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목표를 바꿉니다(2)
* * *
"일이라뇨?"
레디나는 숨을 몰아쉬고 식은땀을 닦으며 물었다.
보이지 않은 압박에 손이 덜덜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 목표는 간단했어. 뒷세계가 더는 이 몸을 해할 수 없도록 완전히 꿇리고, 이 몸을 죽이려 한 이들을 처단하려 했거든."
"하나도 간단한 게 없는데? 막내야, 간단하다는 말을 몰라?"
라르웬은 하벨의 말에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래도 반쯤은 이뤘잖습니까? 뒷세계는 꿇렸고, 이 몸을 죽이려 한 암살자도 죽였죠."
첫 번째는 자신과 라르웬, 카샬이 함께 했지만, 두 번째는 레디나 손에 이뤄졌다.
사냥감이 검은 달로 바뀐 이상 레디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암살 의뢰를 받은, 그 암살자를 넘겼다.
"그런데 암살 의뢰가 또 시작될 수 있다며?"
하벨의 시선에 레디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씀드렸죠."
"내가 암살자 집단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이번 일은 알아서 처리하고."
레디나가 직접 바친 목줄은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
믿음과 별개로 이 정도는 풀어 놓을 수 있었다.
"내 암살 의뢰를 네가 맡아서 다시 나한테 와."
레디나가 의뢰를 받는다면 당분간 개자식들을 쳐부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어차피 너는 이미 검은 달을 배신했고, 거기에서 네 배신을 알 때까지 시간이 있으니 괜찮지?"
"물론이죠. 잠깐 생각해봤는데 좀, 아니, 엄청 재밌겠는데요? 전 잠입도 좋아하거든요."
레디나는 즐거움을 드러냈다.
크게 보자면 하벨의 목적과 자신의 목적이 같았다.
손해 볼 건 없었다.
"하벨아."
룬델이 망설이고 망설이다 하벨을 불렀다.
"괜찮습니다. 목줄은 제 손에 들어와 있습니다."
"너, 그 말을 진짜 믿어? 막내야. 이 순진한 동생아. 세상은 진짜 더러운 곳이야."
라르웬은 의자에서 등을 떼며 인상을 구겼다.
"단지 말만 하는 게 아닙니다. 진짜 목숨을 손에 넣었으니까요."
하벨은 단검 하나를 꺼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 단검에 라르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단검에 박힌 문양 자체가 굉장히 눈에 익었다.
"…아, 어디서 봤는데."
"불법 마법 시술을 했다고 하네요? 뭔지 정확히는 몰라도 이 단검에 목숨 반을 담은 대가로 신체적인 능력을 강화했다고 합니다."
"그래. 그거 맞네. 10%, 아니, 8%였나? 어쨌든 그 정도 확률로 성공한다는 불법 마법 시술."
라르웬은 다른 시선으로 단검을 바라보았다.
그걸 성공하다니.
"…진짜 독하다."
"어쨌든 이 단검에 레디나의 목숨이 담겨 있습니다."
"맞습니다. 제 목줄인 거 확실하죠?"
하벨에 이어 레디나도 확신에 찬 미소를 지었다.
"저 단검이 부러지면 제가 어떻게 되는 줄 다들 아시리라 믿습니다."
"죽거나, 뇌사 상태가 되거나 둘 중 하나잖아."
라르웬은 치를 떨었다.
아직도 불법 마법 시술을 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놀라웠다.
"어쨌든, 목줄인 거 확인하셨으면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하겠습니다."
"뭘 말한다는 거야?"
하벨은 미리 듣지 못한 레디나의 이야기에 의문을 드러났다.
"저한테 죽은 그 멍청한 새끼가 괜히 마법사니 뒷세계이니 뭐니 하면서 혼란을 준 거지, 검은 달은 마법사 일도, 티에라 마을 뒷세계 일도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레디나는 이번에 새롭게 일어난 암살자 사건이 별개의 사건임을 확실히 알렸다.
"그럼, 구구절절 말할 필요 없이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죠."
레디나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믿어달라는 말보다 결과가 더 확실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 예의를 몰랐다면 미안합니다. 제가 이런 자리는 잘 몰라서요."
그녀는 룬델과 라르웬에게 웃어주며 천천히 창문으로 향하다 몸을 날렸다.
[쫓을까, 룬델?]
세렌이 물었다.
"아니, 됐어."
룬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벨을 믿어야지.
[그럼 이제 됐어. 다들 돌아가도 괜찮아. 고마워, 고마워.]
세렌은 정령들에게 날개를 흔들었다.
"이제 이 사건은 한숨 돌렸네요. 저도 이만 쉬겠습니다."
피곤함에 눈이 감겨올 지경이라 하벨도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벨아."
룬델이 잠깐 하벨을 붙잡았다.
"압니다. 아직 사건이 하나 더 남아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 몸은 괜찮더냐?"
"아뇨. 피곤해 죽을 것 같습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라르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벨은 피곤함을 떨치며 룬델을 바라보았다.
