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 * *
심지어 저 남자가 꺼내는 말은 사실에 가까웠다.
날씨 정보는 엉터리였고, 일반 비도 아니니 분명히 더 조심해야 할 일이었다.
누군가 죽는 것도 아닌 상황에 정보만 바꾸면 많은 사람을 구해 더 큰 이득이 돌아올 수도 있는데 이를 거부하다니.
이 세계 역시 크게 보면 자신이 있던 세계와 다르지 않았다.
"아, 실례했네. 방금 그 개소리를 그냥 듣고 흘리기에 어려워서 말이야."
장난기가 어린 말투에 직원은 미간을 찌푸리다 말고 멈칫거렸고, 남자는 갑자기 나타난 하벨을 경계했다.
하벨은 얼빠진 직원을 보며 싱긋 웃었다.
"이미 전달된 일기 예보를 정정하는 건 그대의 권한이 아니라고 들었네."
직원은 눈을 깜박거렸다.
하벨이 입은 옷이며 생김새며 귀티가 흘러넘치는 게 갑자기 입안이 바짝 말랐다.
혹시 귀족이 아닐까.
아니, 무조건 귀족일 수밖에 없는 얼굴이었다.
"…그랬습니다."
직원은 괜히 위축된 상태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여기서 실랑이를 벌이는 게 아니라 어서 그대의 상사에게 연락해 다시 상황을 확인하는 게 먼저이지 않은가?"
"그, 그렇죠."
"그럼 뭐 하는가? 어서 움직이질 않고."
자연스러운 명령에 직원은 건물로 들어가다 말고 멈칫거렸다.
생각해보니 왜 자신이 저 사람의 명령을 듣고 있는지.
가뜩이나 저 남자 때문에 일어났던 짜증이 폭발하기 직전까지 차올랐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기상국이 뭐 하는 곳입니까?"
직원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단지 날씨를 맞히는 곳을 넘어 아주 중요한 곳이지. 오염된 비가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기에 그 어떤 곳보다 정확성을 중시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가?"
하벨은 자연스럽게 남자에게 물었다.
손에 종이를 쥔 남자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은 잠깐 입가를 핥더니 맞는 말에 언성을 살짝 누를 수밖에 없었다.
"예. 이런 시국에 날씨의 중요함을 그 누구보다 알고 있는 곳입니다. 잘못됐으면……."
"잘못됐으면 그대가 책임을 지는가? 나는 방금 들은 일기 예보가 잘못됐다는 것에 이걸 걸겠네."
하벨은 목숨이라는 말을 꺼내려다 멈칫거렸다.
자신이 이 몸을 쓰고 있지만, 이건 자신의 목숨이 아니었다.
하여 하벨이 꺼낸 건 보석이었다.
꿀꺽.
직원이 당장 마른 침을 삼켰다.
저토록 선명한 욕망에 하벨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럼 지금 바로 확인하겠……."
"아니, 그럴 필요 없네."
하벨은 직원의 말을 가볍게 자르며 뒤쪽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라르웬과 카샬이 갑자기 무게를 잡고 걸어오고 있었다.
하벨은 필사적으로 입술을 악물며 웃음을 참았다.
"모름지기 정령사보다 날씨를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으니."
하벨은 일단 조명을 라르웬에게 돌렸다.
티에라 가문이 대단하다, 유명하다라는 말은 지겹도록 들었으니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딱 보아도 기상국이라는 곳은 국가 기관인 것 같은데 과연 얼마나 손쉽게 뒤집힐 수 있는지 보자고.'
"저, 저, 정령사라고요?"
직원은 당황했고, 남자의 시선이 잠깐 바뀌며 이미 쓰고 있던 후드를 더 깊게 내렸다.
"날씨 정보는 잘못됐으니 정정하는 게 좋을걸세."
라르웬이 사실을 꼬집자 직원은 불편함을 드러내며 뒷걸음질했다.
"하, 하지만 제가 할 수 없는……."
"아. 제가 이걸 보여드리지 않았네요."
카샬은 천연덕스럽게 아공간 주머니에서 배지 하나를 꺼냈다.
배지는 마름모 모형이었으며 그 속에 연꽃을 닮은 꽃이 피어 있었고, 배지의 위와 아래 꼭짓점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 빛 모양이 박혀 서로 사선을 이루고 있었다.
그 배지를 보자마자 직원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저 문양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티, 티, 티……."
"자, 이제 그 잘난 상사 얼굴 좀 볼 수 있는가?"
하벨이 장난스럽게 묻자 직원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덜덜 떨었다.
* * *
"…이 감사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티에라라는 이름에 기상국 상사가 아니라 이곳을 다스리는 귀족이 튀어나왔다.
