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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 가문의 막내가 되다-2화 (2/415)

2화. 그 용이 아니라 이 용인데(2)

* * *

하지만 갑자기 물풍선이 터지듯 푸르게 물들었던 하벨의 눈동자가 다시 돌아왔다.

껌이어야 했는데.

분명히, 그래야 했는데.

"…하."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겨우 물방울 몇 개가 튀어나오는 게 고작이었다.

'내가. 모든 물과 바다의 지배자였던 내가 만들어낸 물이 겨우 몇 방울이라고?'

하벨은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까아아앙!

카샬의 검과 적의 검이 부딪히는 소리에 하벨은 몇 방울에 불과한 물을 손에 쥐었다.

"도련님! 정신 차리십시오!"

카샬은 이를 악물며 마스크로 입가를 가린 암살자를 노려보았다.

대체 어디에서. 아니, 대체 언제 나타났는지 몰랐다.

암살자가 하벨을 노리는 건 흔했다.

'…하지만 분명 주변 경계를 늘렸는데.'

"누가 보냈지?"

벌벌 떨며 두려움에 휩싸여야 할 하벨의 입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신이 하벨 티에라라는 자의 몸에 빙의했든 뭐든 자신을 건드렸으니 그냥 둘 생각은 없었다.

주르륵.

하벨의 코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 겨우 이 정도에.'

하벨은 여전히 기가 찼지만, 암살자를 바라보았다.

삐삐삐!

갑자기 소리가 정화 장치 쪽에서 울렸다.

"괜찮으십니까?"

카샬이 다급해지자 하벨의 눈썹이 올라갔다.

암살자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팅!

하벨이 물방울을 튕겨 암살자의 손을 때렸다.

놈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지만, 카샬은 암살자의 행동이 살짝 무너진 틈을 타 무릎을 올렸다.

빠악!

정확히 턱에 맞아 암살자가 비틀거리자 카샬은 놈의 어깻죽지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깡!

놈의 다른 손에 쥔 단검이 간신히 카샬의 검을 막으며 부들거렸다.

카샬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전에 하벨을 습격했던 것과 다른 놈이었다.

하벨은 자연스럽게 정화 장치에서 난 붉은빛을 끄며 주변을 살폈다.

마침 자신의 옆에 놓인 탁자 컵이 놓여 있었다.

'이거라면.'

하벨은 컵으로 손을 뻗으려던 순간, 랜턴이 흔들렸다.

그 이상함에 하벨은 고개를 돌렸다. 바로 옆에서 누군가의 숨결이 느껴졌다.

더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침착하게 이불부터 던졌다.

쉬익!

베어지는 이불과 함께 이불 속에 있던 깃털이 휘날렸다.

"와. 한 놈 더 있네?"

하벨은 떨어지는 깃털을 보며 컵을 쥐었다.

무언가 올 거라 긴장하고 있는 게 보였다.

'좋다. 긴장하거라.'

하벨은 틈을 보았다.

새로 등장한 암살자가 아닌, 마스크를 한 기존 암살자를 향해서 물을 뿌리며 명령했다.

"반대쪽을 노려!"

쏴악!

갑자기 쫄딱 젖어버리자 마스크를 한 암살자가 분노에 몸을 떨었다.

아무리 당황했어도 아무 힘도 없는 일반인에게 물을 맞다니.

"이 새……."

카샬은 마스크를 한 암살자를 다급히 발로 밀치며 하벨을 노리는 머플러를 한 암살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숙이십시오."

하벨의 고개를 누르며 검을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향해 크게 휘둘러 머플러를 한 암살자의 검을 막았다.

까앙!

놈의 머플러가 흔들렸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카샬의 눈이 움직였다. 놈의 검이 딱 하벨이 착용한 정화 장치에 닿아 있었다.

"죄송합니다. …빌어먹을!"

카샬은 식겁하며 놈의 검을 힘으로 내렸다.

'이거 엄청 튼튼하잖아?'

하벨은 팔이 무사한 걸 확인하며 물에 홀딱 젖은, 마스크를 한 암살자를 바라보았다.

놈이 분노를 담아 내지르는 검에도 하벨의 눈동자는 깊은 바다처럼 고요해졌다.

물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드는 것도 움직이는 것도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미 있는 물을 움직일 수밖에.

이 상황이 낯설었지만, 하벨은 생각하지 않았다.

아주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충분하니.

타타타타타.

적셔진 부분에 있던 물이 날카롭게 모습을 바꾸었다.

