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우당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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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쯧. 털렸습니다."
카샬은 먼저 하벨이 방문했다던 검은 달을 만난 장소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단번에 코를 찌르는 피 냄새에 혀를 찼다.
뒤에서 '끄응' 하고 앓는 소리에 카샬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선 하벨을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그냥 적응이 덜 됐을 뿐이야."
하벨 옆에 막대기처럼 변한 우산이, 그 우산 위에 아라가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단지 비가 내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무거워졌다.
카샬이 왜 가면까지 준비했는지 빗속에 걷다 보니 알았다.
오염된 물에 내성이 없는 이 몸에게 비가 내리는 날에 마시는 공기조차 독 연기와 같았다.
가면을 써도 숨 쉬는 게 조금 버거웠다.
가면이 없었으면 버티지 못했겠지.
그토록 어여뻤던 비가 이토록 무서운 존재가 될 줄이야.
'내가 지금보다 물을 더 잘 다룬다면 한결 편하겠는데.'
하벨 티에라는 시간의 흐름에 맡겨 적응한 모양이었지만, 자신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가면은 여러모로 불편했으니.
'하지만 오길 잘했어. 이로써 검은 달 소속 암살자들끼리 갈등이 있다는 게 확인됐다.'
하벨은 자신이 원하던 상황이 그려지자 슬쩍 웃었다.
지금 죽어있는 저 암살자가 자신에게 사진을 주며 알려줬던 사실은 진실일 확률이 높아졌다.
자신에게 정보를 미끼로 두고 도망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일이 뒤틀린 모양이었고.
"역시 아프신가 봅니다. 잠시만요."
카샬이 온도계를 꺼내려고 하자 하벨은 팔목을 살짝 걷어 점보다 작은 검은 불꽃을 토해낸 랜턴을 가리켰다.
"그것보다 이거 보여?"
"예, 장식품이잖습니까."
"말고, 여기 검은 불꽃이 보이냐고."
"아무래도 상태가 조금 더 심각한 듯합니다."
카샬은 라르웬을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봐도 그래. 헛것이 보이나 본데. 빨리 처리해야겠네."
걸음을 옮긴 라르웬은 주변에 떠도는 정령들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실례합니다. 혹시 누가 여기에 있던 자들을 죽였는지 보셨습니까?"
정령마다 병을 끌어안고 있었는데 뒷세계에 퍼진 옅은 독에 라르웬은 그 병에 독이 담겨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정령들은 자연에 깃드는 존재이기에 죽음을 제외한 자연의 힘들을 고루고루 쓸 수 있었고, 그중 자신들이 더 잘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곳에 머무르는 습성이 있었다.
정령들은 병을 더 끌어안으며 라르웬을 쳐다보다 곧 하벨에게 시선을 돌렸다.
[말하기 싫은데. 어디서 저런 불쾌한 걸 데리고 와서는. 어서 꺼지렴.]
루룸이 그 말에 가시를 날카롭게 올렸다.
[나도 쟤가 싫지만, 라르웬이 물었으면 대답해야 할 거 아니야?]
[네가 아끼는 정령사라고 나도 아껴야 한다는 거야? 건방지게.]
[어서 말해. 나한테 뜯기기 전, 아니지, 세렌한테 뜯기기 싫으면!]
[뭐야. 티에라 가문의 정령사였어? 그 쓸데없는 가면은 왜 써서는.]
세렌이라는 말에 정령들의 표정이 달라지자 루룸은 우쭐거렸다.
[그럼. 둘째하고 …막내야.]
'세렌이 왜?'
하벨은 이전처럼 계속 불꽃이 사라지지 않는 랜턴을 보다 고개를 올렸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약점은 일찌감치 사라졌지만, 본인은 자신에게 약점이 잡혔다 생각하는 순진한 정령이지 않은가.
[젠장, 귀찮게. 이러면 말해야 하잖아. 우리도 룬델한테 신세를 지고 있으니까.]
'오. 룬델이 괜히 티에라 가문의 수장이 아니었네.'
하벨은 비로소 밖으로 나와서야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며 신기함을 속으로 꾹꾹 눌렀다.
