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6화 (26/415)

26화.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2)

* * *

"아, 아니. 제 말은 그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말실수였습니다."

하벨은 다급히 사과했다.

이건 단지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문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이런 실수를 하다니.

"제가 다시금 사과드리겠습니다. 동생이 병상에서 털고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몸이 좋지 않습니다."

라르웬은 하벨을 보호하며 말을 꺼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이고, 나 역시 계속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바안이 새삼 사람 좋은 얼굴로 웃자 하벨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이 망할 입. 언젠가 사고를 칠 거라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크게 칠 줄이야.'

"정말입니다, 하벨 공. 오히려 불의를 참지 못하고 나서줬던 공의 용기에 나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바안은 진심으로 하벨에게 고마움을 드러냈다.

곧 바안의 표정이 살짝 가라앉아갔다.

"나라가 완전히 썩은 건 아니라는 걸 알려주셨잖습니까."

바다에 정차 없이 떠돌아다니던, 주인을 잃은 나룻배처럼 공허하면서도 불안한 시선으로 하벨을 보던 바안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을 오래 뺏지 않겠습니다."

"저하."

하벨이 바안을 불렀다.

"말씀하세요."

"지쳐 보입니다."

자신의 옛 모습이 살짝 보이는 것 같아 하벨은 그 말을 꺼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책임감에 얽매여 끝없는 바닷속으로 끌려갈 것만 같지 않은가.

"…그렇게 보입니까?"

바안은 마치 이런 소리는 처음 듣는 것처럼 크게 놀라며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예. 그렇게 보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안은 다시 자리에 앉아 하벨에게 조언을 구했다.

"다 잘할 수 없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처럼 보였기에 하벨 역시 진지하게 대답했다.

처음 본, 하물며 성인도 되지 않은 소년에게 조언을 구한다는 자체가 바안이 얼마나 절박한지, 조언할 사람조차 없을 정도로 고독한지를 알 수 있었다.

"하나씩 해결하십시오."

늘 웃음을 달고 있던 하벨이 웃지 않자 라르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멀리 보셔야 합니다."

왕이란 이름을 다는 순간,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있었다.

하물며 바스러져 가는 나라의 왕자라면 어떤 심정이겠는가.

"고독하고 견딜 수 없을 만큼 버거우실 겁니다."

차분히 꺼내는 하벨의 말에 바안의 손끝이 떨렸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소년인데 자신의 아버지를 보는 것 같지 않은가.

"그래도 버티고 싶으시다면 다시 처음부터 걸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걸어야 합니까?"

"잘못된 매듭으로 끝을 완성할 수 없잖습니까?"

"그렇죠. 결국, 매듭은 완성을 시킬 수 없죠."

"짊어진 게 많은 만큼 느리게 걸으셔야 합니다. 하나씩, 하나씩 살피십시오."

자신은 그 무게가 버겁고 지쳐 손에 쥘 수 있었던 것도 다 놓아버렸다.

그렇기에 하벨은 바안이 가진 저 마음이 오래 유지되길 빌었다.

"나는 성질이 급합니다."

"그래도 느리게 걸으셔야 합니다. 제대로 된 한 걸음이라면 저하의 곁을 따르는 이가 둘이 올 겁니다. 또 다음 한 걸음이 옳다면 저하를 따르는 이가 넷이 될 겁니다."

거듭된 하벨의 조언에 바안은 어깨에 힘을 천천히 빼었다.

기쁜 듯, 혼란스러운 듯, 그래도 또 고마운 듯.

그렇게 복잡한 심경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나는……."

"저하."

라르웬이 바안의 말을 막았다.

"거기까지 하십시오. 이는 저하를 위해서 드리는 충언입니다."

"…미안합니다."

바안은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했는지를 알았다.

저 아이가 탐이 났다.

하지만 탐이 난다 해서 손에 쥐려 한다면 자신들을 도와주는 티에라 가문에 칼을 찌르는 게 아닌가.

"그럼 이만 가겠습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먼저 발걸음을 떼던 바안은 잠깐 멈춰 하벨에게 고개를 숙였다.

"조언, 감사합니다."

진한 초록색 머리카락을 후드에 숨기며 바안의 회색 눈동자가 살포시 감겼다.

하벨은 그가 간 뒤에야 입을 열었다.

"왕자라고 해도 이제 갓 성인이 된 듯한데 고생이네요."

"막내야? 너는 아직 미성년자야. 네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다?"

라르웬은 기가 찬 듯이 대답했다.

왜 수백 년은 산 사람처럼 말하는지.

"…아. 잠깐 잊어버렸습니다."

하벨은 자신의 나이가 7일이라는 걸 다시금 떠올렸다.

"음… 내가 냉정해 보였을 수도 있어."

라르웬이 말을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이전에도 말했듯이 나라에 내분이 일어나면 그 여파가 우리한테 세게 닥칠 거야. 네가 날 오늘 일로 달리 보아도 나는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거야."

"형님, 거기까지 말한 적 없습니다."

"알아. 그래도 꼭 말해야 할 순간이라는 게 있잖아?"

억울해하는 하벨을 보며 라르웬은 가볍게 웃었다.