바늘처럼 우르르 일어나 암살자의 피부를 찔러버렸다.

갑자기 수천 개의 바늘에 찔리는 듯한 감각에 암살자의 검이 손가락 두 개 정도의 거리를 두고 떨어졌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쪽은 마스크를 한 암살자였다.

"어, 어떻게……."

"궁금해?"

가볍게 들리는 목소리에도 마스크를 한 암살자는 놀란 눈으로 하벨을 쳐다보았다.

"그럼 꿇어."

옆쪽에서 세찬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와 함께 카샬이 머플러를 한 암살자의 목을 날렸다.

피 냄새가 짙게 몰려왔다.

하벨은 자리에서 일어나 암살자와 눈높이를 높게 벌렸다.

머리를 밟고 물었다.

"누가 보냈어?"

"……."

침묵이 이어지자 하벨은 암살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거 자살했네."

이 몸뚱어리로는 겨우 손톱 하나 크기만 한 물의 비수를 만드는 게 전부라 암살자를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가 없었다.

"하……."

하벨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괜찮으십니까?"

카샬은 하벨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상태를 살폈다.

"나는……."

하벨은 목구멍을 긁듯이 밀려오는 뜨거움을 토해냈다.

피가 떨어졌다.

부들거리는 손을 따라 흔들리는 랜턴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분명 검은 불꽃을 품지 않았던가.

빛이 사라졌다.

자신이 잘못 본 건 아닐 테고.

"헤레스 씨를 불러오겠습니다."

카샬은 피를 토한 하벨의 상태에 너무 놀랐다.

"…아니."

하벨은 카샬을 말렸다.

지금은 팔찌 장식 말고 고민해야 하는 건 따로 있었으니까.

'이놈들부터 배후가 누구인지 살피거라.'

"이놈들이 누구인지 살펴."

하벨은 생각과 달리 나오는 말에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빙의의 부작용이었다. 갓 몸에 깃든 자신의 영혼이 아무리 커다랄지라도 몸에 새겨진 기억이 먼저일 테니까.

"나는 룬델 티에라를 찾아갈 테니까."

하벨은 이 상황이 기가 찼다.

빙의에.

습격에.

아주 잘났다 싶었다.

* * *

벌컥.

룬델은 난데없이 문이 열리자 깜짝 놀랐다.

"…하벨아?"

룬델은 하벨을 부르면서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일단 들어가겠습니다."

하벨은 당황한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나오는 존댓말 역시 몸이 기억하는 습관 중 하나일 테니까.

룬델은 당당한 하벨의 모습에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령들이 하벨이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놀랐는데.

"방금 습격을 받았습니다. 무슨 관리를 이따위로 하는 겁니까?"

하벨이 툭 하고 꺼낸 말에 룬델은 그를 다독였다.

"괜찮더냐? 얼마나 놀랐을까. 다치지 않았더냐?"

"괜찮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룬델이 갑자기 허공을 바라보며 언성을 올렸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뭔가 화가 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정령사 가문이었지? 그럼 저기에 정령이라는 존재가 있는 건가?'

하벨은 눈동자를 제아무리 굴려도 그들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일단 들어가 있거라, 하벨아. 헤레스를 부르마."

룬델이 하벨을 재차 다독이지만, 하벨은 일단 대화를 위해 자리에 앉았다.

"아뇨. 할 말이 있습니다. 아버……."

하벨은 생각과 달리 멋대로 튀어나오는 말에 입을 꽉 다물었다.

'아버지는 무슨.'

아무래도 이 부작용은 시간이 지나야 해결이 가능할 듯했다.

어떻게 본다면 자신은 이 몸에 들어온 불청객이니.

"어쨌든 드리고 싶은 말은 일단 이겁니다."

룬델은 불안한 시선으로 하벨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지금 이렇게 걸어 다닐 몸이 아닌데.

코피와 입가에 핏자국이 보였다.

"저는 하벨이 아닙니다."

"……?"

룬델의 표정이 굳어지자 하벨은 손가락 만지작거렸다.

'……?'

팔찌에 달린 작은 랜턴에 또 불이 붙었다.

환한 불꽃.

'이번에는 밝아졌다.'

암살자와 마주할 때는 이것보다 크고 거무튀튀하지 않았던가.

'이곳의 팔찌 장식은 이런 건가?'

신기했다.

"하, 하벨아. 그러니까……."

"아, 못 들으셨습니까? 한 번 더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세상의 수호자이신 용들의 왕이시여…….

