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4화 (14/415)

14화. 우당탕!(2)

* * *

* * *

"…으음."

룬델은 라르웬의 부름에 다급히 달려와서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나 듣고는 5분간 넋을 놓았다.

티에라 가문에 있는 모든 정령은 물론 다른 곳에 있는 정령마저 거부당하고, 정령도 보지 못하고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하벨이 드디어 정령사으로서 재능에 꽃이 피다니.

이 기쁨과 혼란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참에 하벨은 '아라'라고 불리는 기묘한 생명체를 내밀며 물었다.

정령이 맞냐고.

[삐이?]

아라의 고개가 룬델과 같은 방향으로 갸웃거려졌다.

'아라를 봐도 털뭉치밖에 안 보일 텐데.'

아라를 관찰한 결과 하벨은 쫑긋 솟은 귀와 털뭉치로 이루어진 정령이라는 걸 확인했다.

"좀 특이하긴 해도 정령이 맞구나."

룬델은 무겁던 입을 다시 열었다.

[진짜? 진짜로 그렇게 생각해, 룬델?]

세렌이 아라 옆으로 조심스레 이동하다 말고 해맑게 물었다.

다시 보아도 아라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교감이 느껴졌다. 이것만큼 확실한 게 없지."

[불쌍한 것. 아라야. 내가 옆에서 열심히 돌봐줄게.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 수 있어!]

세렌이 더 다가오자 아라는 털을 곤두세우며 하벨에게 찰싹 붙었다.

[씨이…!]

세렌의 시선이 하벨을 향했다.

"세렌. 생각해보니 나만 혼나는 건 불공평……."

[조용히 해! 입 다물어!]

세렌이 다급히 하벨의 입을 막았다.

'룬델은 벌써 내가 어떻게 밖으로 나갔는지 눈치챈 것 같은데.'

하벨은 세렌을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게 더 재미있으니까.

"아버지."

라르웬이 룬델을 불렀다.

"잠시 물리시지요."

"그래, 그러마. 세렌."

[아, 알았어. 다들 가자고.]

세렌은 다른 정령들을 데리고 가다 라르웬에게 붙어 있는 루룸을 쳐다보았다.

[이 눈치 없는 루룸아. 너도 가야지.]

[나는 너랑 달리 입이 무거운데, 세렌아?]

[죽을래? 너 진짜 죽고 싶어?]

세렌의 매서운 시선에 루룸은 입을 삐죽 내밀며 천천히 움직였다.

[치사한 세렌아. 간다. 간다고. 라르웬. 나 없다고 울면 안 돼.]

"그래. 잘 가."

라르웬은 손을 흔들었다.

[이 매정한 것. 그래서 마음에 들어.]

루룸은 킥킥 웃다 세렌을 따라 움직였다.

방이 조용해지자 라르웬은 하벨을 바라보았다.

마치 네가 원하는 걸 말해보라는 것 같았다.

하벨은 사양하지 않았다.

자신이 이 몸으로 살 동안 지켜야 할 규칙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하벨 티에라가 벌인 일이지만, 자신은 저들의 세계에 끼어든 불청객에 불과했다.

그러니 숙여도 자신이 숙이고 적응해도 자신이 해야지.

"가주님."

"…그래, 하벨아."

"당분간 제가 정령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주십시오."

이미 카샬과 라르웬, 그리고 룬델의 반응을 보았다.

하벨 티에라와 가까운 자들도 처음에 믿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 다른 이들은 어떻게 나올지 아주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뭐, 설령 알린다고 해도 이를 믿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요."

회의감이 가득한 하벨의 말을 어루만지듯 룬델은 묵직한 소리를 꺼냈다.

"나는 널 믿는단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진심이 엿보였기에 하벨은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럴 때는 시선을 돌리는 게 좋았다.

하벨은 뒷세계에서 처바른 검은 달 소속 암살자를 통해 얻었던 티에라 가문 내부의 배신자들이 적힌 목록을 룬델에게 넘겼다.

"이제 조사하시면 됩니다. 내부 배신자들 목록입니다."

"이걸 얻으러 뒷세계에 갔더냐?"

"그렇죠. 그래도 손에 뭐라도 얻어서 다행입니다."

"이런 일이라면……."

"저는 가주님께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당연히 기억한단다."

룬델은 부드럽게 웃었다.

"검은 달과 쓰레기, 그리고 뒷세계가 제 자유를 막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쳐부수겠습니다."

하벨 역시 활짝 웃었다.

자신이 하벨 티에라에게 몸을 돌려주기 전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암살자에게 죽을 순 없지 않은가.

자신과 하벨 티에라를 위한 일이었다.

"이렇게 허락을 구하면 된다고 형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맞습니까?"

순간, 라르웬은 당황했고, 룬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체 애한테 뭘 가르친 건지.

눈으로 욕을 하는 터라 라르웬은 고개를 슬쩍 숙였다.

"막내의 응… 용이 참 빠르지 않습니까? 하하."

