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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10화 (10/415)

10화. 틈의 세계

* * *

설령 자신이 살던 세계가 아니라도 개새끼에게는 개새끼답게 처신하는 건 똑같겠지.

하벨은 차가 든 잔을 들었다.

콱!

남자는 순식간에 단검을 꺼내 책상에 찍었다.

'오. 검 좀 돌려봤나?'

하벨의 미소가 길어졌다.

"손님. 다시 생각하십시오."

남자는 비웃음을 억지로 참듯 말을 꺼냈다.

"왜?"

"서로에게 좋잖습니까? 폭력을 행사하신다면 더는 손님으로 보지 않겠습니다."

"이 새끼야."

촤악.

흡족함이 가시기 전에 하벨은 찻잔을 아래로 향하도록 뿌렸다.

남자는 뜨거운 차를 그대로 뒤집어썼다.

"제 인내심은 여기까지입니다, 손님."

"기분 더럽네. 나도 지금 딱 그런데."

아라가 눈치껏 하벨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정령이 정령사에게 정령수를 주는 방법이 다양한 건 알지만, 아라는 달라붙는 게 제일 좋은 모양이었다.

아라가 준 정령수로 몸에 불순물들이 점점 사라지자 하벨은 가뿐한 몸을 느끼며 남자를 살폈다.

저 남자 역시 암살자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모름지기 먼저 치는 놈이 이길 확률이 높았다.

'역시 다리가 최고겠지?'

처음 암살자를 잡았을 때처럼 하벨은 남자의 몸에 떨어지는 물을 날카로운 비수처럼 만들었다.

타타타타타!

"으아아악!"

남자의 비명이 터지며 주저앉았다.

난데없이 다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아래를 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피가 흐르고 부들부들 떨렸다.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저번보다 물의 비수를 더 길고 깊게 만들 수 있었지만, 하벨은 하지 않았다.

치고 빠지기에 지금이 딱 좋았으니.

'아무것도 없지. 범인은 물이었으니까. 그나저나 보다 보니 누구를 닮은 것 같네.'

페트리오가 얼어붙었다가 하벨의 시선에 흠칫 놀라며 천천히 그를 쳐다보았다.

하벨은 이전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미지의 힘.

그 힘이 또 발동한 셈이었다.

"…커헉."

하벨은 다급히 가슴을 붙잡았다.

또 비어버린 순환의 길로 기어오르는 불순물들 때문에 가슴의 통증을 느끼며 피를 토했다.

"도, 도련님?"

페트리오의 눈이 커졌다.

피를 토하다니.

"…아, 병 때문이야."

망할 물의 저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하벨의 말에 페트리오는 잠깐 머리가 멍해졌다.

'병이라니. 물의 저주 말고 또 병에 걸리셨단 말인가.'

하벨은 입가를 쓱 닦고 놈이 혼란에서 벗어나기 전에 망토로 주먹을 감쌌다.

"아라야. 아직 이런 거 보면 안 돼. 고개 돌려."

[삐?]

왜냐고 묻는 듯한 아라의 말에 하벨은 다른 손으로 아라를 살짝 움켜쥐었다.

"음… 주먹은 함부로 휘두르는 게 아니니까."

하벨은 놈의 얼굴을 후려쳤다.

뻐억!

놈의 머리가 땅에 닿자 하벨은 발로 얼굴을 짓밟았다.

"다리도 마찬가지라서."

놈은 여전히 혼란한 시선으로 하벨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억이 나면 말해. 그때 들어줄 테니까."

퍼억!

하벨은 놈의 얼굴을 걷어찬 후에 때리는 부위를 바꿨다.

퍽!

처음부터 놈은 자존심이 높아 보였다.

퍼억!

열이 받겠지.

퍽퍽!

물까지 뒤집어썼으니 눈이 돌아가겠지.

하벨은 흘러내리는 코피를 쓱 닦으며 부지런히, 골고루 놈을 발로 다져주었다.

'하지만 고통 앞에서는 누구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아픔은 크게.

하지만 기절하지 않을 만큼.