"대충 예상하셨겠지만, 가문에 있는 모든 정령사까지 살피셔야 합니다. 지금 감옥에 있는 페트리오에게 접근하는 이들도 유심히 살피시고요. 그놈들이 진짜 범인으로 향하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할 겁니다."
"네가 넘긴 명단에 적힌 이들은 조용히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하벨은 룬델의 대답에 잠깐 생각했다.
"혹시 지금까지 계속 이렇게 처리해온 겁니까?"
"그렇지. 아버지께서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너무 많거든."
라르웬은 룬델을 대신해 말해주었다.
'그대가 왜 조용함을 택했는지 내 모르는 건 아니네. 하지만 지금은 조용함보다는 시끄러움을 택할 때가 아닐까 싶네.'
"답답하네요."
하벨의 입꼬리가 잠깐 떨렸다.
웬일로 말이 잘 나오나 싶었는데.
[야…! 너 너무한 거 아니야? 룬델이 얼마나 널 신경 썼는데 답답하다니!]
세렌이 기겁했고, 루룸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으려 짧은 앞발로 입을 가리려 애를 썼다.
"우리 막내가 좋은 생각이 있나 봅니다. 한 번 들어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라르웬은 진심으로 기대를 담아 하벨을 바라보았다.
이미 하벨이 직접 보여준 것들이 있기에 라르웬은 그가 그냥 내지른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좋은 생각이구나. 이렇게 같이 말을 나누는 것도 오랜만이라 즐겁단다."
룬델 역시 하벨의 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 음, 티에라 가문은 귀족 가문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그렇단다. 티에라 가문은 귀족 가문이 아니지. 하지만 우릴 노리면 노렸지 경시하는 곳은 없다고 보면 된단다."
"그럼 귀족에게 '야'라고 불러도 되는 겁니까?"
하벨은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
여기저기 신나게 물어뜯기는 걸 보면 분명 가문의 가치는 충분하나, 그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아직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물론이란다. 욕은 하지 말고 강아지라고 부드럽게 불러주렴."
"정말 그렇게 불러도 되는 겁니까?"
하벨은 재미있는 걸 본 것처럼 눈을 반짝였다.
"그래. 하지만 목을 베는 것까지는 할 수 없구나. 이는 가문의 힘이 약한 게 아니라 개떼같이 달려드는 다른 놈들 때문이란다."
"그놈들이 누구입니까?"
"우릴 탐내 하는 이들, 노리는 이들 등 정말 많단다."
"아버지, 제가 그냥 던지겠습니다."
룬델에게 허락을 구하고는 라르웬은 간지러웠던 입을 풀었다.
"막내야, 우리가 있는 이 나라는 '에르티안'이라는 이름의 왕국이야. 가장 힘이 약한 왕국이지."
라르웬은 팔짱을 낀 채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런 상황에서 나라에 내분이 일어나면 누가 가장 좋겠어?"
"당연히 다른 나라들이죠."
"그렇지. 내분이 일어나면 외부에서 좋다고 에르티안 왕국을 물어뜯을 테고, 외부의 힘이 강해진 만큼 우릴 손에 넣으려고 별 지랄을 다 떨 거야."
상상만으로도 끔찍한지 라르웬은 당장 얼굴을 구겼다.
"어쨌든 그렇기에 아버지께서 최대한 무응답으로, 무반응으로 대응한 이유였어."
"하지만 '귀족'이 먼저 우리를 쳤습니다."
하벨은 장난기가 가득한 웃음을 흘리다 한쪽 입꼬리를 비틀었다.
앞으로 남은 사건 하나를 떠올리며 일단 밑작업에 들어갔다.
"앞으로 제가 할 행동은 모두 정당방위입니다."
"막내야. 대체 뭘 하려고?"
[그러게? 되게 궁금하네.]
라르웬도 그의 머리에서 코를 벌름거리던 루룸도 흥미롭게 상황을 바라보았다.
"이번 마법사 사건과 더불어 좀도둑 사건 뒤에도 귀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 지금 감옥에 있는 그자가 귀족이라면 가능성은 크단다."
룬델은 하벨의 말에 동의했지만, 세렌은 비웃음을 살짝 흘렸다.
[그 정도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어.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제가 예전부터 꼭 하고 싶었던 게 있었습니다."
하벨은 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자 간지러운 말을 일단 참았다.
"무엇이 하고 싶었더냐?"
룬델은 뭐든 들어줄 것처럼 물었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안 됩니다, 체면을 차리셔야 합니다'라고 지껄이는 것밖에 못 하는, 귀족들의 목을 뎅겅뎅겅 잘라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때는 자신이 왕이었기에 귀족 같은 관료들을 차마 죽이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왕은 따로 있었고, 자신은 귀족도 아닐뿐더러 그냥 한 가문의 막내아들이 됐지 않은가.
자유로웠다.
그 자유를 더 즐기려면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처단하며 하고 싶은 것도 같이 손에 쥐는 편이 즐거울 테지.
"막내야. 방금 내가 말했잖아. 내분이 일어나면……."
"내분이 아니라면요? 정당한 대가로 뎅겅뎅겅 자르는 건 괜찮지 않습니까?"
