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이렇구나, 이랬어
* * *
"아라야. 이것도 다 배움이야. 세렌이 뭐라고 하는지, 너하고 얼마나 다른지 들어보고 싶지 않아?"
하벨이 아라를 다독이는 척 손가락 끝에 물을 슬쩍 만들어내자 아라의 표정이 금세 풀어지다 못해 귀가 파닥거렸다.
[삐이이잇!]
"아라도 알고 싶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아닌지 몰랐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하벨은 금세 날개를 파닥이는 세렌을 보자 웃음을 꾹 눌렀다.
[지금은 당연히 안 오지. 아마 밤쯤에 여우비 정도로 내릴 거야. 확률은 55% 정도?]
'우산을 써야 할 일이 생기겠네.'
며칠간 얌전히 쉬었으니 이제 슬슬 밖으로 나갈 시간이었다.
하벨은 그릇을 삭삭 긁으며 마지막 한 방울의 수프까지 맛있게 먹었다.
"막내야."
잠자코 옆에서 즐겁게 구경하던 라르웬은 빈 그릇을 바라보며 하벨을 불렀다.
"예, 형님."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된 것 같은데."
"어디 가야 합니까?"
하벨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자 라르웬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정령의 부탁을 들어주고 아직 보상을 못 받았잖아?"
"…아."
하벨은 그제야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레디나를 통해 검은 달 일도 잠깐 막고, 페트리오에게 접근하는 이들이 누군가 간도 보며 한가로운 생활에 적응하다 보니 잊어버렸다.
아라의 기분이 좋으면 때때로 교감에 성공하기도 했으니.
"좋습니다. 지금 딱 밖에 나가고 싶었습니다. 많은 정령과 교감하면 무슨 느낌인지 궁금하기도 하고요."
하벨은 즐겁게 웃었다.
"기대해도 좋아. 정령들과 교감하는 느낌은 장난 아니거든."
라르웬도 키득거렸다.
"그런데 막내야."
라르웬이 시선이 다시금 빈 접시를 향했다.
"예."
"요 며칠 지켜봤는데, 왜 수프만 먹는 거야? 카샬이 그거밖에 안 줄 리가 없고. 아니면 편식하는 건가? 그래서 키가 크겠냐?"
순간, 하벨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수프가 얼마나 훌륭한 음식인데.
"지금 수프를 모욕하는 겁니까?"
"뭐…?"
라르웬은 순간 헛웃음을 삼켰다.
수프를 모욕하다니. 살다 살다 그런 말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하벨은 그만큼 진지했다. 벌써 무표정이지 않은가.
"내가 처음 먹은 음식입니다. 맛도, 향도, 심지어 모든 게 완벽한 음식이죠."
음식에 대한 거부감도.
맛있다라는 감각도 알려준 소중한 수프가 아닌가.
라르웬의 표정이 빠르게 일그러졌다.
"잠깐만 기다려 봐. 내, 카샬 이 자식의 멱살을 잡고 올 테니까."
라르웬이 밖으로 나가 당장 카샬의 멱살을 쥐어서는 안으로 들어왔다.
"왜 그러시는 겁니까? 오늘은 둘째 도련님의 심기를 건드린 적이 없습니다. 오! 오늘도 말끔히 드셨네요. 다행입니다."
카샬은 그 와중에도 싹 비운 그릇을 보더니 활짝 웃었다.
"야, 입만 산 집사놈아."
라르웬은 그 모습에 더 기가 찼다.
"아니, 대체 왜 그러십니까?"
"네가 얘한테 뭐라고 했기에 수프에 진심인 거냐고."
라르웬의 살기에 카샬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헤레스 씨와 딱 오늘까지만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뭘?"
"도련님께서 음식을 거부하는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
"아, 내가 음식은 처음 먹는다고 카샬한테 말했습니다. 그만 멱살을 놓아주시죠."
갑작스러운 하벨의 말에 라르웬의 손아귀에 힘이 스르르 풀렸다.
음식을 처음 먹는다니.
"…막내야."
라르웬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벨의 상태가 괜찮은 줄 알았더니 자아의 혼동인지 뭔지가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것도 모르고…….'
