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돌아가는 것 좀 구경하자(3)
* * *
"……."
카샬은 할 말을 잃었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사람이 달라졌다고 정령이 보이게 되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왜 이렇게 놀라?"
하벨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저, 정말 보이십니까?"
당혹감이 섞인 카샬의 물음에 하벨은 씩 웃었다.
"거짓말을 못 하는 건 아닌데, 지금은 딱히 하고 싶지 않아."
사실이라는 말에 카샬의 입은 더욱 벌어졌다.
"그럼 그 폭발을 막은 건."
"나야."
"축하드립니다, 도련님. 정말 축하드립니다!"
"…울어?"
하벨은 당황했다.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지금 카샬의 목소리에 섞인 감정을 모를 수가 없었다.
"아닙니다. 이토록 기쁜 날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고개를 든 카샬의 표정은 조금 전에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완벽하게 웃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지만.
삐. 삐. 삐.
무얼 말하기 전에 정화 장치가 짧게 세 번 울렸다.
"산책은 짧게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안에 든 정화제가 거의 떨어진 모양입니다."
카샬은 곧 1층을 가리키는 숫자를 보며 물었다.
"제가 가주님께 보고하길 원하십니까?"
"넌 누구 사람인데?"
"제가 모시는 분은 도련님입니다."
망설임 없이 꺼내는 말에도 하벨은 흔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봤다고 널 믿겠어?'
오히려 코웃음을 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어차피 자신이 정령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숨길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드러내야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다음 암살자와 또 놀아야 할 수도 있으니.'
일단 자유를 위해서 최소한의 안전은 필수였다.
자신이 주로 머물 이곳부터 시작해야지.
"그럼 기다려."
하벨은 여전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을 꺼냈다.
조금 전 카샬에게 말했듯 거짓말을 못 하진 않았다.
오히려 너무 잘해서 탈이지.
"알겠습니다. 먼저 내리시지요."
카샬은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잡았다.
하벨이 밖으로 나오자 잠깐 얼어붙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풀려나갔다.
시종들이 자신을 보고 고개를 숙이지만, '뭐야, 하벨이야?'라는 그들의 속마음이 하벨의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자신에게는 굉장히 낯설지만, 하벨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다.
걸을수록 시종이 뒷말하듯 속삭이는 소리에 비웃음이 섞여 있었고, 청소하는 척 멀리서 자신의 방향으로 튕기는 먼지와 물방울, 그리고 눈동자에 깃든 한심함.
은근한 무시.
은근한 경시.
하벨은 그 모습에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완전 색다른데?'
누구도 자신을 무시하지 못했으며 늘 경외의 시선과 고요함이 뒤따라오던 상황이 달라지니 새로웠다.
"카샬."
하벨은 잠깐 걸음을 멈춰 카샬을 바라보았다.
"예, 도련님."
카샬의 눈빛에 화가 어려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피해 물러났던 정령들이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하나둘씩 모여드는 게 보였다.
"4층보다 1층이 더 노골적이네. 날 습격한 암살자랑 같은 편이 여기에도 있는 게 아닐까 싶은데."
유치함에는 유치함으로 대응해야지.
하벨은 거의 꺼낸 적 없는 자신의 유치함을 내보였다.
저들의 귀에는 닿되 마치 속삭이듯.
오직 카샬만이 알고 있으라는 듯.
순간, 카샬이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대놓고 이야기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맞장구를 쳐주길 위해 웃음을 꾹 누르며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지? 그게 아니면 날 대놓고 불편하게 하려고 이렇게 다 같이 한마음으로 은근히 날 무시할 리가 없지?"
하벨은 자연스럽게 걸으며 속삭이는 척하며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혀를 놀렸다.
"그렇지요. 가주님께서 그냥 가만히 계신 게 아닌데 참 멍청합니다."
"그럼?"
하벨은 도중에 진짜 궁금해서 물었다.
아들이 이런 취급 받는 걸 룬델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한 명씩 조용히 잘려나갔으니 모르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니 도련님께서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현명하시네."
