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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3화 (23/415)

23화. 이렇구나, 이랬어(2)

* * *

[축복을 내리는 와중에 인간들이 우르르 모여 있는 건 싫어. 저기 빈 건물로 가. 거기에서 축복을 내려줄게.]

정령들은 이전 암살자가 썼던 건물을 가리켰다.

하벨이 움직이자 사람들은 양쪽으로 비켰다.

익숙한 모습에 하벨은 당황하지 않고 뤤트로에게 물었다.

"청소는 해뒀어?"

"물론입니다. 제대로, 말끔하게 해뒀습니다."

"잠깐 쓸게. 괜찮지?"

하벨의 물음에 뤤트로는 고개를 몇 번이고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얼마든지 쓰셔도 됩니다. 아, 아니, 이참에 아예 도련님들을 위해 깨끗이 수리해놓겠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해."

하벨은 굳이 뤤트로를 말리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뭘 하겠다는데 왜 말리겠는가.

* * *

[이봐, 티에라 가문의 둘째야.]

정령은 라르웬을 불렀다.

[비록 우리를 보지 못하지만, 저 아이도 이번에 일에 가담했기에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어.]

정령이 가리킨 사람은 다름 아닌 카샬이었다.

'…정령은 자신들을 보지 못하는 자에게 무조건 차가운 게 아니라는 건가?'

새삼 낯선 모습에 하벨은 살짝 당황했다.

그럼 왜 하벨 티에라한테만 그렇게 냉정한 건지.

하벨은 넘실거리는 의문을 덮으려 아라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저들은 자신이 물어도 대답해주지 않을 테니.

"잠시만요. 물어보겠습니다."

라르웬은 정령에게 고개를 살짝 숙인 뒤 카샬을 바라보았다.

카샬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 괜찮습니다."

"그래도 받아 둬."

정령들 틈에 끼어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던 아라가 갑자기 무언가를 깨물자 하벨은 피식 웃다 말고 귀를 쫑긋 세웠다.

'카샬이 마나를 가지고 있다면 정령에게 축복받는 건 손해가 아니었나?'

―보통 정령사 입장에서는 정령에게 받는 정령수 이외의 것들은 다 불순물이야. 교감이나 정령수를 통해 그 불순물을 녹일 수 있고.

라르웬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 라르웬이 카샬에게 해가 될 행동을 할 리가 없고.'

하벨은 생각을 멈추고 아라를 바라보았다.

상대가 적이 아닌 이상, 원치 않는 건 캐지 말아야 하는 법이었다.

"그럼 제 몫을 도련님께 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실 수 있습니까?"

재차 이어진 라르웬의 제안에 카샬은 하벨을 바라보았다.

"네 뜻이 그렇다면. 알겠어."

라르웬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정령들에게 말을 걸었다.

"방금 들으셨다시피 카샬은 자신의 몫을 하벨에게 넘겨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 들었어. 내키지 않지만 어쩌겠어. 이것도 저 아이의 바람이고, 약속은 지켜야지.]

정령들은 저마다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병을 꽉 쥐었다.

다시 보아도 저렇게 불길하고 불쾌한 인간은 처음이었다.

그 인간 옆에 있는 저 작은 생명체는 왜인지 마음이 쓰였지만.

[이제 축복을 내려줄 테니까,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

이런 경험은 처음일 하벨을 위해 라르웬은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정령들이 여러 방법으로 너와 교감을 시도할 건데 최대한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 받아들인 만큼 네 힘으로 바뀔 테니까."

"예. 걱정하지 마세요."

하벨은 싱긋 웃었다.

모든 물과 바다의 지배자였던 자신은 바닷속에 살았다.

바다와 얼마나 많은 교감을 했겠는가.

하벨은 자신의 몸에 찰싹 달라붙거나, 이름을 가르쳐주거나, 쓰다듬거나, 무언가를 먹게 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는 정령들을 보며 깨달음을 얻었다.

'교감이 꼭 쓰다듬는 것에만 한정된 게 아니었다.'

평소 아라가 기분이 좋을 때나, 다른 정령들을 슬쩍 만지면서 느꼈던 '찌르르'한 감각보다 더 짙었다.

따뜻하기도 했고, 차갑기도 하며 또 시원한 감각이 보드랍게 순환의 길로 향했다.

'꼭 바다에 있는 것 같다.'

하벨은 물속에서 둥둥 뜬 감각마저 느끼자 눈을 잠깐 감았다.

손끝에 바다가 스치고 가던, 그 조용한 순간이 기억이 났다.

하나씩 모인 감각은 곧 어떤 기운이 되었고, 화려하지 않으며 요란하지도 않은 잔잔히 흘러가는 바다처럼 불순물들을 녹였다.

하벨이 손가락을 잠깐 꿈틀거렸을 무렵, 순환의 길에 얇은 막이 만들어졌다.

사아아아.