무슨 음흉한 계획을 숨기는지 몰라도 하벨은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냥 보면 철부지 같은데.
룬델은 그 자연스러운 미소가 너무도 불안했다.
벌써 가출을 두 번이나 한 전적이 있기에 룬델은 입 안이 바짝 마른 듯했다.
"하벨아. 대체 무얼 하려는 것이더냐?"
"제가 그 귀족의 세계로 가겠습니다. 하여 가주님께 허락을 구합니다."
예부터 인간들 사이에 전해지던 말이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가야 한다.
레디나가 검은 달에서 자신의 암살 의뢰를 따놓을 동안 자신은 그 호랑이 굴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하벨은 순식간에 굳은 표정이 된 룬델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무해한 존재입니다."
"누가?"
라르웬은 이 자리에 카샬이 없는 게 너무도 안타까웠다.
우산을 몽둥이처럼 휘둘러 머리를 부수고, 다리를 으깬 상황을 다 봤는데.
대체 누가 무해하단 말인가.
"…라고 귀족들은 생각하겠죠."
하벨은 비웃음을 그렸다.
"그쪽 세계의 법칙에 따라 하나씩 머리통을 부숴줄 생각입니다."
"안 된다."
룬델은 숨을 내쉬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유가 무엇인가?'
"왜요?"
순간, 하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자신이 들어도 참 철없이 들려왔다.
"네가 저들의 웃기지도 않은 광대놀이에 맞춰줄 이유는 없다. 저들의 더러움에 네가 어떤 상처를 받을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구나."
하지만 철없는 그 말에도 룬델은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하벨은 여전히 그 상황이 불편했다.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놈들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갈 테고, 꼬리를 잘라서라도 제 목은 사수할 이들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방법이 가장 효과가 좋습니다. 저들이 저라는 존재를 제정신으로 바라보기 전에 단숨에 정리해야 합니다."
하벨은 다시 룬델에게 제안했다.
그쪽 세계야말로 자신의 경험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곳이었다.
라르웬은 하벨과 룬델이 풍기는 무거운 분위기에 괜히 루룸의 가시를 손가락으로 콕콕 찌르다 하벨을 불렀다.
"하벨."
"예, 형님."
"네 생각은 좋아, 뭐 때문에 그렇게 하려는지도 이해해. 하지만 벌써 결론을 내리기엔 이르지 않을까 싶네. 그 문제는 너만의 문제가 아니니까."
"……."
하벨은 말을 하려다 멈췄다.
자신이 성급했음을 인정했다.
독단에 가까울 정도로 밀어붙이는 행동은 자신이 왕이었을 때나 가능했지, 지금은 아니었다.
앞으로 맞춰서 살아가야 했다.
비록 자신이 '하벨 티에라'가 아닐지라도.
"맞습니다. 성급했습니다."
하벨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게 성급하게 달려가면 돌에 걸려서 코가 깨질 게 분명하거든. 잘 참았어, 막내야."
라르웬은 피식거렸다.
"그래, 하벨아. 일단 쉬거라. 나도 무조건 반대하지 않으마."
룬델 역시 어색하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자유롭게 살도록 허락하겠다 했지만, 하벨의 목숨보다 앞선 약속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명 천천히 하벨에게 다가가겠다 맹세해놓고 성급하게 하벨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던가.
"하벨아. 나는 지금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고 말하긴 어렵구나."
룬델은 민망함을 삼키고 하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하벨아."
부드럽게 하벨을 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앉았다.
하벨의 어깨를 토닥였다.
"오늘, 고생 많았다."
하벨은 살짝 멍한 얼굴로 룬델을 바라보았다.
어깨가 닿은 부분이 이상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뭉클거리는 이 감정을 또 무엇인가.
"맞아. 고생 많았지. 네 손으로 널 죽이려 한 자들의 정체를 알아냈으니까. 잘했다, 막내야."
라르웬까지 칭찬이 이어졌다.
하벨은 비로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어쩌면 자신이 겪었던 사건 중 가장 사소한 일일지 모르겠지만, 자랑스러움이 가득한 저들의 표정을 보자 제일 좋은 보상을 받은 기분이었다.
* * *
'…기분이 이상해.'
하벨은 자신의 방이 아닌, 헤레스에게 향하고 있었다.
어차피 방으로 돌아가면 그녀를 부를 테고, 잠깐 걸을 겸 자신이 움직였다.
'원래 가족이 이런 존재인가?'
가족이 있어 봤어야 이 일렁거림이 뭔지 알 텐데.
하벨은 룬델의 손이 닿았던 어깨에 앉은 아라를 바라보았다.
뭐가 좋은지 아까부터 배시시 웃고 있는 게 아닌가.
하벨은 헤레스의 진료실에 문을 열었다.
"아차. 노크……."
뒤늦게 노크를 잊어버렸다는 사실에 하벨은 미안하다고 말하려다 그대로 멈췄다.
노트 여러 개가 둥둥 떠서는 열심히 연필이 움직이는 게 아닌가.
"……!"
흥얼거리던 헤레스가 하벨과 눈이 딱 맞았다.
누가 봐도 그녀는 마법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