하벨은 그 사실에 솔직히 깜짝 놀랐다.
효과가 너무 좋지 않은가.
자신을 '데론'이라 알린 귀족은 뤤트로와 달리 굽실거리나,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랜턴에 검은 불꽃이 나타났다.'
점보다 작은 검은 불꽃.
어떤 형태로든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하벨은 허투루 데론을 보지 않았다.
"내가 부른 건 이곳을 관리하는 기상국의 직원이지 그대가 아니었네. 왜 그대가 오는 건가?"
라르웬은 바로 불만을 드러냈다.
"귀중한 손님께서 오셨는데 당연히 제가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귀족이 아님에도 라르웬은 하대했고, 데론은 그런 그에게 자연스럽게 존대를 꺼냈다.
그 모습에 하벨은 비로소 티에라 가문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제가 잘 타이르겠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입에 발린 데론의 말과 뻔뻔함에 라르웬은 미간을 꿈틀거렸다.
"그대가 기상국에서 일하는가?"
"아닙니다."
"하면 왜 그대가 타이르니 뭐니 하며 언급하는 건가?"
라르웬은 기가 찬 듯이 물었다.
"제가 이곳을 다스리는 자이니 그 정도의 권한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라르웬은 데론이 대놓고 비리를 인정하자 자연스럽게 하벨을 바라보았다.
보아라, 동생아. 귀족이 이만큼이나 썩었다. 네가 들어가고자 하는 세계가 이렇단 말이다.
꼭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아 하벨은 마음이 편안했다.
적어도 목을 댕강댕강 베어버릴 때, 손톱만큼 남아 있을 미안함마저 싹 사라져버릴 테니까.
"조금 전 기상국의 직원이 벌인 무례를 다시금 사과하겠습니다. 하여 이번에 사들일 정화제의 값을 세 배로 치겠습니다. 혹시 더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사과에는 진심이 없고, 데론의 표정만은 완벽했다.
라르웬은 다시금 하벨을 쳐다보았다.
"원하는 게 있어? 뭐든 말만 해."
"당연히 있습니다."
하벨이 천연덕스럽게 미소를 짓자 데론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벨은 어렸고, 뭣도 모를 만큼 순진해 보였으니.
기껏해야 값비싼 보석이나 옷가지가 아니겠는가.
그 정도야 티에라 가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며 이번 일을 덮는 값으로는 아주 값싼 편이었다.
"일기 예보에 신경을 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하벨은 무언가 걱정된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순간, 데론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마치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이 영토가 당신이 관리하는 영토이기에 이래라저래라 말을 한다는 게 얼마나 불쾌한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벨은 한발 빠지는 척,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하벨 티에라가 가진 말투는 가벼웠기에 빈정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같은 오보가 줄었으면 합니다."
그렇기에 하벨은 필사적으로 목소리에 힘을 주어 자신이 얼마나 진지한지를 알렸다.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마지막에는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뺐다.
가벼운 말투에 가장 어울리는 말이 아닌가.
누가 들어도 강요보다는 부탁처럼 들릴 테니까.
무엇보다 데론 자신이 직접 꺼낸 말이고, 명분도 적당했고, 그놈의 자존심 때문이라도 데론은 거절하지 못할 테지.
"노력… 해보겠습니다."
데론은 흔들렸다.
저 가벼워 보이는 부탁 속에 많은 것들이 숨어 있었다.
역시 티에라 가문의 사람이라 다른 건지.
노력이라는 이름으로 능숙하게 도망가려던 차, 하벨은 확실히 칼을 박아뒀다.
"제대로 오보를 줄여주시리라 믿겠습니다."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내놔라.
통보에 가까운 말을 꺼내며 하벨은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만."
"잠시만요."
데론은 다급히 하벨을 불렀다.
갑자기 자연스럽게 사건이 커져 버렸다.
"내가 요새 날씨에 관심이 많아요. 날씨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놈들이 많아져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하벨은 싱긋 웃었다.
철부지처럼 들릴 수 있는 말이나, 그 상대가 티에라 가문의 막내아들이었다.
말 속에 뼈가 있었고, 다른 것도 아닌, 날씨 정보였기에 여기서 더 뺐다가는 자신이 곤란해졌다.
"힘이… 닿는 데까지 신경 쓰겠습니다."
데론은 할 수 없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얼굴이 달아오를 것처럼 얼얼했다.
"예. 그럼, 기대하겠습니다."
하벨은 그대로 상쾌한 얼굴로 건물을 빠져나와 문을 열었다.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뒤쪽에서 라르웬의 웃음이 터졌다.
[삐이잇!]
문틈으로 아라의 목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얼굴 쪽에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삐잇. 삣. 삐삐. 삐이이잇!]
