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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5화 (5/415)

5화. 돌아가는 것 좀 구경하자(2)

* * *

"용왕이라 불릴 뿐, 이름은 없습니다."

하벨은 룬델이 큰 결심을 하고 왔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하… 벨이라고 불러도 되는가?"

"원하신다면요."

하벨은 자신도 모르게 실실 웃었다.

'이런.'

곧 인상을 찌푸려서는 다시 말했다.

"그렇게 불러도 됩니다."

"내가 무얼 해주길 바라더냐?"

따뜻한 아버지의 시선에 하벨은 잠깐 망설였다.

그간 미뤄왔던 미안함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른 기분이었다.

"저는 하벨로서 살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렴."

"몸을 돌려줄 방법을 찾았으면 합니다."

"내가 도와주마."

"이 몸으로 자유롭게… 살아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란다."

룬델은 손을 뻗어 하벨의 손을 잡았다.

순간, 하벨은 움찔거렸다.

이런 온기는 낯설었다.

"대신 딱 하나만 내 부탁을 들어주겠더냐?"

"…말씀하십시오."

"네가 그 몸에서 나갈 때까지만이라도 좋다. 뭘 해도 좋으니 네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만. 그 사실만 기억해줄 수 있더냐?"

룬델의 눈동자도 흔들렸고, 하벨 역시 간절한 그 말에 흔들렸다.

"저는 하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벨은 긴 침묵을 깨고 말했다.

"괜찮다."

"분명히 다른 사람입니다."

"그래도 괜찮다."

"후회… 하실 겁니다."

"무얼 선택해도 후회한다면 나는 너를 선택하마."

룬델이 부드럽게 미소를 그렸다.

하벨은 어쩐지 그 미소에 자신이 한없이 약해지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분명 모르는 미소인데, 머리로는 알고 있는 이 묘한 느낌 속에서 하벨은 곧 차분히 말을 꺼냈다.

"좋습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지.

"하지만… '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기다려 주십시오."

"강요하지 않으마."

룬델은 하벨의 손을 쓰다듬으며 너무도 행복하게 웃었다.

잃어버렸던 아들이 다시 돌아온 기분에 그 어떤 순간보다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가주님."

하벨은 어색하게 룬델을 바라보았다.

"고맙구나. 오늘은 이만 쉬거라."

룬델은 하벨에게도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늘만 벌써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났던가.

'미안하구나.'

룬델은 하벨 일에만 무능력해지는 자신이 참 싫었다.

'미안하구나, 하벨.'

속으로 사과하며 룬델은 밖으로 나갔다.

'…미치겠네.'

하벨은 제 머리카락을 헝클어트렸다.

아버지란 존재가 이토록 무서운 존재일 줄이야.

'용왕인 나조차 엄청 쉽게 설득했잖아?'

하벨은 숨을 골랐다.

룬델이 움직이는 것과 별개로 하벨은 자신이 직접 움직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룬델은 덩치가 커. 정확한 정보를 모을 수 있는 만큼 적에게 들키기도 쉽지. 일단 어떻게 나가야 할지부터 생각해야지.'

일단 밑밥은 깔아두었다.

세렌이 있지 않은가.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이어 헤레스가 빼꼼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문이 닫힌 후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도련님의 주치의인 헤레스라고 합니다."

헤레스는 맑은 미소를 내보였다.

"돌아간 줄 알았는데?"

"오늘은 조금 더 지켜봐야 할 듯합니다. 요새 자꾸 물의 저주가 들쑥날쑥해서요."

짝.

헤레스가 손뼉을 치자 하벨은 깜짝 놀랐다.

"아. 물의 저주부터 말씀해드려야겠네요."

"오염된 물에 닿으면 걸리는 병이 아닌가?"

하벨은 하벨 티에라의 기억에 의존해 말했다.

"얼추 비슷하지만, 도련님께서 앓으시는 물의 저주는 많이 다릅니다."

헤레스는 안경을 고쳐 잡았다.

"대부분 사람은 오염된 물을 저항할 수 있는 내성이 있습니다. 그 내성을 넘길 만큼 오염된 물에 노출되면 누구나 물의 저주에 걸리게 됩니다."

"흔한 병이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감기처럼 흔합니다."

하벨은 헤레스의 대답을 들으며 눈을 반짝거렸다.

뭐든 처음이라 참 흥미로웠다.

"하지만 도련님께서 내성도 아예 없으신 데다 앓고 계시는 물의 저주는 거의 변종에 가깝습니다."

"변종이라니?"

"물의 저주는 나을 수 있는 병입니다."

헤레스가 둘러 말을 했지만, 하벨은 바로 알아들었다.

"그럼 이 몸은 아니라는 말인가?"

"예. 좋아질 뿐, 낫질 않으십니다."

"이유가 무엇인가? 여긴 정령사 가문이니 정화제도 많이 구할 수 있을 건데."