어색한 라르웬의 웃음에 룬델은 한숨을 꾹 눌렀다.

"내가 하마, 하벨아. 너를 건드린 게 어떤 의미인지 처절하게 밟아주겠다."

"아뇨. 제가 합니다. 제 사냥감입니다. 손대지 마십시오."

자신은 욕심쟁이였다.

하지만 용왕이라는 지위로, 왕이라는 이름 때문에 이미 신하들에게 수많은 사냥감을 뺏기며 살았다.

그러니 더는 뺏기고 싶지 않았다.

자기 일은 자신이.

이렇게 간단한 일조차 하지 못하는 삶을 다시는 살고 싶지 않았다.

"네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란다. 하지만 지금 너는 아프지 않더냐. 나는 걱정이 되는구나."

담담하게 말했기에 룬델에게 담긴 걱정이 더 크게 느껴졌다.

하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룬델에게는 왜 이렇게 약해지는 기분인지.

"너는 괜찮다고 생각해도 틈의 세계는 단순한 곳이 아니란다. 사람의 정신을 건드리지. 그래서 지금 푹 쉬어야 한단다."

하벨은 잠깐 방문을 바라보았다.

룬델의 등장에 헤레스도 카샬도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도련님. 오늘은 약을 하나 쓰겠습니다. 틈의 세계를 마주한 부작용을 줄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헤레스가 그런 말을 했구나.'

하벨은 미소를 지었다.

왕이 아니라 한 존재로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꽤 즐거웠다.

'아픔이 결코, 부끄러운 게 아니듯 아픔 때문에 무언가를 하지 못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러니 나는 가겠다.'

"싫습니다!"

떼를 부리는 듯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하벨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 그러니까 이건 제가 말한 게 아닙니다. 이 망할 입이 멋대로 지껄일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그런 겁니다. 제가 분명히, 싫습니다!"

"…얼른 헤레스를 불러올까요, 아버지? 아무래도 막내가 회까닥할 것 같은데요?"

라르웬이 룬델에게 작게 속삭였다.

룬델은 손을 들어 라르웬을 말렸다.

"하벨아."

"저는 분명히 다른 사냥감을 드렸습니다. 쓰레기라고 말이죠. 아, 방금 또 드렸네요?"

자신은 룬델에게 가장 맛있는 부분을 줬다.

신분이 확실하며 그 뒷배 역시 알 수 있는 확률이 높은 폭사한 기사를.

티에라 가문 내부의 배신자들을.

"그 부위부터 야금야금 먹고 오시는 게 어떠십니까?"

아버지가 아닌, 경쟁자를 보는 듯한 시선에 룬델은 순간 움찔거렸다.

자신을 시험하는 걸까.

룬델은 올곧게 치고 들어오는 저 눈빛에 어떻게 해야 하나 망설이다 라르웬에게 물었다.

"너도 같이 간다고 했더냐?"

"맞습니다. 저하고 카샬도 갑니다."

라르웬이 대답했다.

"그럼, 많은 걸 가르쳐주거라."

룬델은 하벨이 자신을 시험하는 것처럼 자신 역시 그럴 심정으로 말을 꺼냈다.

혼자도 아니며 두 사람이 따라가니 이참에 자신이 몰랐던 하벨을 알 기회가 아닌가.

'역시,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하벨 역시 즐거웠다.

자신은 눈치 빠른 자를 좋아하니.

"하벨아. 내일이나 모레 출발하거라."

"아, 아버지…? 그 두 날은 안 됩니다. 아시면서 왜 이러십니까?"

라르웬이 경악하자 하벨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두 날은 왜 안 됩니까?"

"비가 올 확률이 엄청 높거든. 너도 잠깐 겪어봤으니까 알잖아? 오염된 물이 너한테 얼마나 쥐약인지."

하벨을 들쳐업고 왔던 라르웬은 일부러 팔을 꾹꾹 누르며 마사지했다.

"하벨아. 정령사는 비우는 자란다. 한 번 정령이 보이기 시작하면 이제 더는 다른 힘을 얻을 수 없을 테니 도태되거나 나아가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다."

[삐이이.]

룬델은 아라를 쓰다듬자 살살 녹듯 풀어졌다.

"이번 기회에 네가 약해지는 날을 기억하거라. 모두가 알고 있는 너의 약점을 너 역시 뼈저리게 기억해야 않겠더냐?"

입 안이 썼다.

하지만 룬델은 그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벨은 정령사 티에라 가문의 막내아들이기 전에 다른 말들이 먼저 앞섰다.

정령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정령사 가문 수치, 정령사의 수치.

지독한 물의 저주를 앓은 시한부.

그래서 하벨은 '시든 푸른 꽃'이라고 불렸다.

가문 내에 푸른 꽃은 없었다.

손만 쥐면 꺾일 하벨을 조롱하는 말이며 시든 꽃에 비유해 언제 죽을지 모를 하벨을 향한 비웃음을 담은 말이기도 했다.