아무래도 하벨 티에라가 부르려고 했던 건 용이라고 불리는 존재인 듯했다.

하지만 자신과 그 용은 달랐다.

그저 '용'자 같을 뿐이었다.

―부디, 이 세상을, 제 가족들을 지켜주십시오.

자신을 이 몸에 빙의시키며 하벨 티에라가 꺼냈던 말이었다.

하벨 티에라가 바랐던 일이자 자신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억울한 일이었다.

'너의 일방적인 부탁은 들어줄 마음이 없다.'

―세상이. 이 세상이… 멸망할 겁니다.

'그런 무거운 책임은 죽기 전에도 이미 버거울 만큼 짊어졌으니 이제는 싫다.'

자신은 왕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하벨은 룬델에게 다시 사실을 털어놓았다.

더 진지하게.

"저는 당신의 아들 하벨 티에라가 아닙니다. 용왕입니다."

하지만 평소에 하벨 티에라가 헤프게 웃고 다녔는지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빙의된 것 같습니다. 빙의가 무엇인지 아시죠?"

"네가 아무리 갑작스러운 일에 혼란스럽다고 한들, 이런 상황에서도 장난을 치는 건 아니라고 생각이 드는구나."

룬델의 일그러진 표정에 하벨은 억지로 입꼬리를 내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나 힘겨운지 눈썹이 파르르 떨려왔다.

"지금 제가 장난하는 것 같습니까? 장난 같은 일은 암살자들을 허락한 이곳입니다. 제 아들이 습격을 당한 것도 몰랐단 말입니까?"

"…하벨아. 네가 많이 놀랐구나."

'뭐야? 반응이 처음은 아닌 것 같은데.'

하벨은 룬델의 표정을 살피며 생각했다.

"아니면 역시 그 일 때문이더냐?"

룬델은 그 일을 떠올렸다.

몇 달 전, 하벨은 영원히 정령사가 될 수 없다는 통보를 정령에게 직접 받았다.

정령은 또 하벨을 거부했다.

아니 거의 통보와 같았다.

―우린 네가 싫어. 너는 메말라버린 사막처럼 불쾌함만 감도는걸.

처음 받아본 정령의 편지에 그런 내용이 적혀 있으니 충격이 어떻게 쉽게 가실 수가 있겠는가.

'그 일이라니?'

하벨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용왕이었던 제 원래 기억도 나지 않은데 하벨 티에라의 기억이라고 또렷이 날까.

"카샬은 어디 갔더냐?"

룬델은 하벨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다 무언가 부족한 기분에 그제야 하벨의 집사를 찾았다.

똑똑.

때마침 들려온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세렌이 말했다.

[카샬이 왔네.]

하벨을 보는 세렌의 시선은 삐딱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물이 오염된 이후로 느낄 수 없었던 거대하고 위대한 바다가 느껴졌다.

부끄럽지만, 자신도 다른 정령들도 그 애타는 그리움에 울지 않았던가.

하벨이 오기 전까지 엄청 기뻤는데.

"…들어오게."

룬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방금 습격이 있었습니다."

카샬은 서둘러 보고 했다.

"어디에서 들어온 놈인가?"

"지금까지 습격을 받았던 암살자와 달랐습니다."

카샬은 손등을 가리켰다.

"두 암살자의 손등에 마법 반응이 있었습니다."

"무늬라니?"

"흐릿하나, 달 무늬가 보였습니다. 검은 달."

"검은 달……?"

새로운 암살자의 등장에 룬델이 고민할 때, 하벨의 머리가 기울었다.

카샬이 다급히 하벨을 붙잡았다.

"…카, 카샬. 헤레스를, 헤레스를 불러오거라!"

룬델은 눈앞이 캄캄해진 기분을 느꼈다.

* * *

"…어떤가."

룬델이 초조한 얼굴로 헤레스를 바라보다 재촉했다.

"가주님."

헤레스가 묵직한 목소리를 내자 룬델은 세렌을 바라보았다.

"잠깐 비켜줘."

[뭐, 좋아. 다들 물러나.]

룬델 어깨에 앉아 있던 세렌은 그의 시선이 '삐로로' 하며 울다 날아갔다.

곧 세렌의 눈동자가 장난기가 어렸다.

마침 하벨의 그 멍청한 낯짝을 구경하러 갈 생각이었다.

자신이 봐도 기억상실, 뭐 그런 거에 걸린 게 아닌가 싶었으니까.