정화제는 정령들이 만든 것으로 오염된 물을 정화할 수 있는 유일한 가루였다.

"그건 저도…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 소원은 도련님께서 물의 저주를 떨쳐내시고 쾌차하시는 겁니다."

헤레스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깃들었다.

"길게 말씀드리긴 했지만, 도련님께서는 앓으시는 저 병은 외부의 자극 없이도 오염 수치가 갑자기 멋대로 올라갑니다. 하여 정화 장치를 계속 달고 계시는 겁니다."

하벨은 정화 장치를 바라보았다.

"요컨대 이 시끄럽기만 한 장치가 내 생명줄이다?"

"맞습니다. 그래서 엄청 튼튼하죠. 소리는 물론, 불도 끌 수 있는 기능이 있습니다. 요컨대 아주 훌륭한 장치죠."

"내 계속 궁금한 점이 있었네."

"말씀하시지요."

"만약 물의 저주를 치료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천진난만한 하벨의 눈빛에 헤레스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죽습니다."

* * *

쏴아아.

하벨은 갑자기 쏟아지는 햇살에 깜짝 놀라 이불로 얼굴을 가려보나 누군가 강한 힘으로 붙잡고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도련님?"

슬쩍 한쪽 눈을 뜨자 카샬이 웃고 있었다.

―잘 듣게, 카샬. 지금 하벨이 저러는 이유는 물의 저주 때문이네. 그 병의 증상 중 하나로 자아의 혼동이 찾아와 하벨이 자신이 하벨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어.

어제 룬델이 꺼낸 말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참 이상하다 이상하다 싶었는데 저번 일 때문이라니.

'도련님께서 앓으시는 병이 깊어졌다.'

―나는… 지금 하벨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카샬, 자네는 자네가 하고 싶은 선택을 하게. 하지만 그 방향은 무조건 하벨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이어야 하네.

조언 속에 담긴 경고는 매서웠지만, 카샬은 자책감이 치밀어 올랐다.

하벨이 저택을 벗어난 걸 몰랐다.

그가 오염된 눈이 덮인 산을 오를 때까지 멍청하게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으니.

"어제 그 폭탄은 유리 폭탄이라 불리는 겁니다. 이름과 달리 제법 효과가 좋죠."

카샬이 꺼낸 말에도 하벨은 쏟아지는 빛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정령님이 아니었다면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너도 그 털뭉치가 보여?"

하벨은 한쪽 눈을 뜨며 물었다.

"털뭉치라뇨?"

"정령이 보이는 거 아니었어?"

"저는 정령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이상하게 카샬의 미소가 씁쓸해 보였다.

"그럼 이 팔찌는 뭔데? 막 혼자 타올랐다 꺼지고 그러는데."

하벨은 팔찌를 가리켰다.

어제부터 계속 이상하지 않은가.

지금도 불이 들어와 있었다.

카샬이 들어왔을 때부터일까.

룬델보다는 조금 작은, 밝은 빛을 띠고 있었다.

"저도… 그건 모르겠습니다."

카샬은 고개를 가로젓다 오히려 의문을 담아 쳐다보았다.

장식품같이 몸을 옥죄는 걸 싫어하지 않은가.

"아, 그건 그렇고 어제 통과된 겁니까?"

"뭐가?"

"절 의심하셨잖습니까?"

"눈치가 빠르네?"

"눈칫밥 먹고 살잖습니까. 당연히 빨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카샬은 하벨에게 물을 건넸다.

"도련님께서는 정화된 물을 드십니다. 물론, 독은 없습니다."

"알아."

"독을 탈 생각도 없습니다."

"왜?"

"여기서 쫓겨나면 갈 곳이 없거든요. 그리고 티에라 가문에 찍히면 답도 없습니다."

"그런데 암살자가 있어? 신기하네."

"누가 그랬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찍어내릴 겁니까? 허공에다가 하겠습니까?"

태연한 카샬의 대답에 하벨은 컵을 내밀며 피식 웃었다.

"하긴 그렇지. 모르는데 어떻게 힘을 눌러?"

"역시 말이 통하십니다."

카샬 역시 키득거렸다.

하지만 그는 곧 컵을 내려놓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저는 앞으로 도련님을 모시게 된 집사, 카샬 메르흔이라고 합니다."

통성명하는 모습에 하벨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난 하벨 티에라가 아니야."

"그래서 제 소개를 해드렸잖습니까? 원래는 몇 년이나 모셨지만, 오늘부터 모셨다고 칩시다."

"얼렁뚱땅 넘어가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건 그렇게 넘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훌륭하네."

하벨이 미소를 지었다.

"예. 전 훌륭한 집사입니다. 자, 이제 아침 식사부터 하시는 게 어떠십니까?"

"밥을 먹으라고?"

하벨은 그 말을 난생처음 듣듯 눈을 깜박거렸다.

"혹시 식사하시는 방법도 잊어버렸습니까?"