"지금 왕권은 바닥에 떨어졌고, 이를 도와주면 귀족들에게 좋은 먹잇감만 줄 게 뻔해.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럼, 다시 떨어진 왕권을 주워주면 귀족들에게 엿을 먹일 수 있다는 말이네요?"

"대단하다. 대단해, 막내야. 이런 와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다니."

"되게 좋은 정보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뿌리를 확실하게 뽑을 생각이었고, 덤으로 평생 기억 속에 남겨줄 사건이 하나 있었으면 했습니다."

"귀족들한테 원한이라도… 아, 얼마 전에 생겼구나."

"어쩌면 또 생길지도 모르죠."

하벨은 실실거렸다.

하벨 티에라는 몰라도 자신은 쌓인 게 많았다.

용왕이었을 적 감정을 제외하더라도 하벨은 자신의 잠을 깨우고 목숨을 노렸던 그 행동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나저나 형님."

"그래."

"티에라 가문이 유명하다면서 왕자가 왜 이 얼굴을 모르는 겁니까?"

바안이 처음 자신을 봤을 때, 경계했다.

정말 처음 봤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거야 아버지께서 널 꼭꼭 숨겼으니까."

하벨의 표정이 굳어지자 라르웬은 손바닥을 흔들어 보였다.

"막내야. 널 진짜로 가뒀다는 게 아니라 중요한 자리에 널 데려가지 않았다는 말이야."

"하벨 티에라가 부끄러웠……."

"아니!"

라르웬은 정말 다급할 정도로 소리치다 말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소리쳐서 미안. 괜찮아?"

"그 정도는 괜찮습니다. 언성이 높아지면 소리칠 수도 있죠."

괜찮다는 말에도 라르웬은 하벨의 상태를 살폈다.

정말 괜찮다는 걸 알자 라르웬은 다시금 숨을 깊게 내쉬었다.

"하벨. 진짜로 우리는, 아니, 나는 네가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 우린 적이 많아. 지금도 암살자니 뭐니 하면서 붙은 거 봐봐라."

"내 마음은 변함없으니 은근슬쩍 설득하려 하지 마십시오."

"눈치는 더럽게 빠르네."

라르웬은 가볍게 혀를 찼다.

"난 여전히 네가 그쪽 세계에 발을 디디는 건 반대하지만, 네가 바라면 얼마든지 도와줄게."

"앞뒤가 안 맞는데요?"

"원래 그런 거야. 사람이 융통성이 있어야지."

하벨은 얼렁뚱땅 넘어가려 꺼내는 라르웬의 말이 제법 마음에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융통성이 있어야죠. 그런 의미에서 젤리 사도 됩니까?"

"물론이지."

라르웬이 키득거렸다.

* * *

하벨은 경쾌한 걸음으로 지하 감옥으로 걸어갔다.

'내가 왜 감옥으로 가는지 궁금해 죽을 거다.'

하벨은 페트리오를 이곳으로 꽂아 넣었던 놈이 지켜볼 걸 생각하니 벌써 즐거웠다.

"아."

하벨은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아라를 바라보았다.

세렌이 어지간히도 싫은지 자신의 주머니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다 감옥에 와서야 주머니에서 벗어나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있었다.

[삐이?]

무슨 일이야?

아라는 하벨을 바라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하벨의 손가락 끝에 몽글몽글 맺혀가는 물을 보자 아라가 다급히 달려들었다.

[삐이이잇!]

들뜬 소리에 하벨은 뿌듯했다.

"내가 주는 물이 최고지?"

[삐잇!]

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야. 아까 내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모처럼 밖에 나왔는데 코피를 흘리는 건 좀 그래서 물을 주는 게 늦었어. 미안해."

신나게 물을 먹던 아라가 잠깐 멈췄다.

[…삐이.]

익숙하다는 듯 손수건을 꺼내는 하벨의 모습에 아라가 살짝 시무룩했다.

"혹시 지금 날 걱정하는 거야?"

하벨이 코 쪽으로 손수건을 대다 말고 활짝 웃었다.

누군가 자신을 걱정해주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라는 걸 알기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럴 필요 없어. 나는 네 대장이니까. 처음 약속했던 대로 나는 너를 보호하고 보듬어주며 물도 줄 거야."

하벨은 아라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물을 조금씩 홀짝거리며 아라는 하벨의 눈치를 살폈다.

"아라야. 먹을 거면 먹지 내 눈치는 왜 살펴? 옛날부터 뭐든 주는 건 익숙하니까 괜찮아."

하벨은 키득거리며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확실히 순환의 길에 막이 생기니까, 물을 부리는 것도 이전보다 낫네.'

아라를 위해 물을 불렀을 때, 엄지만 한 크기는 변하지 않았지만, 모이는 속도는 달라졌다.

하벨은 즐겁게 부르는 아라의 흥얼거림을 들으며 계단 끝에 있는 문을 열려다 말고 멈췄다.

'…그러고 보니 물을 그냥 부르면 불순물이 차오르진 않은데, 왜 정령수에만 반응하는 건지 모르겠네.'