그들을 보는 하벨의 시선이 날카로워졌고, 그들은 카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기겁하게 서둘러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런데 나는 조금 요란한 걸 좋아해서."
하벨은 자꾸만 먼지를 튕기던 시종 앞으로 걸어가 빗자루를 뺏고는 힘껏 벽에 내리쳤다.
팍!
반동으로 손이 찌르르했지만, 하벨은 웃었다.
인간 아이가 했던 행동을 언젠가 꼭 해보고 싶었다.
"선을 넘는 자들이 대놓고 잘려나갔으면 하는데. 아, 잘 썼네. 갑작스럽게 뺏어서 미안하고."
하벨은 시종의 어깨를 가볍게 치고는 그들을 한 명씩 바라보았다.
다급히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이들이 조금 전보다 더 늘어났다.
'왜 저러나.'
당혹감과 원인 모를 두려움이 함께했지만, 하벨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벨 티에라에게 잘못한 자들이 그만큼 많은 것뿐이었다.
"도련님."
카샬이 하벨을 불렀다.
"왜?"
"저놈입니다. 이렇게 굴러올 줄은 몰랐습니다."
카샬이 가리킨 복도 끝에서 한 남자가 달려왔다.
꽤 다급해 보이며 팔에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야 이 바보들아! 저놈이라고!]
한 정령이 목청을 높였다.
[검을 날리든 창을 날리든 뭐든 해서 잡아봐봐!]
"밤 중에 은밀한 대화를 나누던?"
"맞습니다."
"네가 찔렀어?"
"찌른 게 아니라 보고드렸습니다. 제가 일을 좀 잘합니다. 하지만 벌써 이렇게 움직일 리가 없습니다."
"다른 일과 얽혔겠지."
하벨은 기대했다.
쓰레기일까, 검은 달일까.
어느 쪽이 얽히든 좋았다.
'이상하게 빠른데?'
배신자와 놈을 뒤쫓아 오는 기사들과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주변에서 구경하고 있던 정령들이 바람을 휘날려 창문을 거의 동시에 내렸다.
[이놈 못 잡으면 세렌한테 혼나고 룬델한테도 잔소리를 들을 거라고. 으으, 끔찍해.]
한 정령이 자신의 양팔을 잡으며 부르르 떨었다.
"힘을… 빌려주십시오."
노란색 문양을 단 기사는 이를 악물며 부탁하자 정령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능한 것들. 겨우 스크롤로 마법 몇 개를 두른 놈일 뿐인데 나한테 손을 벌려?]
정령의 질타가 익숙한지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 되지. 이대로 죽으면 안 되지.'
하벨의 입가에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가 걸렸다.
어제도 생각했지만, 바로 저놈이었다.
가출을 시도할 수 있는 탈출구.
밖으로 나갈 방법을 알고 있는 자였다.
"혹시… 이 빗자루 말씀하신 겁니까?"
카샬이 하벨의 손에 빗자루를 다시 넘겼다.
"맞아."
하벨은 정확한 타이밍을 노려 빗자루를 던졌다.
쉬익!
살짝 빗나갔지만, 다리 사이에 빗자루가 얽히고 침입자는 그대로 앞으로 몇 번이나 굴렀다.
"아깝네요. 제가 빗자루도 잘 던진답니다. 다음번에는 절 시키시죠."
"시끄러. 그래도 잘 굴렀잖아?"
"예. 맞습니다. 아주 잘 굴렀습니다."
하벨은 카샬이 뭐라 하든 자신이 만든 작품을 자랑스럽게 감상하며 걸어갔다.
땅에 구르던 빗자루를 잡고는 발로 정확히 배신자의 척추를 꾹 눌렀다.
"어제 암살자가 날 습격했어. 혹시 관련 있어? 카샬, 뭐 해? 안 뽑아? 그거 장식이었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언제든 잘 벨 수 있도록 열심히 손질해줬습니다."
스겅.
