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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4화 (24/415)

24화. 이렇구나, 이랬어(3)

* * *

"막내야?"

라르웬은 갑자기 슬픔이 그늘진 하벨의 표정에 그를 불렀다.

"뭐, 걱정되는 일이라도 있어?"

라르웬의 물음에 하벨은 자연스럽게 지어지는 표정을 막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배가 고파서 그럽니다."

하벨의 두 눈이 살포시 감겼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따지러 갈 걸 그랬네. 네 간식은 죄다 카샬이 가지고 있거든? 너도 이제 눈치챘겠지만, 카샬은 보통 집사는 아니야."

"진작 눈치챘습니다. 눈치가 좋거든요. 그나저나 왜 먼저 먹지 않습니까?"

하벨은 라르웬 앞에 놓인 음식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온 지 얼마 안 된 터라 아직 따끈따끈했다.

수프가 있으면 몰라도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것들이라 아직 군침이 돌진 않았다.

"너한테 꼬투리를 잡힐 수 없지."

라르웬은 팔짱을 끼며 씩 웃었다.

"이런 걸로 꼬투리 안 잡습니다. 먼저 먹어도 됩니다. 밥을 앞두고 기다리다뇨. 못 할 짓이잖습니까."

"농담이야. 내가 좋은… 형은 아니었더라도 먼저 먹을 만큼 매정하진 않아."

말꼬리를 살짝 늘이던 라르웬은 괜히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부끄러워?]

루룸이 눈을 반짝이며 묻자 라르웬은 루룸의 입을 잡았다.

"참, 힘을 사용하면 원래 이렇게 아픈 겁니까?"

하벨은 정령 이야기를 할 때마다 라르웬이 자꾸만 문을 바라보자 궁금증이 번졌다.

카샬하고 정령 사이에 뭔가가 있는 걸까.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음."

라르웬은 잠깐 생각했다.

순환의 길을 비우는 와중에 통증이 발생할 수도 있었고, 새로운 자연의 힘을 익힐 때도 통증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처음 겪는, 마치 성장통 같은 거라 차차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했다.

"개인차는 나긴 해. 넌 좀 심한 편이지 않을까 싶네."

"원래 아픈 거란 말이죠? 그래도 피를 토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뭐, 흔한 건 아닌데 넌 가끔 그랬어. 물의 저주 때문이지."

라르웬은 괜히 손가락으로 컵을 튕겼다.

자주 본다고 해서 결코 익숙해질 순 없었다.

가장 괴로울 하벨을 생각해 담담하게 보이려 라르웬은 표정을 다잡았다.

"혹시… 이 세계에 용이 있습니까?"

하벨은 식탁을 물들이는 불그스름한 빛에 자신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뜬금없는 질문에 라르웬은 턱을 괸 상태로 눈만 깜박였다.

[…푸핫! 용이 있냐니!]

루룸이 뒤늦게 뒤로 넘어지면서 발을 흔들었다.

똑똑.

노크한 후에 들어온 카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온도계를 꺼내 하벨의 체온을 확인했다.

삑. 삑. 삐비빅.

"미열이 있네요."

카샬은 온도계를 확인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야?"

라르웬의 얼굴이 구겨졌다.

"방금 너무 놀라서 열을 확인할 걸 보시면 모르겠습니까?"

카샬은 억울해하며 온도계를 내보였다.

"그럼, 용은 없는 겁니까?"

하벨이 웃음기를 지우자 라르웬은 루룸의 입을 막으며 대답했다.

"있었지. 그런데 다 죽었어."

"…알겠습니다."

얼떨결에 물었지만, 하벨의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

용이 없다니.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이런 감정은 낯설어 하벨은 자신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카샬에게 물었다.

"잘 해결됐습니다. 다들 친절했죠."

"친절? 나중에 내려갈 때 봐봐. 주방 쪽에서 눈물 바람이 일어났을 테니까."

라르웬은 카샬이 어떻게 했을지 알고 있기에 기가 찬 듯이 웃었다.