[삐로로.]

벌써 신이 났다.

"…그래. 이제 말해보게."

모든 정령이 물러간 뒤에야 룬델은 헤레스를 재촉했다.

"가주님."

그녀는 쉽사리 말문을 떼지 못하다 겨우 목소리를 냈다.

"그래, 헤레스. 얼른 말해보래도."

"저는 물의 저주에 걸린 환자들을 누구보다 많이 봐왔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헤레스는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내 그대의 실력은 충분히 알고 있네. 하여 하벨을 위해 그대를 이곳 티에라에 데려오지 않았던가."

"물의 저주 중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증상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맞는가?"

"맞습니다. 보통은 아주 드문 증상입니다."

"말해보게."

"오염된 물이 뇌까지 도달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혹시나 해 지켜보고 있었는데 도련님이 깨어나시니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그게 무엇인가?"

룬델은 갑자기 입이 바짝 말라 갔다.

헤레스의 뒷말을 듣고 싶지 않았지만, 듣지 않을 수 없었다.

"자아의 혼동이 찾아온 것 같습니다."

"제대로 말해보게."

"자아의 혼동은 자신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 생각하는 증상을 말합니다."

"…그, 그러니까 하벨이 갑자기 자신이 하벨이 아니라고 말하는 게 물의 저주 때문이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본인을 인지하지 못하고 불특정한 이를 자신이라 여기는 겁니다. 하여 도련님께서는 지금 본인을 '하벨'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혼동하고 있습니다."

룬델은 헤레스의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온몸에 피가 말라가는 기분이었다.

"분명 내게 하벨의 상태는 심각하지 않다고 하지 않았던가?"

"예. 이전에 가주님께 기적이라 말씀드렸습니다."

헤레스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하벨이 오염된 눈 위를 뒹굴었음에도 며칠 의식을 잃고 깨어난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그런데 지금 물의 저주가 뇌까지 닿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죄송합니다. 분명히 확인하지 못했는데, 지금 도련님께서 보이시는 증상은 그 외에는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룬델은 하벨이 자신에게 말한 '빙의'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래서 어찌해야 하는가? 치료는 할 수 있는 것인가?"

"다행인 건… 이곳이 다른 곳도 아닌, 정령사 가문인 티에라라는 사실입니다. 그 어디보다 정화제를 손쉽게 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게 설령 정화제든 뭐든 하벨을 위해서라면 아낄 마음은 없네."

정화제는 오염된 물을 견딜 수 있는 내성이 있는 자들 역시 필요한 물건이었다.

"이제 도련님께서는 이전보다 더 오래 정화 장치를 달고 계셔야 합니다."

헤레스의 말에 룬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만 아니라 가주님께서는……."

헤레스가 말꼬리를 늘이자 룬델이 그녀를 재촉했다.

"말해보게."

"정화제로 물의 저주를 약화할 동안만이라도 도련님께서 만들어내신 가짜 인격을 존중하셔야 합니다."

"…허어."

룬델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벨이 꺼내는 헛소리를 받아들이라니.

* * *

"오늘은 아무 말씀도 하지 마시고, 푹 쉬십시오."

카샬은 하벨이 말을 꺼내기 전에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나섰다.

'오면서 신기한 게 많던데.'

하벨은 침대에 앉아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이 살던 원래 세상에 인간들이 사용하던 '현대 문물'이 자연스럽게 뒤섞여 있지 않던가.

키득키득.

카샬이 방에 들어오면서부터 계속 들려왔기에 하벨은 저 웃음소리가 환청이 아니라 단언했다.

하벨은 정확히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찰싹.

무언가 자신의 손에 부딪히자마자 갑자기 선으로 그린 듯한 새의 형상이 보였다.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었는데.

하지만 하벨은 당황하지 않았다.

[…너어! 지금 네가 날 때렸어?]

상대가 저렇게나 당황했으니.

―정령사가 강해지는 방법 중 하나는 교감이다. 하지만 모두가 알지만 하지 못하는 방법이다. 정령은 오만하기에 그대의 손길을 필시 거부할 테… 뭐야 이거. 그럼 못 하는 거잖아. 에이씨, 못하는 건데 왜 적었대?

툴툴거리는 하벨 티에라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딱히 보려는 생각은 없었지만, 하벨 티에라의 기억이었다.

'저게 정령이고, 방금 내가 한 게 교감인가?'

하벨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교감 한 번으로 보이지 않았던 정령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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