길고 긴 시간, 전투와 함께했으니 어딜 때리면 얼마나 아프고 끔찍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후……."

페트리오는 지켜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자신도 웬만큼 저런 상황을 많이 봐왔지만, 저 때리는 기술은 그중에서도 꽤 악독했다.

사람이 아니라 고기를 다지는 것 같지 않은가.

퍼억!

"커헉! 기, 기, 기……."

놈은 더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토했다.

"기 뭐?"

퍽!

하벨은 발을 멈추질 않았다.

단련되지 않은 육체인 만큼 허벅지가 끊어질 것만 같았다.

'몸을 훈련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뭐.'

하벨은 몽롱한 기분에 제 몸에 느껴지는 고통이 반감되는 듯했기에 신나게 발을 움직였다.

"기, 기, 억이 났습니다!"

놈이 내지르는 소리에 하벨은 발길질을 멈췄다.

자신의 손안에서 답답한지 부르르 움직이는 아라의 움직임에 손을 놓았다.

[삐삐삣!]

나 화났어.

아라는 하벨의 어깨에 '쏘오오옵'거리며 옷을 빨아들였지만, 하벨은 아라를 내버려 두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 드디어 기억이 났어?"

기억을 잃어버린 친구가 기억을 찾은 것처럼 하벨은 기뻐했고, 남자는 두려움으로 벌벌 떨었다.

기절할 만큼 온몸이 아팠다.

하지만 정신이 왜 이렇게 또렷한지.

이상하게 맞으면 맞을수록 정신이 더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제발."

놈은 웅크린 몸으로 두 손을 꼭 쥐었다.

이 일을 하며 검에도 베여보고, 마법에도 맞아보고 별의별 일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최악이었다.

차라리 검에 베이고 말지.

"진작 말하면 서로 좋잖아. 그렇지?"

순진해 보이는 하벨의 얼굴에 남자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정신은 멀쩡했기에 남자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팍!

하벨은 남자가 책상에 꽂았던 단검을 뽑아 주머니로 향하려던 그의 손등에 박아넣었다.

"어허. 그런 물건은 안 돼."

"끄… 끄어억!"

이전에 쓰레기와 한 편이었던 기사 놈이 폭탄을 터트린 적이 있었다.

그런 얼빠진 일은 한 번이면 충분하지.

"아, 아무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정말입니다."

"아, 그래?"

하벨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검을 뽑았다.

"으아아악!"

"아파?"

부드러운 하벨의 물음과 함께 갑자기 얼굴을 덮쳐오는 손아귀에 남자의 동공이 확장되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두려움이 가득 찬 순간, 하벨은 남겨놨던 물 한 방울을 떨어트렸다.

꿀꺽.

본능에 따라 남자는 그 물을 삼켰다.

불안함이 가득 담긴 그의 시선에 하벨은 옷 장식 하나를 대충 던져뒀다.

바닥에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눈이 요동쳤다.

하벨은 비웃으며 말했다.

그래. 네가 생각한 그게 맞다고.

"독이야."

말과 함께 하벨은 바닥을 적힌 물 한 방울을 움직여 남자의 복부를 가격했다.

"커헉! 컥!"

남자는 가슴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억지로 토해보지만,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보니까 이곳에서는 사람을 물건으로 취급하더라고?"

잔잔하게 들려오는 하벨의 목소리에 남자는 가쁜 숨만 내쉬었다.

"그럼 너도 물건이 되어야지. 그렇잖아?"

하벨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네 목숨은 이제 내가 샀어."

절망만 남기는 그 말에 남자의 표정은 무너져내렸다.

"앉혀줘. 이제 대화를 해야 하잖아?"

하벨은 페트리오를 보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놈이 앉을 때까지 하벨은 방음이 잘 된 방을 두리번거렸다.

마치 처음 마주한 장난감을 구경하는 아이처럼 순진해 보였다.

"내가 누구인지 알지?"

하벨이 묻자 자리에 앉은 남자는 울먹였다.

"…예."

"누구야?"

"하… 벨 티에라 님이십니다."

그럴 리가.

놈은 말을 하면서 속으로 부정했다.