정령들은 정말 싫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도 누군지 몰라. 알잖아? 주변에 별로 관심 없는 거. 그… 뭐랬더라. 그 세 치 혀를 놀렸으니 죽음으로 갚아라. 그러면서 다 죽였어.]
'역시나.'
하벨은 정령들이 알려주는 정답에 흡족했다.
[혹시 너희 말이야, 뤤트로를 찾아오지 않았어?]
정령들이 라르웬을 보며 슬쩍 물었다.
"맞습니다. 죽이러 왔습니다."
[잘됐네. 걔는 죽이든 말든 상관없지만, 마법사들은 꼭 죽여줘.]
[뤤트로 뒤에 마법사가 있는 거 알고 있지?]
[어디서 굴러온 마법사 놈들이 부정한 것들을 둬서 우리를 압박하고 있으니까. 기분 나빠.]
정령 중 하나가 손을 휘휘 젓자 주변에 있던 종이가 새의 형상이 되어 날아다녔다.
하벨은 저 손짓마저 참 오만하다고 생각했다.
[따라가. 길을 안내해 줄 거야. 일을 해결하고 돌아오면 축복을 내려주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라르웬은 당최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하벨의 표정에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에 밖으로 나갔다.
"궁금한 거 알아. 일단, 걸으면서 말해줄게."
라르웬은 자신의 어깨에 앉은, 정령이 만든 종이 새를 가리켰다.
* * *
"…정령이 말한 축복은 보통 '교감'을 말해. 교감을 통해 순환의 길에 쌓인 불순물을 없앨 수 있다고 말한 게 기억나나 모르겠네."
교감이라는 말을 라르웬이 꺼내자마자 하벨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런 식으로 정령과 교감을 할 수 있다니.
되게 재미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좋은 가르침이었다.
"형님도 불순물이 있습니까?"
"물론이지. 나 말고도 모든 사람이 있을걸?"
라르웬은 순진한 하벨의 표정에 낄낄 웃었다.
"보통 정령사 입장에서는 정령에게 받는 정령수 이외의 것들은 다 불순물이야. 교감이나 정령수를 통해 그 불순물을 녹일 수 있고."
이미 아라를 통해 경험해본 일이기에 하벨은 더는 묻지 않았다.
오히려 웃었다.
원치 않게 보상까지 손에 들어올 테니 더 즐거웠다.
"막내야. 지금 네가 이렇게 즐거운 건 한 번 정령수를 체험해봤기 때문이겠지? 정령수가 들어오자마자 불순물이 녹는 그 감각 말이야."
"오. 정답입니다."
순순히 인정하는 하벨의 대답에 놀란 건 카샬이었다.
"정말입니까?"
질투나 조롱이 아닌 기쁨이 가득 섞여 있었다.
카샬 자신은 보이지 않기에 정령들이 어떤 시선으로 하벨을 보는지, 말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다.
모든 정령은 하벨을 싫어했다.
"그래. 아라가 줬거든."
[삐잇!]
아라가 우쭐거렸다.
쏘오오옵.
이어 그 맛있는 물을 내놓으라고 입을 움직이다 이내 입맛을 다셨다.
"감사합니다, 아라 님. 정말 감사합니다."
카샬의 인사에 아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마도 처음 받아보는 감사의 인사겠지.
배시시 웃으며 기뻐하는 게 보이지만, 하벨은 온 힘을 다해서 정령 특유의 오만함을 누르려고 노력하고 있는 와중에 찬물을 뒤집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너무 띄워주지 마. 지금 조기교육 중이라고."
[푸핫…!]
"푸하하!"
루룸과 라르웬의 웃음이 동시에 터졌다.
태어날 때부터 기본 지식을 깔고 있는 정령에게 조기교육이라니.
"아, 미치겠다! 진짜 미치겠네!"
[아씨, 자존심 상해! 진짜 상한데, 너 왜 이렇게 웃겨?]
하벨은 보지 못했지만, 루룸의 눈이 아주 잠깐 반짝거렸다.
라르웬은 아예 벽을 잡고는 허리를 숙이며 웃고 있었다.
"너도 웃겨?"
하벨의 시선이 카샬에게 향했다. 누가 봐도 힘겹게 웃음을 참는 중이었다.