마치 여기까지 불순물이 오르는 걸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하벨은 놀란 듯 눈을 황급히 떴다.

"왜 그래?"

이미 교감을 마친 라르웬은 하벨의 반응에 깜짝 놀랐다.

정령들은 이미 모든 축복을 내리고 밖으로 나간 뒤였다.

하지만 하벨은 눈을 뜨지 않았고, 그 시간이 생각보다 길어져 건드리지도 못한 채 아라를 달래며 카샬과 함께 숨을 죽이고 있었다.

"…순환의 길에."

하벨은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순환의 길에?"

"순환의 길에 뭔가가 생겼습니다."

"뭐, 뭐가 생겼다고?"

[삐이이잇!]

아라가 라르웬의 품에서 발버둥 치다 하벨에게 달려들었다.

찰싹.

하벨의 얼굴에 매달리자 그는 아라를 잡고는 손가락으로 머리를 긁어주었다.

배시시 웃는 아라의 웃음소리와 함께 '찌르르'한 감각이 몰려왔다.

순환의 길에 생긴, 얇은 막이 이전보다 두터워지기 시작하자 하벨의 눈이 재차 커졌다.

"방금 아라와 교감을 했는데 순환의 길에 생긴 막이 두꺼워졌습니다. 이거 괜찮은 겁니까?"

"순환의 길에 막이 생겼다고?"

라르웬은 난생처음 들어보는 소리에도 침착하려 애를 썼다.

"어디에 생겼는데?"

"순환의 길 입구에 생겼습니다. 그 막 밑에 불순물들이 있……."

하벨은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혹시나 해 아라에게 부탁했다.

"아라야. 나한테 잠깐 힘 좀 불어 넣어줘."

하벨의 손바닥에서 빙그르르 돌고 있던 아라가 귀를 쫑긋 세우더니 손가락에 기대 정령수를 넣어주었다.

정령수는 막을 통과하더니 불순물을 녹여냈다.

조금 전 정령들과의 교감을 통한 뒤라서인지 몰라도 정령수 속에 물 말고 다른 힘이 느껴졌다.

'이 힘은 뭐지?'

하벨은 그 힘을 잡아당기듯 억지로 끌어왔다.

손가락에 끝에 물과 함께 그 다른 힘이 둥둥 떠 있었다.

색도 물처럼 투명했지만, 달랐다.

물과 달리 형체를 잡는 것도 어려워 유지도 못 하고 그만 놓쳐버렸다.

토옥.

바닥에 닿아도 물처럼 번지지 않았다.

"이거 물이 아닌데요?"

카샬은 바닥에 떨어진 몇 방울의 액체를 바라보았다.

[보자.]

킁킁.

루룸이 바닥으로 내려와 코를 벌름거렸다.

[독인데? 완벽한 독은 아니고. 물하고 독이 섞여 있네.]

"독이라고? 너는 참, 어려운 것부터 시작……."

라르웬이 피식 웃다 말고 그대로 굳어졌다.

입을 막은 하벨의 손가락 사이에 피가 흘러내렸다.

"…읏."

그는 다른 손으로 가슴을 붙잡고는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막이 생긴 뒤로 더 아프잖아? 원래 이렇게 아픈 건가?'

하벨은 이전보다 두 배는 더 아픈 통증에 다리가 풀릴 것만 같았다.

통증은 자신에게 있어 굉장히 낯선 존재였다.

맞아봤어야 참는 것도 아는 법이지 않은가.

'한두 번도 아니고. 다들 이걸 어떻게 견디는 거지?'

하벨은 새삼 정령사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하벨 티에라가 걸린 물의 저주를 제외하더라도 다들 이 비슷한 통증에 시달리지 않을까 싶었다.

라르웬은 당장 카샬을 쳐다보았다.

"카샬."

"불순물이 올라오긴 했지만, 아직은 괜찮습니다."

카샬은 하벨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대답했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 웃고 있는데?"

하벨을 부축하던 라르웬은 멈칫거렸다.

조금 전까지 아파하던 하벨이 갑자기 웃고 있지 않은가.

왠지 섬뜩했다.

하벨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닦다 말고 갑자기 치솟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불순물들이 저 막 안으로 들어오질 않아.'

불순물들이 억지로 뚫고 오려고 했지만, 벽에 막힌 듯 더는 올라오지 못했다.

드디어 오르락내리락하던 순환의 길에 작지만, 통로가 생긴 셈이었다.

만약 저 막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가 생긴다면.

하벨은 가능성을 보았다.

'봤지, 하벨? 이 몸은 입만 번지르르하게 움직이는 놈들과 다르다는 걸? 약속한 대로 돌아가기 전까지 네 몸을 사용하는 동안 하나씩 바꿔주마.'

하벨의 입꼬리가 길어졌다.

* * *

"…으흠."

카샬은 손에 들린 장치를 보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온도계를 닮아 있었고, 오염도를 측정하는 장치라고 했다.

