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목표를 바꿉니다(3)
* * *
"헤레스 자네, 마법사였나?"
하벨은 반가워하며 물었다.
하지만 당황한 헤레스의 눈에는 그 반가움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분명히 문 앞에 마나를 옅게 깔아두어 누가 왔으면 알아챘을 텐데.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말을 더듬었다.
"…도, 도련님. 그게, 그게 말이죠."
탁.
하벨은 문부터 닫았다.
그 소리에 헤레스는 딸꾹질을 끝낸 사람처럼 굳은 몸짓 그대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혹시 정령사를 증오하는가?"
분명 하벨은 웃고 있지만, 묘하게 날카로워 보였다.
헤레스는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아뇨! 저는 오히려 좋아하는데요? 두, 세 번밖에 못 봤지만, 정령님들은 정말 귀여우셔요!"
"가주님도 자네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당연히 아시죠!"
"그럼 한 가지만 묻겠네."
"어, 얼마든지 물으셔도 됩니다."
헤레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혹시 바뀐 몸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마법을 알고 있는가?"
"예?"
헤레스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이라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바뀐 몸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마법이 있을까 싶어 물어본 거라네."
하벨은 다시 물었다.
정령사가 자연의 힘을 강대하게 쓸 수 있는 자라면 마법사는 자연을 포함한 비자연적인 힘까지 사용할 수는 자를 말한다고 카샬이 알려주었다.
그 말에 마법사를 만나면 방금 저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다짜고짜 자신들을 공격해 물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헤레스는 달랐다.
그녀는 정체가 들켰어도 자신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다.
"으음……."
헤레스의 말꼬리가 늘어졌다.
고민하는 만큼 그녀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자아의 혼동이 온 사실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본능적으로 자아의 혼동 때문에 불쾌함을 느낀 걸까.
"나는 지금 의사가 아니라 마법사의 관점에서 봐주길 원하네."
고민이 길어지자 하벨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무조건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영혼 1과 영혼 2가 서로의 몸에 들어갔다면 말입니다."
헤레스는 오른쪽과 왼쪽의 손가락을 들어 팔을 교차했다.
"사실 이것도 여러 전제 중 하나죠. 실제로."
자리에서 일어난 헤레스는 벽을 만져서는 호흡을 멈췄다.
[삐이?]
아라는 귀를 쫑긋거리다 갑자기 벽이 회전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꺄르르 웃었다.
"지금 뭘 한 건가? 안에 비밀 공간이라도 있는가?"
하벨은 밀려드는 궁금증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하벨을 보자 헤레스는 웃음을 터트리다 다급히 안경을 올렸다.
"아, 죄송합니다."
"아니, 사과할 필요 없네. 웃는 거야 자네의 마음인데."
"신기해서요."
"무엇이?"
"정령사하고 마법사하고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에요. 그래서 가주님하고, 아가씨와 둘째 도련님만 제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아셨죠. 아, 카샬 씨도요."
하벨은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크게 떴다.
나는?
그렇게 묻는 것 같아 헤레스는 괜히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그, …음, 저도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유는 모릅니다. 가주님께서 비밀로 하라고 하셨는데……."
"그럼 자네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걸 가주님께 비밀로 하겠네."
"아뇨. 괜찮습니다. 가주님이라면 이해해주실 테니까요."
헤레스는 벽이 뒤집히며 나타난 책꽂이에서 책을 하나 꺼냈다.
착착.
자연스럽게 페이지를 넘기던 헤레스의 손가락이 멈췄다.
"여기 보시면 실제로 개와 고양이의 영혼이 바뀐 실험이 있어요."
"그런가?"
하벨은 활짝 웃으며 헤레스가 넘긴 책을 읽었다.
개가 '웨옭'하고 울고, 고양이가 '월월'하며 울부짖었다는 보고에 잠깐 웃음이 감돌았다.
"그런데 이 실험이 성공했다고 보는 이들도 있고, 최면 마법에 걸린 게 아닌가 싶은 관점 등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불확실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하지만 자네 말대로 정말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
글자를 읽어나가던 하벨의 눈동자가 멈췄다.
"혹 자네는 이 부분의 전문가를 알고 있는가?"
"으음……."
헤레스는 고민하다 곧 무언가 생각이 난 것처럼 고개를 살짝 들었다.
"건너 건너로 연락을 통하면 닿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연락 좀 해주겠나?"
하벨은 일단 잡은 줄을 놓칠 생각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 티에라 가문이 유명하다면 하벨 티에라의 얼굴을 모르는 마법사가 있을까 싶었다.
사이가 좋지 않으니 순순히 부탁을 들어줄 리도 없고.
"저, 도련님."
"괜찮네. 자네에게 실망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네. 부탁하네."
하벨의 간절한 부탁에 헤레스는 마냥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나을 수도 있어.'
이 분야의 마법사를 초대해 사실을 듣는다면 충격은 있겠지만, 하벨이 '하벨 티에라'라는 사실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지만, 지금 본인이 본인을 의심하고 있는 상황처럼 보이니.