"아뇨. 도련님의 말씀은 언제나 옳죠."
"그냥 웃어."
"실례합니다."
사람 두 명, 정령 하나가 어울려서 웃는 모습은 생각보다 꼴사나웠다.
시비라도 걸리면 좋겠지만, 저번에 왔을 때보다 뒷세계는 더 조용했다.
닫은 가게가 몇인지.
'벌써 우리가 온다는 사실이 귀에 닿은 거겠지.'
하벨은 별수 없이 아라를 쓰다듬으며 주의를 시켰다.
"아라야. 누가 널 띄우든 어떻게 부르든 나는 네 대장이야. 절대로 잊으면 안 돼."
[삐삐.]
아라가 고개를 저었다.
나흘 동안 공을 들인 일이 날아가고 있었다.
그럼 똑같이 날아가는 게 있어야지.
"맛있는 물이 훨훨 날아가네."
[삐잇!]
아라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좋아."
하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파닥거리는 종이 새를 따라갔다.
벽을 붙잡고 있는 놈이나, 나자빠진 놈이나 다 저러고 있으라지.
"어흠, 흠, 막내야. 네가 앞으로 정령사로서 살아가려면 이거 하나는 기억해야 해."
언제 쫓아온 건지, 라르웬이 조금 전 일을 없었던 것처럼 하며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냥 웃으십시오."
"널 아니꼽게 보는 정령들이 많다는 게 슬슬 보이겠지만, 절대로 정령들과 적이 되지 마. 네가 정령과 만나서 강해질 기회를 그냥 날리지 말라는 거야. 그건 멍청한 짓이야."
"물론이죠. 그 좋은 기회를 왜 날리겠습니까?"
자유를 누리려면 많은 것들을 쟁취해야 하는 사실을 왜 모르겠는가.
마음대로 사는 게 그렇게 쉬웠으면 모두가 그랬겠지.
하벨은 이 도전마저 사랑스럽게 보였다.
용왕이었을 때는 하지 못했던 첫걸음이었으니.
종이 새가 한 골목에서 멈췄다.
[여기부터 마법이 깔려있네. 여기 보이지? 부정한 것들로 그려진 선이.]
루룸은 잘 보이지 않으면 보이질 않을 선을 증오스럽게 가리켰다.
검붉은 선이 뭐라고.
하벨이 주변을 의식하자 정령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상황과 마주했다.
아라가 주머니 속에 들어와 벌벌 떨었고, 루룸은 선의 형태라 잘 모르겠지만, 경계하는 건 분명했다.
"일명 '부정한 것'이라고 지칭하는데, 순환을 역행하는 모든 걸 가리켜. 그러니까, 자연에서 벌어지지 않은 것들이라고 생각하면 빠를 거야? 자연의 존재인 정령에게 있어 유일한 약점이라고 할 수 있어."
라르웬은 발로 선을 지우며 알려주었다.
"예를 들자면 가장 흔한 건 고문당한 자의 피로 그려진 무언가야. 개의 머리를 단 고양이라든지."
카샬은 슬슬 검을 뽑았다.
"하지만 괜찮아. 왜냐?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이렇게 선을 지우면 그뿐이니까."
점점 사나워지는 라르웬의 시선에도 하벨은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겨우 선 하나뿐인데 정령들이 그렇게도 두려워하는 게 이상했다.
"우리가 정령을 필요로 하는 만큼 정령 역시 우리를 필요로 하지. 그래서 정령사가 존재하는 거야."
"작전은 안 세웁니까, 형님?"
하벨은 자신들을 보고 기겁하는 경비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네가 이렇게 3명에서 다 부서트리자며."
"그랬죠."
"그럼 작전이 왜 필요해? 마법사라는 사실에 쫄았냐?"
"마법사는 본 적 없습니다. 그것과 별개로 작전은 늘 필요합니다. 지금 막 생각이 났고요."
"뭔데?"
"작전명 '우당탕'입니다."
'우당탕'이라는 말이 나오자 라르웬은 웃음을 참고자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고, 카샬이 미간을 찌푸렸다.