"안 됩니다. 소량의 오염이 남아 있습니다."

"값을 올려도 되니 오염된 물만 깨끗이 정화해달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라르웬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물의 저주가 식물이나 동물들에게 영향이 없을지언정 결국 돌고 돌아 사람한테 영향이 오는구나.'

세계가 바뀌어도 변함없는 자연의 순환에 하벨은 새삼 신기했다.

한 발자국 정도 이 세계가 익숙하게 다가왔다.

"제가 말하고 오겠습니다."

카샬이 부드럽게 웃자 라르웬은 듬직한 아군을 만난 병사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보다 네가 더 낫지. 적당히 해."

카샬을 알기에 라르웬은 얼마든지 맡길 수 있었다.

"죄송하지만, 도련님께서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카샬은 하벨에게 양해를 구한 뒤 라르웬이 잡아 놓은 방을 벗었다.

"몸은 어때?"

라르웬은 물로 주린 배를 채우는 하벨을 미안하게 바라보며 물었다.

"불만스럽네요."

"아프다고?"

"아뇨. 이제 괜찮은데 좀, 아니, 많이 불편합니다."

"그래. 불편하지. 앞으로 계속 적응해야 할 거야. 나도 몇 번 걸려봐서 알아. 몸에 생기는 이물질도 아파 죽겠는데 순환의 길에 불순물이 늘어나잖아?"

하벨이 저 병에 적응하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기에 안타까움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다시 시작해야 하지 않는가.

"특히나 넌 조금 다르… 니까."

자신이 내뱉었어도 '다르다'는 말이 왜 이렇게 쓴지.

라르웬은 괜히 물을 마셨다.

"끔찍하네요."

이제 시작인 셈이라 하벨은 물컵을 세게 쥐었다.

"막내야."

"예."

"아까 네가 독을 사용했잖아?"

"사용한 건 아니죠."

"그렇지. 사용했다고 말했으면 진짜 양심도 없다고 말하려고 했지."

라르웬은 그제야 낄낄 웃었다.

"좀 놀랐습니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힘이라서 한번 사용해 봤거든요."

하벨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평생 물만 다뤄봤던 자신이 독을 꺼낼 수 있게 될 줄이야.

그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물이 부드럽다면 독은 까끌까끌한 바위를 만지는 기분이었다.

"신기하지?"

그 감각을 알기에 라르웬은 웃을 준비를 하는 루룸의 입을 막고는 물었다.

하벨은 곧 실실 웃었다.

"확실히 새로웠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힘을 쓸 수 있는 겁니까?"

"정령수에는 정령의 힘이 담겨 있어. 순환의 길에 있는 불순물들이 사라지면 질수록 그 정령수에 담긴 정령의 힘이 하나씩 개방되는 거지. 물론, 네가 태어날 때부터 가진 힘에 영향을 받고."

"요컨대 순환의 길을 비울수록 정령이 가진 힘을 온전히 쓸 수 있다는 겁니까?"

"아니. 정령이 가진 자연의 힘을 쓸 수 있지만, 그 힘을 다루는 건 온전히 너한테 달렸어. 여러 가지 힘이 있는데 제일 다루기 힘든 건… 물이야."

라르웬은 괜히 컵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자신도 아직 제대로 다루는 게 어려웠다.

"물이 다루기가 어렵다고요? 왜요?"

하벨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말에 한쪽 눈썹을 올렸다.

"방금 진짜 얄미웠다. 나도 모르게 때릴 뻔했네."

"물어보는 것도 안 됩니까?"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어쨌든, 넌 축복을 받은 거야. 엄청 희귀하니까."

"물이 오염됐기 때문입니까?"

하벨은 이전 뒷세계 사건 때 라르웬이 살짝 언급했던 '물'과 관련된 부분을 떠올리며 물었다.

달리 생각해도 희귀할 이유가 저것뿐이지 않은가.

"맞아. 루룸이나 정령들이 말하길, 물이 거의 응답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마나는 더 심해. 아예 물 쪽으로 반응하질 않아서 물 마법사는 없어."

라르웬은 이번 기회에 하벨이 정령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했다.

하벨은 잠깐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어느새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서 정령들이 룬델을 그렇게 아꼈구나. 하지만 하벨 티에라는? 단지 몰랐던 걸까?'

세렌이나 다른 정령들이 아라가 정령인지 모르는 걸 보면 그럴 가능성이 없진 않았다.

'…물이 죽어가는 세계라니.'

영롱한 붉은빛을 보자 하벨 티에라가 꺼냈던 말이 생각이 났다.

―세상이. 이 세상이… 멸망할 겁니다.

'미안하구나.'

하벨 티에라의 기억도, 자신의 기억도 온전하지 않았지만, 하벨은 여전히 그 부탁을 들어줄 마음이 없었다.

자신은 하벨 티에라가 바랐던 '용들의 왕'도 아니었고, 다시 또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싶지 않았다.

'…미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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