"알겠습니다. 하지만 연락을 해도 빨리 답장이 오지 못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해주셨으면 해요."
"천천히 해도 괜찮네.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네, 헤레스."
그제야 하벨이 안도하며 싱긋 웃었다.
늦든 뭐든 일단 줄을 잡았다는 사실에 마음이 이렇게 편할 수 없었다.
"아, 혹시 한 가지 더 물어도 되겠는가?"
"물론이에요."
"어떤 위협을 알리는 불꽃을 알고 있는가?"
"위협을 알리는 불꽃이요?"
"그래. 내 눈에만 보이고, 내게 위협이 나타나면 불꽃이 나타나지."
"…음."
헤레스의 고민이 길어지자 하벨은 말을 돌렸다.
"실언했네. 없던 일로 해주게."
"아니에요. 이건, 굉장히, 굉장히 흥미로운데요? 한번 찾아봐도 될까요?"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한 것처럼 헤레스는 정말로 즐거워하며 물었다.
"나야 고맙지."
"그럼, 일단 앉으세요. 간단하게 진찰하겠습니다."
헤레스의 말을 따라 하벨은 앉았다.
진찰하면 할수록 헤레스의 미소에 화가 섞인 듯 보였다.
"혹시… 화가 났는가?"
하벨이 묻자 헤레스의 오른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처음 하벨을 보자마자 창백한 안색에 설마 했는데.
"어디에서 뭘 하셨는지 몰라도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도련님."
헤레스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삐이…….]
헤레스 옆에서 눈을 깜박거리던 아라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하벨에게 향했다.
"그… 음, 이건 좀 억울한 부분이 있네."
하벨 역시 괜히 마른 침을 삼켰다.
정말로 억울했다.
바다를 담을 수도 있는 몸인데 고작 손으로 뜬 물 정도를 담았다고 난리가 나는 게 말이 되는가?
"아무래도 도련님의 방이 더 편하실 듯합니다. 저랑 함께 가시죠."
헤레스의 손가락을 따라 링거가 움직였다.
"이거 달고 말입니다."
* * *
"카샬."
하벨은 얌전히 침대에 누워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링거를 다 맞을 때 동안 움직이지 말라고 헤레스가 못을 박고 갔으니 그래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삐이이!]
움직이는 하벨의 손을 보던 아라가 몸을 흔들다 달려들었다.
"예, 도련님."
살짝 퉁명스러운 대답이 들려왔다.
하벨은 자신의 손가락을 깨무는 아라를 향해 말을 건네며 고개를 돌렸다.
"아라야. 내가 네 대장이야. 대장한테 이러면 곤란하지."
침대 옆에 놓인 탁자에서 뭘 하는지 몰라도 카샬의 표정은 말투 못지않게 불만이 많이 보였다.
"그게 뭐야?"
하벨은 카샬이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이자 호기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얇고 길쭉한 네모 형태의 물건 위에 종이가 다발로 꽂혀 있었고, 아래쪽에 빛이 뿜어나왔는데 그곳에 키보드처럼 자판이 배열되어 있었다.
"마법 타자기입니다. 손글씨 못지않게 보고서를 화려하고 완벽하게 쓸 수 있게 도와주거든요. 제가 애용하는 물품 중 하나입니다. 저 대신 쓰고 싶지 않으십니까? 기꺼이 양보해드리겠습니다"
카샬은 하벨의 시선을 의식하며 일부러 손가락을 화려하게 놀렸다.
"전혀. 그것보다 아까 헤레스한테 혼나는 것 같던데."
"…뭐, 익숙합니다. 맨날 깨지는 건 저죠. 월급쟁이의 비애라고 해야 할까, 자기 마음대로 하는 도련님을 모시는 집사의 슬픔이라고 해야 할까. 아, 방금 '자기 마음대로'는 실수였습니다."
카샬은 그제야 속이 후련한지 싱글거렸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건 내가 아니라 너인데? 아무래도 보고 배워야겠네."
"저야 능력이 되니 이러는 겁니다. 도련님께서는 함부로 따라 하시면 안 됩니다."
"카샬. 너……."
"어어,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또 헤레스 씨한테 혼나는 건 싫거든요."
카샬은 상체를 일으키려는 하벨을 보자 요란한 정도로 그를 말렸다.
순간, 하벨은 말문이 막혔다.
라르웬이 왜 카샬에게 이를 가는지 이제야 이해가 갈 정도였다.
[삐?]
아라가 하벨의 손가락 끝에서 만들어지는 물을 보자 다급히 입을 내밀었다.
쏘오오옵!
후다닥 물을 빨아들인 아라는 세상 행복한 얼굴로 천천히 녹아내리듯 풀어졌다.
[삐삐삐!]
"카샬."
"예, 도련님."
팅!
카샬은 검집으로 하벨의 물을 막았다.
재수 없긴.
"말씀하시죠."
조금 전 퉁명스러움은 온데간데없고, 평소처럼 활기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너뿐이야?"
"그야 제가 도련님의 집사니까요."
