을까.
이미 바다에 존재하던 적은 사라졌고, 평화만 이어졌는데 누가 자신을 죽였는지는 애써 떠올리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나는… 배신을 당했다.'
단지 생각만으로 온몸이 떨려왔다.
분노라기엔 짙었고, 증오라기엔 옅었다.
"괜찮더냐?"
룬델은 그 떨림에 깜짝 놀랐다.
"조금 더 일찍 행동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하벨은 룬델이 모르는 이야기를 꺼내며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였다.
이건 후회였다.
자신이 왜 죽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왜 이렇게 됐는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제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사랑하는 아이들이 자신보다 먼저 죽었기에 그 슬픔에 빠졌고.
"그래서."
영광이 시간을 따라 바래지는 줄도 모르고 영원할 거라 믿었으며, 동시에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사랑했기에 아무것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인형과 다를 것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룬델은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하벨이 산에 오르기 전날, 자신을 찾아왔었다.
―아버지.
평소보다 조금 더 무겁게 말을 꺼내며.
―제가 정령사가 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지기 전에 강해질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볼 걸 그랬습니다.
그때, 꺼냈던 말은 방금 하벨이 했던 말과 달랐지만, 비슷했다.
―분명 바뀔 수 있었는데, 제가 힘이 없어서. 제가 약해서 아무것도 바꾸질 못했습니다.
"후회합니다."
―후회… 했습니다.
룬델은 두 목소리가 겹쳐지는 듯한 상황에 입술을 꾹 다물며 파르르 떨었다.
그때, 하벨이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지금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자아의 혼동이 찾아온 지금도 그때 후회가 드러난 거라면.
"…하벨아."
룬델의 목소리가 떨리자 하벨은 깜짝 놀랐다.
"제가… 가주님을 슬프게 했습니까?"
룬델은 고개를 가로저은 뒤에 물었다.
"만약 내가 이번 일을 끝까지 막는다면 후회하겠더냐?"
하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유가 뭔지 알았다.
행복하다는 감각 역시 또렷이 느꼈다.
자신의 이전 삶을 후회했으니 되풀이할 생각 역시 없었다.
"예. 후회하는 삶은 한 번이면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