라르웬은 미안함이 꿈틀거렸다.
"예, 형님."
"맛있는 것도 많이, 많이 사줄게. 카샬, 너도."
만약 하벨이 농담 삼아 건물을 사달라고 해도 지금은 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삐이이?]
아라가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리다 당장 두꺼운 철판을 깨물었다.
아그작.
이젠 입도 제대로 있겠다, 이빨도 난 김에 뭐든 물고 보니 하벨은 익숙하게 아라를 불렀다.
"아라야. 이리 와."
아라는 눈동자를 굴리다 입을 한 번 삐죽 내밀며 하벨에게 날아왔다.
"이빨이 간지러운 건 알지만, 먹을 수 있는 것과 아닌 건 구분해야지."
하벨이 아라를 혼내자 루룸은 낄낄거리다 말고 라르웬의 머리카락을 쥔 채로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따가운데. 비키지."
라르웬이 꺼낸 차가운 목소리에 루룸은 왠지 즐거워하며 다시 똑바로 섰다.
딱딱.
자신의 말을 알아듣기는 한 건지, 아라는 이빨을 부딪치다 갑자기 하벨을 보며 배시시 웃었다.
'고양이인가, 개인가, 그게 아니면 뭐지?'
하벨은 아직 또렷한 형체가 없는 아라를 쓰다듬다 따끔한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세렌이었다.
분명 같이 간다는 말이 없었는데. 대체 언제 온 건지.
"너도 같이 가려고?"
[아라 배웅 온 거니까 신경 꺼.]
세렌은 오늘도 아라에게 멀찍이 떨어져 날개를 흔들었다.
"이제 타시죠, 도련님."
안을 정리하고 나왔는지 카샬은 바퀴가 달린 쇠로 된 상자에서 나왔다.
'자동차는 아닌데. 마차인가? 그런데 말이 없단 말이지.'
하벨은 최대한 비슷한 걸 찾아보나 역시 알기 어려웠다.
헤레스의 진찰이 길어져 방금 도착했고, 아라가 갑자기 저 물체에 달려드느라 하벨은 지금에서야 물어보았다.
"저게 뭡니까?"
"마차야. 신형 마차."
라르웬은 물체를 가볍게 손으로 두드리며 대답했다.
"말이 없는데요?"
"그것도 마차라고 불리지. 말이 예민한 동물이라 정령이 근처에 있으면 겁을 먹더라고. 그래서 어쩔 수 없지."
"말이 있는 마차보다 빠르지만, 상대적으로 비싼 편입니다. 아, 충전식이고 전기가 필요하죠."
카샬은 목소리를 슬쩍 낮추며 그답게 값어치를 언급했다.
'…전기 자동차?'
하벨은 최대한 비슷한 걸 떠올려보았다.
분명 다른 세상인데 희한하게 인간 세상에서 봤던 것들이 하나씩 도움이 되는 것만 같았다.
'신기하니 됐다.'
하벨은 신형 마차로 다가가 조심스레 만져보았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정말로 자동차와 비슷했다.
"형님. 혹시 멀리 움직입니까?"
"1시간 정도? 첫 외식이니 비싸고 맛있는 걸 먹어야지. 내가 좋은 곳을 알고 있거든."
라르웬은 신형 마차를 가볍게 두드렸다.
퉁퉁.
"어서 타."
* * *
신형 마차가 티에라 가문의 영토임을 알리는 면사포를 닮은 결계를 빠져나가자 하벨은 아라와 함께 창문에 매달렸다.
자신이 들렸던 티에라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봤을 때와 달리 멀리서 마을을 바라보니 다르게 다가왔다.
오염된 물을 대비해 길거리 여기저기에 세워둔 커다란 우산들도 보였고, 가게마다 비를 막고자 천막을 내릴 수 있는 장치가 달려 있으며 가로등에 물이 빨리 빠져나갈 수 있게 설치한 수로도 눈에 띄었다.
낯설고 모르는 게 나오면 카샬이 눈치껏 알려주는 터라 하벨은 인간 세상에 처음 발을 디딜 때처럼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나저나 오묘하단 말이지.'