카샬은 곧바로 검을 뽑아 침입자에게 겨눴다.
"거기서 기다리고 있게."
우르르 들려오는 발소리에 하벨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꺼냈다.
'먼저 저놈을 잡은 내가 심문하는 건 당연하고, 나는 그대들이 모시는 자이니 명령을 어기는 건 아니겠지?'
"나, 하벨 티에라야."
참, 멋도 없다.
하벨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죽여라."
배신자는 이를 악물며 코웃음을 쳤다.
딱!
하벨이 놈의 머리를 빗자루로 때렸다.
"누굴 바보로 아나. 죽을 놈이 도망을 쳐?"
딱!
"아주 지랄을 떠네."
따악!
"아니지. 소원대로 때려서 죽여줄게."
하벨은 모처럼 손가락을 풀었다.
누군가를 원 없이 때려보는 것도 해보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다 싶었다.
어차피 저놈은 배신자이니 뭐가 꺼리겠는가.
따악! 딱!
너무 때리는 데만 집중하자 하벨이 애써 찡그렸던 얼굴이 풀어지며 어느새 웃음기가 입가에 걸려있었다.
하벨을 보는 시종들의 표정이 점점 새하얗게 변해갔다.
"…저, 도련님."
보다 못해 카샬이 하벨이 휘두른 빗자루를 잡았다.
"왜?"
"웃고 계십니다."
"하벨이 웃는 상이더라고. 알잖아?"
이건 자신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벨은 여전히 웃음기가 어린 얼굴로 빗자루를 휘두르려고 하자 배신자가 소리쳤다.
"…제발, 그만 때리십시오."
"죽여달라며?"
"그, 그럼 살려주십시오. 전 아닙니다. 진짜 암살자고 뭐도 모릅니다."
배신자는 고통을 호소하며 눈물을 흘렸다.
"내가 어제 수상한 놈이랑 같이 있는 걸 봤는데? 돌을 던진 건 쟤지만."
배신자의 시선이 하벨의 손가락을 따라 움직이다 곧 혀로 바짝 마른 입술을 축였다.
"전 그… 그냥 정화제를 빼돌리려고 했을 뿐입니다. 믿어주십시오!"
"좀도둑이었어? 에이, 진작 말하지. 괜히 힘을 뺐네."
빗자루를 던지자 그 근처에 있던 시종들이 다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표정에 여전히 당혹감이 가득했다.
도중에 하벨이 미친 게 아니냐는 의문도 끼워져 있었다.
'일단 살렸다.'
하벨은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더불어 하나를 더 얻었다.
'암살자'라는 말에 좀도둑은 흔들렸다.
어제 일어난 암살자, 검은 달에서 흔들린 건지, 이전 암살자, 쓰레기에서 흔들린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예 관련이 없진 않았다.
"그럼 이제 그대들에게 맡기겠네. 내 바쁜 일이 있어. 고생하게."
하벨은 기사들을 보며 싱긋 웃었다.
기사들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는 의미인지, 방해라는 의미인지 몰랐지만, 그들 역시 놀라고 있는 건 확실했다.
"아."
몸을 돌리려다 하벨은 정령들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잘 때 생각이 날지도 몰랐다.
"내가 습격을 당했을 때도 이렇게 빠르게 행동하면 좀 좋지 않은가?"
아쉬움이 섞인 듯한 말투와 달리 하벨의 눈매는 사나웠다.
카샬 말이 사실이라면 이곳에 퍼져 있는 정령들이 저 남자의 수상한 행적을 눈치채고, 정령 기사들에게 알렸겠지.
자신이 아니었다면 자는 사이에 암살자에게 죽었을 하벨 티에라와 달리.
그때, 저들 전부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을까.
'그냥 하벨에게 죽으라고 대놓고 말하지 그랬나.'
하벨은 그 사실이 어처구니없었다.
은근한 시종들의 무시 위에 정령들의 대놓고 드러내는 무시가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멍청한 하벨. 왜 그냥 버텼는가? 당장 저것들을 두들겨 팬다 한들, 그대가 타고난 위치가 달라지는 건 아닐 텐데.'