* * *

아이스크림을 삼킨 하벨의 손이 부르르 떨었다.

"…세상에."

모든 부드러움을 가득 담은 맛이었다.

[삐이?]

아라가 고개를 갸웃거리다 하벨이 붙잡은 숟가락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내가 이런 맛을 몰랐다는 말입니까?"

하벨은 아까도 억울했지만, 지금도 억울했다.

이렇게나 맛있는 음식들을 몰랐다니.

왜 수프만이 세상에 모든 맛이라고 생각했는지.

'내가 우물 안 개구리였다. 세상을 그토록 좁게 바라만 봤다니, 부끄러울 정도야.'

"내가 왜 카샬한테 화를 냈는지 알겠지?"

라르웬이 키득거리자 하벨은 계산하러 일어난 카샬을 노려보았다.

"이제 수프는… 아니, 수프만 먹진 않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차마 수프를 버릴 수는 없었다.

자신의 시작을 함께한 음식이 아닌가.

"물론입니다. 내일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올리겠습니다."

카샬은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그래. 내가 왜 외식을 했는지 모르지는 않겠지?"

라르웬이 넌지시 묻자 카샬은 떨떠름한 말투로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바뀐 도련님의 입맛을 하나씩 확인하라는 게 아닙니까?"

"그것도 있고. 그냥 기분이 좋아지잖아? 그렇지 않아, 막내야?"

라르웬은 다리를 가볍게 흔들며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아.'

하벨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라르웬의 말에 자신을 무관심하게 바라보던 관료들이 눈앞에 그려졌다.

행복함을 묻는 이들은 오래전에 사라졌으며 그들이 자신에게 바라던 건 그저 얌전히 왕좌에 앉아 숨만 쉬는 것이었다.

하벨은 찬찬히 그려지는 자신의 입꼬리에 눈웃음을 지었다.

"고맙습니다, 형님."

용왕이라는 이름은 한때 누군가의 존경이었으며 자랑이었겠지만, 변하는 시간 속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저 살아 있기만 하면 되는 인형이 된 것 같아 머리에 쓴 왕관이 너무도 무거웠다.

그래서 지쳤다.

그래서 버거웠다.

하지만 여기는 바닷속이 아니었다.

하벨은 식탁을 물들인 빛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웃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하루는 처음입니다."

왕관도 없고.

자신을 아는 이 역시 없고.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책임감도 없고.

이게 자유를 가졌기에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기쁨이지 않을까 싶었다.

"행복하냐?"

라르웬은 놀란 마음을 감추려 툭 하고 말을 던졌다.

고작 외식 한 번에 하벨이 정말로 행복하게 보여 마음이 좋지 않았다.

"행복하네요. 정말 행복합니다."

숨만 쉬어도 중독될 것 맛.

그 자유에 자신은 이미 중독됐는지도 몰랐다.

'자유가 억압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시는 건가?'

카샬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하벨을 지켜보았다.

"이제 더 힘내야겠습니다. 그럴 이유가 또 생겼고요."

하벨은 한 번 맛본 이 자유와 행복을 놓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방금 입 안에 사르르 녹았던 아이스크림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달콤했으니.

"비가 내리기 전에 가볍게 산책을 하고 싶습니다."

하벨이 아이스크림을 떠먹으려다 괴로워하는 아라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삐이… 잇!]

아라의 입가에 아이스크림이 묻어 있었다.

난생처음 느껴본 차가움에 아라는 눈을 질끈 감으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령도 아이스크림을 먹습니까?"

하벨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제 와서 아라가 가장 좋아하는 게 바뀌면 곤란했다.

이제야 훈련의 성과가 보이는데.

[아니. 우린 식욕이라는 게 없어. 애초에 뭘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단 말이지. 특이하네.]

루룸의 말에 하벨은 의아함을 느꼈다.

자신이 만든 물만 보면 눈부터 뒤집히는 아라가 식욕이 없다니.