자신의 앞에 앉은 존재가 하벨 티에라일 리가 없었다.

그는 겁이 많으며 온순하고 장난기가 많았다.

오랫동안 물의 저주를 앓았기에 그 부작용에 시달리며, 그 결과 평범한 일반인으로 자라났다.

이는 자신의 의견이 아니라 조사 후에 도출해낸 하벨 티에라라는 사람의 정보였다.

"정답이야."

하벨은 가면을 벗고 후드를 젖히며 싱긋 웃었다.

높이 묶인 파란색이 섞인 은색 머리카락이 길게 흘러내렸고, 반짝이는 에메랄드색 눈동자는 모든 걸 꿰뚫어 볼 듯 날카로웠다.

남자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진짜 하벨 티에라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몰라도 이미 끝났다는 걸 알았다.

정령사 가문이 곧 움직일 테니.

"이제야 말이 통하겠네."

하벨은 남자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알아보았다.

"가문 내에 심어둔 자가 누구인지 적어. 꼭 심지 않아도 돈을 받은 자 등 거쳐 간 놈도 다 적어. 많이 알고 있을수록 좋을 거야."

하벨은 남자 쪽에 있는 종이를 가리켰다.

그제야 놈은 자신이 어떻게 눈치챘는지를 알아낸 듯했다.

그러면 뭐하겠는가. 이미 늦었는데.

"적으면서 대답해."

"아, 알겠습니다."

"너는 왜 손등에 '검은 달' 무늬가 없어?"

하벨의 물음에 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암살자 두 놈은 검은 달 무늬를 가지고 있던데? 이상하네. 가령 말이야."

하벨이 말꼬리를 늘이자 놈은 마른침을 삼켰다.

"혼자서는 그 무늬가 나타나지 않는 거지. 서로 같은 단체에 있는 사람끼리 마주치면 그 무늬가 나타나는 거야. 맞지?"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고, 하벨은 웃었다.

정답이었다.

검은 달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전문적인 암살자 단체가 아닐까 싶었다.

"의뢰인은 누구야?"

하벨은 의문을 덮고 다시 물었다.

"넌 알고 있잖아. 그렇지?"

놈이 눈치가 빠른 자라면 자신은 표정을 읽는 데 아주 익숙했다.

'저놈은 의뢰인을 모른다.'

애초에 검은 달 무늬를 가진 암살자들이 이곳 뒷세계에 있었을까.

자신은 아니라고 봤다.

경험을 통해 추측하자면 원래 하벨 티에라를 습격했던 쓰레기를 이용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었다.

다만, 왜 같은 검은 달이 따로 움직이는지 신경 쓰였다.

'뭐, 그런 건 차차 알아가면 되겠지. 이놈은 동료를 팔아치울 놈이니까.'

하벨은 거짓으로 말을 꺼내며 코를 가리켰다.

"네 그 후각으로."

남자는 진땀을 흘렸다.

분명 하벨이 맞는데, 대체 정체가 뭔지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울컥했다.

페트리오 역시 덩달아 진땀을 흘렸다.

보면 볼수록 무서운 사람이었다.

저 순진한 얼굴과 웃음에 속으면 목이 떨어져도 모를 정도였다.

"저도 모르는 자입니다. 저, 정말입니다. 하지만 현재 '테미도르 여관'에 머무는 걸 확인했습니다."

남자는 덜덜 떨며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어느 날… 거대한 돈과 함께 '하벨 티에라'를 죽이라는 메시지가 날아왔습니다. 거기에는 도련님의 정보와 함께 침입 루트, 도움을 줄 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억울함이 배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의뢰만 아니었어도.

돈에 눈이 팔리지만 않았어도.

라는 남자의 속마음이 가득 흘러나왔지만, 하벨은 속지 않았다.

이 사진 속 사람 역시 검은 달 무늬를 가진 암살자일 테니까.

분명 도망갈 생각이겠지.

그럴 수야 있나.

"좋아."

하벨이 웃었다.

무엇이 좋은지 모르겠지만, 단검의 끝이 어느새 남자의 목을 향했다.

이건 협박이 아니었다.