이전부터 생각했듯이 맨입으로 하벨 티에라의 몸으로 하고 싶은 것들을 누릴 생각은 없었다.
책임은 질색이었지만, 자유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른다는 건 알고 있으니 피할 생각 역시 없었다.
'이 사태를 이 몸이 해결해줄 테니 나중에 돌아와서 내가 뭘 했든 원망은 하지 마라, 하벨?'
이게 자유를 누리려는 자신이 진 약간의 책임과 대가인 셈이었다.
하나씩 선물로 줘야지.
"나이는 먹을 대로 먹었을 텐데, 유치하네."
하벨은 억지로 입꼬리를 틀어 비웃음을 그렸다.
정령들이 선의 형태로 보여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점이 너무도 아쉬웠다.
하지만 우습게도 얼굴이 굳어진 건 기사들 쪽이었다.
"그대들에게 한 말이 아니네."
하벨이 사실을 말했음에도 특유의 장난기가 섞인 말투에 오히려 도발처럼 들린 모양인지 기사들의 기세가 약간 사나워졌다.
하지만 뭐 어쩔 텐가.
유치한 건 저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기사는 무사와 같은 자들이었다.
지켜야 할 존재가 눈앞에 있음에도 지키지 못한 죄는 컸다.
"도련님 앞에서 눈빛들이 왜 이렇게 불손한지, 짜증 나게."
카샬은 애초에 말릴 생각이 없는지 그냥 불을 피워버렸다.
적당한 때가 되면 하벨이 알아서 말리겠지.
"도련님? …도련님!"
얼음장같이 차가워진 분위기를 깨는 한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그녀를 보았다.
헤레스가 다급히 하벨에게 달려왔다.
"…진짜 도련님이셨다니. 멀리서 보고 혹시나, 설마 했는데, 진짜 도련님이실 줄이야. 하……."
그녀의 눈 밑에 그림자가 짙게 깔려있었다.
어쩌면 자신보다 상태가 더 나빠 보일 정도였다.
"도련님. 아무리 답답하셔도 이렇게 돌아다니시면 어떡하십니까? 빗자루 던지기는 어디서 배우셨는지 몰라도 안 됩니다."
주변 상황이 어떻든 말든 헤레스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걱정이 담긴 그 모습에 하벨은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참 애가 탔다.
'하벨 티에라. 모두가 널 무시한 건 아니네.'
어제도 그렇고, 헤레스는 계속 주치의로서 제 상태에 대해 밤새도록 고민한 모양이었다.
"여기 잘 있네."
하벨은 하벨 티에라의 몸을 툭툭 건드렸다.
"다음부터는 카샬 씨한테 맡기십시오."
"좋은 말씀이십니다. 제가 도련님보다 더 전문가니까요."
카샬은 저들을 향한 눈빛을 거두며 말했다.
정령사를 포기하고 검을 잡았다.
부차적인 이유로 선택했지만, 나름, 재능도 있었고.
"카샬."
"예, 도련님."
"암살자 이야기를 계속해봐. 지금 자기 이야기를 한다고 좋아 죽을지도 모르잖아?"
하벨의 웃음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아, 그대도 듣겠는가?"
느닷없는 하벨의 제안에 헤레스는 눈을 깜박거렸다.
저게 무슨 소리인지.
삐. 삐. 삐.
또 울리는 정화 장치 소리에 헤레스는 의사로서 하벨을 바라보았다.
"도련님. 일단 방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네. 산책은 가볍게 하려고 했으니."
하벨은 손을 들어 부채를 흔들 듯 부드럽게 살랑거렸다.
"그럼 다들 수고하게."
하벨이 지나간 자리에 다들 아무 말 없이 잠깐 서 있었다.
아무도 하벨의 변화를 반기는 이는 없었다.
그저 한마음으로 한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염된 눈밭에 뒹굴더니 미쳐버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