아라가 자신에게 얼굴을 비비며 신나게 떠들었지만, 하벨은 느낌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네가 원하는 바를 내가 들어줬다. 그러니 칭찬과 함께 물을 내놔라가 아닐까?'
건물에 들어서기 전에 하벨은 아라에게 남자를 감시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부탁을 정말로 들어줄지 몰랐지만, 참 기특했다.
"잘했어. 착하네, 아라야."
아라가 스스로 손바닥으로 폭 들어와서는 몸을 빙글빙글 돌렸다.
찌르르.
자신과 아라의 마음이 통했는지 교감이 느껴졌다.
[삐이잇!]
아라가 손바닥에서 나와 앞으로 둥둥 떠서는 귀를 쫑긋 세웠다.
이쪽으로 따라오라는 것 같았다.
[나도 길은 아는데.]
라르웬의 머리로 올라간 루룸은 아라를 보며 실실 웃었다.
[삐잇!]
아라는 바로 루룸을 바라보며 언성을 높였다.
그 모습이 꼭 '제 사냥감입니다'를 말하는 하벨과 겹쳐 보여 라르웬은 슬쩍 말을 흘렸다.
"너랑 계속 같이 있어서 그런가, 아라가 널 좀 닮아간다?"
"그렇습니까? 기분 좋네요."
아라를 따라가며 하벨이 즐겁게 대답하자 카샬 역시 유쾌하게 말했다.
"자신감이 가득하십니다. 그렇죠. 자기 자신을 사랑하면 좋은 거죠."
"딱 반 정도만 닮았으면 해. 절반은 내가 봐도 그런데 나머지 절반은 훌륭하니까."
자연스러운 하벨의 대꾸에 카샬은 할 말을 삼키며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진짜로 자기애가 가득하다니.
"막내야. 아까 봤지?"
라르웬은 카샬을 비웃으며 하벨에게 말을 걸었다.
"귀족 말입니까?"
"그래. 잊지 마. 저 얼굴이야. 역겨운 귀족의 얼굴이."
"익숙한 얼굴이라 새삼 다를 건 없었습니다."
"그리고 네가 쫓고 있는 그 남자 말이야."
라르웬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건물에 몸을 숨겼던 남자가 자신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삐이잇!]
아라가 성을 내며 라르웬에게 달려들었지만, 자연스럽게 손으로 움켜쥐어서는 하벨에게 넘겼다.
"도망갈 줄 알았는데."
하벨은 아라를 받으며 조금 전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도망갈 이유가 있어야 도망을 가지 않겠습니까?"
남자는 여전히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하벨 뒤에 걸어오던 라르웬이 하벨을 제치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천천히 허리를 숙이자 하벨의 눈이 커졌다.
"저하."
"저하…?"
하벨은 라르웬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덩달아 카샬마저 바짝 얼어붙다 말고 허리를 숙였다.
"여기서는 눈에 띄니 조용한 장소로 갑시다."
남자는 웃음기를 띠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 * *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라르웬이 묻자 남자는 비로소 후드를 젖혔다.
곱슬기가 있는 단발 머리카락이 드러나며 남자는 살짝 웃어 보였다.
"…이렇게 만난 건 정말 우연입니다. 잠행을 나왔으니까요."
"위험한 일을 하셨습니다."
"압니다. 하지만 나라를 모르고 어떻게 왕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도 위험한 행동을 하신 겁니다."
"그 역시 압니다."
왕자는 라르웬의 꾸중에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조금 전 만난 귀족은 제 안위밖에 모르는 놈이었는데, 왕자는 적어도 나라를 걱정하는 자였다니.'
기상국 직원과 데론을 만난 후라 그런지 몰라도 하벨은 왕자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티에라 가문의 막내, 하벨 티에라라고 합니다."
"아차.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왕자는 하벨을 바라보며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바안 에르티안이라고 합니다, 하벨 티에라 공."
"저는 귀족이 아닙니다."
"존경을 담아 부르는 말이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게다가 티에라 가문 덕에……."
"저하."
라르웬이 도중에 바안의 말을 잘랐다.
무례한 행동이나 바안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아시다시피 제 동생은 많이 아픕니다. 솔직히 원치 않은 만남이라 불편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왕자인데 저래도 되는가?'
하벨은 유달리 예민한 라르웬의 태도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일은 저 역시 없던 일로 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바안은 하벨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올렸다.
"이런 일이 흔합니까?"
하벨이 꺼낸 말에 바안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흔한 일입니다."
'그런 중요한 상황을 알면서도 이걸 내버려 뒀단 말인가?'
"무능하네요."
빈정거리듯 툭 던진 말에 하벨 본인도, 바안도, 라르웬까지 깜짝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