자신의 세계에 있었던 익숙한 것들도 틈틈이 보이지 않는가.
세계란 참 신기했다.
다른 세계라도 인간들이 생각하는 건 대부분 비슷하다는 걸까.
"형님."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던 차 하벨은 문득 밀려오는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비가 오염됐잖습니까? 그럼 동물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겁니까?"
"아니. 이 오염된 물은 사람에게만 효과가 있어. 그래서 오염이 처음 일어났을 때, 신이 노여워 벌어진 일이라 결론이 내려졌다고 하더라고."
"이곳에는 신이 있습니까?"
신 이야기가 나오자 하벨은 호기심이 가득 눈동자로 라르웬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용왕이었을 적에도 신은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누군가 자신을 신이라 부른 적이 많았고 실제로 신처럼 받드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저 격이 높은 존재였을 뿐 자신은 신이 아니었다.
"실제로 신관이 있긴 해."
"신관이라뇨? 제사장을 말하는 겁니까?"
옛날에 인간들도 비를 내려달라 제사를 지내며 하늘을 향해 간곡히 빌곤 했다.
"아니. 진짜로 신의 목소리가 닿는 자들이라고 해."
"그럼 신은 있는 겁니까?"
만약 정말로 있다면 만나보고 싶었다.
왜 자신이 하벨 티에라의 몸에 들어갈 수 있었는지를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런 쪽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 어떻게 생각해, 루룸?"
라르웬은 루룸을 건드리며 물었다.
[아마 있을걸? 아니면 없을 수도 있고.]
루룸은 모호하게 대답했다.
"그게 뭐야?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라르웬이 질타하자 루룸은 코를 벌름거렸다.
[나도 본 적이 없는 걸 어떡해? 세렌도 모를걸? 하지만 진짜 기적을 펼치긴 하잖아?]
"기적이라니?"
하벨의 귀를 잡는 말이었다.
[하얀빛이 뿜어져 나오면 상처가 '짠' 하고 낫거든. 물론 완전히 다 낫는 건 아니라도 좀 무섭잖아?]
루룸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마법사 중에서 또라이들이 좀 있어도 결국 밑바탕은 '마나'라는 자연에서 비롯된 힘이야. 그런데 신관들은 아니야. 힘이 달라. 그래서 좀 그래.]
"어쨌든, 물의 오염에 영향이 있는 건 사람뿐이라는 거지."
라르웬은 루룸의 말이 길어지자 깔끔하게 끊어냈다.
"이름 한번 잘 지었네요."
하벨은 손깍지를 낀 손을 배에 올리며 다시 창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의 저주.
누가 지었는지 아주 제대로 된 이름이었다.
정말로 인간만을 저주해서 벌어진 일 같았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자, 이제 보상을 받으러 가야지."
라르웬은 마차가 멈추자 밖을 향해 손짓했다.
"참. 가주님은 따로 오십니까?"
하벨의 물음에 라르웬은 내리다 말고 살짝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아버지가 바쁘셔서."
"그럼 포장은 할 수 있습니까?"
라르웬의 입꼬리가 길어졌다.
"아버지한테 드리게?"
"예.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럼. 만약 안 되더라도 내가 되게 해줄게. 아버지께서 정말 좋아하실 거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라르웬은 정말로 기뻐 보였다.
카샬까지 방긋방긋 웃자 하벨은 기분이 이상했다.
"왜 다들 좋아하는 겁니까?"
"기특하니까."
라르웬은 실실거리며 마차에서 내렸다.
* * *
라르웬은 뒷세계로 내려가는 땅굴을 따라 앞서 걸었다.
소리가 울리기에 그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꺼냈다.
"별생각은 안 했겠지만, 정령들이 주는 축복은 그 자리에서 바로 받을 수도 있고, 이번처럼 뒤늦게 주는 일도 있어."
"자기들 마음대로네요?"
하벨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렇다고 느낄 수 있는데 그건 아니야. 정령들이 주는 축복은 교감이라고 했잖아?"
"기억합니다."
"그 교감은 우리한테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정령들도 똑같아."