―아버지. 제가 바꿀래요. 제가 바꾸고 싶습니다. 아버지께서 정화제를 빌미로 저자들을 협박하면 얼마든지 저 소문과 입을 막을 수 있겠죠. 하지만 저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거기까지 보호받고 싶지 않아요.

이전에 웃으면 하벨이 꺼냈던 말이었다.

"좋습니다. 겪어보죠."

그때와 똑같은, 자신감이 가득한 미소로 하벨은 자신을 바라보았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니까요.

딱 하나가 달라졌지만.

"지켜보마."

룬델은 걱정과 초조함을 숨기며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 * *

이틀 뒤.

"…이 우산으로 말씀드리자면 도련님의 생명줄입니다. 딱 이 사실만 기억하십시오."

카샬은 우산 하나를 들며 요란스러울 만큼 진지하게 말했다.

"이 우비와 가면도 그렇다며? 아, 정화 장치도. 나는 생명줄이 참 많이 가지고 있네. 오래 살겠어."

하벨이 기억하는 우비는 비닐 소재였지만, 이곳 우비는 그냥 겉옷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몰라도 세상에 바지까지 있는 우비가 어디 있는가.

"우비는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고자 입는 보험입니다. 이 멋쟁이 우산과는 다릅니다."

"뭐가 다른데?"

"제가 정화 장치가 비싸다고 말씀드렸습니까?"

"말했어."

"그것보다 훨씬 더 비쌉니다. 세상에서 딱 하나밖에 없거든요."

"이게?"

"혹시 에고 소드라고 들어본 기억이 나십니까?"

"아니. 전혀."

"에고 소드, 일명 자아를 가진 검이라고 부르죠. 진짜로 자아를 가진 건 아니고, 마법으로 만든 인공 지능이 섞여 있는 검입니다. 이게 참 비싼데 쓸모가 없죠."

"왜?"

"공격 하나, 하나에 시간을 많이 잡아먹거든요. 적을 분석하다 죽는 경우가 많아서 이제는 거의 사라진 분야지만, 가주님께서 사들이셨습니다. 도련님을 위해서요."

카샬은 하벨에게 우산을 건넸다.

"도련님께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으셨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인공 지능을 넣은 우산 때문이라는 거야?"

하벨은 우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론입니다."

"그럼 왜 이런 게 있다고 말을 안 했어?"

"설산에서 겨우 찾았거든요. 이제 막 수리가 끝난 참입니다. 받으시죠."

카샬이 우산을 흔들자 하벨은 여전히 무표정으로 받았다.

"이 우산의 주목적은 도련님을 비로부터 보호하는 겁니다. 물론, 방어에 치중되어 방패로도 훌륭하고, 웬만한 무기보다 비교도 안 될 만큼 튼튼해 휘두르기만 해도 충분합니다."

카샬의 설명에 하벨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듣기만 해도 이건 우산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산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무엇보다 든 듯 들지 않은 듯 가볍고, '자동 비행' 모드를 설정하신다면 손에 쥐고 계시지 않아도 됩니다. 알아서 비를 막으니까요. 아, 색도 기분에 따라 마음껏 바꾸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뿐이라는 거야?"

"아니. 너만이 펼칠 수 있거든."

라르웬이 하벨에게 손을 내밀자 순순히 우산을 넘겼다.

라르웬이 우산을 여는 버튼을 눌렀지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젠 네가 펼쳐봐."

우산을 돌려받은 하벨은 동그라미 표식이 있는 버튼을 눌렀다.

―소유자 '하벨 티에라'를 인식. 작동합니다.

딱딱한 목소리와 함께 우산이 펼쳐졌다.

"…허어."

하벨은 신기함에 눈을 떼지 못했고, 카샬은 허리춤에 찬 검에서 손을 떼며 라르웬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라르웬이 웃었다.

정말로 하벨이었다.

[삐삐삐!]

아라가 우산으로 들어가 살대에 앉아서는 실실 웃었다.

어제 아라에게도 드디어 눈코입이 생겼다.

털뭉치로 가득한 인형 같았지만, 표정을 알 수 있는 게 어디인가.

아라의 눈이 살포시 감겼다. 아무래도 아늑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저 우산이 있어도 비가 온 날에 나간 사실을 죽을 듯이 후회하겠지만, 참아 봐, 막내야. 이 형님이 응원하마."

라르웬이 낄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문이 열렸다.

쏴아아.

비가 쏟아졌다.

저토록 맑고 깨끗해 보이는 비가 오염됐다니.

'……!'

하벨은 금세 라르웬이 꺼낸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차렸다.

직접 맞지 않아도 몸이 무거워지며 두통이 시작됐다.

하벨은 비로소 내성 없이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왜 그렇게 자신을 말렸는지도.

'좋네.'

마치 새롭게 시작됐다는 걸 알리는 것 같아 하벨은 기뻤다.

"예. 쳐부수러 가죠."

하벨은 자신의 잠을 깨게 만든 첫날의 대가가 얼마나 큰지 알려줄 셈이었다.

비가 내리는 밖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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