* * *

<아아. 지금 현재 시각 오후 7시를 알립니다.>

저번에 들었던 일기 예보가 길거리에 세워둔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어느새 길거리에 가로등이 켜졌고, 가게에 간판에 빛이 들어와 조명이 은은하게 번져갔다.

<현재 강수 확률은 20% 미만입니다. 구름이 몰려오고 있으나, 비구름은 아니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엉터리네요."

카샬은 일기 예보에 혀를 찼다.

―지금은 당연히 안 오지. 아마 밤쯤에 여우비 정도로 내릴 거야. 확률은 55% 정도?

세렌이 알려준 날씨 정보와 너무도 달랐으니.

"도련님. 혹시 다음에 저 몰래 밖에 나가시거든 다른 건 좋으니 우산만은 꼭 챙기셔야 합니다. 일기 예보가 오보가 많습니다."

카샬은 무언가 생각이 났는지 하벨에게 당부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몰래 나가면 안 되지. 너, 다음번에도 가출했다가는 머리카락을 확 다 밀어버릴 거다."

황당해하던 라르웬은 곧 하벨을 보았다.

엉뚱하게 불똥이 튀었지만, 하벨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머리카락을 밀든 말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언젠가 또 자랄 텐데요. 솔직히 길어서 귀찮습니다. 확 잘라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일단 참았습니다."

장발을 고집한 건 하벨 티에라의 뜻이기에 하벨은 이를 존중하기로 했다.

"하벨. 나 지금 농담하는 거 아니야."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자 라르웬은 다시 엄포를 놓았다.

"나도 농담 아닙니다. 나는 가주님께 자유를 존중받기로 했고, 정말 필요하다면 또 가출할 겁니다."

"너어……."

라르웬의 인상이 구겨졌다.

"하지만 하벨 티에라는 슬퍼하겠죠. 형으로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게 과연 바람직한 행동인지 제대로 생각해보세요."

원래 자신의 몸으로 돌아왔는데 머리카락이 다 사라졌으면 하벨 티에라는 무슨 생각을 할까.

자신이 잘은 몰라도 아마도 좌절하지 않을까 싶었다.

"……."

말문이 막힌 라르웬을 보며 하벨은 자연스럽게 아공간에서 우산을 꺼내 카샬에게 내보였다.

"여기에 잘 넣어뒀어. 이건 내 생명줄이니까."

비가 내린 날을 걸었을 때 확실히 느꼈다.

카샬이 그냥 꺼낸 말이 아니라 정말로 우산이 생명줄이라는 걸.

"…아. 제가 또 잊어버렸습니다."

힘겹게 웃음을 참고 있던 카샬이 자신의 아공간 주머니에서 벨트를 꺼냈다.

"원래 도련님께서 사용하시던 겁니다. 깔끔하게 수선했습니다."

하벨은 벨트를 받아서는 바로 착용했다.

정말로 하벨 티에라 몸에 딱 들어맞았다.

카샬은 라르웬을 보며 잠깐 웃음을 터트리다 그의 눈매가 사나워지자 다시 꾹 참아냈다.

"언제든 우산을 사용할 수 있게 검처럼 차고 다니는 편이 훨씬 빠를 겁니다."

"우산을 넣는 데가 두 개인데? 하나는 뭐지? 얘가 검을 잡은 손은 아닌데."

하벨이 자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카샬의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병 때문인 걸 알아도 가끔 이렇게 하벨이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처럼 취급하면 죄책감이 밀려왔다.

자신이 하벨을 쫓았으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카샬은 이제는 꺼낼 수 없는, 하벨의 은혜를 가슴 속에 묻으며 평소처럼 말을 꺼냈다.

"도련님께서는 양손잡이이시기에 어느 쪽도 편안하게 쓰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오. 한쪽에 뭘 넣어도 괜찮겠어. 저번에 형님이 쌍검을 다루는 걸 봤는데 꽤 괜찮더라고."

틈의 세계를 처음으로 본 그날, 라르웬과 처음으로 만나지 않았던가.

라르웬이 깜짝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하벨이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라르웬은 하벨의 물음에 어색함을 숨기려 애를 썼다.