우쭐거리는 라르웬의 표정을 따라 하벨 역시 궁금증이 깊어졌다.
정령사와 정령이 마냥 일방적인 관계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정령은 깃드는 존재라고 해. 그만큼 자연에 가까운 존재기에 자칫하다가 진짜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경우가 있다더라고."
[맞아. 원해서 자연의 일부가 되는 얘들도 있는데 보통은 자아가 있길 원해. 그래서 교감을 통해 우리는 정령사가 느꼈던 여러 감정을 통해 자아를 확인해.]
루룸이 자연스럽게 라르웬을 대신해 설명을 이어나가자 하벨은 살짝 놀란 듯 루룸을 바라보았다.
[나나 아라처럼 정령사 근처에 머물기 좋아하는 정령들도 있는데 대부분은 아니야. 그렇기에 정령사가 찾아오고, 교감을 위한 부탁까지 들어줬을 때, 이제 정령들은 각자 자아가 자연에 얼마나 물들었는지를 계산해서 날짜를 조율해. 그래서 시간이 걸린 거야.]
루룸이 살짝 얼빠진 하벨의 표정에 더는 참지 못하고 키득거렸다.
[왜 묻지도 않았는데 알려주냐고?]
"그래. 날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
[날 웃게 해준 선물이지. 너도 눈이 있으면 알겠지만, 나는 그렇게 빡빡하지 않아.]
"저 모습에 속지 마라. 루룸은 네가 여기서 다가가면 '끔찍하다'라는 말을 던지며 비난을 퍼부을 테니까. 루룸과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이미 당해본 건지 라르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 왜 그래, 라르웬? 나만큼 친절한 정령은 없는데.]
루룸은 말과 달리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아버지만은 예외야."
라르웬은 확실히 못을 박았다.
천장에 달린 등을 따라 내려가자 뒷세계가 펼쳐졌다.
며칠 만에 들렸지만, 코빼기도 보이질 않았던 사람들이 길거리에 보이기 시작했다.
하벨은 그들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오, 오셨습니까!"
뤤트로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그를 따라 뒤에 있던 수하들까지 인사했다.
"잠깐 볼일이 있어서 왔을 뿐이니까, 하던 일이나 마저 하고 있어."
라르웬은 대충 손으로 휘휘 저었다.
"도련님들께서 오셨는데 어떻게 그냥 가겠습니까?"
"공기 한층 더 맑아졌습니다. 환기를 위해 저 천장을 뚫어버릴까 했는데 잘 참았네요."
카샬은 뤤트로의 말보다 '윙윙'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새 환풍기를 보며 반겼다.
"도련님께 소량이지만, 몸에 해가 없을 정도라지만, 독에 취하셨다는 사실이 크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무, 무, 물론입니다!"
뤤트로는 부드럽게 타이르는 듯한 카샬의 말에 허겁지겁 고개를 숙이기 바빴다.
하벨은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다 아직 고개를 숙이고 있는 뤤트로의 부하들 틈으로 이전에 봤던, 좋다고 소문난 모든 걸 쏟아부었다는 약을 파는 가게를 쳐다보았다.
아주 잠깐 그 가게 앞에 있던 남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깜짝 놀랐고, 왜인지 다급히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저놈, 빗자루 놈이잖아?'
페트리오를 체포하기 전에 자신이 한 시종에게 빗자루를 뺏어 던진 적이 있었다.
'날 보고 놀란다는 건 둘 중 하나인데? 정말 놀랐거나, 뭔가 미심쩍은 짓을 하고 있다든지.'
하벨은 혹시 몰라 랜턴을 바라보았다.
점만 한 크기의 검은 불꽃이 타올랐다.
'저놈이 왜?'
하벨은 빗자루 놈이 왜 자신의 목숨을 위협한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검은 불꽃의 뜻을 내가 잘못 안 걸까.'
목숨이 위협되는 상황에서 나오는 검은 불꽃.
[너희는 약속대로 마법사들을 죽여 우리의 바람을 이뤄줬어. 이제 우리가 약속을 지킬 차례야.]
하벨은 정령들이 내는 상냥한 목소리에 시선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