"…도련님. 작명가를 저택으로 부르겠습니다. 도무지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용은 뭡니까?"
"작전명에서 드러나잖아? 우당탕 쓰러트리라고."
"뒤에 계십시오. 제가 비에 노출된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잠깐 잊어버렸습니다."
"됐고. 아무거나 줘봐."
"거기 아무 거나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더 좋은 게 있잖습니까. 펼치십시오. 오면 휘두르시면 됩니다."
카샬이 가리킨 건 물기가 쫙 빠진, 막대기 형태가 된 우산이었다.
"…아."
하벨은 멋쩍은 듯이 웃었다.
"이걸 잊었네."
얼마나 좋길래, 카샬이 또 강조하는 건지.
하벨은 막대기가 된 우산을 손에 쥐었다.
손에 착 감겨왔다.
라르웬이 슬쩍 자리를 비켜주었다.
어디 휘둘러보라는 듯이.
"웬 놈들이냐!"
경비 중 한 명이 소리쳤다.
험상궂은 얼굴을 더 험상궂게 만들어도 하벨은 눈을 깜빡하지 않았다.
라르웬과 카샬이 양보한 걸 보면 모르겠나.
"이봐. 이 앞을 넘어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모양인데 내가……."
빠악!
하벨은 우산을 휘둘렀다.
휘두르는 건 가벼웠으며 적의 머리를 부서트릴 때는 이만큼 무거운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맛이 좋네.'
하벨은 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지 않았다.
별로 힘이 들지 않았다.
약간의 눈썰미만 있다면 저들을 쓰러트리는데 특별한 동작을 취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정말 '하벨 티에라'만을 위한 무기 같았다.
바닥에 철퍼덕 누운 적들은 안중에도 없는지 하벨은 잠깐 우산을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어.'
"저, 저……."
적들이 너무 놀라 말을 더듬거리는 사이 하벨은 다시 달려들었다.
빠악!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 알면서 내숭은."
하벨은 쓰러진 적의 머리를 밟았다.
말한 입은 내버려 뒀다. 일부러 팔만 부러트리지 않았는가.
"서로 아는데 모른 척하지 말자고. 마법사들은 어디에 있는데? 어렴풋이라도 알잖아?"
저렇게 부정한 것을 이용해 선을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정령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는 것이며 곧 저들이 불편한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기도 했다.
하벨은 신중히 한 번 더 확인해보고자 했다.
아마 마법사의 대가리를 깨면 그 답이 나오겠지.
"아, 압니다. 알고 있습니다!"
적은 눈물을 질끔 흘리며 외쳤다.
세상에 머리든 다리든 쉽게 깨부수는 무기로 머리를 겨누며 묻는데 어떻게 대답이 나오지 않을 수 있을까.
"안내해준다는데 갑시다."
하벨은 천연덕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가 가르쳤어?"
라르웬이 뒤따라가다 슬쩍 카샬에게 물었다.
아무리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한 행동이었다지만 너무 자연스럽고 기대 이상으로 해결하지 않았는가.
"아뇨. 저는 도련님이 알려주신 줄 알았는데요?"
카샬은 오히려 라르웬에게 물었다.
"내가? 하벨이 얼마나 엄살쟁이인지 알면서 그래?"
"그럼 저 동작은 뭡니까? 초보자가 아닌데요?"
"그래서 내가 물어봤잖아, 멍청아."
"…하. 가주님의 아들만 아니었어도."
카샬은 구시렁거리며 라르웬에게 슬쩍 발을 걸었다.
순간 라르웬이 휘청거렸지만, 카샬은 자연스럽게 하벨의 뒤를 쫓고 있었다.
"저 망할 집사, 일만 못 했어도 벌써 자르라고 수천 번은 말했을 텐데."
라르웬이 복수의 칼날을 갈며 카샬에게 접근하자 하벨은 라르웬을 비웃었다.
"형님. 동생 보기에 창피하지 않으십니까? 나는 좀 그렇네요."
하벨은 라르웬이 자신을 멍청이라고 부른 사실은 아직도 잊지 않았다.
자신은 뒤끝이 있었다.
"왜 나만……."
라르웬은 억울해하다 승리를 알리는 카샬의 미소에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