카샬은 검집을 내리며 뭔가 심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거 말고. 왜 하벨의 방이나 이쪽 복도를 얼씬거리는 시종이 없는 거야?"
"어……."
카샬은 갑자기 당황했다.
"눈치채셨습니까?"
"모르면 바보지."
"아쉽네요. 제가 자연스럽게 도련님의 시선을 유도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세상에 믿을 놈이 없다고 하잖습니까? 딱 그런 경우 때문입니다. 도련님의 작은 정보도 꽤 비싸게 사는 경우가 많다 보니……."
"문제가 터졌어?"
"예. 터졌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오기 전 일이라 거기까지는 잘 모릅니다."
카샬은 괜히 어색하게 웃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다.
"그럼, 가주님이 너는 믿을 만하다고 판단하신 건가?"
"그러니 이렇게 붙어 있는 게 아닙니까?"
"여기에서 쫓겨나면 갈 데가 없다고 했지?"
"치사하게 이러십니까? 살짝, 아주 살짝만 건드렸잖습니까. 이 정도도 안 됩니까?"
"어디에서 왔는데?"
순간, 카샬은 웃음을 잃었다.
늘 감겼던 그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드러났다.
깊은 바다를 닮은 그 눈동자는 정말로 고요했다.
하지만 곧 다시 감겨서는 실실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먼 곳에서… 예, 먼 곳에서 왔습니다."
"나도 그래. 나는 너보다 더 먼 곳에서 왔어. 깊고 깊은 바다에서 왔거든."
하벨은 잠깐 그리움을 담았다.
바다가 그리웠다.
햇살에 반짝거리는 그 아름다움이.
하늘마저 담아버릴 만큼 그 커다란 보금자리가.
모두 그리웠다.
"…어어."
깊은 바다라니.
카샬은 장난을 섞기엔 하벨이 너무도 진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힘… 내십시오. 꼭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무슨 정신으로 그런 말을 꺼냈는지 모르겠지만, 카샬은 왠지 속이 후련했다.
"그럼, 그때까지 잘 부탁할게, 카샬."
다시금 하벨에게 인정을 받았지 않은가.
"예. 물론입니다!"
"아차. 가주님이 이번 일로 네 추가금을 생각 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는데, 아무래도 생각이 길어지겠어."
"…젠장."
카샬은 얼굴 구겼다.
어딜 보아도 하벨에게 인정받은 건 착각인 듯했다.
* * *
며칠 후.
[…날씨가 어떻냐고?]
세렌이 하벨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아니. 아라한테 물었는데?"
하벨은 수프를 삼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시 수프는 언제 먹어도 최고의 맛이었다.
하벨은 감격한 그 마음으로 말을 꺼냈다.
"아라야. 비가 내릴 것 같아?"
[삐이잇.]
아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라는 아직 어려서 잘 몰라. 날씨가 얼마나 변덕스러운데? 그러니까 묻지 마.]
세렌이 갑자기 아라를 두둔하며 하벨을 째려보았다.
[삐잇!]
나는 똑똑해!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아라는 세렌을 향해 털을 곤두세웠다.
"아라가 너 때문에 화났네."
하벨은 낄낄 웃으며 수프를 마저 먹었다.
[아, 아라야, 그런 거 아니야. 날씨를 맞히는 게 생각보다 어려워. 물이 오염되고 나서 더 변덕스러워져서 그런 말을 한 거야.]
이미 아라의 바람대로 멀찍이 떨어져 있던 세렌은 쩔쩔매며 어쩔 줄 몰라했다.
[삐잇!]
아라가 입을 삐죽 내밀다 아예 세렌에게 등을 돌렸다.
충격을 세게 받았는지 세렌은 비틀거리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사춘기가 올 때는 아니지만, 요새 잘 삐지더라고."
하벨은 보란 듯이 아라를 쓰다듬었다.
[푸히히! 미치겠네! 아, 너무 재미있다! 내가 이 맛에 쟤 방을 찾아오지.]
루룸이 낄낄거리며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데구루루 굴렀다.
[시끄러! 웃지 마! 구경꾼 주제에!]
세렌이 파르르 떨었다.
[성질만 내는 세렌아. 아라가 그렇게 좋아?]
루룸이 슬쩍 묻자 세렌은 멈칫거렸다.
[…넌 안 그래?]
[너만큼은 아닌 것 같은데. 네가 같은 정령을 이렇게 좋아하는 건 처음 봤어. 왜 그래?]
[몰라. 그냥 좋은 걸 어떡해! 아니, 나처럼 물의 힘이 강하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가.]
세렌의 시선은 아라를 향했다.
[인간들이 왜 학연, 지연, 혈연에 연연하는지 조금은 알겠어.]
[이거 어쩌나. 아라는 너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날? 날 대체 왜 싫어해? 아니, 누가 날 싫어해?]
세렌은 사실을 부정하다 곧 하벨을 노려보았다.
[씨이…….]
'그래 봤자 승리자는 나란다, 꼬맹이들아.'
하벨은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아라가 좋아하는 걸 손에 쥔 자가 승리자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