하벨 티에라가 앓는 물의 저주가 변종이기 때문일까.

하벨은 생각을 멈추며 문을 밀었다.

지하 감옥에 유달리 빛이 환한 곳이 있었다.

"도, 도련님!"

페트리오가 하벨을 알아보며 당장 쇠창살에 매달렸다.

"좀도둑."

하벨이 씩 웃자 페트리오 역시 씩 웃었다.

"잘 지내나 보네. 저번에 본 것보다 안색이 좋아."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누가 뭐라고 해도 감옥이잖습니까. 감옥이 편한 사람은 아무도 없죠."

"여기 생크림이 묻었어."

하벨이 입가를 가리키자 페트리오는 다급히 입을 쓱 닦았다.

"보… 였습니까?"

페트리오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서 성과는 있었어? 이제 슬슬 알고 싶어서 왔어."

"그렇지 않아도 보고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드디어 오래 간을 보다가 도련님 말씀대로 제게 접근해 탈출 계획을 알려줬습니다."

페트리오는 딱 입 안에 숨기기 좋을 만큼 둘둘 말린 종이를 건넸다.

"축축한 건 이해해주십시오. 진짜로 입에서 꺼내더라고요."

"다른 건?"

하벨은 종이를 펼치며 물었다.

"뭔가 계획을 벌이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자주 꺼내더라고요."

"봐. 내가 뭐라고 했어?"

하벨이 우쭐거리자 페트리오는 얼른 대답했다.

"적이 절 미끼로 삼는다고 했습니다."

"정확히는 네 목숨을 희생하는 거지."

하벨은 종이에 적힌 글자를 확인하고는 다시 페트리오에게 넘겼다.

"계획대로 진행해."

"이참에 제 손을 좀 밟는 건 어떠십니까?"

"서로 싸운 척을 하자고?"

"그편이 자연스럽지 않겠습니까? 도련님께서 여기에 오셨으니 적들이 엄청 궁금해할 텐데요?"

"그런데 우습긴 하잖아. 솔직히 말하면 너는 내 업적 중 하나야. 정화제를 훔치려던 좀도둑을 잡았으니까."

"저는 좀도둑이 아닙, 아니, 맞습니다."

페트리오는 하벨의 말을 부정하려다 말을 바꿨다.

부정한들 정화제를 훔치려고 한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굳이 폭력을 쓸 이유는 없어. 차라리 이런 식으로 회유가 낫지 않겠나 싶네."

하벨은 페트리오에게 보석을 건넸다.

"…허."

페트리오는 보석을 받자마자 침을 꿀꺽 삼켰다.

"봤지? 바로 넘어오잖아?"

하벨은 키득거렸다.

* * *

"도련님."

카샬은 날아온 새의 다리에 쪽지를 빼내 하벨에게 넘겼다.

하벨은 탁자에 차려진 밥을 먹으려 숟가락을 쥐려다 쪽지를 받았다.

레디나였다.

―뒤처리 완료. 첩자로서 재잠입 성공. 1차 임무 완수 후 2차 임무로 진입. 응원 바람.

"오."

하벨은 꽤 빠른 성과에 기대감이 절로 높아지다 '당신의 첫 번째 신도로부터'라는 말에 쪽지를 구겼다.

"레디나 씨입니까?"

"맞아. 뒤처리는 잘된 모양이야. 생각보다 능력이 좋아."

하벨은 쪽지를 다시 카샬에게 넘겼다.

카샬의 한쪽 눈썹이 치켜올랐다.

"제가 이걸 가지고 딴마음을 품을 수 있잖습니까?"

"이래서 추가 임금을 먼저 주는 게 아니었는데."

하벨은 자신을 떠보는 카샬을 보며 혀를 찼다.

"이미 주신 걸 어쩌겠습니까?"

"태워줘."

"알겠습니다."

카샬이 실실 웃으며 음식을 가리켰다.

"오늘은 가문에서 드시는 첫 식사라 요리장이 무척 신경 썼다고 합니다."

"수프는?"

"입가심이라고 하죠. 여기 있으니 먼저 드시죠."

"내 추억이 더럽혀진 기분이라 좀 그렇지만."

하벨은 음식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오늘은 정말 행복해."

하벨이 숟가락을 들자 음식 주변으로 빙글빙글 돌아다니던 아라가 다급히 하벨에게 날아와 숟가락을 이빨로 깨물었다.

[삐잇!]

하지만 하벨은 이미 수프를 넘긴 뒤였다.

[삐이이이잇!]

아라가 기겁하자 하벨은 기분이 이상했다.

시선을 옮기자 랜턴에 검은 불꽃이 화르륵 타오르고 있었다.

하벨의 얼굴이 굳었다.

"카샬, 혹시 여기에 뭘 탔어?"

"그럴 리가 있습니까? 독 검사는 이미 다 마쳤습니다. 저도 미리 맛을 봤고요."

―…독을 조심하십시오.

그런데 갑자기 왜 페트리오의 말이 떠오르는지.

후두둑.

하벨은 뜨거워진 코밑을 보다 말고 의문을 느꼈다.

"…피?"

하벨이 입술을 움직였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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