아까 고맙다는 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기분이 참 이상했다.

그 말을 어떻게 꺼낼 수 있을까.

"산책은 짧게 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던 카샬이 고개를 내리며 말했다.

"그래."

하벨은 즐겁게 대답하며 앞으로 걸어나갔다.

이름 모를 마을이지만, 바닷속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았지만, 하벨은 오히려 더 넓게 느껴졌다.

'발로 걷는 세상은… 이랬구나, 이랬어.'

하벨은 걸을수록 즐거움에 푹 빠져들었다.

"막내야, 혹시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라르웬이 스치듯 지나가는 가게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또 먹어도 됩니까?"

하벨은 금세 발을 멈추고 라르웬을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다 말해. 다 사줄게."

"건물을 사달라고 하셔도 사주실 분입니다."

카샬이 목소리를 낮추며 하벨에게 알려줬다.

"아니. 건물은 가지고 있어봤자 신경 쓸게 늘어날 뿐이지. 나는 저게 먹고 싶습니다, 형님. 음, 젤리…?"

"…허."

카샬은 가게로 신나게 걸어가는 하벨을 보며 헛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세상에, 건물을 거절하다니.

"카샬."

"예, 둘째 도련님."

"너는 건물보다 젤리를 선택한 저 순수함을 배웠으면 해. 진심으로."

"순수함 따위 버린지 오랩니다. 그것보다 도련님이 걱정되네요. 경제관념을 잃어버리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젤리와 건물을 두고 젤리라니."

"솔직히 하벨은 그래도 괜찮잖아?"

라르웬은 아닌 척 우쭐거리다 하벨을 따라갔다.

"…하."

빌어먹을.

카샬은 순간 솟구치는 화를 잠재우며 멈췄던 걸음을 재촉했다.

세상에 티에라 가문의 자제를 경제적으로 걱정하다니.

그런 멍청한 짓을.

다시 생각해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 * *

"아라야. 너는 뭐가 좋아?"

하벨은 가게 앞 유리에 줄지어 있는 각종 젤리를 바라보았다.

[삐이이.]

잠깐만 기다려 봐.

아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유리창에 꼭 붙어 코를 벌름거렸다.

"…당장 날씨 정보를 바꾸십시오."

단호한 누군가의 목소리와 함께 하벨은 랜턴에 불꽃이 나타나는 소리를 들었다.

'…밝은 불꽃.'

잠깐 피어났다가 사라졌지만, 하벨은 이를 외면하기 어려웠다.

아직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검은 불꽃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대상이든 상관이든 그와 관련됐다면 이번처럼 밝은 불꽃은 어쩌면 자신의 목숨을 구해줄 무언가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팔찌를 벗을 수 없다.'

그 뒤에도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팔목에서 더는 벗겨지지 않았다.

'이것도 헤레스한테 물어볼 걸 그랬나.'

하벨은 고개를 돌렸다.

"아니, 여기서 이렇게 따져도 소용이 없다니까요. 저희는 중앙 기상국에서 전해주는 날씨 정보를 전달할 뿐입니다."

가게 근처에서 누군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하벨이 고개를 들자 '기상국'이라는 간판을 단 건물이 보였다.

저기에서 방금 날씨 정보를 알려준 모양이었다.

"비가 올 확률은 40% 이상입니다. 방금 방송하신 정보는 엉터리고, 이를 증명할 수도 있습니다. 날씨 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다면 이걸 보시고 바로 바꾸셔야 합니다."

남자는 손에 쥔 종이를 건네며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그건 제 권한이 아니고, 함부로 일기 예보를 정정했다가는 목이 날아간다니까요."

관료라는 것들은 어딜 가도 저런 놈이 있는지, 하벨은 혀를 차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하벨은 저 얼토당토않지 않은 소리를 그냥 흘리기 어려웠다.

다른 것도 아니고 이 시국에 중요한 날씨 정보이질 않은가.

"그럼, 사람들의 목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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