목을 뚫고 오는 날붙이의 차가운 느낌에 우수수 소름이 돋아났다.

죽는다.

진짜 죽는다.

남자는 소리쳤다.

"마, 마법사들이 이곳에 있습니다!"

남자의 목을 뚫으려던 단검이 잠깐 정지했다.

그의 말이 아닌, 페트리오가 경악했기에 하벨은 멈췄다.

"등록되지 않은 마, 마법사들이 이 뒷세계의 주인에게 고용됐습니다!"

통했다고 생각하는지 남자는 목에 핏대를 세웠다.

―원래 이곳은 '아카른'이라고 하는 자가 지배했는데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페트리오가 알려줬던 정보.

'그게 왜?'

의문을 드러내는 하벨의 시선에 페트리오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마법사 대부분은 정령사를 증오합니다. 모든 마법사는 나라에 등록해야 하지만, 등록되지 않은 마법사라면……."

"맹세코 이전에는 없던 일입니다! 마법사는 이렇게 쉽게 고용될 수도 없습니다!"

남자는 살고자 페트리오의 말을 잡아먹었다.

'…하. 이거 참 원치 않은 걸 받았네.'

하벨은 남자를 지그시 바라보다 페트리오를 아주 잠깐 쳐다보았다.

"무조건은 아니지만, 콧대가 높은 마법사 양반들이 여기에 올 리가 없죠."

페트리오 역시 남자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주인이 새로 바뀌었고, 마법사가 고용됐는데 마법사들은 대부분 정령사를 증오하고, 티에라 가문과 위치가 가깝다? …이거 원.'

말이 길어졌지만, 여러 가능성 중에 가장 확률이 높은 건 하나였다.

뒷세계에서 티에라 가문을 노린다.

'생각한 것보다 가문의 적이 많은데?'

눈 떠서 마주한 놈들이라고는 죄다 적들뿐인지.

"새로 바뀐 주인장 이름이 뭔데?"

처단해야 할 목표가 커진 사실이 불만스러웠지만, 어쩌겠나.

처음 생각한 대로 뒷세계가 다시는 하벨 티에라를 건들지 못하도록 머리를 찍을 수밖에.

하벨의 미소가 사라지자 남자는 다급히 말문을 열었다.

"뤠, 뤤트로라고 불리는 자입니다."

"사진은?"

"있습니다! 무조건 있습니다."

하벨은 여전히 단검을 겨눴다.

"해독제는 내가 가지고 있지만, 정말 나 혼자 왔다고 생각해?"

꺼졌던 불꽃이 언제고 다시 고개를 들지 모르니 하벨은 남자를 꾹 눌렀다.

"…알고 있습니다. 정령님들이 지금 절 보고 계시겠지요."

남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사진을 꺼내 하벨에게 건넸다.

"이것뿐이야?"

"아, 아닙니다. 조사한 결과를 다 드리겠습니다. 여기 밑에 상자가 있습니다. 비밀번호는 3―5―6―2―1입니다."

하벨이 페트리오에게 눈짓하자 그는 얼른 상자를 찾았다.

아마도 다 쓸모없는 정보일 테지.

하지만 지금은 뭔가를 발견한 것처럼 연기했다.

"상자가 있습니다."

페트리오는 혹시 몰라 입을 가리며 조심스럽게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저자 말대로 안에는 정말 자료가 있습니다."

"챙겨. 다."

하벨은 그제야 남자의 목을 겨눴던 단검을 내려놓았다.

남자가 숨을 몰아쉬자 그대로 뒤통수를 세게 후렸다.

빠악!

'억' 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몸이 무너졌다.

죽이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검은 달 무늬를 가진 암살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는지 아닌지 그걸 확인하고 싶었다.

갈등이 있으면 분명 다음번에 찾아갈 때, 저놈이 죽어있을 테니까.

"가자, 좀도둑."

마법사라.

뭐든 적이라는 건 확실했다.

적에게 건네는 가장 좋은 경고는 모름지기 적장의 목을 베어버리는 일이었다.

물리기 전에 물어버려야지.

'뤤트로의 목. 그 정도면 괜찮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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