"아니. 밥을 먹는 건 처음이야."

용왕이었던 자신은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살아가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궁금했던 적은 있지만, 먹는다는 행위 자체가 왠지 껄끄러웠고 왕으로서 체통을 지키느라 굳이 관심에 두려 하지 않았다.

그 외에 일들이 너무도 많았으니.

"…으음."

카샬은 침음을 흘리며 하벨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누가 봐도 진심으로 보였다.

"도련님께서 지금 좀 심각하십니다."

"뭐가 심각하다는 거야?"

"원래 식사 후에 헤레스 씨를 부르려 했는데 안 되겠습니다."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볼게."

"예. 무엇이든 물어보십시오."

"밖에 나갈 수 있어?"

"지금요?"

"지금."

"그 밖이라는 게 저택 밖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아."

하벨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샬은 활짝 웃었다.

"절대 안 됩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그럼 암살자 이야기를 해 봐. 쓰레기든 검은 달이든, 뭐든 해봐."

쓰레기는 하벨 티에라가 겪었던 암살자.

검은 달은 자신이 겪었던 암살자.

이렇게 지칭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침부터 기분이 불쾌해지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분이 무슨 소용이야?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물론 자신이 아니라 하벨 티에라의 몸뚱어리가.

원치 않게 이 몸을 지켜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지만, 한 번 결심한 일을 무를 생각은 없었다.

"생각을 좀 해봐야지 않겠어?"

하벨의 눈이 먹잇감을 노리듯 번뜩거렸다.

"예전부터 생각하는 걸 싫어하셨습니다. 아, 물론 예전에 말입니다."

카샬이 살짝 웃음기를 띠자 하벨은 비웃음을 그렸다.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행동을 옮겨야 하지 않겠는가? 한곳에 머물러 있으면 그 또한 위험한 법이지.'

"융통성을 갖자, 카샬."

저런 말을 원한 건 아니었지만, 자신이 듣기에도 꽤 얄밉게 들렸기에 하벨은 만족스러웠다.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그러는 김에 나가자."

"제가… 잘못 들었습니까?"

"아니. 제대로 들었어. 나가면서 말해도 되는 문제잖아."

"예? 방금 제가 밖은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산책 가는 거야. 저택 안에."

카샬은 미간을 찌푸렸다.

"더더욱 모르겠습니다."

"암살자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암살자도 들어야 하지 않겠어? 쓰레기든 검은 달이든."

이게 무슨 말인지.

카샬은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가자."

하벨은 활짝 웃었다.

* * *

"…그렇게도 좋으십니까?"

카샬은 바보가 된 듯 마냥 헤실헤실 웃는 하벨의 표정에 주변을 향하는 카샬의 눈동자가 더 날카로워졌다.

평소라면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오늘따라 시종들의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하벨이 눈밭에 뒹군 후에 며칠 만에 얼굴을 비쳤으니 그럴 수밖에.

어제 일은 룬델이 입단속을 단단히 했으니 새어 나갈 일도 없고.

"좋지."

하벨이 신기했던 건 건물 안에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다는 점이었다.

엘리베이터와 묘하게 조화로워 자꾸 눈길이 갔다.

"신기하잖아."

호기심.

그거 하나면 충분한 게 아닐까 싶었다.

하벨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자신이 머무는 곳은 4층으로 룬델을 비롯해 아직 얼굴도 보지 못한 오누이들이 사는 곳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티에라라는 성을 가진 자들이 사는 곳이라지?'

그런데도 암살자가 드나들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를 알게 했다.

그중 하나는.

'검은 달이 꽤 강했나 봐.'

하벨은 흐뭇하게 웃었다.

쓰레기는 검은 달과 달리 자신의 방까지 오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강한 건 틀림없지 않은가.

'암. 나도 강하지.'

"왜 갑자기 웃으십니까?"

장난기가 가득한 하벨의 미소에 카샬의 미간 사이가 살짝 좁혀졌다.

"그런 게 있어. 1층으로 가자고."

하벨은 신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화가… 나지 않으십니까?"

"아, 시종들이 날 은근히 무시하면서 쳐다보는 거?"

시종들이나 기사들은 자신을 보며 꼬박꼬박 인사를 했다.

무엇 하나 책잡히지 않을 만큼 깔끔한 몸과 달리 그들의 시선에 어딘가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어제 파란색 문장을 가진 기사들처럼.

"아니면 정령들이 나를 노골적으로 피하는 거?"

세렌과 털뭉치를 통한 교감으로 선의 형태로 된 정령들이 보였다.

그들은 마치 더러운 걸 보듯 자신을 피하기 바빴다.

엘리베이터가 닫히자마자 카샬은 놀란 눈으로 하벨을 바라보았다.

"지, 지, 지금 도련님께서……."

"맞아. 내가 하벨과 달리 꽤 유능해서."

하벨은 카샬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애를 마음껏 드러냈다.

"정령이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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